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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강의록

[백남준과 30세기] [목포대II] 'TV가 INTERNET 되다'

[결론] 닫힌 코로나시대, 열린 줌-유튜브 시대 열다. 우리 손엔 다 백남준 있다.

<전반부> [백남준&첫전시] 1963년 부퍼탈, 파르나스갤러리, 첫 전시 

그러면 백남준 첫 전시 7년 준비하는 과정도 좀 알아봐야겠죠. 동경대학 유학 후 어떻게 독일에 건너가 누구의 영향을 받고 어떤 활동을 하다가 첫 전시를 열게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첫 전시의 개념을 확실하게 들어온다.
테이트 모든 백남준 인터넷 예언하다 https://seulsong.tistory.com/1157

 

[백남준] 5가지 미래 예언, -테이트모던 평가

[테이트모던 백남준] 테이트 모던이 본 백남준의 5가지 미래 예언 1. 1974년 인터넷을 예언했다. 2. 비디오아트를 예언하다. 3. 환경위기를 예언했다(TV정원이 그런 주제의 작품) 4. Global Media를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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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텃세다. 보편성이 아니다 -백남준

1963년 백남준 첫 전시 장면. 피아노를 통섭개념으로 재해석하다

He was born 1932 Seoul. He received a BA in aesthetics from the University of Tokyo in 1956 where he also studied music and ar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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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1956년> 이전 첫 전시 이전 첫 사랑. 여기 이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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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백남준의 첫사랑' 백남준은 1952년 동경(도쿄) 대 문과부에 입학했다. 법대 상대 2년 후 미학 및 예술사를 전공을 정하고, 주로 작곡과 음악사를 공부했다. 1953년 백남준은 일본에서 같은 동경대 불문과 학생 시브사와 미치코(步澤道子)와 첫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똑똑하고 인형처럼 예쁜 여학생이었다. 수줍음을 잘 타는 백남준은 그녀 앞에 서면 얼굴을 붉어졌고 그녀를 만나고 싶어 끙끙 앓았다. 어느 날 백남준 그녀에게 대학생으로는 살 수 없는 엄청나게 비싼 부다페스트 현악 4중주가 연주하는 바르토크 첼로 연주회 티켓을 건넨다.

1951년 백남준 모습 동경대 들어가기전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었고 너무 비싼 표라 마음에 걸려 돌려주려고 했다. 그녀가 백남준의 주소를 알아내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백남준이 사는 곳은 동경에서도 최고급 주택가가 모여있는 부촌이라 처음에는 크게 당황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백남준이 나왔고 부잣집 도련님답지 않게 옷차림은 허름했다고 한다. 

그녀가 연주회에 못 간다고 하니까 백남준이 함께 가면 안 되겠냐고 애원하다시피 해 겨우 같이 가게 된다. 차도 같이 마시며 데이트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 애인에게 돌아갔다. 백남준의 애틋한 첫사랑은 그렇게 끝나고 만다. 초대 백남준 아트센터 이영철 관장이 2008년 일본 출장을 갔다가 그녀를 만났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 스마트한 미인이라고 기자와 인터뷰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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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956년> 뮌헨대 입학 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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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 졸업 논문도 '쇤베르크 연구'였다. 동경대를 졸업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던 백남준은 파리로 유학가려 했으나 부친반대로 방향을 틀어 독일 유학을 결심했다 백남준 1956년 홍콩과 캘커타와 카이로를 경유해 뮌헨에 도착하다.

일본 동경대 마치고 1956년 뮌헨대 입학 허가를 받고 첫해 음악사 등을 공부했으나 학교 분위기가 너무 보수적이라 다음 해 더 자유로운 프라이부르크 음대로 옮겼다. 그리고 1957년부터는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매년 여름학기에 열리는 '젊은 작곡가를 위한 음악제'에도 참석했다. 그 후 백남준은 쾰른대 철학과에 입학해 니체와 헤겔 등을 공부했다.

백남준 처음 유학한 뮌헨대학 예술사학과 방문 2019

<그러나 뮌헨 대학 1년(1956년-1957년) 다니고 등교를 거부하다 너무 보수적>1956년 뮌헨대 9월 학기에 입학 허가를 받고 첫해 음악사 등을 공부했으나 제가 이 대학을 작년에 갔어요 노벨상 42개 받는 명문대학교 분위기가 너무 보수적이라 탈출 다음 해 더 자유로운 프라이부르크(자유의 도시) 음대로 옮겼다. 그리고 1957년부터는 독일 다름슈타트(방문)에서 매년 여름에 '젊은 작곡가를 위한 음악제'가 열리다 여기에 참가했다. 그 후 백남준은 쾰른대 철학과에 입학해 니체와 헤겔 등을 공부했다.

1956.9-1957.8 백남준 뮈헨에서 공부한 내용

뮌헨 대 백남준 지도교수 게오르기야데스(Thrasybulus Georgiades)는 그는 20 세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학자이자 음악이론가 중 한 명 1930년대 비잔틴 민속 음악과 전례 음악 연구> 논문으로 유명하다. After graduating, he studied for a year with composer  at the University of Munich and for two years with composer at the International Music College in Freiburg. 

백남준은 당시 기이한 현상이었다

1957년 1) 푸라이부르크국제대학교로 옮김 2) 지도교수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는 백남준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다. 도끼 일화 프라이부르크 지도교수 포르트너를 물리치다 토끼 사건, 백남준 서구미술판에서 기이한(extraordinary) 현상이었다

그래서 쾰른 방송국에 일하도록 추천 당시 쾰른 첨단의 전위음악이 리드하고 있었다 전자음악을 창시한 슈톡하우젠 만났고 그리고 백남준은 일본 잡지 간행하는 <현대음악> 독일 해외통신원 기자도 했다.. 백남준 첫 전시를 7년간 준비 이를 갈면서... 3년간 비밀방, 전자공학 독학 고3처럼, 전자책만 읽다. 베를린 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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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1957년> 신음악 국제 여름 캠프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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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슈타트에서 열린 신음악 국제 여름 캠프

다름슈타트에서 신음악 국제 여름 캠프 참가1957년 독일 쾰른에서 백남준<1957년> He attended the International Summer Courses for New Music in Darmstadt in 1957, when he met Karlheinz Stockhausen, and 

<백남준 잘 요약된 삶의 궤적 찾기 쉽지 않다. 여기는 2000년 백남준 구겐하임 전시 때의 자료. 전반기 정리 잘 했네요. 후반기는 흐지부지!> 독일에 유학한 백남준 처음에는 독일 명문 뮌헨 대학(백남준 지도교수이자 음악학자인 T. 게오르기야데스(Thrasybulos Georgiades) 이름도 나오네요) 다니다가 너무 보수적이라고 생각해 포기하고 프라이부르크 음대(at the International Music College in Freiburg)로 학교를 옮겼다> 1957년 다름슈타트 현대음악 여름 강좌에 참석 '슈톡하우젠'을 만나다. 프라이부르트 학교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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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1958년> '존 케이지' 처음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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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존 케이지'가 주역코드를 보고 작곡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다

1958년 중요한 해 존 케이지 만났다. 주역 작곡

뮌헨(1년), 프라이부르크(2년) 그리고 쾰른대학에 입학하다. 슈톡하우젠(전자음악의 창시자) 더 가까이 지내다 In 1958, He met John Cage. Cage, and through him Marcel Duchamp, had a significant influence on Paik as he became a major force in the avant-garde through performances. 존 케이지 만나다 1958년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해 중 하나였다. 다름슈타트 열리는 여름 현대음악 강좌 참석 당시 강사였던 존 케이지를 만나다. 그의 생애 결정적 영향을 주다 주역으로 작곡, 소음 침묵도 음악이다.: 음악 범위를 확장하면 지평을 넓히다.

"(고급)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 마찬가지로 고급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 그 나라 땅의 크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급 정보와 폭넓은 지식으로 전 세계를 지배한다" 백남준은 '탈영토제국주의(여러 번 반복)'라고 한다. / "내가 정치가가 되었으면 벌써 감옥에 갔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가 되었다" -백남준 내가 유명인(세계적 일류) 되면 그때 정치적 발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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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1959년> 존 케이지 오마주 1차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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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사람을 얼떨떨하게 하는 것이라고. 당시 독일예술가를 그렇게 만들었다

<1959년> 존 케이지 오마주 전시를 열다. 장소는 독일예술계의 맨토인 '장-피에르 빌헤름'(2차대전 레지스탕스에 참가) 가 운영하는 갤러리 22였다. In Hommage a John Cage(1959), Paik employed audiotape and performance to attack traditional musical instrumentation and compositional practices, splicing together piano playing, screaming, bits of classical music, and sound effects. Realizing that taped sound was not enough, he decided to move into performance, first by introducing performative actions into his audio works.

시대 문명은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넘어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갔다. 유(조) 음악(harmony music)에서 무(조) 음악(a-music)[랜덤 음악]으로 넘어갔다. 1) 이원론(분석 논리)에서 일원론(융복합)으로 넘어갔다. 2) 서양(양)에서 동양)으로 넘어갔다. 3) 뒤샹에서 백남준으로 넘어갔다. 4) 고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기체로 넘어갔다. 여기에는 철학적, 미학적 테러리즘 작동했다. 1959년 <존 케이지를 위한 헌사 1탄> 전시, 그러나 존 케이지를 참석하지 않고 보이스는 멀리서 이걸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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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1960년> 크리스토를 만나다. 쾰른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 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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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존 케이지 2차 오마주전(쾰른에서) 그리고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 공연 중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다. 같은 해 크리스토를 만나다. 여기서 백남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다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다 1960년

백남준은 왜 존케이지를 좋아했나

-영원히 아이디어가 샘솟는 사람이다. -백남준 내 인생의 95% 영향을 준 사람. 쇤베르크 제1의 발명, 케이지 제2의 발명이다. 독일의 숨막히는 분위기에서 케이지를 만나 경쾌한 해방감을 느끼다. 나는 케이지를 통해 비로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도 예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백남준의 스승답게 예술가이면서 문화인류학자(핀란드 전통가옥과 똑같은 소나무로 만든 한옥처럼 못을 사용하지 않고 한옥을 특히 좋아한다)였고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가 2) 소음이나 침묵(1952년 8월29일 뉴욕 우드스탁 타운홀에서 공연된 <4분33초> 작곡)도 음악으로 보다 음악의 영역을 확장. 3) 백남준은 소년 시절부터 숸베르크에 심취했는데, 동경대 졸업논문도 쉔베르크 연구 자연스레 쇤베릌 제자인 존 케이지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중 1959년 독일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 여름학교에서 존 케이지의 연주를 처음 들은 백남준은 “마치 모래를 씹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회상하며 충격을 토로하다.


청중의 머리에 돌을 던지듯 아무런 장식 없는 음악은 처음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평소 “인생이 존 케이지와의 만남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로 케이지와의 만남이 아주 중시. 4) 존 케이지는 과학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바흐와 베토벤 음악을 피아노로 즐겨 연주했다. 그러나 고전음악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는데 지루함을 느낀 그는 앞에서 말한대로 아놀드 숸베르크의 제자로 입문, 전위음악작곡. 그리고 무엇보다 선불교(스즈키 다이세츠)고 힌두교 우연성에서 돌파구를 찾게 됐다. 특히 개념예술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을 좋아했다. -임영균 글을 참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남준의 멘토였던 존 케이지가 1992년 8월 12일 타계한다. 주변에서 백남준에게 그가 어떤 분이었냐고 궁금해하자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 사람으로, 난 독일의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케이지를 만나 경쾌한 해방감을 느끼며 숨 쉴 수 있었고 미국에도 예술이 있다는 걸 그를 통해서 알았다"라고 대답했다.

1960 악명 높은 파괴자 크리스토를 만나다

백남준, 자르기 천재 : 1960년 바우어마이스터 아틀리에에서 존 케이지에 보내는 헌사 2편(일면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 열다 그때 존 케이지 참석 백남준 그의 넥타이를 자르다(악명 높은 해프닝) 왜? 존 케이지, 여기서 유명한 대지 미술가 얼마 전 작고한 '크리스토'를 만나다. 백남준조차 초기 크리스트를 오해한 면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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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1961년> 백남준, 독일전위예술가 중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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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9살 본격 관객참여적 포퍼먼스 액션뮤직 본격 시작, 머리를 위한 선 1961년 이때 백남준 <머리를 위한 선>을 선보여 예술가 중에서, 플럭서스 안에서도 스타(총사령관)가 된다. 주변의 예술가들이 규합하다. 심지어 다들 가난해 백남준이 종종 식사비를 내기도 했다. 유학비 받던 시기이기에 액션뮤직 시작 '오리지날레' 머리 위한 선 공연 In 1961 Paik performed Simple, Zen for Head and Etude Platonique No. 3, in which he became a volatile figure, thrashing about in unexpected patterns and sudden movements to his signature soundtracks.

1961년 백남준 전자음악의 창시자 슈톡하우젠 만났다

[위사진] 1961년 쾰른에 갔다. 거기서 가 전자음악의 창시자 슈톡하우젠 만났다. 죽이 맞아(의기투합) 1961년 10월 26일 <ORIGINALE(괴짜들)> 퍼포먼스를 공동 기획했다. 관객 참여형 음악적 공연이었다. 백남준과 보이스의 첫 만남 I, 1961년 여름 뒤셀도르프, 백남준과 플럭서스의 관계 서양인들 기 죽이기 금강경, 

'사구게' 낭송하는 백남준 1961년 10월 26일부터 11월 6일 2주 정도 금감경을 인용하다

백남준 금강경 낭송

<금강경> '사구게'에 나오는 "모든 가시적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그걸 응시해야 하리(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같은 경구를 낭송하다

[위사진] 1961년 독일의 문화대통령 요제프 보이스은 백남준을 멀리서 보고 있었다.

1961년 전자음악의 창시작 슈톡하우젠 만났다고 했는데 그의 부인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만나다. <백남준 여성에게 인기가 높았다. 1961년 독일에서 만나 친하게 지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평이다> 백남준은 '플럭서스'와 1961년 '오리기날레' 공연 등에서 메타한 해프닝을 펼쳐 큰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고 싶다"며 전자매체를 활용한 실험예술을 꿈꾼다.

백남준은 60년대 초부터 전자음악을 소개한 쾰른 서독 방송(WDR)을 출입하면서 그런 경향을 보인다. 때론 베를린공대에서 강연도 들었고 위험천만한 1만 5천 볼트 전기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TV를 악기처럼 예술의 도구로 상상한 것이다.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 독일에서 백남준의 프리마 돈나,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그녀는 백남준아트센터에 초대를 받아 몇 번 한국에 왔었다. 그녀는 백남준이 독일 생활에 익숙하지 못할 때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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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1962년> 플럭서스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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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미술사에 중요한 해이다. 왜냐하면 플럭서스가 정식 출범했기 때문이다. In 1962 Paik participated in the Fluxus International Festival of the New Music in Weisbaden.

1963년 2월 2일-3일 다국적 다 장르적 국제 플럭서스 공연

백남준은 소위 문화 패거리 <플럭서스> 가입. <플럭서스 물이 흐른다(fluxus=flow) 뜻 표어는 고체 사회(hard-power)에서 액체사회(soft-power)로> 정신병자들 탈출했다 평가를 받았다 1961년 미국 출신 마치우나스 등이 합류로 미국 작가들 참여하다. 여기서 대통령이 3명이 나오다. 사실은 정치적이기도 하다.

체코 대통령: 하벨/리투아니아의 초대 대통령:란즈베르기스. 다국적 그리고 다장르적 모든 예술가 참여하다. 20세기 전반부 바우하우스 20세기 후반부 플럭서스 국제적 문화패 미술만 아니라 문학 등

1962년 6월 16일 1)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Neo-Dada in der Musik)' '머리를 위한 선' 선보이다.

1962년 6월 16일 1)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Neo-Dada in der Musik)' '머리를 위한 선' 선보이다.

 백남준 이 시기에 폭탄선언하다.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Yellow PERIL! C'est moi)라고 선언한다.

백남준 첫 전시가 열리기 1년 전 그가 만 30살인 1962년 백남준은 세계 미술판을 엎어버리겠다고 폭탄선언을 하다. 내가 문화 칭기즈칸이 되어 서양미술판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장담하다. 문화제왕으로서 포부를 밝히며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Yellow PERIL! C'est moi)라고 선언. 루이 14세가 한 '짐이 곧 국가다'를 패러디한 것이다. 자신의 출현을 13세기 초 몽골제국이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에 비유하며 유럽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1962년 플럭서스 공식 출범 1962년​  플럭서스 정식 창립하다

같은 해 여성회원인 <앨리슨 놀즈>를 위한 세레나데(Serenade fur Alison)가 있었다. 성희롱이 아니라 오히려 성 해방이 주제. 생리혈 소재로 한 생명의 잉태자인 여성에 대한 찬가다. 

Serenade fur Alison

생리혈 소재로 한 생명의 잉태자 찬가, 플럭서스은 한국의 안은미(백남준 상 수상)를 연상시킨다. 여성의 팬티를 10개 입고 그것을 하나씩 벗기 여성의 생리혈, 멘스(menses) 피가 묻은 것 여성의 위대한 멘스(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피)가 없으면 인류는 멸망 여성 찬가죠. ‘플럭서스(Fluxus)’ 반예술 반사회 무정부주의자와에 가깝다. 미술의 민주화에 기여하다 그리고 예술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다. 병자에 이 세상에 출몰했다는 등 미치광이 단체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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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1963년> 백남준 첫전시, 독일 7년만에 13대 실험적 TV로 '서양미술판'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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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서른, 첫 전시에서 서양미술판 다 쓸어버리겠다 '비디오 아트'로 선서구 중심 세계 미술,, 새판으로 갈아엎다. 다시 말해 '비디오아트'란 <동서문화의 차이를 최소화하는 세상> Paik's first exhibition, entitled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 in 1963 at Galerie Parnass at Wuppertal, launched his transition from composer and performance artist to the inventor of a new art form: an engagement with the material site of television as an instrument. In the exhibition, thirteen televisions lay on their backs and sides with their reception altered; for example, Zen for TV (1963) reduced the television picture to a horizontal line and Kuba TV (1963) shrank and expanded the image on the television set according to the changing volume.

이 포스터 만드는데 7년 걸린 셈이다

[01] 독일 부퍼탈 어떤 도시인가

산업도시 엥겔스(맑스의 평생 친구로 생활비를 대준 독일에서 최고 부잣집 아들)의 고향이고 유명한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고향이기도 하다. 백남준은 여기서 첫 전시에 그림이나 설치가 아니라 쌍두마차 즉 피아노와 TV로 그림처럼 이곳저곳에 설치했다 물론 거기에 퍼포먼스도 동반되었다.

[02]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SIGHTS & SOUNDS 개념

"백남준은 선의 철학을 괴벽스럽게 때로는 농담 투로 전자아트에 적용하기로 유명하다" -하버드 대학교 시각 예술과 교수, 데이빗 조슬릿(David Joselit) [평] 맞는 이야기다.

*백남준 첫 전시에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귀로 보고 눈으로 듣다> 개념을 적용했다. 음악을 미술로, 미술을 음악을 표현백남준 SIGHTS & SOUNDS 결합한 총체예술의 기념비적인 전시가 열린다/SFMOMA stages monumental nam june paik exhibit as a mesmerizing riot of sights + sounds 환상적인 광경 + 소리의 폭동으로 기념비적 백남준 전시 백남준 첫 전시, *귀로 '觀(보다)' 눈으로 '聽(듣다)': 선불교 개념] 

[03] 과격한 문화테러리스트 서양미술판 깨다

1963년 세계 예술계에 투하한 원자폭탄(?) 서구미술판에 큰 사기를 치다. 제로 포인트 전혀 새로운 미술 탄생시키다.

백남준 서양미술계에서 문화 깡패, 문화 테러리스트였다. 문화 테레리스트-전복자-우상파괴자(영원한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의 모습 보이다.

<1> 백남준 1994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소위 세계 일류(탈영토제국주의)가 되면 조국이고 뭐고 없다고"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이 멋지다.

[04] 음악과 미술을 뒤섞은 통합적 예술양식(Gesamtkunstwerk)

1. 1963년 백남준 첫 전시에서 보이스 때려 부순 피아노 독일에서도 비싼 <이바우> 그 깨져버린 피아노가 잔재를 버리지 않고 남겼다면 현대미술 경매에서 최고가를 쳤을 텐데 불행히도 그냥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다. <아래는 백남준의 글 보이스 폭스 중에서>

2. 나는 (첫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서) 전자와 물리 외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백남준. 백남준 워낙 독서광이라 첫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스스로 비밀 골방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들어가서는 다른 책은 전혀 읽지 않고 오직 전자공학과 물리학에 대한 책만 읽었다.

독일어판 백남준 책을 펼치니 아래 이런 내용이 있었다.

2017.05.23 베를린

1. Barbara Wien, "Jetzt ist: Utopie. Das ist wichtig" -N. J. Paik 지금이 유토피아다. 그게 중요하다. -백남준 2. 한국의 선(Zen)은 엄격한 일본과 다르게 보다 느슨하다. 여유롭다. <백남준은 독일어를 쓰다가 몇 마디는 영어를 섞어서 쓰기도 했다> Aber koreanische Zen hat keine japanische Scharfe gehabt, sondern der koreanische ist viel lockerer. So beyond oder before Scharfe, ja? -Nam June Paik -백남준. 3 Der meiste Koreanische Buddhismus ist Zen. 

2 예술, 사람을 얼떨떨하게 하는 것(예술 원리)">"전위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유명한 말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05] 예술은 사람을 얼떨떨하게 하는 것

<1> "관객하고 예술가(아티스트)하고 괴리(거리)를 더 좁히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의 진의(essence)'이고 '인생의 진의'가 아닌가?" -백남준 1995년 광주 비엔날레 인터뷰 중에서 [평] 백남준은 전시의 주인공을 작가가 아니고 관객으로 봤다. 그만큼 작가와 관객의 원활한 (쌍방) 소통을 가장 중요. 그는 문화 민주주의자였다.

<2> 백남준에게 피아노를 부수는 것은 일종의 수행이자 명상. 그런 행위를 하다가 인터넷 발상했다.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일종의 단[斷]의 철학(깨달음을 통해 기존의 모든 가치를 잘라내는 행위)이다> 시게코 여사와 인터뷰 중 "백남준은 샤머니즘 요소가 강했고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적인 것에도 심취했죠. 피아노를 부수는 행위가 그에게는 어떻게 보면 수행이나 명상이었을 거예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급진적 사고로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샀죠."

[06] 첫 전시에 소리 소문 없이 떨어뜨린 원자폭탄

<본론>을 들어가 1963년 백남준 첫 전시에 소리 소문 없이 떨어뜨린 원자폭탄, 60년 전 이야기인데 지금도 놀랍죠

1963년 바이올린 질질 끌고 다니기

백남준은 1963년에 그의 첫 전시에서 서양미술을 바닥부터 무너뜨리려고 그들의 성상을 파괴하고 그들이 믿는 서구적 우월주의나 과학주의라는 우상에 테러를 가한 (바이러스) '해커'였다. 백남준은 서양 예술가의 혼을 빼놓고 대혼란에 빠지게 하려고 '피드백'과 '랜덤 액세스'라는 기괴한 노이즈 방식을 도입했다.

동시에 백남준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미술로 음악을 하고 음악으로 미술을 하는)" 융합적 회통 사상을 첨단의 TV 전자 아트로 실현함으로써 세계 미술 혁명의 기린아가 되다. 백남준은 서양에 직접 가서 원자폭탄 떨어뜨리고 서양미술판을 제로 그라운드로 만들었다. 그 터전 위에 '비디오 아트'라는 서양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혀 새로운 예술의 신기원을 세웠다.

백남준 TV를 결국 30년(1963-1993)만에 인터넷으로 바꿔버렸다. 일방형 불통(먹통)의 상징인 'TV'를, 쌍방형 '소통'의 상징인 'INTERNET'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런 시공간을 초월해 경계가 없는 인터렉티브 한 방식의 소통을 통해 인류가 다 같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아름다운 세상(코뮌 공동체)에 대한 백남준식 유토피아를 구현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0gvgLEe0I8E&t=59s

부제가 추방

[07] 족보 없는 예술, 7년간 이를 악물고 준비?

유명한 말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 "난 당시 입시생처럼 전자공학과 물리학, TV 관련 책자만 봤다"라고 적혀 있다. 죽을 수도 있는 족보 없는 예술에 도전, 세계를 주도하는 서양미술판 떨어뜨릴 원자폭탄을 제조하고 있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영역에 도전하고 싶다면서 TV아트를 시작하다. 멀리 보다 백남준. 깊이 사유하다-푸코 전자 아트를 하기 위해서 비밀스럽게 공부방을 만들어 3년간 전자공학을 공부하다. 그리고 후에 유학비가 안 와 백남준의 독일 생활은 빈궁해졌다. 동경에서 가족과 함께 1년을 보냈기도 했다. 그런데 운 좋게 그때 미국인보다 트랜지스터 원리를 2년 앞서 발견한 전자공학자 '우치다 히데오'와 백남준과 함께 비디오 합성기를 발명한 '슈야 아베'를 만나 도움을 받는다.

이 괴상한 전시를 서구백인중심의 헤게모니를 흔드는 '빅뱅'이나 세계 미술계에 소리 소문 없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물론 그 방식은 비폭력적이다. 백남준의 이런저런 의도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완전범죄' 같다. 백남준도 "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 아트는5차원 사기다"라는 하지 않았던가.

이 괴상한 전시를 서구백인중심의 헤게모니를 흔드는 '빅뱅'이나 세계 미술계에 소리 소문 없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물론 그 방식은 비폭력적이다. 백남준의 이런저런 의도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완전범죄' 같다. 백남준도 "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 아트는 5차원 사기다"라는 하지 않았던가.

[08] 왜 추방? 총체예술 EXPEL 서양미술 '추방'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내건 건, 백남준이 셔먼 아티스트로서 한국의 터줏대감을 이곳에 모셔와 텃세 부리는 서양인의 기를 꺾고 같이 놀자고 한 것인가. 백남준은 대감놀이를 이쪽 신을 저쪽 신으로 보내 의견을 나누고 저쪽 신을 이쪽으로 초대해 융숭히 대접한 후 돌려보내는 소통의 장본인으로 봤다./ 백남준 첫 전시 소머리를 걸다/ 영국이 자랑하는 데미언 허스트도 백남준이 독일에서 연 첫 전시회에서 피가 흐르는 소머리를 작품으로 내놓은 대담함에서 영감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이동식 백남준문화재단 이사

엥겔스의 고향인 소도시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

1963년은 서양미술판에 원자폭탄이 투여되다 첫 번째 전시다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백남준은 그가 31살이 되는 1963년 7년간 준비한 첫 개인전을 엥겔스의 고향인 소도시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3월 11일부터 20일까지 열었다. 이 갤러리는 원래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을 대표하는 건축가 예를링의 비상업적 사무실이었다.

이 포스터 수많은 비밀로쌓여 있다. 16개의 개념 등장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전시 포스터 1963. 에릭 안테르시 컬렉션.

그가 만든 포스터는 영어, 독어, 프랑스어로 쓰여 있는데 16개 주제가 나온다. 지상천국을 연상케 하는 '성인을 위한 유치원'(1), 관념주의를 경고한 '이데아의 물신 세계'(2), 사물의 음향까지도 언급한 '소리 나는 오브제'(3), 선불교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선 수행을 위한 도구'(4), 토론 주제 같은 '비인과성과 원리로서 동시성'(15), 일상 속 축제를 강조하는 것 같은 '독일 바보학에 대한 연구'(16) 등이 그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포스터에서 대문자로 강조한 알파벳만 따오면 '추방(EXPEL)'이 되는데 그 뜻은 불분명하다. 냉전과 이념대결을 추방하자는 건지 아니면 서양미술을 추방한다는 뜻인지 보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건 백남준의 첫 전시 전단지를 1960년 4월에 발행된 <경향신문> 위에 인쇄했다는 점이다. 1962년 10월 독일에선 나중에 무죄로 석방됐지만 <슈피겔지> 편집국장이 체포되는 언론탄압이 있었다. 이런저런 사건과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이 부분 아직 미개척>

백남준 첫 전시 포스터에 16가지 중요한 주제가 나온다. 그중 하나인 <아이디어에 대한 물신주의> 백남준의 평생 과제였다 즉 관념(주의)을 깨부수는 작업을 한 것이다. 지배담론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인간성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경고다 이밖에는 이 포스터에는 16가지 테마다 나온다.

***이 밖에도 <소리 나는 오브제(Objets Sonores)>라는 테마도 있다. 이것은 물건에서 나는 소리도 음악으로 보는 것이다 즉 사운드 아트를 뜻한다. 혹은 무계 음악 기존의 음악의 위계를 해체시키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잉태하고 있음을 암시한 말이다.

백남준이 29살인 1961년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 공연에 참가했을 때 모습.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백남준 이론가 헤르조겐라트 박사 강연 때 찍은 사진 백남준 첫 전시 포스터에 백남준 예술의 중요한 16가지 테마(핵심 개념)가 나온다. 아직 전혀 연구되고 있지 않다. 그런데 김남수 선생(백남준 연구가) 지난번 백남준 전시(세종문화회관) 때 해설을 붙였다. 대단한 일이다.***

[09] 왜 음악의 전시? -소리(sound)=시각(sight) 통합

바람을 보고, 비를 듣는다. 즉 <觀風聽雨> 표현이 있듯이 말이다.

[백남준 첫 전시,귀로 '觀(보다)' 눈으로 '聽(듣다)' : 선불교 개념] "백남준은 선(ZEN) 철학을 괴벽스럽게 때로는 농담 투로 전자아트에 적용하기로 유명하다" -하버드 대 시각예술과 교수, 데이빗 조슬릿(David Joselit)

1963년 백남준의 첫 전시(독일 부퍼탈) <음악의 전시>란 뭔가? 음악으로 미술을 보여주는 전시? 아주 쉽게 말하면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는 음악,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음악

그의 첫 전시 제목이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인 건 음악전공자인 그이기에 자연스럽긴 해도 전시장에 피아노와 함께 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 아트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TV 위에 전자붓으로 추상화를 그리다. 혁명이다.

1963년 전시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쿠바TV를 보고 있는 백남준과 칼 오토 괴츠. 미국의 백남준 전문가 존 핸하르트 큐레이터는 비디오아트를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사진술의 발견과 버금가는 미술사의 혁명"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 현대 서양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오브제 아트를 백남준은 피아노 등에까지 확대하고 그 범위를 넓혀나간다. 또한 침묵이나 제거할 수 없는 잡음인 '화이트 노이즈'까지도 높은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할 때'라는 타이틀로, 백남준 전문가들 인터뷰에 이어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시대별로 소개한다. - 기자 말

그의 전시개념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새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본다"는 데서 왔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리(sound)가 시각(sight)이 되는 '사운드 아트'다. 기존의 시각 중심을 넘어 오감이 총동원된 즐거운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실험예술이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이런 개념은 다원예술과도 통한다.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쿠바 TV를 보고 있는 백남준과 칼 오토 괴츠. 미국의 백남준 전문가 존 핸하르트 큐레이터는 비디오 아트를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사진술의 발견과 버금가는 미술사의 혁명"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

백남준은 그가 31살이 되는 1963년 7년간 준비한 첫 개인전을 엥겔스의 고향인 소도시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3월 11일부터 20일까지 열었다. 이 갤러리는 원래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을 대표하는 건축가 예를링의 비상업적 사무실이었/그의 첫 전시 제목이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인 건 음악전공자인 그이기에 자연스럽긴 해도 전시장에 피아노와 함께 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10] 1963년 첫 전시장면 기괴함(Bizarre)

그의 첫 전시에는 각기 다른 4대의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그 모양새가 각각이다. 피아노에 브래지어를 입혀 여자로 의인화시켜 웃음이 터트리게도 하고, 또는 작동하는 전구, 깡통, 자물쇠, 암소 뿔, 철조망, 전화기, 괘종시계, 헤어드라이기 등을 붙여 놓아 관객을 얼떨떨하게도 한다. 피아노도 대화가 가능한 생명체로 본 모양이다.

4. TV(멀리 보다) 피아노, 대신 악기로 도입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텔레비전 방 바리타지(젤라틴 액에 바리타를 혼합해 코팅한 종이) 인화 흑백사진 1963.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텔레비전 방 바리타지(젤라틴 액에 바리타를 혼합해 코팅한 종이)인화흑백사진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 강연 때 찍은 사진

백남준은 60년 전 TV라는 캔버스에 가는 수평, 수직의 선묘를 그림으로써 그의 예술혁명은 시작된다. 요즘 모니터에 글씨를 쓰면 입력이 되는 방식의 유래가 된다.

TV 전시가 어떻게 비디오 아트의 기원이 되냐는 사람도 있지만, 모니터로 이미지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1963년을 비디오아트의 시발점이라 해도 좋으리라. 비디오 아트라고 해서 꼭 비디오를 사용한 시점으로 잡는 건 지나치게 매체 중심이다.

백남준의 유명한 말 "TV는 평생 동안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에서 TV아트가 창안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이렇듯 백남준은 TV가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내부 회로를 해체시켜 대수술을 가한다. 또 백남준이 TV를 주목한 건 이 매체가 예술품으로 계속 진화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첨단 하이테크를 활용한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참여 TV'를 등장시킨 건 사람을 지배하에 두는 독재형 TV가 아니라 민주형 매체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관객의 참여와 소통은 그의 예술에서 더 중요해진다.

[11] <구석기->신석기> 대변화 빅뱅 산업화 시대 -> 정보화시대 패러다임 변화

그의 첫 전시 제목이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 인 건 음악전공자인 그이기에 자연스럽긴 해도 전시장에 피아노와 함께 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아트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아주 쉽게 말하면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는 음악.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선불교적 음악. 또한 백남준 말대로 물리학적 음악이다. 전자공학이 들어간 첨단의 과학 예술이다. 화면에 영상적 장면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그림이 보인다. 다시 말해 추상적으로 흘러가는 보이지 않는 시간을 눈으로 보게 한다. 비주얼 아트다. 결론으로 그의 첫 전시는 동양의 선불교와 서양의 첨단과학이 결합된 것이다.

그의 첫 전시제목이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인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 아트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미래 인터넷(tele-vision, visionary, voyant) TV 등장

그의 전시개념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새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본다"는 데서 왔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리(sound)=시각(sight)이 되는 '사운드아트'사운드 아트'다.기존의 시각 중심을 넘어 오감이 총동원된 즐거운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실험예술이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이런 개념은 다원예술과도 통한다.

[12] 소대가리, 대감놀이, 추방&환대, 굿 형식

소머리와 함께 백남준과 페터 브뢰츠만 등등 1963. 사진: 울프 예를링

영국이 자랑하는 데미언 허스트도 백남준이 독일에서 연 첫 전시회에서 피가 흐르는 소머리를 작품으로 내놓은 대담함에서 영감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이동식 백남준 문화재단 이사

백남준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하여간 소머리에서 냄새가 진동하자 전시가 시작되기 3일 전 독일 경찰이 출동해 이를 제거하게 된다. 독일엔 두개골 동물은 지하 1m에 묻어야 하는 법이 있단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 아트의 시대가 열리다

백남준의 기개 어디서 나왔나/ 6개 국어백남준은 남다른 명석함과 해박한 지식과 동서철학을 섭렵한 인물인 동시에 칭기즈칸의 기개와 몽골 셔먼의 기질도 농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몽골 유전자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몽골은 우리와 3천 년 전 헤어졌는데 그들은 아직도 우리 걸 보존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런 배경을 알았기에

1963년 예술사에서의 빅뱅, 1863년 마네의 '풀밭 위에서의 점심식사'-칭기즈칸의 기개로 도전한 전자 아트: 대감놀이의 또 다른 해석 기발한 전시 정말 알다가도 모른 전시였다. 이 전시에 대한 평가, 온 우주에 음악이 스미게 했다.

백남준의 첫 전시서문은 그가 존경하는 피에르 빌헬름이 썼다. 첫 구절은 "이번 전시가 온 우주에 음악이 스미게 했다"는 시적 언어로 시작한다. 이는 서로 불협화음과 충동을 일으킬 것 같은 미술과 음악과 TV 등을 융합해 시공간을 넘어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매체예술이 탄생된 것으로 본 것 같다.

요셉 보이스가 백남준 첫 전시 개막식에 나타나 도끼로 부순 피아노 1963

백남준의 친구인 요셉 보이스는 전시 개막 1시간 뒤 나타나 그 피아노 중 한 대를 마치 어떤 표적물을 정확하게 강타하듯 그렇게 박살을 냈다. 보이스는 피아노를 치면 음악이 되지만 피아노를 부수면 행위예술이 된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이리라.

[13] 서구 성상파괴 왜?

그의 첫 전시에는 각기 다른 4대의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그 모양새가 각각이다. 피아노에 브래지어를 입혀 여자로 의인화시켜 웃음이 터트리게도 하고, 또는 작동하는 전구, 깡통, 자물쇠, 암소뿔암소 뿔,철조망, 전화기, 괘종시계, 헤어드라이기 등을 붙여 놓아 관객을 얼떨떨하게도 한다. 피아노도 대화가 가능한 생명체로 본 모양이다.

백남준의 친구인 요셉 보이스는 전시 개막 1시간 뒤 나타나 그 피아노 중 한 대를 마치 어떤 표적물을 정확하게 강타하듯 그렇게 박살을 냈다. 보이스는 피아노를 치면 음악이 되지만 피아노를 부수면 행위예술이 된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이리라

<피아노 4대와 TV 13대> TV 뉴 피아노 혹은 새로운 악기로 도입하다: 백남준은 60년 전 TV라는 캔버스에 가는 수평, 수직의 선묘를 그림으로써 그의 예술혁명은 시작된다. 요즘 모니터에 글씨를 쓰면 입력이 되는 방식의 유래가 된다. 비디오 아트라고 해서 꼭 비디오를 사용한 시점으로 잡는 건 지나치게 매체 중심적 사고다.

그의 첫 전시에는 각기 다른 4대의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그 모양새가 각각이다. 피아노에 브래지어를 입혀 여자로 의인화시켜 웃음이 터트리게도 하고, 또는 작동하는 전구, 깡통, 자물쇠, 암소 뿔, 철조망, 전화기, 괘종시계, 헤어드라이기 등을 붙여 놓아 관객을 얼떨떨하게도 한다. 피아노도 대화가 가능한 생명체로 본 모양이다.

백남준의 유명한 말 "TV는 평생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에서 TV아트가 창안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이렇듯 백남준은 TV가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내부 회로를 해체시켜 대수술을 가한다. 또 백남준이 TV를 주목한 건, 이 매체가 예술로 진화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피아노와 함께 바이올린 서양 예술의 상징을 질질 끌고 다니다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욕조의 마네킹 바리 타지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히치콕의 소름 끼치는 공포영화 '사이코'나 아르토의 '잔혹극' 혹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연상된다.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14] 위의 연장선으로 서양 뮤즈 살해?

[전시된 사이코 욕조] 살해장면과 완전범죄 서구의 뮤즈 욕조에서 살해하다. <잔혹성> 얼떨떨의 진수 1) 유럽의 성상 파괴 피아노 등등 2) 유럽 뮤즈 살해 -문화 깡패 문화 테러리스트 별명

빈부차 경제적 차이 문화적 차이를 없애려고 했다. 서구의 문화 운동장을 제로로 만들다 60년 지난 지금 동서가 차이가 없다. 아니 동양이 앞서고 있다 뭐든지 한국에게 묻는다. 

1963년

[15] 문화 독재자 TV 파괴: 참여와 소통이라는 무기 활용

당시 첨단 하이테크를 활용한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참여 TV'를 등장시킨 건 사람을 지배하에 두는 독재형 TV가 아니라 민주형 매체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관객의 참여와 소통은 그의 예술에서 키워드다.

<정말 심미적인 사람은 쇤베르크나 백남준이나 존 케이지처럼 잡음도 불협화음도 너무나 아름답게 들릴 수밖에 없다. 샬럿 무어먼도 마찬가지다. 전위예술가들>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백남준.

당시 첨단하이테크를 활용한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참여TV'를 등장시킨 건 사람을 지배하에 두는 독재형 TV가 아니라 민주형 매체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관객 참여와 소통은 그의 예술에서 더 중요해진다.

<정말 심미적인 사람은 쇤베르크나 백남준이나 존 케이지처럼 잡음도 불협화음도 너무나 아름답게 들릴 수밖에 없다. 샬럿 무어먼도 마찬가지다. 전위예술가들>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백남준.

[16] 백남준 혁명 전자 아트 전자 붓 개념이다. 물감 붓과 전자 붓의 차이

물감 붓보다 훨씬 유연한 전자 붓

TV 모니터에 수평선과 수직선을 그린 것은 세계미술사에 혁명'

[17] 전시 주인공=관객, 모든 사람=예술가, 예술의 민주화

백남준의 첫 전시에서 가장 백남준다운 작품 중 하나는 '랜덤 액세스(음악)'다. 막대 꼬치에 꽂혀 있는 레코드를 관객이 즉석에서 마음대로 골라 변형해 작곡할 수 있는 방식이다. 관객이 전시의 주인임을 선포한 것으로 이 말은 롤랑 바르트가 1968년 <저자의 죽음>에서 한 "독자의 탄생과 저자의 죽음"이란 말을 연상시킨다.

<피아노 4대와 TV 13대> TV 뉴 피아노 혹은 새로운 악기로 도입하다: 백남준은 60년 전 TV라는 캔버스에 가는 수평, 수직의 선묘를 그림으로써 그의 예술혁명은 시작된다. 요즘 모니터에 글씨를 쓰면 입력이 되는 방식의 유래가 된다. 비디오 아트라고 해서 꼭 비디오를 사용한 시점으로 잡는 건 지나치게 매체 중심적 사고다.

백남준의 유명한 말 "TV는 평생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에서 TV아트가 창안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이렇듯 백남준은 TV가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내부 회로를 해체시켜 대수술을 가한다. 또 백남준이 TV를 주목한 건, 이 매체가 예술로 진화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위사진]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음반꼬치 1963. 바리타지 인화흑백사진.

그는 이렇게 작가 중심의 수직적 전시에서 관객 중심의 수평적 전시로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꿨다. 그래서 마침내 '대중예술가'시대, '문화민주주의'시대를 연 셈이다. '랜덤 액세스'란 이처럼 작가가 정한 어떤 규칙이나 각본을 정하는 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과 비위계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 된다.

백남준은 이렇듯 작가지만 관객에 초점을 두고 그들과 함께 '상호작용(interactive)'하는 예술을 추구했고, 이게 결국 60년대엔 <참여 TV>로, 70년대엔 신시사이저로 편집한 <비디오 아트>로, 80년대엔 생중계한 <위성 아트>로 진화된다.

11. 다시 재현하기 힘든 전후 무후 한 전시. 동서와 시공간 넘다. 음악=미술, 전시=해프닝, 숨 막히는 세상 속 구멍 내다. 그는 서구에서 못 말리는 문화 깽판

최고의 기획자 큐레이터로서의 백남준 재평가

백남준의 첫 전시는 이처럼 뒤샹의 반미술과 쇤베르크의 반음악을 합친 것 같다. 당시로는 유례가 없고 상상하기 힘든 전시였다. 특히 흥미로운 건 갤러리 입구의 정원과 현관, 화장실 욕조와 지하실까지도 복합적 전시공간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백남준은 작가만 아니라 포스터도 직접 제작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전시장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큐레이터로,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전시를 총괄하는 기획자로 또한 개념미술가로 그 몫도 다 했다. 최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큐레이터로서 백남준'에 대한 재평가 붐이 일어나고 있단다.

[위 사진] 경향신문 4월 27일 자 4면에는 '사월혁명'을 기리는 '문화계 여러분이 보내온 글'과 조지훈, 정비석 등의 독재 종식 촉구와 희생 학생 애도의 글과 안의섭(두꺼비) 화백은 복간 만화가 실려 있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에서 소개된 영상자료 중 찍은 사진

하여간 1980년 이후 백남준과 지인이 된 전 문화행정가 천호선 씨의 말에 의하면 첫 전시회를 기획할 때 한국에서 일어난 '사월혁명'으로 <경향신문> 폐간·복간 소식을 알게 되면서, 일본에 있던 형에게 복간호를 비롯한 경향신문을 구할 수 있는 대로 보내달라고 해서 거기에 일일이 낱장으로 인쇄해서 만들었단다.

<경향신문>은 1959년 4월 30일 이승만 정권을 비판해 폐간됐다가 4월 19일을 계기로 4월 27일 다시 복간된다. 백남준은 <경향신문> 1960년 4월 27일과 29일, 1961년 3월 13일 자 위에 전단지를 만든다. 백남준은 세계 미술계의 일대 혁명이 될 비디오 아트와 고국의 민주화운동을 동일시하는 관점도 엿보인다.

이렇게 전단지 하나 만드는 방식도 기존의 방식을 교란시키고 당황하게 하는 것으로, 그 아이디어가 자신의 정치성이 들통나지 않게 하고 그가 염두에 두었던 정치적 메타포와 의도가 뭔지를 후대에야 깨닫게 되는 고단수였다.

[18] 인류 영원한 질병=우상숭배

백남준은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이라고 했는데 서구인의 성상인 피아노를 부순 것도 그렇고, 위에서 보듯 서양 뮤즈가 욕조 속에서 양 팔다리가 잘린 채 있는 장면도 그렇고, 이런 이미지는 서양미술 숭배에 대한 파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긴 이 세상에 버려야 할 편견과 우상숭배가 얼마나 많은가.

19세기 과학혁명으로 유럽이 산업화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원 확보와 인력이 필요해지자 식민 개척과 제국주의로 박차를 가한다. 거기서 얻은 이득으로 호사와 권력을 누릴 때 랭보는 그들을 향해 야만의 문화라고 선포하며 아프리카로 떠났다. 백남준의 포스터에 적힌 '추방'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는 바로 그렇다.

동서를 넘어 랭보와 백남준은 시대의 우상 파괴자라는 면에서 같다. 서구 문명을 비판하는데 서구인이 아닌 동양인이 시도한 건 드문 일이지만 백남준은 서구인의 성상인 피아노 등을 부수고, 서구적 가치를 뒤흔들고 서구문명을 희화시키면서 'TV아트'라는 새로운 예술로 이원론에 갇힌 그들의 난제를 풀어보려고 했는지 모른다.

[19] 예술: 매체 확장, 지평 넓히기, 오늘 이야기 주제 미디어 관련

[위 사진]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입으로 듣는 음악 퍼포먼스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위 작품은 모조 페니스를 입에 물고 바늘을 레코드에 얹고 고막의 진동을 속귀로 전달받는 관객 참여형 작품으로 성(性)을 소재한 점도 흥미롭다.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백남준은 드디어 "음극선관이 캔버스를 대체한다"라고" 선언했다. 백남준이 발명한 TV회화는 그 어떤 기존 회화과 비교가 안 되게 표현력이 풍부하다. "다빈치만큼 정확하게, 피카소만큼 자유롭게, 르누아르만큼 다채롭게, 몬드리안만큼 심오하게, 폴록만큼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만큼 서정적으로"라고 한 백남준 말이 이를 반증한다.

** 뒤샹을 가볍게 넘어서다

백남준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백남준 자료집)>을 낸 저자 리비어와 인터뷰에서 비디오 아트가 앞으로 큰 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뒤샹은 비디오 아트를 제외하곤 모든 걸 다 이루었다. 그는 입구는 크게 만들고, 출구는 아주 작게 만들었다. 그 작은 출구가 바로 비디오 아트다. 그리로 나가면 우리는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이라며 자신이 창안한 예술의 독자성을 명쾌하게 풀다.

[20] 평생 백남준 비평 -홍가이. 허나 백남준 왈, 날 보면 날 죽여라!

문화 테레리스트-전복자-우상 파괴자(영원한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 평생 비판하는 작가 홍 카이 https://seulsong.tistory.com/438

홍가이 전 MIT 교수 그는 일관성이 있게 백남준을 비판한다

그러나 백남준은 이런 말을 남겼다. "백남준을 보면 백남준을 죽여라". 누구든지 나를 밟고 지나가라. 겸손한 말씀 오히려 그런 백남준의 대가적 모습이 그를 더욱 훌륭한 작가로 우뚝서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당분간은 아직 백남준을 능가하는 작가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평생 백남준을 미학적으로 혹독하게 비판한 전 MIT 홍가이 교수.

<결론> 그러나 백남준은 말했다, "날 보면 날 죽여라!" 부처님 말씀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여라"의 벤치마킹인가). [殺佛殺祖(살불살조)] 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날 죽여라.

<1964>​ In 1964 Paik traveled to the US. He quickly settled in New York and became a leading innovator among an emerging generation of artists seeking new modes of artistic expression and distribution. That same year, Paik collaborated with Shuya Abe to create Robot K-456 (1964), a remote controlled robot that played audiotaped speeches by John F. Kennedy and defecated beans in Paik's Robot Opera (1964).

<후반부> [백남준과 인터넷] 2교시 '전자초고속도' 가는 길, 10단계
-우리는 모두 백남준의 은하계 속에 살고 있다. 

<본론> <백남준 발전시킨 인터넷 10단계> 1963-1993, 30년 걸리다

백남준에게 영웅은 동과 서를 왔다갔다 한 사람 혹은 동과 서의 길을 열어준 사람을 전자시에 맞게 비디오 로봇 형태의 ‘칭기스칸의 복권’, ‘마르크폴로’, ‘훈족의 왕 아틸라’, ‘스키타이의 왕 단군’, ‘로봇 전사’, ‘고대기마인물상’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을 내놓았다.

1963년 [01단계 인터넷] 첫 전시, 미래의 인터넷인 TV을 도입하다.
1965년 [02단계 인터넷] <달은 가장 오래된 TV> (월인천강지곡) 비디오 처음 사용


1970년 [03단계 인터넷] <비디오 코뮌>, 1969년 합성기(신디사이저) 발명으로 가능
1973년 [04단계 인터넷] <1인 미디어 시대> 유튜브 그 작품 <글로벌 그루브> 발표.
1974년 [05단계 인터넷] 인터넷 전신 <전자 초고속도로> 개념 록펠러 기금 수령

1974년 작품

1978년 [06단계 인터넷] 백남준은 “종이는 죽었다” 뉴욕 모마 강연
1984년 [07단계 인터넷]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등 3탄 위성아트 전 세계 방송채널 연결
<21세기 정보시대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되다 -백남준>
1993년 [08단계 인터넷] 1993년 <전자 초고속도로> 베니스비엔날레 참가
1994년 [09단계 인터넷] 상용화된 인터넷을 보여주는 W3 작품 등 발표,
2000년 [10단계 인터넷] SNS 상용시대
<결론> 우리는 모두 백남준의 (전자) 은하계(갤럭시) 속에 살고 있다

백남준은 어떻게 인터넷을 착안했을까? 궁금하죠 오늘의 주제와 관련 된 것이죠. 이걸 상용화하는데 30년(1963-1993)에 걸렸다. 10가지 단계를 밟았어요. 1995년 인터넷 등장 이후 이것을 총정리해서 기록한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라는 작품이 있어요 여기서 고속도로가 뭘까요 바로 인터넷 전자 초고속도로죠. 백남준의 예술론 5개 국어로 종합한 거죠. 일종의 미디어론이죠.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죠

인터넷 예언과 관련해 백남준이 남긴 유명한 말 2가지를 소개하겠다. 백남준은 평생 자신을 '비디오아트스트'라기보다는 '정보 아티스트'라고 말했어요. 앞으로의 시대는 정보 디지털 시대가 될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되었죠. 정보를 위한 사회라는 것은 결국 전 세계가 보다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이죠.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다 마찬가지죠, 소통이 잘 되어야 행복해지죠. 부부 사이나 부모 자녀 사이나 정치로 치면 여와 야 소통이 잘 되면 만사형통이죠. 이렇게 소통이 중요한데 백남준은 이런 정보가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인류의 공공재로 그걸 공유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사회 <문화의 민주화, 정보의 민주화>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백남준은 이런 말을 했어요. 정보 즉 brain-power가 석유 즉 oil-power를 대신하는 시대를 올 것이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좋은 정보가 있으면 석유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렇게 말했어요. "한국은 다 좋은데 정보가 부족하다" 정보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 오래전에 한 이야기 지금도 유효하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더 질 높은 정보를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백남준은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터넷 창안했는데 과연 어떤 방식의 인터넷을 발상한 것일까? 그의 콘셉트는 뭔가?

그것은 바로 "가장 빠르고 가장 싸고(저비용으로 왜? 가난한 자를 누리게 하려면) 가장 접근하기 쉽게" 바로 그런 방식의 인터넷을 원했죠. 전 세계와 원활하게 소통하는 길에 대한 열망이 엄청 컸다. 왜냐하면 소통이 잘 되면 나라와 나라 사이 동과 서가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죠. 전쟁세대인 백남준은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죠. 물론 남북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되면 동서의 세계가 서로 잘 이해하게 되고 전쟁이 없어지고 백남준은 심지어 미국이 베트남에게 졌죠. 왜(?)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백남준 처음 인터넷 발상할 때는 몽골 초원 고속도로, 실크로드에서 생각을 시작했죠.과거 몽골의 칭기즈칸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 장비 보완해주는 병참 제도 platform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빠른 말이 있었기에 세계를 지배했죠. 지금은 전자통신과 위성과 인터넷이 가장 빠른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죠

그래서 앞으로는 아시아가 전망이 좋다 부각되고 있다. 중국, 인도, 베트남 등등 백남준은 세계를 빠르게 연결시켜 상호 이해와 문화교류를 통해 전 세계의 하나 되게 하고 공존공영의 변화를 도모하려고 했죠. <영어로 하면> Transforming Cultures and Connecting the World

[본론] 백남준 30년(1963-1993)에 걸려서 10가지 단계를 어떻게 밟았는지 그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우리 시대는 인터넷을 빼고 하루도 살 수 없죠.

1963년 실험적 TV

<1963년> [1단계 인터넷]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에 미래의 인터넷인 TV을 도입하다. TV는 미래의 컴퓨터였죠. 물리적 음악이라고 백남준은 TV를 악기로 봤죠. 혹은 장난감. 첫 전시 제목이 그래서 <음악의 전시> 독불장군이나 독재자 같은 TV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싶은 것으로 만드려고 했죠. 이런 TV를 가지고 미술을 시도하는 건 서양미술에는 족보에 없는 혁명적 일이었다.

<1965년> [2단계 인터넷] 백남준 '월인천강지곡'을 좋아했는데 여기서 발상, 강물에 흐르는 달빛은 부처한 대자대비한 은공으로 비유한 최초의 한글시) <달은 가장 오래된 TV> 기막히다 토끼이야기 생각하면 쉽죠. 매우 시적인 제목이죠 무명의 백남준 배려 뉴욕 갤러리아 보니노에서 처음 선보이다. 무명 실험예술 자리 마련 등 배려. 과거에는 달이 TV.

그리고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을 세계 최초 (사전) 구입하다. 당시 미국 뉴욕을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그때부터 드디어 비디오 아트가 사용하기 시작했죠. 왜 비디오 사용했을까요 비디오는 TV보다 수정이 용이하고 순서를 왔다 갔다 편집이 가능했죠.

1970 비디오 코뮌

<1970년> [3단계 인터넷] <비디오 코뮌>, 쉽지 않은 일가능했던 것은 1969년 아베와 함께

1969년 신디사이저 저작권 요구하지 않다

<1969년> 비디오 용이하게 편집하는 합성기(신디사이저) 발명했기에 이 기술의 저작권을 요구하지 않다. 비디오 코뮌이란 사회주의 개념인데 비슷한 말은 '글로벌 비디오' '인류 공동체'라는 뜻이죠. 여기서 강조점, 역시 동서양의 다양한 정보를 교류해야 한다. 이 작품의 콘티를 보면 동서양 내용을 반반씩 소개하고 있죠.

1973년 Global Groove

 

<1973년> [4단계 인터넷] 같은 획기적 선언 즉 <1인 미디어 시대 올 것이다>라고 예언

하나, "앞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 TV 채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혁명이죠? 왜요? 사실 KBS MBC 등 이런 방송매체를 운영하려면 천문학적인 대자본이 들어가죠. 그런데 1인 미디어 시대가 되면 개인도 최저비용으로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예언한 셈이죠. 대형 미디어는 대자본 광고비에 의존하기 때문에 지식과 정보를 더 많이 가진 자 중심으로 그들에 유리한 방송을 하다 보니 fact가 왜곡되거 축소 확장 굴절되죠. 이걸 막을 수 있는 거죠.

둘, 말로 만이 아니라 실제로 유튜브를 만들다. 비디오 아트 작품 중 걸작인 <글로벌 그루브>을 발표하다. 이것은 <비디오 코뮌> 더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예외 없이 축제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주제죠. 여기서 축제는 무슨 축제죠 바로 정보의 축제죠. 미국이나 유럽만 정보의 축제를 독점하거나 즐기면 안 되고 지구촌 모든 나라에서 이 축제를 즐겨야 한다. 그래서 그 속에 내용을 보면 <비디오 코뮌>과 마찬가지로 동서문화 반반씩 비율로 소개 일본의 상업광고, 한국의 부채춤 등등

<일종의 techno-utopia다> 백남준이 1973년에 만든 유튜브, 그는 같은 해 '1인 미디어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다(Someday, everyone will have their own TV channel -Nam June Paik 1973).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는 맥루한 말한 지구촌 시대에, 온 인류(지구촌 사람들)가 손에 손 잡고 한판 멋진 축제를 벌리자는 제목이다. '1인 미디어'는 (저비용으로) 개인을 완벽한 '주체'로 만든다. 방송의 무서움은 개인의 시각-청각을 마비시키면서 '추상적 사유'를 극단적으로 제한한다.

<1974년> [5단계 인터넷] 백남준이 지금의 인터넷 그 전신인 <전자 초고속도로(E Super High-Way)> 개념을 만들어서 록펠러재단에 예술기금을 받기 위해서 문화 프로젝트 제출로 이 개념을 제출했죠. 그래서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가 된 셈이죠. 1974년 그해 백남준에게 너무나 중요한 한 해죠.

그를 세계적 작가로 떠오르게 한 대표작 <TV부처> 발표하는데 이 작품 역시 인터넷 개념이 들어가 있다. TV와 부처, TV는 서양의 기술을 말하고, 부처는 동양의 사상을 말하죠.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만나서 융합이 될 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그래서 인터넷이 필요하다. <1982년> 백남준은 파리 퐁피두센터 개인전을 앞두고 ... 이 전시 설명 인터뷰에서 "나는 TV 안에 인간의 뇌를 심고 싶다면서 <인공지능>을 언급하다. J'ai essayé de mettre un nouveau cerveau au téléviseur(=I tried to put a new brain on the TV set)>"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4년> [7단계 인터넷] 굿모닝 미스터 오웰 - '당신은 절반만 맞았다'

백남준 인터넷이 없는 시대 어떻게 하면 세계를 연결할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드디어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미국 유럽 아시아 방송채널을 일단 연결시켜보자. 그러면 뭐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 위성 아트죠. 그래서 뉴욕, 파리, 쾰른 서울 TV 방송 PD와 협의해 채널 연결 드디어 성공을 했죠. 지구촌 사람들 몇 명이 시청했을까요? 2500만 명, 정말 대단한 숫자죠. 21세기 정보 디지털 시대의 시작이죠. 그래서 백남준은 "1984년 1월 1일이 바로 21세기가 시작한 날이다"라고 말했죠.

1984년 0시 0분 세계인을 위한 위성아트* 지구촌 한 몸 신나는 미래로 가자.2000년 0시 0분 한국인을 위한 위성아트* 남북한 한 몸 신나는 미래로 가자.*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 2000년 호랑이는 살아있다. **위성(A Satellite 어원이 '미래의 빛'이라는 말에서 왔다 –백남준

이 위성 아트에서 빅브라더고 종종 등장하지만 세계의 지성인과 예술가와 엔터테이너들이 막아낸다. 그 순서는 이렇다. 뉴욕의 사회자 1) 조지가 나오고 파리의 사회작 2) 그로드가 나온다. 당시 뉴욕 SF와 파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파리에서는 당시의 BTS 같은 <사포>가 나와서 괴상한 노래를 부른다. 빅브라더가 잠시 나오고 토론장이 나오면서 3) 수잔손탁이 나오고 4) '프리그만'과 '폴러'도 나온다. 5) '크리스만'도 나온다. 6) '오잉고 보잉고'의 <일어나라 1984년> 들린다. 그리고 손과 깃털을 연주하는 7) '존 케이지'가 등장. 잠시 불통의 문제도 발생. 그러나 소통은 이어진다. 피드백과 메아리 신호 우주의 요들송 나오고 철의 자막을 열어젖히는

'머스 커닝햄' 등장, 갑자기 9) '살바도르 달리'가 길을 지나가다가 10) 톰스 트윈즈가 나와 '나를 안아주세요' 부른다. 다시 11) 빅브라더 나오고 이어 비트 세대의 간판 시인 12) '알렌 긴즈버그' 모두 모여 숨을 쉽시다 시 낭송한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로 13) '샬럿 무어먼 출연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드디어 새벽 3시 10문 이 2500만여 명이 본 이 거대한 세계 최초의 지구촌 위성 오페라는 끝난다.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위성 아트), 전 세계 2500만 시청자>시청자> 세계 미술사에서 전후무후한 이벤트

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엘 후 개인빚이 너무 많아 고민중

[프랑스 '르몽드'지] 백남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이 발표되자 이에 대해 프랑스 유력지 르몽드 지는 <전자(테크놀로지) 아트가 폭발하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하다. 놀랍고도 기상천외한 작품이라고 극찬하다.

관련기사 최태만 교수 

 

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33> 굿모닝 미스터 오웰, 글러벌 버라이어티쇼 하다

˝빅 브라더가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다.˝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쓴 `1984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일렉트로닉 테크놀로지를 통제의 수단으로 악용한 전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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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로리 앤더슨이나 프랑스 이브 몽땅, 당시 프랑스의 BTS 그룹이다.백남준은 항상 대중문화의 심층에 담긴 메시지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읽었다. 바우하우스의 정신(회화 조각 건축 공예 디자인 같은 급으로 보다 문화의 민주화 운동)을 계승하고 있다. 백남준 당시에 BTS가 있었으면 BTS를 함께 했겠지만 당시 BTS가 없었기에

1986년 바이바이키플림

David Bowie 백남준 당시 BTS가 없어 영국 천재적 첨단 대중예술가 엔터테이너 David Bowie와 협업. 지금이라도 BTS해야 1999년도에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다. 대중가수이나 높은 평가를 받다. 영국의 천재적 엔터테이너와 같이 일을 하다. <참고> 1986년 '바이 바이 키플링' [뉴욕 타임스] 백남준 1986년 작품에 대한 오마주 기사. 백남준 "스타워즈 만드는 100만 분 1 비용으로도 우리는 위성 아트를 통해서 동서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 수 있다"라고 말한다.

1988년 위성아트 Wrap around the world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감시와 처벌 사회에 대한 전망에 대한 반박이다. 1986년 '바이 바이 키플링' 동서양은 서로 소통할 수 없다는 키플링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1988년 '손에 손잡고(Wrap around the world)' 글로벌 수준에서 전세계가 함께 평화를 생각하고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2000년 '호랑이는 살아있다' 호랑이라는 신화적 동물에 의탁하여 백남준 자신과 한국의 생명력을 고양시키다.

<1993년> [8단계 인터넷] 백남준, '베니스'에서 문화 칭기즈칸 되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인 '전자초고속도로(일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 Electronic Superhighway)'의 부제는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이다. "선사시대, 우랄알타이족의 사냥꾼인 우리는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란드(핀란드)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몽골처럼 더 멀리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 새로운 지평을 봤다."

단군 스키타이 1993

진짜 인터넷이 등장하는데 백남준 예술적 인터넷 작품 <전자 초고속도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참가해 발표하죠. 이 작품으로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1993)' 수상하게 된다. 13세기에 이미 동서교류를 시도한 '마르코 폴로'는 백남준 주제와 꼭 맞는 대표인물이다. 아래에서 '단군 스키타이 왕'도 살짝 보인다. 폭스바겐 폐차를 개조해 위성TV안테나를 달고 지구촌을 누빌 채비가 끝난 백남준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마르크폴로

'문명의 동서남북'이라는 주제의 이 전시에서 그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전자적 소통을 시도하는 비디오 로봇 형태의

칭기스칸의 복권’

‘칭기스칸의 복권’, ‘마르크폴로’, ‘훈족의 왕 아틸라’,‘스키타이의 왕 단군’, ‘로봇 전사’, ‘고대기마인물상’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을 내놓았다.

1993 베니스 황금사자상 수상식

수상작 제목은 '전자초고속도로'인데, 백남준은 '마샬 맥루한'처럼 지구를 하나의 촌으로 봤다. 동서가 미디어환경의 변화에 따라 교류와 소통을 통해서 서로 만나야 한다는 주제를 표현했다. 최초의 실크로드 개척자인 '마르코 폴로' '알렉산더 대왕', '칭기즈칸' 등이 주인공이다. 이들이 고비 사막부터 유목민의 이동수단인 말과 코끼리 등을 타고 가는 모습이다.

1993 백남준 전자초고속도로

그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건 역시 우주선을 타고 가는 한민족의 전설적 시조 '단군'이다. 그런데 이 단군 앞에 '스키타이 왕'이 붙어있다. 백남준은 스키타이를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지배했던 고대 유목기마집단으로 기원전 6세기 흑해북쪽에서 발원하여 기마의 스피드로 시베리아, 몽골고원, 한반도 남단까지 진출했다"고 설명한다여기서 보면 백남준은 단군을 기존의 민족주의적 관점이나 실증주의적 역사관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국가나 국경의 개념을 넘어 북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의 유목민계통으로 본 것이다. 백남준은 우리가 북방계 기마유목민족임을 강조했다

백남준 I 'W3' 64대 비디오 15분 1994년 작품

백남준 I 'W3' 64대 비디오 15분 1994년 작품

<1994년> [9단계 인터넷] 상용화된 인터넷을 보여주는 W3 작품 등 발표, 사실 이 작품은 몇 년 전부터 기획된 것이다. 이것을 상용 인터넷을 나온 지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이후 인터넷 기술(프로토콜)을 폭발적으로 발전한다.

<2000년> [10단계 인터넷] 스마트폰 전쟁시대 페북 트윗 등 SNS 상용시대 닫힌 코로나 시대 열린 줌 시대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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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추모제는 매년 1월 29일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에 열리고 있어요 저도 최근 1-2번 참가했어요 봉은사 주지인 원명 스님이 이 행사 인사말에서 여러분의 손 혹은 주머니에 백남준이 있어요 스마트 폰을 두고 한 말이죠 그는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위대한 예술가죠. 덕담을 했는데 정확한 말이죠 오늘의 결론 우리 모든 인류는 지금 백남준이 발명한 전자 은하계 속에 살고 있다.

1994년

*"Jeder Tag ist ein Guter Tag" - Buddha [예더 타크 이스트 아인 구터 타크]
"Every day is a good day" 날마다, 매일 좋은 날 -

2000년 이후

부처백남준 뇌졸중 후 10년 만에 타계했다. 1932년~2006년

부처백남준

그는 마지막 10년 인간 승리자의 모습을 보인다. 불편한 몸에도 전혀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몸이 불편하기에 오히려 마음에 욕심이 없이 편안한 사람처럼 어느 시기보다 삶을 즐겼다. 그의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 "I am Happy, I am Happy"를 연발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나 그의 낙관성을 그가 후회 없이 인생을 충만하게 살았기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전 세계를 호령하면서 문화 칭기즈칸으로 못할 것 없이 살았기 때문인가. 그러면서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서양인들 그를 맞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서양인보다 서양을 더 많이 알기에 오히려 서양인들이 기가 팍 죽은 것이다. 6개 국어 하니 그를 감당 못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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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닫힌 코로나 시대 열린 줌과 유튜브 시대 열다. 우리 손엔 다 백남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