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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 83년 퐁피두에서 '인공지능(Nouveau Cerveau)' 언급

우리는 TV에 새로운 두뇌를 장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백남준 <번역 수정 중>
Nous essayons de mettre un nouveau cerveau aux téléviseurs. - Nam June Paik

 

Nam June Paik, « pape de l'art vidéo » au Centre Pompidou - Lumni | Enseignement

Au Centre Georges Pompidou, le vidéaste Nam June Paik du mouvement fluxus a constitué un drapeau tricolore géant avec cinq cents moniteurs vidéo posés au sol. Il explique sa démarche d'artiste vidéo et sa technique.

enseignants.lumni.fr

백남준(1932-2006) 미술사적 맥락 글 알렉산더 보자 게시일: 20131126

한국 작가 백남준(1932-2006)은 새로운 예술 양식 비디오 아트의 발명가다. 음악가로서 교육을 받은 그는 피아노를 공부했고 '쇤베르크'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는 1956년에 유럽에 도착하여 '스톡하우젠'과 함께 전자음악을 작업했다. 그는 비주류인 플럭서스 그룹과 그의 주인이 되는 존 케이지와 빠르게 가까워진다.

1959년 그의 첫 번째 작곡인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 1번은 관객 앞의 보면대에 바이올린을 두드리는 것을 연주로 생각했다. 그의 두 번째 주목할 만한 작품은 설치 작품이다. 한 갤러리에 전시된 고장 난 TV 13대의 오케스트라이다. TV 음극선관을 통해 소리 주파수를 전송함으로써 발생하는 줄무늬를 투영된다. 백남준은 "콜라주 기법이 유화를 대체한 것처럼 음극선관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라고 믿으며 "나는 추상 TV 발명했다"발명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1964, 백남준은 음악을 버리고 뉴욕으로 떠나 플럭서스 창시자인 조지 마치우나스(1931~1978)와 더 가까워졌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최초의 비디오 신시사이저 중 한 명인 슈야 아베와 함께 발명했다. 1970년 이 악기를 사용하면 카메라의 이미지에 색상을 지정하고 변형하여 사운드를 간섭적으로 생성하여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백남준의 전자제품 작업은 도발과 '문화 테러'에 대한 성향과 함께 올인으로 진행된다. 그는 1963년의 TV 이미지를 가져와서 뉴욕 교황 바오로 6세 방문(1965) 동안 가짜 라이브를 만들고, 비틀스가 포함된 가짜 뮤직비디오 또는 베토벤 작품(1973), 뉴욕 생활에 대한 비현실적인 컬러 보고서(모음곡(모음곡 212, 1975) 또는 1967년 뉴욕 오페라 섹스트로니크과 같은 공연은 통역사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 속옷 차림으로 첼로를 연주로 경찰에 의해 외설의 시비로 중단되었다.

백남준은 항상 비디오와 관련된 조각으로 발전하여 "비디오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오브제(TV Chair, 1968)나 조각상(TV Rodin 생각하는 사람) 텔레비전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관조하는 TV, 1978), 심지어 스크린 조각(벤자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980년대)까지 만들었다. 1982년 삼색영상 384,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미디어타워 1003개 다다익선으로 화면을 스크린 수를 늘렸다.

증가하는 세계화의 맥락에서 백남준은 TV 쇼인 '글로벌그루브(Global Groove 1973)'도 제공합니다. 그는 록, 아방가르드 음악, 클래식 음악, 민족 음악, 시 및 광고를 번갈아 가며 다양한 음악 프로그램을 혼합하다. 예술가의 역할은 생방송의 틀 내에서 문화 간의 만남을 촉진하고 "예기치 않은 합의를 듣게 만드는" 것이다.

백남준은 그의 마지막 세 작품인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 1984),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 1986) 또는 손에 손잡고(Wrap Around the World, 1988)에서 이것을 보여준다. 라이브 예술위성 방송하다. 보위(David Bowie) 또는 사카모토(Ruychi Sakamoto)를 존 케이지(John Cage) 및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과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촬영하고 백남준이 혼합한 영상으로 연결시키다.

예술의 욕구(Désir des Arts)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자이자 프로듀서인 클로드 위드로(Claude Hudelot) (다다의 뒤샹 Marcel Duchamp)의 예술적 논쟁과 플럭서스(Fluxus) 그룹과 백남준을 중심으로 한 1960년대의 예술적 논쟁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그는 20세기 미술사(History of 20th Century Art)의 저자인 미술사학자 피에르 카반(Pierre Cabanne)의 도움을 받다.

피에르 카반(Pierre Cabanne)은 예술과 기술의 관계, 보다 일반적으로 현대 미술에서의 작업의 위상과 창작에서의 행동에 대해 논평하다. “아티스트는 시선보다 손에 있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도구인 장치를 다룬다. 모두 동일하게 이 툴킷에 통합된 상태로 유지되지만, 기본적으로 기술에 접근한다. 그것은 그 사람을 [...], 예술가가 궁극적으로 이런 종류의 태도로 자신을 결의하게 만드는 것,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태어날 것이라고 만드는 행동이다.”

"비디오 아트의 발명가, 세기에 상당한 것" 백남준이 384대 텔레비전을 파리의 퐁피두센터 메인 홀 바닥에 설치했다. 4개의 그룹에 배치된 모니터는 변경되거나 전환된 비디오 이미지, 채도 또는 간섭 색상을 교대로 방송한다. 따라서 작가는 변화하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구성하며, 그 풍부함은 화면의 율동적인 조합에서 비롯된다. 설치하면 프랑스 삼색기의 이미지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런 다음 비디오아티스트의 목소리가 그의 의도를 설명한다. 백남준은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갈아 가며) "TV에 새로운 두뇌를 집어넣기"를 시도했다고 보고하다. 작가와 인터뷰는 그의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말을 보존하면서 더빙이 아닌 신중하게 자막으로 제공한다. 따라서 백남준이 자신에게 맡겨진 공간을 채우기 위해 복잡한 모양을 생각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면, 이 모양은 처음에는 뱀이 얽힌 코브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선택은 또한 냉정하고 경제적인 양방향 거리이며 프랑스 국기의 구조는 단순한 솔루션이다.

대담한 하이 앵글로 된 줌(Zoom)에서 우리가 그것이 프랑스 국기인지 물었을 때 그는 파란색, 흰색 및 빨간색 영역이 있는 "일종의 프랑스 국기"라고 대답하지만, 변형을 알아야 하므로 정확하지 않다. 프랑스 국기. 경의와 기분 전환을 결합하는 이러한 선택은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 현대 미술관의 요청으로 1989년 작곡한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작업도 건전하다. 강력한 타악기는 이미지의 변형과 전체의 잔혹성을 강화하다. 백남준과의 인터뷰는 카메라가 다채롭고 시끄러운 구덩이 위를 빙빙 돌며 전체 범위와 야망을 수용하는 샷과 인턴 컷 되다. 전사(텍스트를 클릭하면 비디오 위치가 지정된다)

바로 1960년대, 중추적인 시기라고 말씀하셨는데, 현재 퐁피두 센터에서 볼 수 있는 백남준과 같은 사람들이 일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래서 그는 비디오 아트의 발명가이다.

피에르 카반: , 그는 비디오 아트의 발명가이며 상당한 수준이다. 실제로 예술가들은 장치, 즉 눈보다 훨씬 더 손에 있는 것에 의해서만 책임을 지는 도구를 다루기 때문에 세기에 상당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이 도구에 통합되어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들은 기술을 다루며 기술은 세기에 상당한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남자, 예술가를 기본적으로 이런 종류의 태도, 행동에 체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태어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 작품은 내 예술의 잿더미"라고 말한 이브 클랭(Yves Klein)과 같은 사람은 절대적으로 분명히 이 경첩의 사람이다. (고요)

백남준: 이 공간을 채워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복잡한 모양을 먼저 생각했지만, 프랑스 국기가 더 간단해 보였다.
기자: 저기 보이는 것은 프랑스 국기인가요?
백남준: , 하지만 변형이 있다. (소음) 우리는 TV에 새로운 두뇌를 장착하려고 한다(소음)

Contexte historique ParAlexandre Boza, Publication : 26 nov. 2013

L'artiste coréen Nam June Paik (1932-2006) est l'inventeur d'une forme d'expression nouvelle : l'art vidéo. Musicien de formation, il a étudié le piano et soutenu une thèse sur Schönberg. Il arrive en Europe en 1956 pour travailler la musique électroacoustique auprès de Stockhausen. Il se rapproche rapidement du groupe informel fluxus et de John Cage qui devient son maître.

Sa première composition en 1959, la Sonate n°1 pour violon solo, consiste à briser un violon sur un pupitre devant l'auditoire. Sa seconde œuvre remarquable est une installation : un orchestre de treize téléviseurs déréglés exposé dans une galerie. Les téléviseurs projettent des zébrures, provoquées par l'envoi d'une fréquence sonore dans leur tube cathodique. Paik estime que « tout comme la technique du collage a remplacé la peinture à l'huile, le tube cathodique remplacera la toile » et en conclut : « j'ai inventé la télévision abstraite ».

En 1964, Paik abandonne la musique et part pour New York et se rapproche du fondateur de fluxus, George Maciunas (1931-1978), puis pour le Japon où il invente, avec l'ingénieur Shuya Abe, un des premiers synthétiseurs vidéo (1969-1970). Cet instrument permet de colorier et déformer les images des caméras, de les modifier en produisant des interférences sonores.

Le travail sur l'électronique de Paik va dans toutes les directions avec un penchant pour la provocation et le « terrorisme culturel » : il prélève des images télévisées à partir de 1963 pour réaliser de faux directs pendant la visite du pape Paul VI à New York (1965), de faux clips avec des chansons des Beatles ou des morceaux de Beethoven (1973), des reportages aux couleurs irréelles sur la vie de New York (Suite 212, 1975), ou des performances comme le Sextronic Opera en 1967 à New York, interrompu par la police pour indécence car son interprète Charlotte Moorman joue du violoncelle en sous-vêtements.

Paik évolue vers la sculpture, toujours associée à la vidéo, lui valant le surnom de « pape de la vidéo ». Il réalise un objet (T.V. Chair, 1968) ou une statue (T.V. Rodin où Le Penseur contemple son image dans un téléviseur, 1978), voire des sculptures d'écrans (Benjamin Franklin, Jean-Jacques Rousseau dans les années 1980). Il multiplie le nombre d'écrans : 384 dans Tricolor Vidéo en 1982, 1 003 pour la tour-média Tadaikson (The More The Better), à l'occasion des Jeux Olympiques de Séoul en 1988.

Dans un contexte de globalisation croissante, Paik propose même une émission de télévision, Global Groove (1974). Il y mélange divers programmes musicaux alternant rock, musique d'avant-garde, musique classique, musique ethnique, poésies et publicités. Le rôle de l'artiste est dans le cadre du direct de précipiter les rencontres entre les cultures, de « faire entendre leurs accords imprévus ». Paik en fait la démonstration dans ses trois dernières œuvres, Good Morning, Mr. Orwell (depuis le Centre Georges Pompidou à Paris, 1984), Bye Bye Kipling (1986) ou Wrap Around the World (1988). Ce sont des émissions de satellite art connectant en direct David Bowie ou Ruychi Sakamoto à John Cage et Merce Cunningham dans des images prises à différents endroits du globe et mixées par Paik.

Éclairage média, ParAlexandre Boza, Publication : 26 nov. 2013

Dans le cadre de l'émission Désir des arts, son présentateur et producteur Claude Hudelot fait le pont entre la contestation artistique de l'entre-deux-guerres (dada, Marcel Duchamp) et son prolongement dans les années 1960 autour du groupe Fluxus et de Nam June Paik. Il y est aidé par son invité en plateau, l'historien de l'art Pierre Cabanne, auteur d'une Histoire de l'art du XXe siècle.

Pierre Cabanne commente la relation entre art et technologie, et plus généralement le statut de l'oeuvre dans l'art contemporain et le geste dans la création. « Les artistes manient un appareillage, un outillage dont ils sont responsables uniquement par ce qui existe dans leurs mains beaucoup plus que dans leur regard. Ils restent tout de même intégrés à cet outillage, mais au fond, ils abordent la technologie [...]. C'est quelque chose qui fait que l'homme [...], que l'artiste se résout au fond à cette espèce d'attitude, de comportement qui fait que ce qui est important chez lui c'est ce qui va naître beaucoup plus que ce qu'il fait ».

Nam June Paik, « inventeur de l'art vidéo, qui est quelque chose de considérable dans le siècle », a disposé sur le sol du hall principal du Centre Georges Pompidou à Paris trois cent quatre-vingt quatre téléviseurs. Placés par groupes de quatre, les moniteurs diffusent alternativement des images vidéo altérées et détournées, une saturation colorée ou des interférences. L'artiste compose ainsi une image changeante, mouvante, dont la richesse provient de l'assemblage en rythme des écrans. L'installation permet de composer une image du drapeau tricolore français.

La voix de l'artiste vidéo prend alors le relais pour expliquer ses intentions. Paik signale (alternativement en anglais et en français) qu'il a essayé de « mettre un nouveau cerveau dans la télévision ». L'entretien de l'artiste est judicieusement sous-titré plutôt que doublé, préservant sa parole sur son projet. Ainsi, si on peut lire que Paik avait pensé à des formes compliquées pour remplir l'espace qui lui a été confié, il peut entendre que ces formes étaient au départ des cobras, des serpents entrelacés. Le choix de la simplicité (« cheap ») est également à double sens, à la fois sobre et économe, et la structure du drapeau français est une « solution simple ».

Lorsque dans un audacieux zoom en plongée on lui demande si c'est le drapeau français, il répond que c'est un « genre de drapeau français », avec des zones bleue, blanche et rouge, mais qui doivent connaître des variations, donc ne sont pas tout-à-fait le drapeau français. Ce choix d'associer hommage et détournement se retrouve dans les œuvres qu'il compose en 1989 à la demande du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our célébrer le bicentenair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L'oeuvre est également sonore ; de puissantes percussions renforcent l'altération des images et la brutalité de l'ensemble. L'entretien avec Paik est entrecoupé de plans dans lesquels la caméra virevolte au dessus de la fosse colorée et bruyante pour en embrasser toute l'étendue et l'ambition.

TRANSCRIPTION(Cliquez sur le texte pour positionner la vidéo) Passer la transcription

Claude Hudelot: Vous parliez tout de suite des années 60, une époque charnière, et c’est l’époque où commencent à travailler des gens comme Nam June Paik qu’on peut voir actuellement au centre Pompidou.Alors lui, c’est l’inventeur de l’art vidéo.

Pierre Cabanne: Oui c’est l’inventeur de l’art vidéo qui est quelque chose de considérable. Quelque chose de considérable dans le siècle parce que vraiment, alors là, les artistes manient un appareillage, un outillage dont ils sont responsables uniquement par ce qui existe dans leurs mains beaucoup plus que dans leur regard.Ils restent tout de même intégrés à cet outillage.Mais au fond, ils abordent la technologie, et la technologie, c’est quelque chose qui est considérable dans le siècle. C’est quelque chose qui fait au fond que l’homme justement, que l’artiste se résout au fond à cette espèce d’attitude, de comportement ;qui fait que ce qui est important chez lui c’est ce qui va naître beaucoup plus que ce qu’il fait.Et un homme comme Yves Klein, qui a dit d’ailleurs, "mes œuvres sont les cendres de mon art", est tout à fait, évidemment, l’homme également de cette charnière. (Silence)

Nam June Paik: On m’a demandé de remplir cet espace, j’avais d’abord pensé à des formes compliquées mais le drapeau français m’a semblé plus simple.

Journaliste: Ce qu’on voit là, c’est le drapeau français ?

Nam June Paik: Oui c’est ça, mais avec des variations… (Bruit)

Nam June Paik: Nous essayons de mettre un nouveau cerveau aux télévise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