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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크갤러리] 정소연 전 '지각의 공간, 인식의 장소'

[Nook gallery 누크갤러리] 전시제목: 지각의 공간, 인식의 장소 전시기간: 2021 년 8 월 5 일 – 8월 28일 참여작가: 정소연 전시장소: 누크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평창 34 길 8-3 (03004) ) 일, 월: 휴관

2021년 8월 5일부터 8월 28일까지 정소연 개인전 <지각의 공간, 인식의 장소>를 개최한다. 전시의 제목은 ‘지각의 공간, 인식의 장소’다. 이는 ‘지각의 장소, 인식의 공간’에 대한 반어법이자 장소와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작가의 역설적 의지를 담고 있다. 정소연은 장소와 공간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역전시킨다.

Post-Neverland 5, Diameter 120 cm, Oil on Canvas, 2015

이번 전시는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방에는 “포스트 네버랜드(post neverland)” 시리즈 페인팅이, 두 번째 방에는 “벽지그림”과 “벽지공간” 작품들이 전시된다. “포스트 네버랜드” 시리즈는 식물의 ‘개념’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이상적인 ‘형태’, 즉 현실이 아닌 이데아를 제시하는 식물도감의 도판들을 저본(底本)으로 삼아 그린 그림들이다. 과장한 곡률의 왜곡이 정지 영상인 페인팅 작업 속에서도 동영상적인 지각의 세계를 이끌어 내며 공간으로 가려던 시선을 장소로 되돌린다.

“벽지그림”과 “벽지공간”은 이중의 변환이 따른다. 그 이중의 변환은 건축 내부를 벽지라는 내피를 통해 평면화할 때 장소에서 공간으로 환원되고, 그리고 평면으로 다시 입체를 만들 때 공간에서 장소로 복원되는 방식을 택한다. “벽지공간”은 평면작업을 입체작업으로 만든 것이다. 평면으로 펼쳐졌던 건물의 내부는 입체로 묶어지면서 외부로 역전되어 안팎이 뒤집혀지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의 상태가 된다. 벽지공간 작품 안에는 하나의 조형물이 장소와 공간을 번갈아 거쳐 가면서 변성되어가는 흔적들이 역력하다. 정소연의 작업들은 장소가 공간을 보듬고 공간이 장소를 포섭하는 등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을 작품으로 연출하고 있다.

[전시글]지각의 공간, 인식의 장소 Space of Perception, Place of Recognition - 황인(Hwanng, In 미술평론가)

정소연은 아티스트이자 공학자다. 아트와 공학은 원래 한 몸이었지만 각각 다른 영역으로 분화되었다가 최근에 와서 다시 합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여정에 정소연의 작업이 동참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nature)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움(natural) 속에서 살아간다. 자연(nature)에 인공(artificial)을 더하면 자연스러움(natural)이 형성된다. 아트(art 인공)는 문화를 향한 특별한 발명품 이전에 인간의 생존을 위한 불가결의 조건이다.

라틴어 ’아트‘의 조어(祖語)는 그리스어 ’테크네‘다. 오늘날은 예술(아트)과 기술(테크네)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는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용(有用) 혹은 무용(無用)에 따라서 오늘날의 기술 혹은 예술이란 개념으로 분화되었다. 무용의 테크네는 아트가 되었다면 유용의 아트는 테크네가 된 형국이다.

최근에는 무용의 예술과 유용의 기술이 다시 합쳐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술이 곧 기술이었던 시대에는 예술과 기술은 공통적으로 신체를 출발점으로 하여 신체의 연장 혹은 증강을 도모했다. 미술은 일찍부터 신체로부터 독립하려는 시각과 그 시각의 극단인 소실점을 중간기착지로 삼아 시각 너머의 정신적인 영역으로 도전했으나 여전히 지각(perception)의 세계를 떠나지 못했다. 한편 기술을 기반으로 발전한 근대 이후의 공학은 신체가 지각하는 세계를 넘어서서 인식(recognition)을 기반으로 하는 수학의 세계에 그 터전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무용(無用)의 예술로부터도 멀어졌다. 신체와 함께 하는 지각은 장소(place)를, 신체를 떠난 인식은 공간(space)를 지향한다. 장소에서 지각된 사물과 사태는 환원 과정을 거쳐 인식의 공간에서 수학적 질서로 재편성될 수가 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지각의 공간, 인식의 장소’다. 이는 ‘지각의 장소, 인식의 공간’에 대한 반어법이자 장소와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작가의 역설적 의지를 담고 있다. 정소연은 장소와 공간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역전시킨다. 그녀는 공학자이면서 아티스트이고 아티스트이면서 공학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공간의 세계에서 장소를 끄집어내고 장소의 영역에서 공간을 추출해내거나 심지어 장소와 공간이 혼재하는 실험적 양상까지 시도해 보려 한다.

공간은 장소의 무한한 확장이 아니다. 공간은 신체의 지각을 일체 끄고서 심상의 깊은 곳에서 내관의 불빛을 켰을 때 비로소 인식체계 안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광대무변의 세계다. 지각으로 받아들인 장소 속의 복잡한 사물과 사태가 공간으로 이전하면 일체의 흥분이 다 사라진 냉랭한 수학적 질서로 재편된다. 장소와 공간을 넘나든다 함은 장소에서 발생한 사태를 수학적 질서로 재편했다가 다시 그 질서를 지각적인 장소의 세계로 되돌린다 함을 의미한다. 아티스트의 지각능력과 공학자의 인식능력이 번갈아 동원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번 전시는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방에서는 포스트 네버랜드(post neverland) 시리즈 페인팅이 두 번째 방에서는 벽지그림과 벽지공간 작품들이 전시된다.

포스트 네버랜드 시리즈, 그리고 이 시리즈의 텍스트인 네버랜드 시리즈는 식물도감의 도판들을 저본(底本)으로 삼아 그린 그림들이다. 식물도감 속의 도판은 실재하는 식물을 그대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도판은 그 식물의 정연한 질서와 건강함을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제시한다. 그 식물의 ‘개념’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이상적인 ‘형태’, 즉 현실이 아닌 이데아를 도판은 제시한다.

예컨대 그 식물을 장미라고 하자. 장미의 잎과 가시의 형태, 꽃잎의 수와 형태 그리고 이들의 가장 전형적인 색채 등이 조합된, 조금의 결손이나 과잉도 없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장미가 도판에서 구현되고 있다. 도판 속의 장미는 우리들의 지각이 포착할 수 있는, 혹은 누군가가 보았던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장미(a rose)가 아니다. 너와 나, 우리들 공중(public)이 함께 떠올리는 모습의 그 장미(the rose)를 넘어서서 장미라는 개념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이데아로서의 장미(rose)다.

도판을 저본으로 하여 출발한 장미를 비롯한 여러 꽃과 새가 등장하는 화면은 반듯하거나 균질하지가 않다. 하나의 페인팅 작품 안에 곡률이 서로 다른 화면들이 뒤섞여 어지럽게 배치되어 있다. 감상자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 혼란스러움이 주는 묘한 리얼리티가 있다. 도판이 제시했던 이데아로서의 꽃과 새는 온데 간데 없고 현실 속의 생생한 날 것의 자연(nature)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일상 속에서 사물과 우리의 만남은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뇌 속에는 신체에 가해지는 중력(gravity)을 근거로 한 가상의 수직선과 수평선이 내장되어 있다. 시지각이 받아들인 사물들의 혼란스런 형태와 배치는 뇌 속의 가상적인 수직 수평의 질서 속에서 반듯하게 재배치되며 안정을 찾는다. 포스트 네버랜드 페인팅은 자연의 양상이 뇌 속의 질서로 재편되기 직전의 단계에서 실시간으로 전개되고 있는, 시각적으로 비뚤어졌거나 중력이 기울어진 감각의 상태를 울퉁불퉁한 곡률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포스트 네버랜드 시리즈 그림은 동영상을 방불케 한다. 작가가 과장한 곡률의 왜곡이 정지영상 속에서도 동영상적인 감각의 흐름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동영상에서만 동원되는 신체의 감각기능이 정지영상인 포스트 네버랜드 페인팅 작품 앞에서도 동원된다.

현실 속에는 모든 사태가 동영상으로 존재한다. 사물이 움직이든 내가 움직이든 모두 동영상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 이를 정지영상으로 보정하여 입력한다. 그 편이 심리적으로 훨씬 더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동영상을 정지영상으로 압축하여 표현해야 하는 페인팅은 이 보정작업의 정도가 심하다. 인류는 이런 작업을 수천년, 수만년이나 해왔다. 입체를 평면이라는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장소에서 공간으로 사물을 재배치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현실 속에서 평면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입체를 평면으로 옮기는 일, 장소의 사태를 공간의 질서로 배치하기 위해서는 지각의 체계를 인식의 체계로 바꾸는 환원적인 작업이 필수적이다.

인류가 공간을 발명하지 못했으면 눈 앞에 펼쳐진 사물과 사태는 마냥 동영상의 상태인 채 움직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과잉의 엔트로피를 요구하는 일이다. 장소 속의 사물과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일단 정지영상으로 압축한 다음 평면공간에 재배치한 상태에서 응시하고 관조해야 한다.

벽지 공간 Wallpaper Space 3, 40 x 24 x 24 cm, Acrylic on Wood, 2020

서양미술의 경우 캔버스 자체가 개념으로서의 평면공간이라는 지위를 얻기 전까지는 창문이 장소적 사태를 공간적 질서로 이행케 하는 중간적 역할을 대행했다. 주체, 창문, 대상, 그리고 그 뒤로 소실점이 한 축을 이루는 시점의 구조가 이루어지는 셈인데, 장소 안의 이 모든 질서가 소실점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적 균질공간에 포섭된다는 걸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소실점 너머의 균질공간이, 혹은 창문이라는 평면에 투사된 지각적인 평면을 향해 주체와 대상이 하나의 축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물과 관찰자 모두가 정지되어 있다는 묵계가 요구된다.

정소연은 미술이 오랫동안 지켜온 이 묵계를 깨트렸다. 포스트 네버랜드는 의도적으로 곡률을 과장했다. 울퉁불퉁한 곡률들의 조합을 통해 거꾸로 정지영상에서 동영상을 끄집어내었다. 정지영상인 식물도감의 도판 자체가 처음부터 현실 속에는 실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상태를 그린 것이다. 도판 속의 식물들을 그림으로 구현할 때 주체, 창문, 대상(식물), 소실점으로 이어지는 배치의 축을 기어코 깨트림으로써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건 소실점과 그 너머의 공간을 향해 배치의 축이 진행되어가는 과정에서 점점 희박해져 갔던 장소성의 과감한 복구가 아닌가 한다.

개념을 모아 만들어진 이상적인 형상은 현실 속의 울퉁불퉁한 실재로 복귀했다. 공간으로 가려던 시선은 장소로 되돌아왔다. 꽃은 막 피어나고 새는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다. 장소성을 드러냄으로써 사건성을 도출해내고 불규칙한 곡률의 울퉁불퉁한 화면은 시선의 멈춤을 허용치 않음으로써 동영상적인 긴장감을 느끼도록 했다.

정소연은 비디오 작가로서도 훌륭한 경력을 갖고 있다. 비디오로 동영상을 만드는 건 상식이다. 정지영상인 페인팅 작업으로 동영상적인 지각의 세계를 이끌어 내는 게 포스트 네버랜드 시리즈의 본령이다. 이런 작업은 장소와 공간, 지각과 인식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사물과 사태를 수학적 질서의 공간 속에 재배치해야만 성립되는 공학과 사물과 사태를 온몸이 동원된 섬세한 지각으로 감지해야만 구현되는 아트를 정소연이 모두 섭렵했다는 점이 이런 작업을 가능케 했다.

두 번째 방은 벽지그림과 벽지공간의 방이다. 벽지는 패턴화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배열시켜 만들어진다. 벽지는 건물의 내피다. 건물의 형태 및 구조와 일체를 이룬다. 지난번 전시 ‘면벽수행’에서 보여준 벽지그림은 반듯한 큰 화면 안에 시점의 축이 비뚤어진 작은 화면을 삽입한 작품이다. 이번에는 작품들이 살짝 비틀어져서 전시된다. 큰 화면은 비뚤하게 보이고 작은 화면은 바로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작품을 똑바로가 아니라 살짝 옆으로 보는 셈이 된다. 이는 병풍 그림을 감상하는 방식과 흡사하다. 전통적인 서양화가 주체, 창문, 대상, 소실점이 하나의 축을 이루고 여기에다 감상자의 시선마저 그 축과 일치해야 한다면 전통적인 동양화의 산수화는 그 축의 배치가 직렬이 아닌 병렬형태다. 동양화에서는 주체에서 소실점까지 일직선상으로 연결되는 시점의 축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그렇지만 그림을 보는 방식 또한 병풍 그림처럼 정면이 아닌 약간 측면에서 시점을 취하기도 한다.

주체, 창문, 대상, 소실점, 감상자가 일직선의 축을 이루는 미술에서는 중심시(foveal vision)에 반응하는 추상체 수용기(cone receptor) 세포들이 동원된다. 이 세포들은 분포범위가 좁은데 망막의 중앙에 집중되어 있다. 주로 색채의 구별과 함께 페인팅과 같은 정지영상의 파악에 동원된다. 그러나 상기한 일직선상의 축 바깥의 상황을 지각할 때는 주변시(peripheral vision)에 반응하는 간상체 수용기(rod receptor) 세포들이 동원된다. 이 세포들은 망막의 주변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고감도의 흑백필름처럼 어둠 속에서 사물을 흑백으로 인식하는데 동영상적인 사건과 상황의 변화를 감지하는 역할을 한다. 시야를 넓혀 돌발적인 사건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만큼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포다. 그림이든 사물이든 정면이 아니라 옆으로 볼 때는 추상체 수용기 세포보다는 간상체 수용기 세포가 더 적극적으로 동원된다. 이 경우 정지영상의 그림에서도 동영상적인 사건성의 감각이 유발될 수가 있다. 식물도감의 도판을 저본으로 한 그림에서 불규칙한 곡률을 조합함으로써 동영상적인 감각을 유도했던 작가의 의도가 여기서는 관람자의 시점의 축을 무너트리는 방식으로 실험되고 있다.

벽지공간은 평면작업을 입체작업으로 만든 것이다. 그 평면작업은 실재하는 건축물의 내부를 벽지라는 내피를 통해 평면적으로 펼친 것이다. 입체인 내부공간에 내피처럼 부착된 줄무늬 벽지를 건축구조를 평면으로 환원하여 설계하는 방식 그대로 평면화하였다. 이번에는 그 평면을 다시 입체로 만들었다. 이 작업에는 이중의 변환이 따른다. 그 이중의 변환은 건축내부를 평면화할 때 장소에서 공간으로 환원되고, 그리고 평면으로 다시 입체를 만들 때 공간에서 장소로 복원되는 방식을 택한다.

건축이란 행위는 장소에서 공간을 발견하고 이 공간을 다시 장소로 구현하는 일이다. 물론 시작의 장소와 건축적 과정을 거친 결과의 장소는 전혀 양상을 달리 한다. 정소연의 벽지공간 작업이 딱 그러하다. 장소 속의 입체를 공간 속의 평면(설계도)으로 펼치는 데에는 치밀한 수학적 작업이 요구된다. 수학적인 질서로 재배치된 그 평면을 이번에는 육면체의 입체로 묶는 작업을 한다. 건축으로 치자면 실제의 건물로 시공하는 일이 된다.

이전 작업에서 평면으로 펼쳐졌던 건물의 내부는 입체로 묶어지면서 외부로 역전된다. 내부가 외부로 드러나며 안팎이 뒤집혀지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의 상태가 된다. 벽지공간이라고 이름하였으되 그 결과물은 사실 벽지장소가 될 수도 있다. 애초에는 장소였다가 평면의 공간으로 갔다가 다시 장소로 돌아왔으니 벽지공간 작품 안에는 하나의 조형물이 장소와 공간을 번갈아 거쳐 가면서 변성되어가는 흔적들이 역력하다. 장소가 공간을 보듬고 공간이 장소를 포섭하는 등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을 작품으로 연출하고 있다.

장소 속의 실제건물이 평면공간 속의 이데아로 펼쳐졌다가 다시 실재인 입체로 묶어지면서, 실재도 이데아도 아닌, 완전한 입체도 완전한 평면도 아닌, 조각도 그림도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공간-장소가 구현되고 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작업이다. 벽지공간 작품들의 바닥에는 기하학적 구조의 얇은 나무틀이 놓인다. 이는 장소와 사건성 등을 모두 포섭하는 광대무변의 공간을 상징하는 최소한의 기호라고 볼 수가 있다.

정소연의 작업은 유용의 공학이 이룩한 인식체계라는 성과와 무용의 예술이 쌓아온 지각체계의 경계를 넘나든다. 인류가 최초로 자연에 인공을 추가했을 때, 처음에는 새롭고 낯설었지만 결국은 자연스러움이라는 최적의 생태조건을 만든 것처럼, 정소연은 유용의 공학적 성과를 무용의 예술로, 장소를 공간으로, 공간을 장소로 끌어들여 이제껏 알던 미술과는 또 다른 새로운 미술을 향한 행보를 이끌고 있다. 정소연의 특장은 자신의 작업들을 텍스트로 삼아 이를 계속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아가는 데에 있다. 새롭고 낯선 깨침은 창조의 큰 기쁨으로 이어질 것이다.

[작가약력] 정소연 Soyeon Jeong 鄭素姸(1967 ,서울생) 학력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공학과 예술공학전공 박사 (Ph. D.) 뉴욕 공과 대학 (New York Institute of Technology) 대학원 Communication Arts 전공 (New York, USA) 석사 (M.A)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대학원 서양화과 석사 (M.F.A.)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학사 (B.F.A.) 전시 경력 개인전 13회 - 해외(미국) 3회, 국내 10회. 2019 면벽수행 (이화익갤러리, 서울) 2016어떤 풍경 (이화익 갤러리, 서울) 2014 Neverland (이화익 갤러리, 서울) 2011 홀마크 프로젝트 (이화익 갤러리, 서울) 2007 CTRL TIME: SoYoun Jeong (Amelie A. Wallace Gallery, SUNY College at Old Westbury, New York) 2005 “진짜 더 잼있는 전시” (쌈지 스페이스, 서울) 등 13회 주요 기획 단체전 -국내외180여 회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 중국 상하이현대미술관, 싱가폴 미술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아트 갤러리, 호주 골드코스트 아트센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움(LeeUm)삼성미술관,영은미술관, 성곡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아트선재센터, 코리아나미술관, 토탈미술관, 가나아트센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문예진흥원미술관, 포스코미술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대구미술관, 경북대미술관, 우리옛돌박물관, 양평군립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 기획전 참가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경기도미술관 등 주요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