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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평화박물관] '2022년 후반기 기획전 '우리들의 캐리커쳐'

[평화박물관] '2022년 후반기 기획전 <우리들의 캐리커쳐>을 연다. ' 장소: 스페이스99(서울시 구로구 부일로9135) 기간: 20220624-1001일 참여작가: 1) 강현욱, 2) 김상돈, 3) 조습 시간: -금 오후 2-5, 토요일 오전 10-오후 5, 주관: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전시기획: 박만우.

[1] 캐리커쳐란?

일반적으로 정치인이나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을 외모나 성격의 특성에 근거해 단순화시키거나 과장, 왜곡된 방식으로 그려내는 통속적인 그림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서양미술사상 18세기 유럽의 프란시스코 고야 또는 윌리엄 호가스 그리고 19세기 오노레 도미에 등의 풍자화를 보면 사회의 부정부패에 대한 고발은 물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한국 전통 문화 속 캐리커쳐

한국의 시각예술 전통에서도 불교회화나 민속화 등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으나 가장 가까운 과거에서는 탈춤과 같은 민속연희에 등장인물들이 썼던 가면이 한국적 캐리커쳐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양반, 승려 등 지배계급의 위선과 폭력에 대해 해학과 풍자로 저항한 민중의 정서가 표출된 문화적 산물이 탈과 민속연희의 서사와 등장인물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3] 캐리커쳐, 초상화에 대한 반()초상화

캐리커쳐는 초상화를 패러디화하고 초상화에 결부된 이데올로기, 집단의 신념, 도덕, 위선과 허위의식을 조롱하고 풍자한다. 한국 현대사의 <반헌법행위자열전>을 기획하고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평화박물관은 국가폭력 피해자의 억울함을 밝히고 가해자의 악행을 파헤쳐야하는 본연의 과업수행과 더불어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들의 반초상화를 그려내고자한다. 이성에 의한 비판작업 못지않게 유희에 의한 풍자가 인간의 본성을 더 잘드러내 보여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세 작가(강현욱, 김상돈, 조습) 작품세계

강현욱은 386세대 한 정치인의 캐리커쳐를 2채널 비디오설치 작업으로 제시한다. 김상돈은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시기를 살아온 세대를 신부족의 출현이라는 사회현상으로 파악한다. 이상적 신체의 재현이라는 기존 조각개념을 해체하여 신부족의 토템을 위한 브리꼴라주 형식의 새로운 신체상을 제안한다. 조습은 타블로비방(활인화) 양식을 차용해서 한국 근현대사의 지배자와 피지배자, 상이한 계급의 두 관점을 교차시키는 퍼포먼스-사진 작업을 보여준다. TV 사극드라마 장면들을 패러디화하는 이 작가의 대형 사진은 지금 여기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다양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중의적인 메시지를 보낸다.

[5] 개인, 집단, 사회를 희화하는 캐리커쳐정신

이는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심미적 태도이다. 너와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추함을 해소하거나 추함으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는 몸과 마음의 유희이다. 그럼으로써 캐리커쳐가 초상화가 우리 참모습에 더 흡사한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을 통해 추함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는 <우리들의 캐치커쳐>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 모두가 던지는 질문이다.

<출품작 해설 I> 강현욱, <Deep Time>, 2022, 2채널 비디오설치

중년의 한 사내가 무엇을 응시하고 있다. 가까이 사람들이나 오리 소리가 들리는걸로 봐서 그는 호숫가에 서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이 사내는 손가락으로 연신 코나 눈 주위를 문지른다. 귓가에 안경테 자국이 선명한 탓에 안경을 벗고 있는 이 사내는 호수 저편의 무엇을 바라보고 있지만 특정한 외부 사물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주름진 눈가 그리고 거친 피부가 그의 바라보는 눈을 통해 외부세계가 아니라 그의 몸(body) 아니 그의 살(flesh)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사내가 욕실 내부에서 주먹을 쥐고 힘주어 손가락들을 비벼댄다. 가려워서 긁어대는 것이 아니라 틱장애와 같이 불안감이나 초조감이 암시된다. 그는 이런 강박행동의 징후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몸으로 표현하는 길 이외에 달리 표현이 불가능한 화석화된 언어, 신체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정동이 감지된다.

장식장 거울 앞에서 그 사내는 거울 속의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본다. 분할된 두장의 장식장 거울에 의해 왜곡되는 자신의 얼굴상이 재밌는지 그 사내는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거울놀이를 한다. 곧 이어 거울 속으로 90년대 격렬한 대학가 시위장면이 펼쳐진다.

사내는 운동권 노래, <타는 목마름>의 마지막 소절을 읖조리다 에이 씨~”하는 불만의 소리를 내뱉는다. 탄환이 박힌 자국이 여전히 확연한 광주 전남도청 건물의 계단, 일제 강점기 공출할 식량증산을 위해 조성한 충남 논산의 탑정호, 1989년 평양방문 후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통일의 꽃임수경이 늘 암송했던 카톨릭 주기도문 그리고 인양된 세월호가 아주 멀리 흉물스럽게 거치되어 있는 목포신항 등이 586세대 한 정치인쯤으로 추정되는 이 사내의 응시를 감싸고 있는 마음의 풍경이자 이다.

강현욱의 신작 비디오, <Deep Time>640여초의 짧은 시간에 걸쳐 여러 장면을 압축적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긴 씬은 2분여가 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한 장면이 30-40초를 넘지 않는다. 비장미가 넘칠만도 한 586세대 정치인의 내면 심리의 풍경을 마치 인스타그람 릴스 감성으로 편집했다고나 할까? 멀리 목포신항이 뒤로 보이는 나대지를 걸어가는 사내는 돌밭위에 주검과 같이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시신과 같이 누워있는 이 사내는 눈을 뜨고 웃고 있는 듯 보인다. 마치 플래쉬몹의 시체놀이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놀이를 엿보는 느낌을 들게한다면 그건 7회 정도 강박적으로 반복해서 걸어가는 사내와 누워있는 자신을 교차해 보여주는 편집작업 덕분일게다.

프로이드의 포르트-다 게임(실패놀이)에서 알 수 있듯이 삶과 죽음, 현전과 부재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이 장면은 이 사내의 강박적 행동의 기저에 깔린 불안과 두려움의 깊이를 헤아리게 해준다.

<출품작 해설 II> 김상돈, <당신과 나-신부족:외삼촌>, 2017

2011년부터 토테미즘과의 상관성 속에서 조각을 탐구해온 작가는 브랑쿠시와 자코메티에 이어 2017<너와 나-신부족> 연작 작업을 하면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와 조우한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같은 금속이나 주변에서 쉽사리 구하는 발견된 오브제(objets trouvés) 또는 좌대 대신 이동이 가능한 바퀴 달린 단을 사용하는 점도 그렇고 종이정도 두께의 얇은 평면을 직립으로 구축하여 인간의 신체를 암시한 점도 스미스의 영향을 추측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20세기 농경사회를 벗어나 산업사회의 완전한 도래를 목격한 당시 조각을 산업사회의 토템으로 파악한 스미스의 작업은 김상돈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김상돈이 조각을 토템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모더니스트 조각가 스미스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그의 급진성은 브리콜라주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브랑쿠시, 자코메티와 같은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조각 작업부터 스미스의 토템 조각 등 서구 현대조각의 다양한 어휘와 통사구조를 차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의 무속제의, 민속연희 등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소품, 무구와 장식 등을 전유한다. 그 외에도 쇠파이프, 고무호스, 스테인리스 쟁반 등 산업용품, 일상용품 그리고 버려진 구두, 깡통, 플라스틱 피리 등의 용도 폐기된 물품들을 재활용, 재혼합 또는 재구성하여 직립형 토템을 탄생시킨다.

지배계급의 문화인 기념비적 조각에 저항하는 민중의 문화로서 브리꼴라쥬 조각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2017년 한국의 대통령이 탄핵되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을 겪을 무렵 작가는 새로운 사회현상을 목도한다. 산업화 혹은 민주화의 주역이었던 세대들이 편견, 독선, 자기주장에 몰입된 채 시대의 고통과 갈등을 외면하고 자기 우상화 혹은 자폐증에 빠지고 있는 현상을 그는 신부족의 등장으로 파악한다.

<당신과 나-신부족> 연작은 당신들을 위한 토템이기도 하지만 당신들과 함께 살아야하는 우리를 위한 토템이기도 하다. 집단의 상징인 토템을 인간집단과 동, 식물 또는 자연물과의 특수한 관계를 넘어서 학연, 지연 등 각종 연고에 기반한 공동체의 엠블럼을 사용하거나 혹은 인터넷 시대의 각종 웹블로그, 유튜브 방송을 중심으로 결속하는 집단을 의인화함으로써 확장된 토템 개념과 함께 신부족을 풍자와 해학으로 다루고 있다.

<신부족#1 친 할아버지>는 조각의 몸통을 4개의 크기가 다른 금속 쟁반으로 구성한다. 음식을 나를 때 사용하는 쟁반은 음식의 양과 가짓수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진다. 원형 디스크 형태의 금속쟁반은 각기 평면위에 여러개의 구멍이 나있어 쟁반 하나 하나가 얼굴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쟁반 다섯계가 수직으로 덧붙여져서 몸통의 형상을 이루니 얼굴들로 조합이 된 몸통이라고 해야하나? 평면의 얼굴과 볼륨을 지닌 몸통으로 표상되는 신체 조상의 개념을 완전히 해체하는 전례없는 조각이다. 특히 머리 부분에 설치된 다부진 표정의 늙은이 목각탈과 목에 달린 거울, 쟁반 구멍 곳곳에 걸린 구부러진 금속 숫가락 그리고 가장 큰 쟁반 중앙에 매달린 고무호스와 바가지는 기존의 유기적 신체를 해체하여 신체 각 부분이 하나의 독립적인 알레고리 기능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출품작 해설 III> 조습, 퍼포먼스-사진: <>-돼지(), 아카이벌 피그먼스 프린트, 2020,

활인화(타블로 비방)는 연극의 한 장면 혹은 회화를 살아있는 인물이 정지된 상태로 재현하는 유럽 사교계의 놀이였다. 살아있으나 말도 없고 움직임이 없는 낯선 상황을 연출하는 이러한 퍼포먼스는 조습 사진의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일반적으로 등장인물의 포즈, 의상, 화장, 소품, 얼굴표정과 조명이 활인화 퍼포먼스를 성공적으로 만드는 요인인 까닭에 조습의 사진 작업에서도 이들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여기에 조습의 퍼포먼스-사진은 사진분야에서 1970년대부터 시작된 타블로라고 불리는 사진에서 다른 요소를 빌어온다. 일반적으로 사진 타블로는 연극적인 활인화가 아니라 회화주의를 표방했던 사진작가들에 의해 시도된 픽토리얼리즘 사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책이나 잡지에서 접하던 사진의 크기와 달리 커다란 스케일과 사이즈로 제작되는 타블로는 감상자가 벽면을 마주대하듯 사진작품과 대면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타블로의 이러한 대면 경험은 사진에 회화의 구성적 국면을 도입하게 해준다. 선과 색, 형태와 질감 그리고 프레이밍과 심도 등 잘 짜여진 구성은 강가나 바닷가에서 자연을 배경으로 촬영한 조습의 퍼포먼스-사진을 차별화시켜준다. 2013년 작업 <일식>부터 작가는 밤에 자연을 배경으로 한 야외에서 퍼포먼스-사진 작업을 한다. 정교한 설정과 단단한 연출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 촬영이지만 궁극적으로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결과물이 생성되므로 예측불가한 자발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인물들의 자세와 얼굴 표정 그리고 자연환경의 변화는 불가피하므로 퍼포먼스-사진의 촬영 과정에도 역시 우발적 순간을 포착하는 스냅숏이 수반된다. 음과 양, 정과 동의 관계라고나할까? 연출에 의한 의도적 구성과 우발적 이미지는 조습의 퍼포먼스-사진에 본질적으로 수반되는 길항관계를 형성한다.

작가는 이러한 형식적 장치를 통해 자신에게 고유한 정치적 알레고리를 제안한다. 2018년의 <>, 2019년의 <> 그리고 2020년의 <> 연작은 공통적으로 TV 사극드라마의 장면들을 패러디하고 있다. 활인화 형식으로 드라마의 장면을 재연한다는 점이 권선징악을 근간으로 하는

스토리텔링 구조 자체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패러디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수단은 사극 드라마의 장면을 모방하는 동시에 주요 코드들을 해체시키는 데에 있다. 복식체계, 등장인물 역할 분배에 따른 주연과 조연 구별에 의한 위계질서, 왕과 신하 사이의 계급질서, 시간과 공간의 좌표, 젊은 남녀 주인공 사이의 로맨스 설정을 위한 연령 구분은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성별 구분조차 철저히 사상되어 버린 탓에 패러디는 역설적인 모방을 시도한다.

2020<-돼지> 작품의 경우 왕의 복장인 곤룡포를 입은 세 인물이 족발과 돼지머리를 들고 임금놀이를 하고 있다. 정통 사극 드라마에서 곤룡포를 입은 왕이 음식을 먹는 장면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중국에서는 돼지고기 파동이 발생하면 민심이요 동해서 국가 통치 자체가 흔들린다는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민생 현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의무능함을 꼬집으려 했던 것인가? 아니면 그저 배부른 돼지로 만족하여 정치적으로 무관심을 덕목으로내세우는 우매한 백성을 질책하려 했던 것인가?

조선시대 소학지희(笑謔之戱) 가운데 하나로 노유희(老儒戱)가 있었다. 광대들이 선비의 모습과 행동을 풍자하여 보여주던 연극이었다. 광대가 다 떨어진 의관에 온갖 추태를 연출하여 과거 급제한 이들을 위한 축하연의 즐거움을 제공했다. 조습의 패러디, 그의 캐리커쳐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민중연희의 유산으로 간주될 만하다. * 기사 작성을 위해 고화질 해상도 이미지가 필요하실 경우 평화박물관 스페이스99 담당자에게로 peacemuseum@empas.com 010-3455-2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