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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 에피소트] '조가연' '안 마리 뒤게' 교수 백남준 연구자

<백남준 에피소트> 조가연 백남준 연구자 눈문 중에서

[1961년 백남준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듯 새로운 삶을 시작] 초특급 골방(비밀방)에 들어가 TV기술과 전자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고, 오로지 전자와 물리에 대한 생각에만 몰두하는 스파타식 생활이었다. ‘음극관을 예술에 도입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자기 확신을 얻었다. 새로운 매체를 이용한 흥미로운 작업들에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 . 정치적 맥락과 목적에서 벗어난 무목적성의 전자영상을 구현하는데 성공한다. - 조가연 눈문 중에서

백남준 1960년 초에 모든 소리를 모아서 sound collage 이것을 모바일 이미지로 mobile image로 변형하는 것에 관심이 높았다. 음악이 미술이 되고 미술이 음악이 되는 음악과 미술의 경계가 없는 세상을 동경하다/완벽한 최후의 1초 교향곡 2번 텍스트 스코어 악보

백남준은 시장에서 잘 나가는 작가는 아니다.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것이 비행기 모양의 로봇 라이트 형제’(1995). 65만 달러( 7억원)였다. 그러나 자우어라커는 낙관적이었다. "유명 예술가들에게 흔한 일이다. 대혼란기가 있다.

요셉 보이스 역시 사후 10년간 작품값 하락을 겪었다. 관련됐던 사람들이 자신의 지분을 주장하기도 하고, 서로 백남준을 기념물을 지으려 하는데 바로 그게 훌륭한 예술가이자 대사상가(big thinker)인 백남준의 열린 정신, 열린 공간을 가리는 형국이다. 그러나 아직 6주기다. 10주기쯤 되면 달라질 거다.”

"미디어(매체)란 단어는 미디엄(영매·靈媒)과 동일어원이다" -백남준. 원시적 생명에너지 넘치는 몽골의 샤머니즘(영매)과 미국 유럽 등의 첨단전자기술(미디어)을 주저 없이 냉킁 연결시킨다.

"백남준이 20세기 예술에 끼친 가장 큰 공로로 '기술의 탈()신격화'. 그는 1960년대 초 다른 예술가들도 컴퓨터와 신디사이저를 개발했다. 백남준의 위대함은 '예술가의 비정통적인 직관'에 입각해 구상한 세계를 다른 여러 분야에 넓게 적용한 점이다.

독특한 초형이상학자인 백남준에게는 양립하기 불가능한 것도 없고 위계질서도 없다. 백남준은 1963년 전시회부터 관객참여를 시도했다. 관객은 행동을하도록 요청되고 관객의 행동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작품을 실현시킨다" - 프랑스 파리1대학 안느 마리 뒤게 교수

백남준에게 이란 중국 한국 일본을 아우르는 우리 아시아의 문화적 정신적 자산이었다. 백남준이 보기에 '스즈키 다이세츠' 이라는 동양 사상을 서구 사회에 소개하면서 일본을 이상화하는 위장된 형태의 정치적 목적을 수행하는 문화의세일즈맨이었다.

[일본 선 사상가 스즈키(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선불교 강의)] 백남준과 존 케이지는 예술적 의견는 같았지만, 스즈키 평가에 대해서는 반대였다

하나, 존 케이지가 소리의 조직자, 음악 형식의 혁신을 주도했다고 한다면
둘, 백남준은 물리적 음악가로 소리의 매개자로서 음악의 존재론적 형식을 개혁하다. 존 케이지가 선승을 연상시키는 전위음악가라면, 백남준은 무당를 연상시키는 전위음악가였다.

1952 8 29일 미국 뉴욕의 우드스톡 야외공연장에서 데이비드 튜더가 <43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를 초연했다. 4 33초 동안 피아노의 침묵이 이어졌다. 연주자의 태도는 청중을 혼란스럽게 했다. <4 33> 30 2 23 1 40초 세 개의 악장으로 이루다.

백남준이 가는 곳은 포럼 장소가 된다

1989년 중국작가들과 파리에서 협업할 때 모습 지상의 마술사라는 작품을 발표했군요 At the “Magiciens de la Terre” exhibition in Paris in 1989, Huang Yong Ping, Gu Dexin, and Yang Jiechang with Nam June Paik. The exhibition officially marked the arrival of China’s contemporary artists on the international stage/<레이저아트로 하늘(미술관 천장)에 무지개가 춤추네요>

무당과 미디어아트 동급> , 과거에는 무당이 저승과 이승을 매개했다면, 현대의 미디어아트는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을 연결시켜 주고 있다는 것이다. 백남준에게 TV수상기는 단순히 기술적 차원을 넘어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상징하며 TV부처 등을 통해 서양의 물질문명과 동양의 정신문명이 만나는 합일체로 이해되고 있다. -이지호

미국 작곡가 '앨빈 루시에(Alvin Lucier)' <4 33>가 갖는 의의에 대해 케이지의 위대한 발상은 쇤베르크의 12음계를 연장하여 그저 모든 음조가 동등한 것이 아니라, 모든 소리가 동등할 수 있다는 발상을 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지루함을 개념화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것을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을 떠올리면, 흔히 비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공간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가령 빈방이 있다고 하자. ‘텅 빈 방에는 공간이 가득하다. 게다가 그 공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잠재태다. 거실, 체육관, 창고 등으로 변모할 수 있다.

그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방이든 될 수 있다. 그래서 내부를 무언가로 채우기 전까지, 그 공간은 단순히 텅 비었다기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 Mark A. Hawkins, 당신은 지루함이 필요하다, 35-36

"나는 모든 것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것은 소리를 낸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소리의 관점에서 내가 살고있는 세계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래서 내 가까이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부엌에 있는 야외에 있든 치고 문지르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점차 재래식이 아닌 악기를 많이 수집하여 조립한다" - 존 케이지와 Richard Kostelanetz 대화 중에서

백남준 예술에 기여한 외국인 1) 맑스 2) 쇤베르크 3)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4) 보들레르 5) 셜럿 무어먼 6) 머스 커밍햄 7) 슈아 아베 ) 이브 클랭 9) 맥루언 10) 뒤샹/“비디오는 누가 독점할 수 없고, 모두가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 공동재산(맑스의 코뮌사상)이다. 비디오는 작품의 독점에 바탕을 둔 체제로 작동하는 예술 세계에서 힘들게 버텨내고 있다. 현금을 내고 사가는 작품, 순전히 과시하고 경쟁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진 예술세계에서 말이다.” -백남준 1988

내가 백남준을 알게 된 것은 70년대 말. 그때 누이네가 독일(매형 무역협회 유럽지부주재원) 뒤셀도르프에 살았는데, 나는 당시 비무장지대에서 군(방송병)생활 누이와 편지 속에서 내 동창인 차범근과 백남준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백남준 1978년 뒤셀도르프 미대 정식 교수가 되었기에. 당시 누이가 아는 한국 학생 중 뒤셀도르프 미대생이 있었다. 백남준이 그의 선생이었다

백남준은 1963년 첫 전시 서문에서 가장 먼저 칼 오토 괴츠(Karl Otto Götz)교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1959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괴츠 교수는 백남준에 컴퓨터 페인팅을 언급했다고 한다.

백남준이 20세기 예술에 끼친 가장 큰 공로로 '기술의 탈()신격화'. 그는 1960년대 초 다른 예술가들도 컴퓨터와 신디사이저를 개발했다. 백남준의 위대함은 '예술가의 비정통적인 직관'에 입각해 구상한 세계를 다른 여러 분야에 넓게 적용한 점이다.

독특한 초형이상학자인 백남준에게는 양립하기 불가능한 것도 없고 위계질서도 없다. 백남준은 1963년 전시회부터 관객참여를 시도했다. 관객은 행동을 하도록 요청되고 관객의 행동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작품을 실현시킨다" - 프랑스 파리1대학 안 마리 뒤게 교수

작곡가를 대변하는 악보와 악기 그리고 준비된 연주자, 뭐 하나 빠진 것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던 청중은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고, 불만은 분노로 이어졌다. 침묵은 일순간에 무너졌고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존 케이지가 <4 33> 통해 남긴 교훈은 침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메시지를 음악형식을 통해 전달했다는 점에서 도발적인 시도.

케이지는 음악은 "형식의 이해가 아니라 소리의 경험"이라는 체제 전복적인 아이디어를 선언하다.

현대 미디어아트는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을 연결시켜 주고 있다는 것이 주 임무다/[1961년 백남준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듯 새로운 삶을 시작] 초특급 골방(비밀방)에 들어가 TV기술과 전자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고, 오로지 전자와 물리에 대한 생각에만 몰두하는 스파타식 생활이었다.

음극관을 예술에 도입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자기 확신을 얻었다. 새로운 매체를 이용한 흥미로운 작업들에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 . 정치적 맥락과 목적에서 벗어난 무목적성의 전자영상을 구현하는데 성공한다.

백남준 거대 미디어 5가지 생태계를 언급하면서 신랄하게 비판 1. 섹스 sex 2. 폭력 violence 3. 탐욕 greed 4. 허영 vanity 5. 속임수 deception' -1991 1973년 백남준은 모든 사람들 이제 자기만의 채널 혹은 방송 혹은 색채(언어)를 가지게 될 것이다. 모두가 1인 미디어가 될 것이다. 마침내 최소의 경비로 거대 주류 자본의 미디어 폭력을 막고 그 권력을 쓰러뜨릴 것이다. 백남준, 몽골인, 텔레비전,  3단어 공통점: 바로 <멀리+보다>, 백남준, 멀리 보는 사람, 몽골인, 멀리 보는 시야를 가지다, 텔레비전, 텔레(멀리)+비전(보다)

<백남준, 스즈키의 선은 '지나치게' 서구화되었다고 비판하다>

백남준이 보기에 스즈키의 선은 '지나치게' 서구화된 것이었고 아시아의 이상화가 초래하는 문화적 타자에 대한 무지와 오해, 왜곡 현상을 염려했다. “당시에는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해 동양은 신비로운 지역이었고, 세상의 지혜가 숨겨진 곳으로 미화되기까지 했다.”

초기 대부분의 사람들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구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비전을 가진, 영성을 풍부하게 하는 동양의 지혜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포괄하여 이야기하는 걸 문제삼지 않았다.

그 현상은 1950년대 비트제너레이션이 선불교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요가 수련을 하면서 선 명상센터를 다닐 수 있다. 미국의 초종파성은 단지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던 초기부터 시작된 것이다예술가의 역할은 기본 구조를 개발하는 것이며, 이 뼈대 위에 살을 붙이는 것은 관객에게 맡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