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림 작가는 작곡가 '말러' 연구자이고 작곡가에 가까운 음악 애호가이고 오디오 전문가이다. 그리도 인디음악 연극 춤 영상 등에 다양한 예술에 몸을 던진 다원예술가의 실천가였다.
김구림 화백 자택과 작업실 방문 스케치 2021년 11월 05일 금요일 오후 2시 반 김구림, 일종의 탈 미술관(화이트큐브)주의(?), 전시 개념을 밖으로 확장(?) 한국미술은 다시 백남준과 김구림(base)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의 미술사가들 김구림 작가 '위키피디아'가 없다는 것은 그 전공자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나 싶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아방가르드 미술을 이끈 선구자로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이며 기존 가치와 관습에 대한 부정의 정신을 견지한 김구림은 195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회화와 판화, 조각, 도자, 자수, 사진, 설치미술을 비롯하여, 퍼포먼스, 대지미술, 비디오아트, 메일아트 등과 실험연극, 실험영화, 전위음악, 전위무용, 무대미술, 패션 등 공연예술에도 참여하여 새로운 예술활동에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그는 남들처럼 특정한 스타일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기존 미술의 진부한 관념과 획일적 사고를 이탈하여 현대미술의 이념과 스타일을 독특하게 체화시킨 작가이며, 그래서 그에게는 늘 수식어처럼 최초란 말이 따라다닌다. 그는 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 (AG)를 구성하고 1970년 제 4집단 결성에 앞장서며 한국전위예술의 흐름에 중요한 족적을 남겨 후배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현재 그들도 활발히 유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미술관의 벽을 뚫고 거리로 나가다 - 김구림
김구림은 길거리를 캔버스로 삼았다는 면에서 앞섰다. 그 대표작이 바로 <길거리로 나온 패션쇼>다. 다르게 말하면 '길거리'를 가져다가 그림을 그렸다 길거리를 가져올 수 없기에 중심가 영화관 상영기간이 끝나고 뜯어낸 광고판을 가져다 그 위에 다시 작가의 페인팅을 그리다. 이것이 요즘은 더 확장되어 도시 전체가 이제는 미술관이 되고 박물관이 되고 있다. 대지미술도 그런 개념에 속한다. 뒤샹을 그림을 전시장에 가져도 놓은 것을 봤는데 그런 개념은 현대미술에서 예외 없이 적용되고 가져다 붙이기 특히 오브제 collage와 엉뚱하게 배치하기 depaysement 등등으로 응용되었다. 그런데 백남준은 sound collage로 발전시켰고 김구림은 현상 collage 혹은 흔적 collage로 변형시키기도 했다.
김구림 선생 60년대 미술관 벽을 뚫고 거리에서 전시하는 개념이 60년이 지나 아래처럼 진화되다.
미술관 벽을 뚫고 경복궁 담의 벽이 전시장이 되다
김구림 화백은 한국 제도권 미술에서 오래전에 튕겨나가다. 그래서 70년대 어쩔 수 없이 그래도 선진국이라는 일본으로 갔고(일제시대 초등학교를 다녀 일본어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일본 전위미술 구타이 등과 같이 전시했고 그리고 80년대 뉴욕 파리 등을 여행한 후 역시 뉴욕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 뉴욕으로 갔고 학생비자로 Art Students League 입학하다 영어가 약해 학교에 잘 적응을 못했지만 연말에 열리는 재학생 전에서 1등을 타기도 했다. 미국미술의 거장들 다 여기 출신인데 여기는 입학이나 졸업식도 없는 미국만의 창의적 미술교육기관) 1989년 LA 초대전을 계기로 대형 작업을 하기 위해서 LA로 갔고 1992년에는 뉴욕에서 만난 백남준과 만나서 2인전도 했다. LA에서 A(ARTIST의 약자)라는 큰 알파벳이 붙은 예술가 레지던스 스튜디오(물론 여기에 들어가려면 심사를 거쳐야 한다)에서 작업을 하다. 이곳은 얼마나 작업실 규모가 큰지 큰 트럭을 들어 올리는 엘리베이터도 있다고 미국에서 총 15년간 작업하다가 2000년에 귀국했다
김구림, 60년 전에 이미 한국 대지 미술의 선구자였다! 자연(강둑)을 캔버스로 삼아 그림을 그리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밭이나 강둑의 잔디를 태워도 3개월 후에 다시 살아나 잔디가 더 잘 자라난다는 점이다.
2016년 6월 18일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이전 30주년 기념 특별전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展 기자간담회에서 김구림 화가가 '도'를 주제로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김구림] 첨단 전위예술, 60년간 실험한 한국미술 선구자 그에게 쉼이란 없다.
<여기에는 서양철학자 델리다가 발설한 해체주의적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것 같다> 나는 김구림 작가도 백남준처럼 미술가보다는 음악가에 가깝다고 본다. 아래 작품을 보면 미술적 회화라기보다는 음악적 회화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시와 모든 예술의 어머니(모국어)는 무엇보다 리듬이고 파동이다. 작가란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신의 눈치를 본다. 다시 말해 작가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진정한 타자(Moi, c'est L'Autre)가 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걸 '대타 존재'가 된다라고 했다. 또 타인의 시선이 바로 지옥 "L'enfer, c'est les autres" 명제도 담겼다. -김구림 종합예술가
한국 실험 미술과 전위 미술의 1세대 거장 김구림 선생님 그의 생애는 아무도 가지 않은 독보적 길을 걸어왔다. 작업실 살짝 엿보기 여기는 메인 작업실도 아니고 보조 작업실이다. 과연 우주만물과 세계를 보는 작가의 안목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 현장을 찍어보다. 중요 도록을 한 권 주시면서 직접 책 앞면에 자필 사인도 들어가다.
[1] 남녀원리는 물론이고 우주의 근원성을 보면 다 음양조화에서 온다. 1984년 뉴욕에서 시작
음양시리즈는 7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고 쉬었다가 지금까지도 시리즈물을 하고 있다. 동양철학의 진수인 음양철학을 세월을 지나수록 더 오묘하고 놀라운 동양의 지혜로 거기에 맞지 않는 사물과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원리가 없다는 확신이 든다고 한다. <'음양 4-s 12' 복합매체 29.8×21cm 2004. 대비효과를 극대화하면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About yin and yang In recent paintings, fashionable portraits or items of personal preference in magazines and advertisements are copied on the canvas by digital printers. and brush strokes are made on them, the existing images being erased. This is making an image transform into a non-image and a non-image turning into an image, with copied images and brush strokes rubbing against each other. not painting any objects with the existing formalized strokes. In other words, this is expressing the present culture, the life and desire of humans, good and evil. and nature and civilization in the language of an artwork. This is the meaning of yin and yang, the creation of the universe, all the people and nature in the world, all principals, and the law of life and death combined into one.
의 우주만물에 대한 메타언어인 음과 양에 대한 김구림 생각
1984년 뉴욕에서 체류 시 자연이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진 이래 음과 양이라는 동양의 테제를 등장시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1980년대의 후기와 1990년대의 후기에 이르는 십여 년간 그는 일상의 소재들인 나무·기구·거북·꽃과 같은 실재의 이미지를 등장시켜 이것들을 지우고 부각시키는 방법을 통해 자연과 우주의 근원과 신비를 응시하면서 일체의 사물들을 태초의 시선으로 다루는 데 몰입하였다. 자연창조의 신화가 여기서 모습을 드러낸 건 성과였다. 이를테면 이 시기의 음과 양에 등장시킨 원(圓)은 붓다가 머무는 처소로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근원적 경계이자 우리의 잠재의식에 내재하고 있는 세계의 근원상(根源相)이다.
“나의 작품에서는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가 분명치가 않다. 거기서는 과거와 현재가 종횡으로 중첩된, 이를테면 '과거-현재'를 부각시킨다. 그래서 있음은 곧 없음의 상대성이며 서로가 더불어 존재한다"
그곳은 보이는 세계에서 보았을 때 볼 수가 없는 세계이기에 어둠으로 채워진 세계였고, 거기서 현 세계가 빛을 받아 유출됨으로써 우리 앞에 펼쳐 진다는 걸 작품에 반영하였다. 구름조각을 빌려 저쪽과 현 세계를 중재하려 했던 게 이를 시사한다. 이즈음, 작가의 언급에 의하면, <음양>은 끊임없는 생성 · 소멸 · 변화. 발전을 주제로 시간의 흐름과 생명의 존재를 다루는 데 있었다. - 김복영, 상대성의 신화」
김구림의 위 작품 <음양陰陽88)>은 세계의 내재적 구조를 조형적으로 압축시켜 놓은 듯한 그림이다. 언뜻 보면 종교적 상징형상처럼 다가오는 이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있다. 3개의 캔버스를 이어서 하나의 화폭으로 만든 작품인데, 가운데 위치한 캔버스가 좌우에 붙어있는 캔버스보다 가로 세로 길이가 좀 긴 작품이다. 이 한가운데 위치한 캔버스에는 캔버스 가득 큰 나무 형상이 뿌옇게 그림자처럼 그려지고, 그 위에 주황색 선(線)으로 윤곽선을 보이면서 큰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십자가가 그려진 캔버스의 왼편에 이어져 있는 또 다른 캔버스에는 검은색 바탕에 주황색으로 그어진 짧은 선들이 검은 공간 속을 부유하듯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 짧은 색(色)이 자유로운 선형을 그리면서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3개의 캔버스를 이어서 하나의 화면으로 만들고 있는 이 그림 전체적으로 좌우대칭형의 구도를 취하고 있는데, 화면의 약 1/9에 해당하는 아랫부분에는 강물과 같은 불다는 물결을 옆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강렬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호소력을 보인다. - 임두빈, 「세계를 용시하는 김정의 세부 시)
김구림의 최고 미덕을 폼을 잡지 않는 예술을 한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의 입장은 다르겠지만 관객에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비가시적 시각예술이다.
[1] 작가: 김구림 1936년 경북 상주 生 3대가 한약방을 하다. 유복한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나다.
[2] 수상: 2017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2014년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 2006년 이인성 미술상 수상, 1983년 대한민국 무용제 무대미술상
[3] 저서(3권): I 판화 콜렉숀. 서문당. II 서양판화가 100인과 판화감상. 미진사. III 별하나 나 하나(동화). 동화출판사.
김구림 저 <판화 COLLECTION 보는 법에서 수집까지> 김구림 작가는 한국판화부분에서 저술가와 이론가로 실천가(예술가)로 독보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이 분야에서 개척자로 한때 홍익대 대학원 판화과에서 5년 강의도 하셨다. 그의 내놓은 2권에 판화 책을 일종의 판화 백과사전 같았다. 판화에 문외한이 나에게 신기하게 보였다. 1978년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판화를 만드는 공간을 열었고 미국에서 15년간(뉴욕과 LA) 작업 활동하면서 배우고 경험한 모든 자료가 담겨 있다 그리고 Theodoro B. Donson의 'PRINT MARKET'을 바탕으로 집필한 것이다. 판화 전공자 수집가에게는 필독서이다 판화 용어를 조어처럼 새로 만들어야 했다 <차례> 1. 판화란 무엇인가 2. 판화의 종류 3. 오리지널 판화 4. 판화의 수집 5. 복제 판화 6. 판화 발행업 7. 판화의 경매 8. 판화의 보관과 유지
김구림은 그의 판화 저서 <판화 COLLECTION 보는 법에서 수집까지>에서 유명 외국작가의 사인 변천사도 연구하다
김구림 선생님 판화에 대한 2번째 저서 <서양판화가 100인과 판화 감상 2014년 250쪽 미진사 간행> 여기서는 판화 감상화를 위해서 서구 판화 100선이다. 원래 일본 우키오에 등이 더 있었는데 일부 개정되고 책 제목도 서양미술이 안 들어갔는데 추가되었다고 이 책을 직접 받았다
[4]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영국),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 컬렉션.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미국), 리움미술관, 홋카이도근대미술관 (일본), 오사카예술센터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일본), 라이트콘 (프랑스), 이스라엘미술관 (예루살렘), 뉴욕시티은행 (미국), 한국 영상자료원, 서울대미술관, 대구 문화예술회관, 서울시립미술관, 토탈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아라리오미술관, 경기도미술관, 한국문예진흥원, 수원대학교미술관, 경주아사달조각공원, 일현미술관 외 다수.
[2] 주요미술관, 갤러리 개인전 및 단체전, 퍼포먼스
2020 김구림 한국전위예술의 획을 긋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https://www.youtube.com/watch?v=pv1eqenY73s
['김구림'과 '제만'은 1969년에 상통. 이들은 예술의 결과보다는 예술의 과정과 태도(attitude)를 더 중시. 요즘 유행하는 예술의 확장성(expand)과 시간성을 중시하고 우주만물의 순환과 호흡의 운동성과 과거 현재 미래의 시대성과 '음양'과 '이기'가 일원론으로 오버랩된다.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더 깊고 넓은 차원을 추구하는 종합성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김구림의 시도와 태도의 독창성은 미술적이라기 범위에서 벗어나 보다 포괄적인 종합 예술(Total Art)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미술이 뭐고 음악이 뭐고 춤이 뭐고 연극이 뭐고 등도 포함되지만 그보다는 예술의 정체성의 근원보가 본질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접근한다거나 무엇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를 묻기도 했다. 1969년 세계적 큐레이터 제만이 최초로 시도한 전시 <예술이 태도가 될 때> 바로 그런 면을 보였다 그의 전시는 미술의 전시가 아니라 예술의 전시였던 것이다. 김구림도 1969년 같은 해에 그런 태도와 철학으로 총괄적이고 시원적인 통합예술(Gesamtkunstwerk)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이건 작가의 노력이기보다는 작가의 타고난 체질이다.
[3] 김구림 '공간구조' 1969 한국 최초로 '엘렉트로 아트(전자아트)'에 도전했다는 것 그 자체가 획기적이다.
[1] 주요미술관, 갤러리 개인전 및 단체전, 퍼포먼스
- 2021 <음과 양>, 가나아트센터, 서울 2021 <몸 짓 말 corpus gestus vox>, 경기도미술관 2021 <컬렉션_오픈 해킹 채굴>,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21 <자문밖 프로젝트 I>, 가나아트센터, 서울
- 2020 <판화. 판화. 판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0 김구림 한국전위예술의 획을 긋다. YouTube.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0 <1/24초와의 대화>, Museum Cinema Festival, 경북대학교 미술관, 대구, 2020 <매체에 재조명: 동아시아 영상 예술의 부상>, OCAT Shanghai, 샹하이
- 2019 <실험음악. 시속의 울림. 마음속의 노래 작곡.연주>, Cafe OTO, 런던(김구림, Jess Beige Kim), 2019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9 <한국의 비디오아트 7090: 시간 이미지 장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2018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한국의 아방가르드미술: 1960-80년대의 정황>, 대구미술관, 대구, 2018 제 64회 오버하우젠 국제 단편영화제 공식초청, 오버하우젠, 2018 홍콩아트바젤, 캐비넷, 홍콩, 2018 <1960-1990년 동 아시아의 퍼포먼스의 역사, 3개국 아방가르드>, 큐레이터 시리즈: 빅터 왕, Roberts Institute of Art, 런던, 2018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 도쿄국립근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과천), 국립싱가폴미술관, 2018 퍼포먼스 히스토리스. SOAS대학 특강, 런던, 2018 Traversing the Turbulent Time, 골드스미스 대학원 특강, 런던
- 2017 <아시아디바>, 북서울 시립미술관, 서울, 2017 대구미술관 <대구미술관포럼>, “앙그리와 63미전” (김구림과 앙그리 그룹. 강연), 대구
- 2016 <삶과 죽음의 흔적>,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2016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 (과천30년 기념 퍼포먼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6 <뉴 테이트 모던 개관기념 소장품>, 런던, 2016 <Postwar Art Between the Pacific and the Atlantic. 1945-1965>, Haus der Kunst Munchen, 뮌헨, 2016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 불온한 탈주>, 부산비엔날레,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 2015 <거대한 초생달: 1960년대 예술과 동요-일본,한국,타이완>, 모리미술관, 도쿄, 2015 <Embeddedness: 6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필름과 비데오>, 테이트모던, 런던, 2015 <생성에서 소멸로> 퍼포먼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15 <동북아시아 지역사와 시대정신>, <생성에서 소멸로> 퍼포먼스, <24분의 1초의 의미> 특강 산시성 미술관, 산시성, 2015 동거동락, 남산골 한옥마을, 서울, 2015 Lille 3000 페스티발, “르네상스”, 릴
- 2014 홍콩 아트 바젤, 홍콩, 2014 <개인전>,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
- 2013 <잘 알지도 못하면서>, SeMA Green 1960-1970대 작품 서울시립미술관 초대전, 서울
- 2012 <RES(V)OLUTION 1960-2013>, DNA 베를린 갤러리, 베를린,2012
- 2012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 테이트모던, 런던
- 2010 타이완 국제실험영화제 1/24초의 의미 출품, 대만.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팔방미인>, 경기도
- 2009 <퍼포밍더씨티 Kunst Aktionismus im Stadt Raum 60er and 70er Jaher>, 뮌헨, 밀라노, 파리, 도시 순회전
- 2008 <NOW JUMP: 백남준 아트센터 개관전>, 경기도, 용인
- 2007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 과천
- 2002 <김구림의 작은 회화>, 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서울
- 2001 <한국 현대미술과 전개: 전환과 역동의 시대>,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 과천
- 2000 <개인전>, <현존과 흔적>,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초대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서울
**1993 <세 개의 세상 하나의 예술>, 비올라 대학교 아트 갤러리, 미국,
1992 <김구림, 백남준 2인전: Discontinuities>, 찰스 위처치 갤러리, 캘리포니아
1991 <개인전>, The Modern Museum of Art, 캘리포니아, 1990 <침묵의 대화, 서양과 일본의 정물화>, 시즈오카 현립미술관, 1988 <국제소형판화 트리엔날레>, 샤말리에르, 프랑스, 1987 <김구림 개인전>, 현대갤러리, 서울, 1986 <뿌리에서 현실로>, 루이스 아브론스 아트센터, 뉴욕, 1986 <ARTISTIC LICENSE ‘BRUCE NAUMAN 외 7인’ 전, 갤러리 뉴욕, 뉴욕, 1985 <미국 우수작가 선발>, 뉴욕 링컨 센터, 뉴욕, 1984 <개인전>, 아마노 갤러리, 오사카, 1984 제 8회 브리티시 국제 판화 비엔날레, 런던, 1982 연극 <통막살> 무세중과공연, 문예진흥원 문예회관 극장, 서울, 1982 이어령의 수필집 ‘말’ 삽화 제공, 문학사상, 1982 최은희의 춤, 연출 및 무대미술,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1981 퍼포먼스 ‘손톱과 시’ 발표, 공간사랑, 서울, 1981 창작무용 <이상의 날개> 연출, 안무, 의상, 무대미술, 세종문화회관, 서울,1981 <한국 드로잉 전>, 브루클린 미술관, 뉴욕, 1981 구림 판화공방 개설, 신영동, 서울, 1981 제 16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NUCLEUS 1 MAIL ART>, 초대작가로 사진작품 출품, 상파울로, 1981 서울 동아 국제판화 비엔날레, 서울, 1980 <아시아 현대미술>, 후쿠오카 미술관, 후쿠오카 ***
1978 <제 4회 인도 트리엔날레>, 뉴델리, 1978 서울 국제 판화교류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77 <한국 현대 미술의 단면>, 도쿄 센트럴 미술관, 도쿄, 1977 <개인전>, 가네꼬 아트 갤러리, 도쿄, 1976 제7회 까뉴 국제회화제, 초대 출품, 까뉴, 1976 제 5회 Open Encounter on Video 초대전, 벨기에, 1975 제 4회 국제 OPEN ENCOUNTER ON VIDEO 초대전, 부에노스아이레스, 1975 <에콜드서울>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0 <매체에 재조명: 동아시아 영상 예술의 부상>, OCAT Shanghai, 샹하이,
2019 <실험음악. 시속의 울림. 마음속의 노래 작곡.연주>, Cafe OTO, 런던 (김구림, Jess Beige Kim)
2019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9 <한국의 비디오아트 7090: 시간 이미지 장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8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한국의 아방가르드미술: 1960-80년대의 정황>, 대구미술관, 대구
2018 제 64회 오버하우젠 국제 단편영화제 공식초청, 오버하우젠
2018 홍콩아트바젤, 캐비넷, 홍콩
2018 <1960-1990년 동 아시아의 퍼포먼스의 역사, 3개국 아방가르드>, 빅터 왕, Roberts Institute of Art, 런던
2018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 도쿄국립근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싱가폴미술관
2018 퍼포먼스 히스토리스. SOAS대학 특강, 런던
2018 Traversing the Turbulent Time, 골드스미스 대학원 특강, 런던
2016 <삶과 죽음의 흔적>,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2016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 (과천30년 기념 퍼포먼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6 <뉴 테이트 모던 개관기념 소장품>, 런던
2016 <Postwar Art Between the Pacific and the Atlantic. 1945-1965>, Haus der Kunst Munchen, 뮌헨
2016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 불온한 탈주>, 부산비엔날레,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15 <거대한 초생달: 1960년대 예술과 동요-일본,한국,타이완>, 모리미술관, 도쿄
2015 <Embeddedness: 6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필름과 비데오>, 테이트모던, 런던
2015 <생성에서 소멸로> 퍼포먼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15 <동북아시아 지역사와 시대정신>, <생성에서 소멸로> 퍼포먼스, <24분의 1초의 의미> 특강 산시성 미술관
2015 동거동락, 남산골 한옥마을, 서울
2015 Lille 3000 페스티발, “르네상스”, 릴
2014 홍콩 아트 바젤, 홍콩 2014 <개인전>,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
2013 <잘 알지도 못하면서>, SeMA Green 1960-1970대 작품 서울시립미술관 초대전, 서울
2012 <RES(V)OLUTION 1960-2013>, DNA 베를린 갤러리, 베를린
2012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 테이트모던, 런던
2010 타이완 국제실험영화제 1/24초의 의미 출품, 대만
2010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팔방미인>, 경기도미술관, 경기도
2009 <퍼포밍더씨티 Kunst Aktionismus im Stadt Raum 60er and 70er Jaher>, 뮌헨, 밀라노, 파리, 도시 순회전
2008 <NOW JUMP: 백남준 아트센터 개관전>, 경기도, 용인
2007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 과천
2002 <김구림의 작은 회화>, 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서울
2001 <한국 현대미술과 전개: 전환과 역동의 시대>,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 과천
2000 <개인전>, <현존과 흔적>,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초대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서울
1993 <세 개의 세상 하나의 예술>, 비올라 대학교 아트 갤러리, 미국
1992 <김구림, 백남준 2인전: 불연속 Discontinuities>, 찰스 위처치 갤러리, 캘리포니아
백남준이 뉴욕에서 김구림을 만났을 때 이런 덕담을 남겼다고 한다. "김선생님 실험미술을 하는 사람은 그 작품성을 인정받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오래 오래 사셔야 합니다"
1991 <개인전>, The Modern Museum of Art, 캘리포니아
1990 <침묵의 대화, 서양과 일본의 정물화>, 시즈오카 현립미술관
1988 <국제소형판화 트리엔날레>, 샤말리에르, 프랑스
1987 <김구림 개인전>, 현대갤러리, 서울
1986 <뿌리에서 현실로>, 루이스 아브론스 아트센터, 뉴욕
1986 <ARTISTIC LICENSE ‘BRUCE NAUMAN 외 7인’ 전, 갤러리 뉴욕, 뉴욕
1985 <미국 우수작가 선발>, 뉴욕 링컨 센터, 뉴욕
1984 <개인전>, 아마노 갤러리, 오사카
1984 제 8회 브리티시 국제 판화 비엔날레, 런던
1982 연극 <통막살> 무세중과공연, 문예진흥원 문예회관 극장, 서울
1982 이어령의 수필집 ‘말’ 삽화 제공, 문학사상
1982 최은희의 춤, 연출 및 무대미술,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1981 <한국 드로잉 전>, 브룩클린 미술관, 뉴욕
1981 구림 판화공방 개설, 신영동, 서울
1981 제 16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NUCLEUS 1 MAIL ART>, 초대작가로 사진작품 출품, 상파울로
1981 서울 동아 국제판화 비엔날레, 서울
1980 <아시아 현대미술>, 후쿠오카 미술관, 후쿠오카
1978 <제 4회 인도 트리엔날레>, 뉴델리 1978 서울 국제 판화교류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77 <한국 현대 미술의 단면>, 도쿄 센트럴 미술관, 도쿄 1977 <개인전>, 가네꼬 아트 갤러리, 도쿄
1976 제7회 칸 국제회화제, 초대 출품, 칸,
1976 제 5회 Open Encounter on Video 초대전, 벨기에,
1975 제 4회 국제 OPEN ENCOUNTER ON VIDEO 초대전, 부에노스아이레스,
1975 <에콜드서울>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75 백남준과 <Rencontre International Ouverte de Video> 출품, 파리
1974 <The 2nd International Impact Art Video-74> ‘걸레’ 출품>, 스위스 로잔
1974 <개인전>, 갤러리 16, 교토,
1973 제 12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출품, 상파울로
1972 <제 3회 AG전: 탈 관념의 세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71 <제 2회 AG전: 현실과 실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71 제 7회 파리비엔날레, 파리 시립미술관, 파리
1970 제 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 백남준 작품 <피아노 위의 정사> 연출, 국립극장, 서울
1970 제4집단 결성식, 서울 을지로 소림다방 예술단체 제4집단 대표취임, 서울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과 ‘제4집단’
1970년 8월 15일 오전, ‘기성문화를 장례 지내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일단의 젊은이들이 광복 25주년을 맞아 사직공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히피 스타일의 복장에 긴 머리의 정찬승과 손일광, ‘제4집단’의 대표(통령)인 김구림, 그리고 정강자 등이었다.
‘제4집단’의 대표(통령)인 김구림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는 미국의 팝송을 비롯한 외래문화가 범람하여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던 때라 이에 대한 민족적 각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누군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문화적 자존심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제4집단’이 나서기로 결의를 한 것이다.35)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이라 이름 붙여진 이것은 이보다 약 두 달 앞선 6월 20일, 당시 을지로에 있는 소림다방에서 결성대회를 가진 <제4집단>이 첫 번째로 마련한 행사였다. 이들은 비록 외세에 의한 타율적 해방이긴 했지만 ‘8. 15 해방’이 지닌 의의를 높이 사 이 날 사직공원에서 행사를 갖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들은 태극기, ‘무체사상’을 의미하는 백기와 함께 관 1개와 생화를 준비하였다. 이율곡동상이 있는 행사장 주변에는 ‘제4집단’의 회원들은 물론 마침 광복절을 맞이하여 공원에 놀러 나온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준비를 마치자 이들은 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고 ‘제4집단’의 강령을 복창한 다음 ‘문화예술의 장례를 위한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윽고 행사를 마친 이들은 관에 선언문을 넣고 모래를 채운 뒤 그 위에 꽃과 태극기를 덮은 다음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태극기와 흰 깃발을 든 정강자가 앞장을 섰고 그 뒤를 김구림이 흰 깃발을 들고 따랐다. 관을 든 손일광과 정찬승이 바로 김구림의 뒤를 이었으며, 그 뒤를 ‘제4집단’의 회원들과 호기심을 느낀 시민들 일부가 따라갔다. 그러나 행렬은 그다지 멀리 가지 못했다. 행렬이 광화문을 지나 덕수궁 근처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 이르렀을 때,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경찰관이 이들을 불러 세웠다. 이들은 애초에 한강에 가서 관을 땅에 묻기로 계획을 세웠지만,36) 중도에 그만 둘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평로파출소로 연행된 그들은 얼마 후 다시 남대문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영등포구치소로 넘겨졌다. 이들은 거기서 즉결재판을 받았는데, 죄목은 ‘통행방해’와 ‘도로교통법 위반’이었다. 37)
김구림에 의하면 원래 이 행사의 계획은 사직공원에서 출발하여 광화문을 거쳐 남대문과 용산을 지나 제1한강교 밑 백사장으로 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관을 땅에 묻으면 오랜 세월이 지나 지형이 변하게 되는데 그리되면 오염된 문화를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그 당시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문화적 데먼스트레이션은 중도에 행위자들이 연행돼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지닌 문화적 함의이다. 관을 든 행렬이 광화문 근처를 지나갈 때, 행인들의 비난과 야유를 들었다는 정강자의 증언은 당시의 해프닝이 대중에게 예술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일종의 ‘미친 짓거리’ 쯤으로 인식됐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대중과 아방가르드 예술과의 괴리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으로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eet)가 밝힌 것처럼, 전위예술에 대한 대중의 뿌리깊은 불신과 혐오에 기인한다. 오르테가에 의하면 전위예술39)의 특징은 비통속성인 바, 이는 그저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본질적 숙명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전위예술이 표방하는 새로운 형식과 기법은 대중이 보기에 매우 낯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일반화되기까지에는 일정한 검증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예술가와 대중 간에는 이해가 맞지 않는 데서 오는 마찰과 오해가 끊임없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어떤 작품에 대해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과 비통속적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못을 박는다. 40)
아방가르드의 낯선 예술 형식은 대중을 당혹케 한다. 저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행위미술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길거리에서 괴상한 짓거리를 하는 저 사람들의 특이한 복장과 행위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제4집단’의 행렬을 막은 경찰관이 보인 반응은 이의 한 예다. 이를 상상하여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장면이 될 것이다.
경찰:“(행렬 가운데 대표인 가장 괴상해 보이는 정찬승을 보며) 여보쇼. 이게 대체 뭐하는 거요?'
정찬승:“왜 그러십니까? 이건 해프닝인데요.”
경찰:“해프닝? 해프닝이 대체 뭐 하는 거요?”
정찬승:“해프닝이죠. 그러니깐 뭐랄까, 일상공간에서 어떤 계획된 사건을 통해 사물의 존재감을 새롭게 드러내자는 건데.......”
경찰:“(좀 듣다가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관을 발로 툭 차며) 여보, 제발 웃기지 마쇼.“
경찰이 보낸 이 야유는 오르테가도 지적한 것처럼 전위예술에 대한 깊은 불신과 혐오에 기인한다. 그렇기에 그는 전위예술가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서 모종의 모멸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런 모멸감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아방가르드 예술의 심리학은 집단의 심리학이기 때문에 문학적, 문화적, 예술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사회학적 연구의 대상”이라고 한 포지올리의 말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전위예술과 대중, 곧 사회와의 관계는 오르테가가 일찍이 통찰한 것처럼 전위예술이 ‘대중이라는 적’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들 간의 마찰은 필연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그 시설이 조악했다. 고교시절 단체로 여기서 국전을 본 것 같다. 덕수궁에서도 했지만 김구림 작가는 이런 건물이 국립현대미술관이라니 이것은 말도 안 된다면 국립미술관을 보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사전에 시신을 염을 하듯 건물을 염을 하는 이벤트 해프닝이다. '크리스토'의 유명 건물을 천으로 감싸는 아트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것이다 1969년 작품이다. 이런 작업을 하려면 돈도 들겠지만 인원 동원하는 것 몰래 가서 설치하는 것 그 하나 하나가 쉽지 않은 일이다.
1970 퍼포먼스 도<道> 경복궁 현대미술관, 서울
1970 제4집단 정찬승, 고호와 <가두퍼포먼스> 총괄연출, 서울
1970 퍼포먼스 육교 위에서 풍선으로 길을 가로막는 퍼포먼스, 신세계백화점앞 육교, 서울
1970 퍼포먼스 <콘돔과 카바마인>서울대 문리대 정문 앞, 서울
1970 <무체전> 제 4집단과 해체 선언, 공보관, 서울
1970 <현상에서 흔적으로> 발표, 대지예술 살곶이 다리 뚝방, 서울
1970 제 4집단과 <기성문화예술과 기존체제의 장례식 및 정국 결성대회> 사직공원, 서울,
1970 <무체전> 제 4집단과 해체 선언, 공보관, 서울,
1970 <제1회 AG전: 환원과 확장의 역학>, 국립중앙공보관, 얼음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 발표,
1970 제4집단 정찬승, 고호와 <가두퍼포먼스> 총괄연출, 서울,
1970 대지예술 <현상에서 흔적으로> 발표, 살곶이 다리 뚝방, 서울
일정한 규격이나 틀에 얽매인 미술관에서 과감히 뛰쳐나온 김구림은 1970년 4월 11일 오전 11시부터 뚝섬 근처 살곶이 다리 옆 강둑에서 한국최초의 대지예술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선보였다. 60도의 경사진 강둑에서 진행된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는 100m의 길이에 한변이 22m정도되는 정삼각형 다섯 개를 선으로 그어놓고 하나씩 건너서 붙을 질렀는데 김구림은 물통에 담긴 석유를 연신 뿌려가면 잔디를 태우다 불이 셔츠에 옮겨 붙어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그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예술의 장르의식을 파괴하여는 전위작가다. 나의 화실은 건물이나 우주 같은 넓은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은 나의 화실인 동시에 모든 사람의 화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대지미술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했다. 그 당시 시각 예술의 범위는 이미 예술의 한계성을 뛰어 넘었으며 그에 따라 화폭을 바라보거나 혹은 조각의 주변을 맴도는 형태의 관람을 벗어난 상태였다. 김구림은 스스로 잔디에 불을 질러 태우는 형식의 파괴'를 통에서 화랑을 떠난 예술 행위를 보여주었으며 작품을 무한 공간으로, 확장함으로써 손의 사고에 의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 방법을 제시한 것이고 자신의 대지 미술을 정의했다.
1970년 작품을 2016년 3월 18일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재현하다
이날 잔디밭을 불태운 퍼포먼스는 김 작가의 전체 작업으로 치면 시작에 불과하다. 삼각형으로 검게 불탄 자리에는 한달여 시간이 지나면 푸른 잔디싹이 돋아나 원래 흔적들이 사라지게 된다. 이런 자연적 변화의 과정까지 나중에 함께 보여주면 ‘현상에서 흔적으로’ 는 완성된다. ‘존재의 소멸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화두를 던지는 작업이기 때문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백남준 1967년 전화아트(후에 SNS아트가 된다)와 김구림(김차섭과 함께) 1969년에 일종의 해트닝으로 시도한 메일아트는 상통한다> Art by Telephone emphasised the centrality of the idea or concept rather than the labour of making as integral to the artistic process.
<김구림은 한국에서는 1969년 처음으로 <매스미디어의 유물>이라는 제목이 붙은 메일아트(주제 삶의 우연성 거기서 맛보는 재미)를 시도하다. 좀더 색다른 퍼포먼스를 하고 싶어했다> 아래, 메일아트의 예
1969년 10월 10일 오전 10시, 김구림은 김차섭과 함께 80명의 화가와 20개의 신문사 앞으로 3번씩 총 300통의 편지를 발송하였다. 한통에는 김구림의 지문이 붉은색으로, 또다른 한 편지지에는 김차섭의 지문이 검은색으로 찍혀있다. 둘은 한 종이에 각각 검고 붉은 지문을 찍어 반으로 찢은 다음 3일에 걸쳐 나뉘보낸 것인데 제일 마지막에 보낸 편지에는 “귀하는 《매스미디어의 유물을 1일전에 감상하셨다”라고 적혀있었다. 김구림은 작품에 대해 편지라는 활자미디어는 곧 없어져서 유물로 남을 것이며 기계가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우주적인 작품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1969 한국 최초 메일아트 우편예술 MASS MEDIA의 유물 발표, 서울전역
1969 <바디페인팅> 발표 (T.B.C TV 방영.) 서울
1969 한국청년작가 11인전, Solidaridad 화랑, 마닐라, 필리핀
1969 한국최초 일렉트릭 아트 <공간구조> 발표
1969 실험영화 8mm <문명, 여자, 돈> 제작 연출, 1969 실험영화 16mm <1/24초의 의미> 제작
1969 영상과 퍼포먼스 <무제> 발표, 아카데미음악실, 서울
1969 오태석의 <웨딩드레스> 시츄아숑 극단 앵글562 연출, 대구시립종합문화회관, 대구
1969 <산하억만년> 무대미술 참여. 국립극장, 서울
1968 <회화68그룹전> 참여 1965 <신작가 협회 창립전> 신문회관, 서울
1969 한국 최초 메일아트 우편예술 MASS MEDIA의 유물 발표, 서울전역, 1969 <바디페인팅> 발표 (T.B.C TV 방영.) 서울, 1969 한국청년작가 11인전, Solidaridad 화랑, 마닐라, 필리핀, 1969 한국최초 일렉트릭 아트 <공간구조> 발표, 1969 실험영화 8mm <문명, 여자, 돈> 제작 연출, 1969 실험영화 16mm <1/24초의 의미> 제작, 1969 영상과 퍼포먼스 <무제> 발표, 아카데미음악실, 서울, 1969 오태석의 <웨딩드레스> 시츄아숑 극단 앵글562 연출, 대구시립종합문화회관, 대구, 1969 <산하억만년> 무대미술 참여. 국립극장, 서울,
1968 <회화68그룹전> 참여, 1965 <신작가 협회 창립전> 신문회관, 서울, 1964 <태양의 죽음> 시리즈 발표, 1963 <앙그리 창립전>, 경북 공보관 화랑, 대구, 1958 첫 개인전, 공보관화랑, 대구 [삽화] 유리별 대합실 (삽화 김구림, 글 이정환). 경향신문. 1976 이어령의 에세이집 (말) 김구림, 삽화, 1982
1964 <태양의 죽음> 시리즈 발표 테이트 모던 소장품, 1963 <앙그리(angry) 창립전>, 경북 공보관 화랑, 대구, 1958 첫 개인전, 공보관화랑, 대구 [삽화] 유리별 대합실 (삽화 김구림, 글 이정환). 경향신문. 1976 / 이어령의 에세이집 (말) 김구림, 삽화, 1982
[4] 김구림 선생 페인팅의 독창성 시대를 반영하다
김구림 선생의 페인팅이 정말 특이하다. 지우기로서의 페인팅 그의 페인팅에서는 캔버스를 쓰는 것이 아니라 대형광고판을 걸었다고 떼낼때 그것을 사다가 바로 그의 페인팅 바탕면으로 사용한다 그 위에 그림를 그리고 그리기보다는 지우기에 가깝다. 그러니까 버려지는 광고판은 시대의 얼굴을 반영하고 거기에 작가의 개입을 더하고 빼고 해서 제3의 페인팅을 그려낸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시간성과 시대의 사회적 현상과 당대 정치경제학의 시사성이 합쳐지고 묻어나는 그런 페인팅이 된다
[5] 실험영화 테이트 모던 소장품 김구림의 24분의 1초 실험영화 1969년 작
1초 동안 넘어가는 필름 24컷이라는 의미가 '24분의 1초의 의미'라는 제목에 담겨 있다”고 밝혔다. 1969년은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군부독재 시절, '24분의 1초의 의미'는 군부독재 시절의 한국 시대상을 삼일고가도로와 세운상가를 배경으로 묘사하고 있다
‘24분의 1초의 의미’에 대해 김구림은 “영화는 1초에 필름 24컷이 필요하다. 1초 동안 넘어가는 필름 24컷이라는 의미가 ‘24분의 일초의 의미’라는 제목에 담겨 있다”고 밝혔다. 1969년은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군부독재 시절, ‘24분의 1초의 의미’는 군부독재 시절의 한국 시대상을 삼일고가도로와 세운상가를 배경으로 묘사하고 있다.
"스크린이 아닌 인물에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이 오늘날에는 보편화되었지만 ‘24분의 1초의 의미’가 만들어질 당시인 1969년에는, 영상은 반드시 스크린에 투사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24분의 1초의 의미’는 선글라스를 낀 김구림의 몸 위로 스크린이 아닌 영상이 직접 투사되는 파격적인 영상 실험을 한, 당시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시도를 선보인 작품이다.
이 영화를 제작한 다음에 ‘24분의 1초의 의미’가 당시 신문에서 대서특필되고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키자, 충무로에서는 김구림이 영화계를 망친다고 생각해서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영화계의 보복을 두려워해 아무도 이 영화의 편집을 하려고 들지 않자 김구림이 직접 편집하는 방법을 배워 직접 편집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를 제작한 다음에는 집단 린치를 당해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물리적인 위협도 받은 작가가 김구림이다.
이런 김구림의 핍박 받는 실험정신이 반세기 가까이 되어서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재조명 받는다는 사실은, 김구림이라는 작가의 개척 정신이 반세기가 지나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방증한다. 동시에, 해외에서 인정받아야 국내에서는 마지못해 인정하는 ‘문화 역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 있어 씁쓸함을 남기기도 한다.
‘24분의 1초의 의미’는 영국 테이트모던만 초청받은 게 다가 아니다. 프랑스 릴의 ‘릴3000페스티벌에도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사흘 동안 초청될 예정이다." - 출처 : 서울문화투데이(http://www.sctoday.co.kr)
테이트모던 소장품 24분의 1초는 세계미술사에 남을 만한 수작이다. 1969년은 1970년부터 시작하는 한국의 산업화의 전야에 해당한다. 한국은 1970년 전태일이 분신으로 산업화가 본격화된다. 이런 시대정신을 잘 반영하는 예술품이 나왔다는 것은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김구림 작가는 이 영화를 만들다가 영화계에서 한국 영화시장을 망친다며 엄청난 반대로 인신공격을 해 7주일간 병을 앓기도 했다. 당시 김구림 작가는 초기 경제활동을 왕성하게 할때다. 대구에 있는 섬유회사(이 회사 사장이 바로 김준성 전 부총리였다)가 크게 능력을 인정받다. 신상품 기획을 잘해 연봉을 가장 많이 받는 유능한 회사원이기도 했다 그는 고속 승진을 해 5년만에 부장이 되기도 했지만 예술의 길을 걷기 위해서 그런 경제활동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그때 나온 것이다. 영국은 산업화 300년된 국가인데 한국은 10년도 안 됐는데 산업화의 예술화에서 오히려 앞섰다
***** 일관된 스토리가 있는 이번 작품의 시나리오 내용을 살펴보면, [1] 달리는 車內에서 본 고가도로 난간 ② 60개의 짧은 플래시 컷(flash cut) ③ 샤워(고속도 촬영) ④ 하품하는 남자 ⑤ 피어오르는 연기 이 작품은 공식 기록으로 한국 최초의 전위영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1960년대는 한국의 군부통치 시절 산업화가 시작되고 엄격한 질서와 통제가 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시대여서 보다 관심을 끈다. (1/24초의 의미는 제목 자체가 이 시대의 시대상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이 작품은 필름이 1초에 24 컷이 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차 안에서 보는 고가도로의 난간, 60개의 짧은 플래시 컷, 샤워하는 남자, 행위예술가 정찬승이 하품하는 모습, 피어오르는 연기 등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의 시간에 담아낼 수 있는 일상들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 이 작품은 산업사회를 바쁘게 살았던 1960년대의 편린들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권태를 동반한 삶의 시간과 당대의 역사를 읽어 볼 수 있다. 작가는 이미지들을 의식적으로 하나하나 독립시기 구성함으로써, 시간 속에서는 사건들이 우연에 지배되고 탈맥락적으로 공간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시간의 흐름이 비선형의 본성을 띠고 있음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사회상 또한 이러한 맥락의 탈구조화를 치닫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김복영, 1/24초의 의미」 영상자료 https://www.youtube.com/watch?v=WVQuEmyidis
김구림 선생님 Total Artist 춤 연극 소설 영화 음악 작곡 행위예술 페인팅 전자미술 판화는 물론 경향신문 연재소설의 삽화 등등 정말 다양한 부분에서 활동하셨네요. 그 왕성한 미학적 호기심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실험영화에서는 세계 정상급이었다. 그의 실험 영화 1/24초는 지금 테이트모던과 뉴욕구겐하임에 소장되어 있다. 집에 가보니 당시 영화를 찍을 때 영사기(아래)가그대로 다 있었다. 산업화의 속도문화 속 소외와 권태 현상을 영상화하는데 한국이 먼저 치고 나가다. 영국은 산업화 300년된 국가이고 한국은 20년도 안 됐는데 예술화에서 오히려 앞섰다.
[6] 김구림 선생 거실에 오디오 시설, 그는 조율에서 일가견을 가지 음악가이자 작곡가에 가깝다
집안에 오디오 교향악단이 있다. 김구림 작가 음에 상당히 예민하신 분이다. 백남준 과에서 속한다.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들기 위해서 적어도 몇 년 고생해서 음 조절과 선 조절을 해야 한다. 때로는 은으로 만든 전선을 연결해야 하기에 매우 까다롭다고 자녀들이 거의 20년 간 이런 음악을 듣고 자랐으니 음향에 예민할 수 밖에 없다고 두 자녀는 다 영국에서 미술과 공학을 공부하다. 잠시 앉아 있는데 방이 마치 연주장 같다는 착각이 든
집안 천장 쪽에도 다양한 악기가 걸려 있다 뒤에는 한국에 3대밖에 없는 피아노 포르테도 보인다.
[7] 김구림 화백은 연극연출가로도 활동
[] 1975년 파리 비디오아트 7인전 참가 백남준과 함께 참가
김구림 작가, 1975년 비디오아트 7인전 참가. 백남준(독일대표로 참가)과 함께 <Rencontre International Ouverte de Video> 출품, 파리에서 세계 전자아트 7인전을 하는데 그때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참가했는데 작가 명단에 백남준이라는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고 그때 처음 백남준을 봤다고 한다. 백남준은 독일작가로 참가했다고 하네요. 아래가 김구림 전자아트 작품이다.
[8] 김구림 선생은 한국에서 전자음악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2012년 런던 테이트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잭슨 폴록 등과 전시에 참가
백남준 이후 처음으로 김구림 화백,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니키드 생팔, 쿠사마 야요이, 신디 셔먼, 이브 클랭 등과 함께 영국 테이트모던 전시('어 비거 스플래시(A Bigger Splash: 퍼포먼스와 페인팅의 연결이 주제)' 참여 2012-12-20기사. 전시는 2013년 4월 1일까지. 박인영기자 <연합뉴스>
'한국 전위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구림 화백이 영국의 세계적인 미술관인 런던 테이트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미술품 전시에 참여했다. 김 화백은 한국작가로는 처음으로 이번에 테이트 전시에 참여했다. 테이트큐레이터가 우연히 김 화백의 작업에 관한 서적을 접하고 관심을 두고 연구해오다 이번에 직접 갤러리 측에 전시 참여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The Tate Modern exhibition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 in 2012 took a look at the dynamic relationship between performance and painting since 1950. It featured works by artists as diverse as David Hockney, Jackson Pollock, and Yves Klein.
서울문화투데이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369
위 기사를 보면 김구림 화백이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백남준과 함께 가장 많은 작품을 소장한 작가 중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1964년 '태양의 죽음' 테이트모던 소장품>
<김구림 화백, 1964년에 벌써 붓질회화를 거부하다> 김구림은 1964년 작품 '20-S 34’ <태양의 죽음>이 영국 테이트 소장되었다 그 작품 앞에서 테이트 학예실장 캐더린 우드(전공 퍼포먼스아트)와 찍은 사진
이 작품은 붓으로 그리는 회화가 너무 상투적이고 낡은 방식이고 생각한 데서 탄생한 것이다. 그런 것에 지루하게 느껴져 결국 불태우는 방식으로 나아간 작품이다. 비닐 같은 오브제로 해야 속이 풀리는 그의 몸에서 밴 실험정신과 통한다.
여기서 태양의 죽음이란 기존의 구태의연한 회화 방식의 사형 언도를 뜻한다. 붓질회화의 이제 죽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획기적 예술에 필요하다고 젊은 시대의 발로다. 여기서 죽음이란 끝이 아니고 진정한 창조의 시발점을 상징한다. 일단 제목에서 성공이다.
김구림 화백의 사고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 것을 과감히 시도하는 전위에 늘 서 있었다. 참 회화가 되기 위해서 손과 붓이라는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본 것이다. 작가의 의도성과 인위성보다 무의식이라는 신대륙을 찾아가듯 우연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미술에서 더 넓은 세계를 열고자 회화에서 불가능에 도전하는 정신을 보였다.
이 작품의 작업 과정을 보면 캔버스가 아니고 하판에다가 비닐을 붙이고 거기에 불을 붙이고 어떤 곳은 타고 어떤 곳은 안 타기도 하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와중에 담요로 불은 컸다 살렸다 하면서 어떤 가능성에 도전한 실험 작품인 셈이다. 기발한 과정 예술이다. 1962년부터 김화백이 심혈을 기운인 오브제 아트의 연장이다.
여기서도 김구림 화백의 특징인 재미와 장난기의 정신이 담겨 있다. 이런 시도는 역시 김구림 화백의 신나는 세상에 대한 갈망과 철학적 사유체계 확장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여기서 불태움과 죽음은 역시 보다 진화된 예술에의 열망의 발로인 셈이다.
이런 자유분방함은 역시 그의 증조부 때부터 한의사를 한 넉넉한 집안 경제사정에 유래한 것이다. 김 화백의 부친도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마는 그런 성격의 어른으로, 당대 큰 백화점 사업을 하다가 재산을 날리기는 했지만, 그런데도 집에 유명 배우와 가수를 초대해 풍류를 즐기는 그런 삶의 방식이 나중에 김화백에게도 영향을 준 것 같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등 대부분 천재는 학교 안을 못 견뎌 튕겨 나왔다. 김구림 작가는 한국사회의 우상 격이 된 학력과 싸워온 드문 작가다. 3대가 한의학을 하셔서 부잣집 아이들이었고 형제들도 다 학교에서 수재였지만 김구림만은 대학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때려치우고 나온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뵈니 그게 허세가 아니고 성격이 원래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 안 하려고 하는 성미였다. 자녀들도 다 영국에서 최고 명문을 졸업했다. 아들은 영국의 MIT라고 하는 Imperial College 공대(미국보다 수업료가 싸서 선택)를 졸업하고, 따님은 골드스미스(퍼포먼스 전공)와 왕립 미술학교 대학원(순수미술전공) 졸업하고 지금 런던에서 작가로 활동 중이다.
김 화백은 전시에 1969년 서울에서 여성 모델의 몸에 그림을 그린 '보디 페인팅' 퍼포먼스를 담은 사진을 출품했다. 이외에도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니키드 생팔, 쿠사마 야요이, 신디 셔먼 등 세계 현대미술에 영향을 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13개 섹션에 나뉘어 전시된다. '퍼포먼스 이후의 회화(Painting after Performance)'라는 부제처럼 회화에 관한 연극적인 접근과 회화를 그림으로 보는 두 가지 상반된 접근을 보여주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2xz9Gayrpw
[2012년 테이트 모던 전시] 김구림 외 호크니, 잭슨 폴락 등등
1950년 이후의 퍼포먼스와 페인팅 간의 역동적 관계를 조명하다. 2012년 Tate Modern 전시회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 에서는 1950년 이후의 퍼포먼스와 페인팅 간의 역동적인 관계를 살펴본다. David Hockney , Jackson Pollock , Yves Klein 과 같은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큐레이터 캐서린 우드(Catherine Wood 퍼포먼스아트 전공)가 쇼를 소개하고 몇 가지 하이라이트를 선발했다.
[1] 작가: 김구림 1936 경북 상주 生 3대가 한의원을 하다.
[2] 수상: 2017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2014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 2006 이인성 미술상 수상, 1983 대한민국 무용제 무대미술상
[3] 저서(3권): I 판화 콜렉숀. 서문당. 동화집. II 서양판화가 100인과 판화감상. 미진사. III별하나 나 하나. 동화출판사.
[4]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영국),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 콜렉션. 구겐하임미술관 (미국), 리움미술관, 홋카이도근대미술관 (일본), 오사카예술센터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일본), 라이트콘 (프랑스), 이스라엘미술관 (예루살렘), 뉴욕시티은행 (미국), 한국 영상자료원, 서울대미술관, 대구 문화예술회관, 서울시립미술관, 토탈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아라리오미술관, 경기도미술관, 한국문예진흥원, 수원대학교미술관, 경주아사달조각공원, 일현미술관 외 다수.
김구림은 퍼포먼스라는 말이 없는 시대에 이벤트나 해트닝 같은 행위예술을 했다. 아래와 같은 오브제 개념미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주만물의 원소에 대해 과학자나 물리학자들의 생각이 다를 것이다. 작가는 생명의 근원(우주만물의 에너지 혹은 원소)으로 4가지 사물을 든다. 물-불-철-가스 1974
김구림은 퍼포먼스라는 말이 없는 시대에 이벤트나 해트닝 같은 행위예술을 했다. 아래와 같은 오브제 개념미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주만물의 원소에 대해 과학자나 물리학자들의 생각이 다를 것이다. 작가는 생명의 근원(우주만물의 에너지 혹은 원소)으로 4가지 사물을 든다. 물-불-철-가스 1974
김구림 개인전 《음과 양: YIN AND YANG》2021. 09. 17. (금)~2021. 10. 17. (일) 장소: 평창동 가나아트. 김구림 전시 특징은 늘 새롭다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9eAYlzhM-Ww
[1] 메타버스: 가상과 현실 상호작용 속 새 가치 창출하는 세상(universe)
[2] NFT: (가상자산) 소유권 인증서 만들어줌, 대체 불가능한 토큰, 프로그램 언어, 가상자산으로 등록 소유권 인정해 주는 것, 게임은 그냥 게임. 그러나 NFT 합쳐지면 총체적 기록 되면서 큰 돈 된다(?) 결재: 대체 코인으로 한다.
[3] 디지털 아트 다른 말로 NFT ART, 엄청난 예술세계
[9] [김구림의 삽화] 경향신문은 조선동아만큼 구독률이 오르지 않자 당대 인기리에 유행한 연재 소설 삽화가로 일단의 파격적 조치로 김구림을 택했다. 대성공을 거두다. 나중에 조선동아도 김구림 삽화를 요청했지만 거절하다. 나는 미술가이지 삽화가가 아니다라고 아래는 그때 삽화다
가을의 향기 소리와 색채로 넘치는 김구림 작가의 평창동 자택 김병기 화백도 여기에 살았다고
김구림 평창동 자택 울긋불긋한 가을의 정취가 물들다. 이 언덕으로 작품이 올라가고 내려간다고
김구림 선생님 뒷마당 작업장으로도 쓰인다고. 여기에 닭은 직접 키워 자녀들에게 닭에서 알이 나오고 그것이 어떻게 식탁에 올라오는 지 현장학습의 장이기도 했단다. 현재는 1층과 지하만 사용 2층 3층은 주인이 때로 있다고
<70년대 한국미술계 제4지대 등 당대에는 수용하기 힘든 미술을 하다고 주변에 방해와 경찰 등의 방해서 포기하고 한국에서 튕겨나가 일본은 어떤가 해서 한국을 벗어나게 된다 그때만 해도 일본은 우리보다는 훨씬 선진국이었다라고> 김구림은 당시 버려진 타임지 라이프지를 더무리 집에 가지고와 작업을 시작하다. 정보와 이미지가 턱없이 부족한 시대 그는 마치 낯설 별에서 온 사람처럼 시대미술의 틀을 박차고 나와 전위적 실험적 미술을 시도하다 그러나 도무지 한국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을 떠나고 초등3학년때 일제시대가 일본에 가서 언어소통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그의 일본어는 주변 일본인에게 일본사람으로 통할 정도였다 <아래시립사진>
김구림 작가 1981년에는 직접 <구림판화공방>도 운영하셨군요. 아래는 판화작업을 하는 모습 1981년
<테이트 컬렉션 한국 작가 작품> 한편, 현재 웹사이트에 공개된 자료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테이트 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된 한국 현대 미술가들은 백남준(1932~2006), 이승택(1932~), 김구림(1936~), 이우환(1936~), 윤석남(1939~), 이건용(1942~), 서도호(1962~), 이불(1964~), 구정아(1967~), 양혜규(1971~), 김성환(1975~), 문경원∙전준호(문경원, 전준호, 1999년 결성), 장영혜 중공업(장영혜, 마크 보주, 1999년 결성)이다. 작고한 백남준을 제외하면 1930년대생부터 1970년대생까지 여러 세대의 생존 작가들이 테이트의 한국 현대미술 컬렉션을 이룬다. 개별 작품의 수로 보았을 때는 백남준의 작업이 총 17점으로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다. 이는 다른 12명/팀의 작가들의 총컬렉션과 유사한 수치로, 한국미술 소장품의 약 50%에 달하는 비율이다. 또한 소장 작가 및 작품의 절대적인 수는 영국, 인도 등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적은 편이나,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과거와 동시대가 나름대로 얽혀 있는 흔적으로서 존재한다.
김구림 독일 뮌헨 하우스쿤스트 전시
백남준의 전화아트(1969년 시카고 현대미술관에서)는 SNS 아트로 발전하고 김구림은 한국에서는 1969년 처음으로 <매스미디어의 유물>이라는 제목이 붙은 메일아트(주제 삶의 우연성 거기서 맛보는 재미)를 시도하다. 좀 더 색다른 퍼포먼스를 하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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