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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강의록

[백남준과 30세기] [목포대 I] 고인돌, 거북선, 텔레토피아

[백남준과 30세기] 목포대 강의 [1부] 'LIFE&ART'

"문화가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겨 꽃 피우지 못하면 사라진다"

목포대 조은정 교수님 초대와 전성규과 이예린 교수님감사 박혜현 조교님 등 수고, 대학원생 여러분 반갑고, 여러분은 우주이고 나는 먼지다. 여러분의 life style과 creative style에 도움 되었으면 좋겠다. 오거리 백남준 전 527일까지

소외와 독점가 없는 인류 구원의 길이 뭔가를 고민하던 백남준, 그의 사유의 결과물로 1963년 독일에서 서양미술의 추방이라는 부제 하에 음악의 소리를 시각화하는(음악의 전시) 제목으로 '첫 전시'가 열렸고, 1965년 '비디오'를 예술에 도입했고, 1969년 '신디사이저'를 아베와 같이 발명하고 1970년 이 기술로 '비디오 코뮌(인류공동체)'을 초기 비디오 작품으로 만들고, 전 세계가 축제의 삶을 구가하자는 1973 '글로벌 그루브(지구촌 축제)'라는 유튜브로 만들었다. 그해 '1인 미디어(유튜브시대)를 예언'하다. 그리고 1974년 인터넷 전신인 '전자초고속도로'를 록펠러 재단에 신청해 기금을 받고, 그해 'TV 부처'를 발표해 뉴욕 미술계의 지축을 흔들다. 그리고 위성아트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오늘부터 '21세기 정보화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다. 그 이후 3편의 시리즈물(바이바이 키플링, 손에 손잡고, 호랑이 살아있다)이 나오고 마침내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인터넷을 예술화한 '전자초고속도로'를 출품해 마침내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인류는 정말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00년 이후 그것을 전화기와 결합한 '스마트 폰'과 'SNS' 전성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예술가로 이만큼 인류에게 정보와 지식을 단숨에 값싸게 공유하는 사회를 구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백남준는 새 천년 정보사회 디지털 문화 속에서 '비디어아트'라는 새로우 꽃(르네상스)을 피운 것이다. 그래서 인류문화사(세계미술사)에서 영원히 남게 된 것이다. 2000년 0시 0분 '호랑이는 살아있다'는 위성아트로 20세기에는 한국이 너무나 고생을 했지만 21세기는 한국이 20세기 유태인처럼 세계문명을 주도하게 될 거라고 예언하다.

목포대 특강 안내 게시물

[백남준강좌] 미술학과 32021.06.25 오후 2'백남준과 30세기' ‘타이머’, '거치대' '질문지' 필요 <작성 중> 김형순(seulsong) 보들레르(시인 미술평론가 백남준 스승) 전공-교사-편집장-오마이-백남준 자료집 2010-8271-3435 seulsong@nate.com 백남준 40강 유튜브(백해영갤러리 기획) https://www.youtube.com/user/seulsong/videos

2019 년 겨울 백남준에세이 모음집 나왔다

<전반부> 목포가 백남준 예술 고향 다 되다

<1> '백남준과 30세기' 30세기? 정치는 10, 교육은 100, 문화는 1000년을 내다보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원이 다르다. 백남준이 휘트니미술관 2인전 할 때 강익중과 대화하면서 3000년대를 언급한 이유가 아닌가.

<2> '왜 백남준이냐?' 세계에서 최초로 '정보화시대''비디오-디지털'라는 문화를 '예술''' 피웠기에 / 아무리 경제력 군사력이 강해도 아무리 넓은 땅을 차지해도 그 나라 문화가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겨 꽃 피우지 못하면 사라진다. 아무리 경제력 군사력이 강해도 아무리 넓은 땅을 차지해도 그 나라의 문화가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겨 꽃 피우지 못하면 사라진다. 그래서 백남준이 중요하다. 영국, 셰익스피어 독일, 괴테 프랑스, 빅토르 위고를 중시하는 이유다.백남준 예술의 3가지 특징: 1) 가장 먼 역사를 인류학으로 2) 시사정보예술가라 현실적, 인터넷 발명 3) 미래 사유/백남준, 닫힌 코로나 시대에 대비해 30년 전부터 열린 회로를 만들다(위 사진을 보면 그런 생각이 난다) 백남준 어떻게 60년 전에 닫힌 (코로나) 시대 내다보고, 열린 회로 만들었나?

백남준 월요강좌 (2020-2021)  백해영갤러리
오마이뉴스 백남준 25회 연재기사 (2013-2015)
전남대 문화대학원 백남준 특강  2015 년

교육은 100년을, 문화는 1000년을 내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제목을 3000(30세기)으로 바꾸다.

제1전반부 예술가의 후반부 예술론 / 제2전반부 '백남준의 첫전시' 후반부 '백남준과 인터넷'
제목 <백남준과 21세기~30세기> 부제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문화예술은 어차피 미래지향적이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4000년만년 그리고 -1000% 어려운 개념이 등장한다

현재가 유토피아. 의미심장하다.

21세기 하니까 백남준의 말이 생각. '내일은 아름다울 것이다'.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도 이야기 *'현재가 유토피아. 이게 중요하다'(Jetzt ist: Utopie. Das ist wichtig/Now is: Utopia. This is important) 예트츠 이스트 우-토피. 다스 이스트 비히티히.

또 이런 제목의 작품도 있다.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이다" 과거 현재 미래 연결된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재해석] 가장 먼 과거(선사시대)를 보는 사람이 가장 먼 미래(30세기)를 본다.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를 시간의 예술이라고 했다. 이 예술은 음악전공자가 아니면 성공하기 힘든 예술장르다. 백남준의 이런 말은 다 인터넷을 연상시킨다. Visionary artist 백남준, 이를 위해서라도 백남준 고대시대가 아니라 선사시대로 올라간다.

2019  테이트 모던 순회전 암스테르담 포스터 < The future is now>

The future is now. <미래(future)의 시점[관점]에서 현재(now)의 역사를 보는 게 예술이다 -백남준>

백남준은 선사시대도 보고 미래도 내다보지만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농담도 있다

1992년 과천 국립미술관에서 관객과 작가와 토크가 있었다. 관객: 그럼 묻겠다. 백남준! 당신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남준: 현재 나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돈이 벌리는 것이다. 그러자 과천미술관 장내가 떠나갈 듯이 웃음바다가 돼버렸다.

다원예술가, 창의융합 예술가인 백남준의 예술론 다양하죠. 누가 백남준에게 묻다 민주주의가 뭐냐?

<그 대답은?> 댓글 아니 ???

<1990> 백남준과 이어령 선생과 인터뷰에서 21세기 한류와 BTS 현상을 정확하게 예언하다>

백남준 왈 "이제 21세기에는 우리가 뜸 들여 익힌 문화를 전 세계에 내보일 때가 올 것이다" 예언 적중, 100% 맞추다. 한국문화의 도약적 발전과 그 징조인 미리 발설한 셈이죠.

<2000> 구겐하임 전시 때 한국기자와 인터뷰: "한국이 20세기에는 너무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에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 G7에서 보듯 지금 실현되어 가는 도정에 있다.

[주변 사람들,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왜 백남준 좋아하는가?]

<첫번째> 백남준 관련 이야기를 들으면 충격(쇼크)를 받아요. 속이 시원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내가 백남준에게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사고의 영역과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다. 생각보다 정말 예외적이고 경이로운 인물이다.

<두 번째> 내가 하고 싶은 것 대신 다 한 예술가, 그를 생각하면 즐겁다. 예술가가 그렇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죽었다. 피카소, 워홀, 뒤샹 다 그랬죠. 1980년부터 알기는 했죠.

부친 1957년 독일 미혤슈타트 홈스테이. 여기는 재독화가 노은님 작업실 있다

그리고 <3번째> 내가 백남준을 좋아하는 건: 백남준이 독일에 유학하던 1956-1957년 경에 같은 시기에 저희 부친도 역시 독일에서 짧은 기간 공부했다. 내가 어려서 가장 많이 본 사진이 바로 독일 풍경 사진이다. 2차대전 후 10년 후라 1957년 독일은 분위기가 활기찼죠. 라인가의 기적으로 새로운 도약을 하는 시기라 백남준에게도 좋았죠.

풀밭위에서의 점심식사 마네와 피카소

피카소 말기에 서양미술사를 다시 자신의 입체파로 재해석해서 그림을 많이 그렸죠. 위도 그중 하나다. 백남준도 그런 시도를 1993년 베니스에서 시도했는데 피카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독창적이다. 아래를 참고 보면 된다. 미켈란젤로 천장 벽화를 뉴미디어 디지털 아트로 변형시킨 작품은 미켈란젤로 원본보다 더 독보적이다.

5년만에 완성한 미켈란젤로 천장화

백남준의 전자 설치 작품 시스티나 성당

1993년 백남준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작품 다시 재현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 백남준 순회전 전 103일까지> 위 작품 그 중 대표작이죠

16세기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백남준 정보화 시대의 맥락에 맞게 전자 아트로 재해석하다. 하나의 고정된 천장화가 아래처럼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수천 가지 변주곡(Variation)으로 연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다. 예술학도는 이런 모험과 용기가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이번 SF 전시 영어기사 제목에 <Predicted 예언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온다> Prolific Korean-American Artist Predicted Digital World We Live In Now Decades before YouTube, there was Nam June Paik, a Korean American artist who believed all people should have their own TV channel. Matt Dibble explores a retrospective of this visionary video artist. Producer: Matt Dibble

SFMoMA는 테이트 모던과 조금 다르게 새롭게 유튜브로 단장하다 백남준은 미디어학자 맥루언을 말한 지구촌 시대, TV(1963)를 비디오아트에 도입으로 실감나게 했다. 혹은 맥루한이 말한 인류가 하나의 지구촌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온몸으로 구체적으로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는 비주얼 시각 세계를 구현했다. "백남준 30년 혁명,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일방형 소통매체인 TV(1963)에 공격(attack) 가해 쌍방형 소통매체인 INTERNET(1993)으로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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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백남준과 예술고향 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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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탈영토제국 (Empire)을 열망하다

[1] "(탈영토제국시대) 이제 변방은 없다" -들뢰즈. 어디나 중심지다.

[2] 백남준이 한국의 젊은 작가에게 이렇게 충고하다. "미쳤다 소리 듣더라도 창조적으로 생각해야 돼!" '창의융합'교육이 바로 백남준에게서 나온 말이다.

[3] 목포대 30세기를 위해서, 백남준 같은 창의적인 학생에게 주는 '백남준 장학금' 안 만드나!!

[4] 광주는 이미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로 지정되었다. 목포(slow city) 이를 넘어서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미래도시' 지정 필요가 있다. 목포: 문화를 보고, 정보를 듣는 도시 <(문화)(정보)> 목포가 중심지가 된다.

[5] 1995년 백남준은 제1회 광주비엔날레 태동의 산파역할을 하다 한국미술이 국제적으로 동네미술에서 세계미술로 도약하는 중간 역할을 하다. 백남준이 호남에게 큰 선물을 하다. 김영상 대통령도 기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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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백남준 정보(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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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 서구는  1984 년 시작 ,  호남은  1995 년 시작

[1] 백남준과 김대중이 호남을 21세기 정보화에서 발전의 발판을 마련? 여기가 <목포에서 베를린까지> 갈 때 시발점 혹은 출발점이다.

호남과 영남은 정보화시대에 어디가 유리한가 지금은 자연친화적이고 유연하고 산업화에 벗어날 수록 유리하다. 그리고 백남준이 1995년 이곳에서 이미 정보아트 전시를 열어 정보화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아래 다시 부연 설명...

대한민국은 운 좋게 20세기에 21세기로 김대중 대통령은 토플러의 충고를 받아 3의 물결시대를 철저한 준비로 산업화 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별탈없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반면 일본은 과거에 너무 집착하다보니 이에 실패했다. 그래서 지금도 팩스를 쓴다. 제대로 된 스마트 폰을 만들지 못한다. 일본 공무원들 전산화가 안 되어서 야근을 많이 한다.

김대중 대통령 정보화시대 세계적 중요인사 다 만나다

백남준과 김대중 대통령 덕분에 우리는 그런 일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IT 강국이 된 것이다. 서구에서는 산업화를 우리보다 300년 전부터 일본은 우리보다 100년 전에 산업화를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따라갈 수 없없다. 그러나 정보화시대는 다르다 우리가 먼저 치고 나가는 전략이 성공했다. 이것은 호남과 영남도 마찬가지다. 삼성 LG SK통신도 초일류 기업 혁신을 통해 같이 발 빠르게 따라온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보화 마인드 백남준 못지않았다. 2000년에 정보화에서는 서구에 뒤질 수 없다면 세계 최초의 인터넷망을 깔고 국민컴퓨터 공급하면 정보화에서 가장 앞서는 국가를 촉진시켰는데 지금 한국 IT강국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왜 일본이 저렇게 팩스를 쓰고 있나 정보화에 대비하지 못했기에? 유럽은 300년 전 일본은 100년 전에 산업화 그리고 이제는 정보화 우리가 빨라 가고 있다.

홍라희 여사와 백남준 파리에서

[2] 백남준과 삼성과 인연

<홍라희 여사> 글이 있다. "백남준 선생이 비디오아트의 거장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동안 삼성의 첨단기술과 기업 이미지도 한층 발전되어 갔다" 홍여사가 백남준에게 삼성 기업 이미지에서 좋은 경향을 주워서 고맙다는 글을 남겼다. "삼성이 일류기업이 되기 이전에 백남준은 먼저 세계 일류 예술가가 되었다"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남준 선생이 35년만에 처음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당시 국제적 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삼성 TV모니터를 자신의 작업에 사용하기 시작. 이건희 회장과 함께한 어느 날 백선생이 만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인으로서 조국에 대한 애정과 삼성에 대한 기대를 재치와 유머를 섞어가며 표현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다음 해 1985년에는 백선생은 삼성전자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어 자신의 작업에 삼성 TV 모니터를 지원받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3] 근대문화유산 도시 목포, 이제는 영남과 차별화 정보화 도시로 맥락을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을 바로 광주비엔날레 정보아트 전 때문이다. 백남준 1995년 광주비엔날레 너무 좋아하다가 다음해 과로로 쓰러지다.

1995 년 김대중 대통령, 백남준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고인돌 '

 

1995년 광주 정보아트 포스터

당대 세계적 미디어아트 최고 이론가 '신시아 굿맨' 1995년 광주에 초대받아 오다. 백남준 이미 1995년 시작, 백남준이 <정보아트> 전을 열면서 호남에서 정보화 사회를 시작하다.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 지정이 1995년 광주 때문이다. 이 전시는 세계미술사에 기록되어야. 당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뉴 미디어 아티스트 총출동하다.

백남준 초대로 한국에 온 '신시아 굿맨'

그녀는 펜실베이니아 대에서 미술사학 박사. 저서 <아트와 테크놀로지> 1997. "디지털 혁명-컴퓨터 시대의 예술", 1990년 기타: MIT 공대 고급 시각 연구 센터에서 연구원. IBM, Polaroid Time Warner를 포함한 기업의 고문으로 활동. 그녀는 예술-과학-기술에 관한 국제회의(Arttransition) '90의 이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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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백남준 소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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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남준의 소통론(com 상호적)에서 왜 참여가 중요한가? 지구촌에서 소외를 없애고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 가장 쉽고 빠른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인터넷 같은 장치가 그래서 필요했던 것이다.

[백남준이 참여와 소통을 중시한 이유(?)] 시민이 참여하면 독재가 사라지고, 다른 나라와 소통이 잘 되면 전쟁이 사라진다. 평화와 공존이 가능하다. 백남준은 정보시대에 <참여와 소통>이 에스페란토 언어와 같다고 했다.

1990년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

[2] 백남준은 왜 그렇게 굿과 샤머니즘과 인류학을 중시했나? 소통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발휘하고 가장 원활한 소통과 참여 촉진시키는 예술형식이기에. 다만 백남준은 방울이나 거울 대신 TV와 피아노를 사용하는 전자굿이 다르다.. 왜 굿이 왜 강렬한가 그것은 바로 소통을 넘어 신통의 단계 즉 죽은자와 산자를 만나게 하는 '초능력 소통(Super Communication)' 으로 가기 때문이다. 현대판 신내림이나 신접이 가능하다. 이런 것은 서양에는 없는 것이다.

목포 고하도

[3] 목포에 투어를 하다가 알게 되었지만 이것도 하나의 소통.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호남을 빼고 다 일본 식민지>

그러나 울돌목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남은 12척 배로 일본군에 크게 승리해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다. 이곳, 이충무공 유적지 목포 고하도(高下島, 전남 기념물 제10)은 명량해전을 끝내고 잠시 노량해전 출전을 위해 군량미와 무기 등을 재정비하던 곳이다. 군량미 공급 등 이곳 주민들 적극적인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결국 노량해전에 출전해 이순신 장군은 장렬하게 전사. 이순신은 이곳에서 적의 동태 관찰하기 위해 넓이 1, 높이 2m, 1m의 성을 쌓았다.

프랙털 전자 거북선  1993

[백남준과 이순신 장군] 거북선의 창안자 이순신 장군 또 그것을 백남준 예술화하다. 이 작품은 시대의 위기를 예언한 시인이자 위대한 지략가 전술가이었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백남준의 오마주 작품이다. 거북선을 만드는 발명가로서 이순신 장군의 공학적 상상력도 위대하지만, 백남준이 만든 이 프랙털 전자 거북선의 구성미와 조형성, 총체적으로 잘 융합하는 예술성은 더 위대해 보인다.

[3] 백남준 1932년생 백남준 그는 평생 전쟁으로 고통받은 세대다. 그는 입만 열면 <평화와 공존과 소통>을 이야기했다.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인터넷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625 남북대화 소통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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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백남준 작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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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남준은 어떤 예술가인가

하나, [일반론] 비디오아트 창안자로 100대 사상가 중 한 사람, 전 세계를 네트워킹하는 Bridge Artist]

세계 미술을 뒤바꾸고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예술가다. 우선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를 창안한 정보 아티스트다. 문화와 예술의 맥락을 바꾸다. 그리고 전 세계를 촘촘하게 네트워킹시키다. 그런 기술도 개발해서 말이 아니라 실용적으로 상용화했다. 백남준의 위대한 점은 바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그의 아이디어를 사용할 수 있게 한 점이다. 대표적 예가 바로 인터넷이다. "삶과 예술을 통해 보여준 소통, 공유의 정신의 소유자, 21세기 창의사회를 주도할 역량의 인물, 백남준은 국가, 인종, 종교, 가치관 등을 뛰어넘은 사상가"

, [이용우 평론가] <백남준과 80년대부터 같이 활동한 이용우 선생(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

"생각해보면 백남준의 화려한 예술적 부피와 경력을 따를 만한 한국 예술가는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 같다"

리히터 사진도 아니고 회화도 아니고 추상도 아니고 구상도 아닌 리히터 

백남준 1994년 순위 세계 5: 1994년 독일 경제지 카피탈(Capital)에서 세계 100대 미술가5, 1) 미국의 브루스 나우만, 2)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3) 지그마 폴케(독일 앤디 워홀), 4) 게오르그 바셀리츠 5) 백남준

, [뉴욕타임스] '성공한 반란자(뉴욕타임스 늙어서도 이런 경우 성공하기 힘든데, 백남준은 예외였다)'? 노선 이탈자, 문화 테러리스트, 교란자, 파괴자에 속한다. 이런 말도 했다 그는 미디어 아티스트, 정보 아티스트로서 6개 국어래서 그런지 6차원이다 이런 말도 했다. 'TV아트는 5차원 사기(1986)'라고? 그 전에 백남준 '예술은 고등사기(1984).

[핸하르트]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워싱턴 국립 스미소니언 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다섯, [테이트모던 예언자] 백남준 5가지 '미래 예언자' 2019년 테이트 모던(동영상)
<
런던 테이트 모던 동영상 자료> www.youtube.com/watch?v=yMUJB5aFvdo  

Someday, everyone will have their own TV channel -Nam June Paik 1973

<1> 19731인 미디어 시대를 예언 당시에는 유튜브를 Global Media라고 부르다.

<2> 1974인터넷을 예언했다.

<3> 1963년 첫 전시를 열면서 TV로 하는 비디오아트를 창안하다.

뉴욕 모마 강연 모습  1978

<4> 환경위기 예언(TV정원, 그런 주제의 작품) 1978년 백남준 MOMA Lecture 1978년 백남준은 종이는 죽었다예언하죠. 지금은 종이신문보다 인터넷 신문이 훨씬 많아졌죠. 나무를 덜 죽인다는 뜻 즉 현실적인 환경운동이 되죠.

<5> 스마트폰(mixed-media phone) 예언 2000년 이후 디지털 세상 완전히 자리를 잡고 정보시대의 돌입하다. 그리고 1974년 백남준이 발상한 다용도 폰을 예언했는데 결국 2009년부터 스마트폰 smart phone, 혹은 아이폰으로 발전하고 그래서 지금의 SNS가 전 세계적으로 상용화된다. 트윗과 페이스북이 전 지구를 점령하게 되다

독일 교수 시절  1979

여섯, 교육자(미대 교수. 이런 말도 남겼다 "가장 미학적인 것이 가장 교육적이다") 19789월 백남준 독일 미대 교수 첫 수업을 어떻게? 수업 후 반드시 공동식사를 하다 .도박비용도 주다. 양혜규 똑같은 나이에 독일에서 교수가 되다. 두 사람의 특징 언어에 달린 추가 성 아트를 창안하다. 아래 대학 교수 취임 수업이 어떤 포퍼먼스가 있었는지 설명 예정

독일 명문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3] <인터뷰 1> 2015년 뉴욕 1달 취재 백남준 라파엘레 셜리 미국 작가이면서 백남준 조수 7 구겐하임 전시 때. 원래 페인팅을 전공 백남준 영향으로 뉴미디어 아트를 하다. 집에 2번 초대 받다.

질문 1 백남준은 어떤 인물인가? 에피소드. 하나 소개한다면?

작품 구상 중인 두 사람.  1997 년 정도

대답(뉴욕) "백남준은 매우 지적(highly intelligent)이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동양과 서양, 과학과 종교와 예술을 큰 틀 안에서 연관시키는 사유를 했다. 그는 내가 만난 본 사람 중 마음의 스케일이 가장 컸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명상의 형태로 즐겼고, 레이저 빛 아래 어둠 속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레이저 조각을 몇 시간 동안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른 조수도 그랬겠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특별했다. 그는 거의 완벽한 침묵 속에서 오랜 시간 휠체어에 앉아 자신의 레이저 작품을 응시했다. 그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은 바로 레이저 아트에 관한 이야기할 때이거나 철학적 논제를 꺼낼 때였다.

뉴욕 머서(Mercer)가 옆 프린스(Prince) 가에는 '제리'라는 그의 단골집이 있었는데 우리도 매일 거기서 그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는 동물이나 여성에 대해 매우 유쾌한 유머와 조크를 던지며 우리를 즐겁게 해 줬다. 내가 그와 작업하는 동안 내내 그는 정말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친절했고 그의 장난기(playful mind)는 또한 뺄 수 없는 그의 단골 메뉴였다.“

2015 년 뉴욕 라파엘레와 인터뷰에 대해 이야기할 때

[4] <인터뷰 2> 질문: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미술관 브로운 관장에게 질문 백남준? 대답: "피카소가 20세기 전반을 지배한 거인이라면 백남준은 20세기 후반 예술의 무게중심이다. 그의 상상력이 세상을 바꿔놨다"

피카소 입체파로 서구  400 년 회화 전통 허물다

스미소니언 미국 국립미술관은 백남준을 미술사에서 볼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피카소 이후 최고의 예술가이다.”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여전히 콤플렉스가 있는 걸까. 서양에서 높이 평하는 우리는 잘 모른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에서 평가받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셈이다. -이동식(80년대 백남준과 같이 활동) 백남준 문화재단 이사

<통섭의 창안자> 통섭을 설명하는 백남준의 재미있는 말 넥타이 매는 것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고 피아노는 연주하는 것 뿐만 아니라 부술 수도 있다 이거 바로 통섭이다. 백남준의 작품과 예술관, 문명관에는 이런 것들이 이미 다 통섭돼 있다. 창조는 존재하는 것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바이올린은 연주만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텔레비전은 보라고만 있는 게 아니다. 인공위성은 전파를 송수신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예술은 꼭 눈앞에서만 보고 듣는 게 다는 아니다. 기존의 제한과 존재 방식을 깨버리고 넘어설 때 새로운 것이 나온다. -이동식 | 언론인, 백남준 문화재단 이사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독일 전위예술가

<인터뷰 3> 질문: 독일 50-60년대 초기 쾰른 시절, 백남준을 많이 도와주다. 백남준보다 2살 아래. 독일 전위 예술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독일 플럭서스 프라마 돈나)는 백남준을 어떻게 봤나?

대답(쾰른) :"우린 젊었을 때 만났다. 여기서 나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그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1) 대단한 정신이었고 2) 철학자였고 3) 음악가였고 4) 예술가였고 5) 장인[artisan]였6) 행위예술가였고 7)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

[5] <인터뷰 3> 질문 현대세계미술사에서 위상은?

대답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기 후반은 워홀, 그리고 20세기 전체를 뒤샹의 시대라 부른다면, 다가오는 21세기는 백남준의 시대가 될 것이다" -진중권 <> 피카소 워홀 뒤샹은 다 산업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예술가다. 그러나 백남준은 정보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예술가다. 그래서 세 사람과 완전히 다른 예술가다.

장 폴 파르지에 파리 8대학에서 20년간 백남준과 영상학 강연

[6] <인터뷰 3> 당신(장 폴 파르지에 프랑스 백남준 전문가)에게 백남준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천재였고 모성이 강한 나의 어머니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 대한 책을 쓸 때 지혜의 여신처럼 자상하게 돌봐주고 이끌어줬다. 백남준은 언제나 페미니스트들이 좋아하는 방식을 취했다."

[7] 2017년 독일에서 백남준 추모 1주기 이야기. 베토벤과 동급이다. 20세기 서구의 지성인들 백남준은 거의 다 안다. 독일에서는 신적인 존재다. 백남준은 왜 독일에서 예술 신이 되었나?

1. 백남준은 왜 독일에서 베토벤처럼 존경 받았나 <위사진> 백남준 사후 1주년 기념 때 뒤셀도르프 시 전차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붙이고 다녔다. 백남준에게 독일은 가장 오래된 고향이고, 라인 강은 그의 예술적 영감을 준 젖줄이었다. 백남준은 라인 강 물결에서 TV주사선을 봤고 "눈부신 날, 라인 강의 물결을 세라"고 노래했다. 예술과 TV를 오묘하게 결합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켰다. www.youtube.com/watch?v=Z4hw_0RrLJw

2007 년 백남준 추모 1주기 독일 뒤셀도르프 기념행사

부인 '시게코' 증언에 의하면 백남준은 독일에서 예술가에 대한 최고 존칭인 '마에스트로' 칭송을 받았고, 웬만한 카페에 가도 '마에스트로' 오셨다며 융숭하게 대접했고 또한 독일인은 백남준을 "독일에서 공부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자랑스러운 독일제 작가"라고 했단다. 베니스에 독일대표로 출전하다.

[2] 그는 왜 독일에서 예술 되었나? 그는 왜 독일에서 신화가 됐나 베토벤처럼 존경을 받았나?
<인터뷰> 질문: 백남준 독일에서 왜 그렇게 인기가 높았나?
[대답] 현장에서 경험한 일화 소개 몇 년 전 취재한 적이 있는 독일 작가 원래 음악 전공인데 사운드 아트를 하는 작가로 부인은 한국분이고요. '알프레드 하르트' 씨와 대담 중에 왜 백남준은 독일에서 그렇게 인기가 높은가 하고 물어봤어요

"백남준이 독일에서 인기가 높은 건, 알다시피 2차 대전 이전은 프랑스가 세계 미술을,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주도했다. 그래서 독일은 변방이었는데 70년대 '요셉 보이스'와 함께 백남준이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독일에 혜성처럼 나타나 소리와 영상을 뒤섞는 '전자 아트'를 창안해 독일 미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 '아트스타'가 되었다. 독일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미술을 뒤바꾼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다빈치' 같은 예술가였다" 그에 대한 극찬이다.

<백남준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대답 1 앞에서 언급한 대로 문화의 그릇에 비디오아트라는 꽃을 피우다. 우리에게는 한국을 알리는 *최고의 문화유산, 온 인류에게는 인터넷과 SNS을 통해서 '지구가 한 동네'라는 '지구촌'(맥루언) 시대를 확실히 실현했다. *추신: 한국에 위인이 없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 잘 알려진 위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남준은 아니다. 한국인의 가장 큰 빽이다.

대답 2 아무리 경제력 군사력이 강해도 아무리 넓은 땅을 차지해도 그 나라의 문화가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겨 꽃 피우지 못하면 사라진다. 그래서 백남준이 중요하다.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 인도하고 바꾸지 않겠다 독일에서는 괴테, 프랑스에서 빅토르 위고를 중시하는 이유다. 지금과 같은은 영상시대 한국인하면 누구인가?

백남준은 독일에서 베토벤과 비슷한 평가 혹은 그 이상의 평가를 받는다. 서양의 지식인이라면 백남준을 다 안다. 물론 한국에는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서경덕, 이이, 이황, 다산, 실학자 박지원, 동학의 수운, 20세기 전반부에 정지용 시인 혹은 윤동주 시인(세계적으로는 알려지지 않다) 그러면 누구냐? 인터넷을 창안한 정보시대의 선견자 백남준 아닌가!

II 가장 한국적 작가 II

백남준 한복이 잘 어울린다 서울양반의 전형이다

또 백남준 어떻게 가장 한국적 작가가 될 수 있었나 백남준은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백남준은 <삼국유사>를 제일 좋아했다. 장자보다 더 높이 평가하다. ? 한국인의 판타지를 발견하고 이를 창조적인 에너지 승화, 가무와 판타지 능력에서 빼어난 민족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중 몇 가지 소개하려 한다.

백남준이 그렇게 <삼국유사> 좋아한 이유, 다음 3편의 인터뷰로 알수 있다. - "기가 막힌 판타지가 넘치는 한국적 상상력의 보물창고 -백남준"

[1] 도올과 백남준 인터뷰 질문 1: 당신은 왜 그렇게 삼국유사에 빠졌습니까? 대답: 한국민족은 삼국유사가 대변해 주듯이 판타지가 대단한 민족이다. 그런 판타지를 죽이면 절대 안 된다. (나의 평: 그는 한국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환상적인 판타지가 삼국유사에 그득하다고 보면서 한국적 상상력의 보고로 여겼다 비교해 볼 수 있어 한층 더 흥미롭다

[2] 김훈과 백남준 인터뷰 질문 2: <삼국유사>에 대한 당신의 애착은, 그 역사서 안에 아방가르드적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삼국유사>역사가 아닌 것을 역사화하고 있습니다. 역사와 삶의 혼합이라고나 할까요. 인간의 판타지도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지요. 초현실주의의 맥락으로 <삼국유사>를 읽습니다. 민속·신화·민화가 다 그렇습니다.

[3] 관객과 백남준 인터뷰 질문 3: "우리 미술학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대답: "한국 민족은 <삼국유사>에서 보듯 판타지가 대단한 민족이나 미국에서 '한국 미술 5천년전'이라고 해서 가 보니 한국의 판타지는 다 죽여 버리고 맨 중국적인 것만 진열해 놓아 매우 서운했다""한국 민화의 컬렉션이나 해석에서 아직도 일본이 한국을 앞지르고 있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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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백남준 어린 시절 얼마나 부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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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3천평 정도 집에서 살아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백남준 유년기 살던 ‘옛집'을 그의 이종사촌들이 드로잉하다

겨울에는 뒷마당에 스케이트 장도 있었다고 백남준 동대문집 3000평이었다고, 내가 마산에 살 때 700평 우리 어머니 항상하시는 말씀 집에 일하는 사람 있어도 큰집에 살면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청소하기. 나는 20-30평도 청소하기 힘들더라 백남준의 이종사촌들이 옛 기억을 더듬어 백남준의 유년기 집을 그린 옛 집 드로잉’ /사진제공=서울시립미술관

일제강점기 백남준 부친 공장  1920 년대 방직기  1300 대

(1) 그는 (1932-2006 전쟁세대, 늘 평화와 공존을 입에 달고 다녔다) 서울 사람, 백제 사람, '몽골 후손'이라고 늘 자랑하다. 독일에서 몽골반점 performance 백남준: 당대 지금 삼성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부잣집 막내아들이었다. 백남준 부친 백낙승(일본에서 메이지 대학 법대와 니혼대 상대를 나온 지식인)이 운영하는 태창방직 사진 1920년대 방직기가 1300여 대(위 사진)가 있었다고 한다 추신 백남준 왈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사람들하고 우리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 3천 년 전 우리 것을 몽골사람들이 보존하고 있어. 그리고 난 공자 노자 이런 사람들 이전의 사람들을 좋아하지" 개인 소유가 없는 선사시대를 좋아하다.

부친 백낙승과 백남준. 금수저의 전형

(2) 백남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나?

1. 30년대 경성 일본 제국주의 나름 높은 문화를 유지하다. 그가 유치원 다닐 때 캐딜락(유치원 동창인 이경희 여사와 함께)을 타고 다니고 당신 한국에서 캐딜락이 2대가 있다고 당시에 차 수리공이 10이 되었다고(당시는 차가 자주 고장이 나서 수리공이 많이 필요했다고) 동대문 집이 3천 평이나 되고 그러니 백남준 부친이 사업가로서 친일을 했다기보다는 불가피하게 일본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백남준은 그런 것이 싫어서 굶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예술가가 되려고 결심했다고 대신 백남준 왈, 난 외국미술만 수입하는 게 아니라 한국미술도 해외 수출하는 문화 장사꾼 -1984.

2. 백남준의 10대 어떻게 6개 국어를 왜? 환경이 좋았다. 일본 갈 때 프랑스어 사전을 가장 먼저 챙기다. 독일에 도착해 친구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 나는 홍콩-인도 캘커다-이집트 통해서 뮌헨에 도착했다. 나는 먼 동양에서 온 아시아 언어 3개와 서양 언어 3개를 하는 한국인 예술가다.

3. 홍콩 영국계 로이덴(Royden) 학교로 전학, 그 이유(?)

백남준 여권사진 여권번호  7 번

백남준 10대 청소년기 쇤베르크(예술적)와 맑스(철학적)에 열광하다. 왜 뒤집어엎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평화적인 방식으로 즉 예술과 문호로 한다. 폭력은 절대 반대했다.  당시는 맑스(경기 중 안병무와 최관우 선생에게 배움)는 지식인의 열병이었다. 쇤베르크(12음법 창안자)가 극단주의자였다면 그가 전통음악을 개혁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급진주의자가 되는 길이었을 것이다.“

대자본가의 아들인 백남준은 상급생에게 며칠 학교를 가지 못할 정도로 얻어맞았다고 그의 동창인 서재웅씨는 증언한다. 그래서 백남준은 학교에 가길 꺼렸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말썽쟁이 아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1949년 경기중학교 4학년 후반기에 홍콩에 있는 영국계 로이덴(Royden) 스쿨로 전학시킨다. 백남준은 이걸 스스로 '화려한 정치망명'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일본시대] 동경대 시절에 어떻게 보낸나? 첫사랑 에피소드 그러나 이경희 여사

일본 가마쿠라

부친과 갈등 속 일본 유학

[부자지간 갈등] 이건 백남준이 홍콩에 갈 때부터 시작됐지만, 동경대학에 진학할 때 폭발했다. 성적은 부친이 원하던 대로 동경대 상과를 들어갈 충분한 수준이었으나 부친을 속이고 미학과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부자지간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부친과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727일 일본 도착] 백남준 18살 때 이야기 중 추가 한국을 떠나 일본 고베(1950727)에 도착했다. 6개월간 '고배' 여관집에 지내다가 가마쿠라 자택으로 이사 얼마 지내지 않고 동경대 입학, 당시 한국인으로 동경대 입학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만큼 총명. 대학 측은 백남준에게 법대나 상대 계열로 진로를 바꾸라고 권할 정도였다니 입시 성적이 좋았다. 가마쿠라에 동경대까지 60KM 백남준은 전철 타다. 1·2학년 때 '고마바' 캠퍼스, 3·4학년 '혼고' 캠퍼스에 다녔다.

백남준은 1952년 동경(도쿄)대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학 및 예술사를 전공을 정하고, 주로 작곡과 음악사를 공부했다. 졸업 논문도 '쇤베르크 연구'였다. 동경대를 졸업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던 백남준은 파리로 유학가려 했으나 부친이 파리는 퇴폐적 도시라고 말리자 결국 방향을 틀어 독일 유학을 결심했다

(5) 백남준의 중국 고전 어디까지 공부했나?

경기중 시절 백남준 아래 중앙

대답 백남준 경기중 다닐 때 한문선생 천관우(1925~)에게 노장을 배우고 거기에 반하다

1992년 과천 백남준과 토크에서  난해한 '노장'에 대해 쉽게 말하다

그리고 백남준 글은 4분의 1이 한문 그러나 이것을 고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중국어는 이미 그 자체가 그림 언어라 그 소통력이 탁월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친필 원고,  굿의 미디어론

백남준 미디어론 친필원고 여기서는 굿과 미디어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적고 있다

[웃음바다] 1992년 과천 국립미술관에서 관객과 작가와 토크가 있었다. 관객: 그럼 묻겠다. 백남준 당신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남준: 현재 나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돈이 벌리는 것. 그러자 과천 장내가 떠나갈 듯이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6) <1995> 백남준의 독서량은 어느 정도질문 김훈: 모국어로 쓴 책을 어디까지 읽었습니까?
백남준: 이태준, 정지용, 유진오, 한설야, 박태준, 김기림을 읽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를 매혹시킨 것은 단연코 정지용이었습니다. 정지용은 언어의 의미와 언어의 시각적 이미지를 모두 장악한 시인으로 저를 매혹시켰습니다. 그렇게 날카롭고 가파르고 또 시각화한 언어에 저는 매료되는 것입니다. *좋은 화가가 되려면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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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백남준 전시론: 목표전으로 설명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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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가지는 전시를 넓은 의미의 굿의 형식으로 이해하다: 독일에서 첫 전시에 소대가리를 걸다.

[2] 백남준에게 전시란? 폭풍 같은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사건의 미학? Something happens

이번 목포 백남준전 중간 평가를 해보면 작지만 풍성한 알찬 프로그램으로 구성 성공적

*이번 사건으로 엄청난 지각 변경이 왔다. 서울사람 목포사람이 상호적으로 발전했다. 목포 김 시장님마저도 관점의 지각변동, 여기 목포대에서도 이어졌다. 지금 출발점 더 많이 발전할 것이다. 제가 여기 산언덕 동네 시 정신과 카페 문화 문화유산의 정신 마치 지중해 아테네 근처 크림반도 착각이 들 정도였다.

1. 김순주 선생 MBC 시민 아카데미에서 전시를 위한 특강이 있었고
2. 전시 오프닝에서 바이올린 백남준 퍼포먼스 따라 하기 있었고 아래 사진

백남준 I "걸음 위한 선" 혹은 "줄이 달린 바이올린" 영상, 1979. 장소 쾰른. 이걸 찍은 사람은 "W. 헤르조겐라트"박사. 그는 독일에서 유명한 미술사가로 이 액션에 담긴 의도를 알았다

헤르조겐라트 박사, 독일 백남준 전문가
'걸음 위한 선' 혹은  '줄이 달린 바이올린' 버전이 많다.

3. 지난 520일 목포 시립예술 무용단 '나는 비트겐슈타인 읽지 않았다' 공연 있었고
4. 내일 626일에는 목포시립교향악단 4중주(정헌 지휘자, 직접 지휘)가 예정이다.
5. 저도 이번 전시와 연관해 목포대에서 백남준 강의도 할 수 있었고요
6. 아트상품 만들어 기념품'(?) 배포, 전시장 앞 가드닝 정비(파라솔 설치) 예정 등 성과를 냈다.
7. 인근 지역 행정-문화계 인사와 긴밀한 연대감 생겼다. 역시 백남준이라는 작가이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목포시장이 백남준을 좀 이해하게 되면서 맥락이 정보화 마인드로 확 바꿨다. 목포시 문화정책에도 변화가 올 것 같다
* 못 가신 분들 내일 모레까지 백남준 목포전 627일까지 한번 봐도 좋을 것 같다.

(1) 인트로 백남준 맛보기: I Never Read Wittgenstein 19981996년 쓰러지고 나서 작품이라 디테일하지 않다. 서구철학제 주눅들지 마라.

(2) 백남준 60년 전 유라시아 시대 예언 <호랑이는 살아있다(2000)> 20000시에 발표했나?  한국은 21세기에 20세기 유태인(0.2% 인구로 노벨상 25% 차지할 정도 과학 예술 정치 경제에서 세계를 주도하다)이 했던 그런 기여를 할 것이다. 21세기는 한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다. 정말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3) 백남준의 탈영토제국 목포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나? 백남준은 우리에게 왜 중요? 왜 유명한가? 미래는 영토보다 사이버 공간 크기가 더 중요하다. IQ와 지적 호기심이 높고 IT강국인 한국 매우 유리하다.

(4) [문 대통령 G7 회담을 봐도 그렇다] 한국은 세계에서 모두가 배우고 싶은 나라, 러브콜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시대로 넘어가는 2000년의 결정에 힘입었다. 백남준 2000<호랑이는 살아있다>는 위성 아트를 통해서 한국의 위상과 그 비전을 제시했는데 거의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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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남준의 시대론 : 60년 전 유라시아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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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작품 중 1960년대 유라시아 지도

[1] <목포에서 베를린까지> 분단시대를 산다는 것은 남북한 동포가 다 마스크를 쓰고 사는 것이다. 얼마나 답답한가. 이 마스크를 벗는 것이 바로 남북평화 공존시대를 여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는 날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사는 것이 된다. 목포에서 베를린까지 부산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파리와 런던까지 가야 하지 않겠나 이제는 우리가 이를 대처할 수 있는 군사력 경제력 갖추고 있다. 가능한 한 빨리 개성공단부터 문을 열어야

<후반부> 백남준 이상향 Park's Teletopia : EAST meets WEST. (평화 공존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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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백남준의 이상론 - 전자 유토피아(텔레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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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광주비엔날레 백남준 출품작 전자마차 말도 전자말이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백남준의 '전자 마차(일명: 통신, 운송, 무역(Communication Transportatiom, Trade off-Trade) in 1995)' 대단한 작품, 백남준 역시 천재네요 Video installation 277*533*150cm Exhibited in the special exhibition <Info Art> 1st Gwangju Biennale 1995

[1] 백남준이 꿈꾸는 해원상생 정보-지식 소외자 없는 전자 유토피아(텔레토피아) 추구

[2] 유토피아는 반반의 세계이다. 50% 50%

더 구체적인 예를 들겠다. 1) 백남준의 대표작 TV 부처. 동양과 서양 반반 :동양은 서양의 기술이 필요하고, 서양은 동양의 지혜가 필요. 어려운 말로 상호 주체적 의존 관계 서로에게 도움을 주되 종속되지 않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2) TV 정원 기계문명 자연 문명 반반 반반씩 그런 균형감을 좋아한다 3) 디지털과 아날로그 반반: 사이버네틱스(인간적인 과학주의 기계를 위한 기계주의가 아니다) 인공지능 사이버네틱스 알고리즘과 샤머니즘 반반 4) 고급문화(High art) 50%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그리고 대중문화(Low art) 50% 이것의 비빔밥을 선호했다. 백남준은 항상 대중문화를 통해서 시대의 흐름을 읽었다. 백남준 생존했다면 BTS가 극찬. 그 시대는 그들이 없어 영국의 천재적 엔터네이너 보위와 작업하다

<19831231일 프랑스 '리베라시옹(Liberation)' 신문과 인터뷰>

<질문> 이번 전시(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의도는?
<대답 백남준> "TV는 미술시장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술만큼 훌륭한 미디어가 없어요. 그러나 TV는 예술을 이용할 줄 모릅니다. 잘 알다시피 오늘날 고급 예술과 록 음악 같은 대중 예술 사이에 간극이 있는데 여러 연애물을 소개하는 버라이어티쇼 방송조차 이 둘은 적절하게 혼합하지 못하지요. 제가 그걸 하렵니다"

[탈영토제국주의] 남의 영토를 쳐들어가지 않고도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이 바로 '탈영토제국주의'.

내질문: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탈영토제국주의를 경험할 수 있나요?
백남준: 예컨대 내가 어느 한 분야에서(아주 좁은 분야라도) 세계에서 최고의 일인자가 된다면 땅을 차지하지 않고도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공부하기 좋아하고, 지식노동자가가 많고, 새로운 것에 호기심 많은 한국인들에게 맞아! 열심히 인터넷 검색하면 뭔가 나올 수도 있어!

BTS(뒷부분에 또 나옴)는 지금 케이 팝으로 그런 일을 하다. 남의 나라 영토를 침입하지 않으면서 평화적으로 전 세계를 움직이는 일을 맨 앞장에서 실천하고 있다. 그 가사에 세계평화와 희망과 공존의 메시지를 담아서 말이다. 게다가 BTS 메시지는 백남준의 메시지 같다. 세계평화와 해원상생(win-win) 공존과 원활한 소통과 삶에 대한 적극적 참여 등등

[2] "백남준 30년 혁명,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일방형 소통매체인 TV(1963)에 공격(attack) 가해 쌍방형 소통매체인 INTERNET(1993)으로 바꾸다.

1986 년 바이바이키플링

[3] Park's Teletopia 백남준의 예술 공식: EAST meets WEST. (평화 공존 소통) *글로벌 미디어(Global Media) 예언하다. 테이트 모던 유튜브에 보면 전 세계를 연결 미디어 발명.

[4] SFMoMA는 테이트 모던과 다르게 새롭게 유튜브로 단장하다 백남준은 미디어학자 맥루언을 말한 지구촌 시대, TV(1963)를 비디오아트에 도입하고 일방형 소통매체 TV에 공격(attack)을 가해 쌍방형 소통매체인 INTERNET(1993)으로 바꿈으로써 인류가 하나의 지구촌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온몸으로 구체적으로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는 비주얼 시각 세계를 구현했다.

[5] 1993년에 선보인 미켈란젤로 천장 벽화를 뉴미디어아트로 변형시킨 작품은 미켈란젤로 원본보다 더 독보적인 작품으로 길이길이 높게 평가받을 것이다. <백남준을 '20세기 전자 문명시대의 미켈란젤로'라고 평가한 사람(엘리자베스 브로운 미국 국립 스미소니언 미술관장)도 있는데 지나친 평가가 아님을 증명하다> 예술의 범위는 정치에서 말하는 '좌우' 같은 좁은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백남준 M범위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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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백남준 융합 예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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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술론 백남준의 비빔밥과 융복합 세계는 구체적으로 뭔가? 한국은 왜 비빔밥을 잘 할까? 반도국과 관련 해양문화와 대륙문화 반도 국가 뭐든지 다 수용한다. 다문화 다종교 주의가 나오다. 다음 기회에 더 자세한 설명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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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백남준 정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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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 <인포-아트>, 이미 언급했지만 예술사에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1963 년

[2] 대답 물감 페인팅이나 전자 페인팅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물감 붓에서 전자 붓으로 바뀌다.이 부분을 사람들이 많이 오해한다. 물감이나 전자가 같은 것 단지 맥락과 매체가 다만 매체가 바뀐 것이다.

[3] 전자 페인팅의 큰 장점. 그 담을 수 있는 가상 용량이 무한대. 팔만대장경도 전자 페인팅 모니터에 다 담을 수 있다. 현대는 정보와 지식의 크기 너무 방대해 전자 페인팅이 불가피했다.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이 100년을 그린다면, 모니터에 그리는 그림은 1000년을 그린다. 백남준은 현대미술에 있어 이런 시대적 요구에 대안을 내놓았기 때문에 위대하다.

레오나르도만큼 정확하게, 피카소만큼 자유롭게, 르누아르만큼 다채롭게세계 모든 작가를 다 담을 수 있다.

[4] <백남준, 한국의 젊은 작가에게 주는 충고> "미쳤다 소리 듣더라도 창조적으로 생각해야 돼!" -1999.12.17 산업화 시대는 성실한 노력이 중요, 정보화시대는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중복>

[5] 산업화 이분법, 극복 대안 뭔가?

대답 : "그가 행한 예술적 작업 전부는 오늘날 지구적 창조문화를 불러왔다." -이동식 | 언론인, 백남준 문화재단 이사.

백남준의 작품과 예술관, 문명관에는 이런 걸 다 통섭(統攝, Consilience 통합적 상호작용). 창조는 존재하는 것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맥락을 바꾸다. 바이올린은 연주만을 위해 있는 게 아니고 텔레비전은 보라고만 있는 게 아니고 인공위성은 전파를 송수신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예술은 꼭 눈앞에서만 보고 듣는 게 아니다. 기존의 존재 방식이나 맥락을 깨버리고 넘어설 때 새로운 것이 나온다.

[6] 백남이 받은 상 이야기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상은 거의 다 받았다. 특히 독일에서 그랬다.

<백남준 유머 감각은 천재적> 백남준 김대중으로부터 큰 상(2000년 금관문화훈장) 받다. 이날 수상 소감에서 "내가 이런 좋은 상을 탈 줄 알았다면, ''씨 대신 ''씨 성을 타고나 오래오래 살면서 훌륭한 작품을 더 만들면 좋았을 것"이라며 농담을 던지는 여유도 보였다.

사실 백남준은 이전에 세계에서 주는 모든 상을 거의 다 석권했다. 겸손한 말이죠. 괴테상 호암상 교토상 등등

백남준은 19892'쿠르트 슈비터스(K. Schwitters)', 1991'고슬리 황제반지(Goslar Kaiser Ring)',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독일대표) '황금사자상', 1997'괴테 상', 1998년 독일 구겐하임 개관(1997) '토머스 크렌스(T. Krens)', 20018'빌헬름 렘브루크(W. Lehmbruck)'상 등 독일 최고 예술상은 다 휩쓸었다.

[5] 질문: 백남준 95(5년 전) 광주에서 본격적으로 정보화시대를 열었다 어떤 작품을 출품했나 왜 고인돌인가?

<앞에서 약간 언급> 대답 1: 백남준 1995년 정보화시대 아트(정보 아트 Info-Art)라는 특별전 광주비엔날레에서 열었다. 백남준 인맥 총동원해 당시 첨단의 디지털 아트 하는 작가들 다 불려 보았다. 그런데 그곳이 광주라는 지역성이 상당히 중요하다. 2000년이 되기 5년 전 이야긴데 역시 시대를 미래 내다본 셈이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백남준 출품작 고인돌

질문: 1995년 백남준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고인돌', 고인돌은 뭔가?

대답: 고인돌은 지금으로 하면 국회다.. 부족들이 다 모였다. 축제도 된다 영어로 하면 Parliament 이 어휘는 프랑스어 'Parler' 즉 말하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당시 선사시대 고인돌 앞에서는 뭐든지 말할 수 있었다 즉 쌍방소통이었다. 참여와 소통 공동체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21세기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은 것은 독점 세력 때문이다. 말의 독점(언론독재 정치 독재)과 돈의 독점 세력(독과점 세력, 재벌 세력) 때문이다. 당시가 지금보다 오히려 더 쌍방소통 *참여와 소통 사회 공동체 민주주의가 이뤄졌다.

[6] 조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서 그래서 구조주의적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철학과 역사가 해결 못 하는 부분을 대답하려고 하다)는 선사시대가 21세기보다 더 선진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대미술가 인류학 공부 필요] 철학과 역사학의 한계를 뚫으려고 하는 학문이 인류학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으로 총체적 의미를 찾으려 했고 무능력한 철학을 대체하고 진리를 모색하려고 했다. 그래서 프랑스 엘리트 철학자 사르트르를 비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점도 있다. 이들은 주위만 맴도는 이전의 철학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르트르는 투신이라는 방식의 행동주의로 나갔고,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보다 더 멀리 단호하게 나아갔다.

**정보화 사회, 국제화 사회에서 어디에 (꼽사리) 끼려면 외국어 잘해야 하고, 상대방과 대상에 대해서 뭔가 잘 알아야 소통이 잘 되어야 다른 나라에 더 잘 이해하고 그래서 평화와 공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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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백남준 시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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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1세기는 지역보다 산업화 기반이냐 정보화 기반이 더 중요

(1) 영남은 산업화 기반사회이고 산업화에서 뒤진 호남은 이제 정보화 기반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호남(광주와 목포)은 상당한 가능성. 아직 초기 단계지만 이이남 같은 작가가 등장한 건 고무적, 사실 그의 유년기 달력에서 남종화 본 게 다다. 그럼에도 미디어 작가가 되다. <일주일 전에 만나다 전시 기사도 쓰다> 그리고 광주가 유네스코-미디어아트-창의도시(고무적) 유네스코-미디어아트-문화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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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백남준 시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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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남준이 자신을 <시간의 예술가>. 시간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황홀경 도취

시간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취하는 것이다.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몰입할 수 있다. 그래야 시간의 주인으로 산다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길 일종의 황홀경이다. 순간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다. 혹은 시간 예술이란 시간을 시각화해서 영구화시키는 것이다. 비디오 찍히면 사라지지 않는다. 백남준에게 엑스터시는 남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순간이라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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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백남준 색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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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남준 (비디오) 색채론> 여기서 추상 시간이 나온다.

[백남준에게 색은 성 그리고 시간을 의미] 백남준에서 색은 성을 의미한다. 여자의 안색이나 입술색은 색을 의미한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자연색 시기마다 다르다. 그래서 백남준에게 색은 시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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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백남준 사람들 : 친구 스승 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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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 보이스, 샬럿 무어먼, 윤이상, 보들레르, 뒤샹. 그리고 BTS

1992년 경주 백남준 관려 ㄴ학술대회 참가자

1 질문: 백남준의 세계적 인맥 어느 정도? 그리고 소통의 천재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나?

대답: 박만우 2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의 증언, 백남준은 미국 나사의 우주 물리학자나 하버드대 미생물학 교수 같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세계적 예술가 등 1500(이 숫자 박만우 관장의 말)의 전문가와 끊임없이 줄기차게 (전화 등으로) 소통하고 네트워킹하는 세계적인 작가 세기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정보시대 정보가 어디에 있고 수집능력 중요>

2. 백남준의 평생 환상적 예술 파트너. 1964년 미국에 만나 인연을 맺다. 3년 후 그녀 과노출 연주로 검거,

샬럿 무어만 사진

대답
: 이른바 '행위 음악'인데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게 특징이에요.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 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 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 개념을 넘어섰죠. 그렇게 해서 탈장르적 비디오를 창안했어요.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거죠."

3. 질문: 여기서 백남준이 주장하는 신음악과 구음악의 차이는 무엇인가?

구음악

"폰 카랴안은 너무 지겹고 마리아 칼라스의 벨칸트는 너무 시끄러워" -백남준

백남준은 폼 잡은 카랴안 음악을 구음악으로 보고 그런 음악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신음악을 창조하다. 신음악과 구음악의 차이를 확연히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의 차이다.

신음악

대답 : 간단하게 대답하면 신음악은 온몸으로 연주하는 것이고 구음악을 음계로 연주

4. 요셉 보이스, 백남준과 그의 절친 독일 작가 보이스와 차이는 뭔가?(장 폴 파르지에) 무개념 제로 개념 백남준 여기서 더 나아가서 마이너스 개념에 까지 도달한다. 노자의 허() 사상: 창조적 비움(creative emptiness)

대답: 마이너스 플럭스 미학의 차이가 있다. 자연은 노자 말대로 무위자연이 좋고, 음악은 무음악(a-music)이 좋고, 행위는 무상행(無相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좋고, 소유는 무소유가 좋고, 지성은 무지 성이 좋다. 무지 성이란 지성의 無化로 이 단계가 되어야 예술이 된다. 그런데 백남준은 예술마저 무예술(zero-art)이다. 백남준은 장 폴 파르지에(백남준 전문가) 말대로 마이너스 예술(-art)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말대로 마이너스 1000 예술(-1000 art)이다

5. 윤이상과 백남준 독일에서 어떤가? 대답: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 2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2명의 한국인은 윤이상과 백남준 존 케이지를 두고 다른 면 윤이상은 경상도식 밀어붙이고, 백남준은 백제(전라도)식으로 유연하게 대처하기 두 사람은 천재다.

대답: 보들레르 도시의 산책자 프리랜서의 창시자 최고의 지식인인데 돈벌이 별로 없고 이곳저곳 떠도는 도시의 노마드(통한다) 발터 벤야민도 정치 망명자로 그런 처지가 되었죠.

6 대답: 시대를 꿰뚫는 '견자(見者)': 보들레르와 백남준

보들레르와 백남준 어떻게 스승과 제자가 되는가? 시대를 꿰뚫는 '견자(見者)': 보들레르와 백남준의 차이:

 

1. 보들레르가 반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상징적 '포엠/비전(P-Visoin)
2. 백남준은 반위계적이고 비선형적인 사이버화 된 '텔레/비전(T-Visoin)

백남준은 유럽성당에서 본 '스테인드글라스''보들레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중세 건축에서 스며드는 빛이 연출하는 짜릿한 전자 황홀경 전율 맛보다.

백남준은 서구 근대 예술의 아버지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의 <조응(Correspondence)> 시에 크게 감응하여 이를 비디오아트로 번역해서 새로운 전자 아트를 탄생시켰다. '백남준은 또한 샤를 보들레르의 상징주의 미학에서 언급한 '색채·소리·향기'의 언어에 '시각·청각·촉각'을 결합한 더 나아가 '과학·문화·예술''자연·기계·인간'도 하나로 통합하는 총체적(비빔밥) 예술이라는 총체 예술가(Kunst Integral)라는 새로운 전자 개념까지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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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백남준 축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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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1977)'' 잘 노는 게 창조다. -김정운 교수

백남준은 초감각적이고 촉각적인 쾌락주의자다.

"카타르시스, 순간의 환희, 모든 감각의 만족, 전인격 총체적 개입, 극도의 전자적 충동, 두뇌의 전기자기 진동, 직접 접촉 예술, 전자와 생리학의 시뮬레이션,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 정신 사이버네틱스, 인공 신진대사, 다매체 다방향 상응 등등." 백남준의 에로시티즘은 그의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누군가 나와서 연구해야 할 테마이다. 이에 대한 전문가가 전무하다. 백남준은 자신의 예술 골자를 요약, "카타르시스, 순간 환희, 모든 감각의 만족, 전인격 총체적 개입 [] 창조적 황홀경 속에서 삶을 무르익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창조적이 될 때 가장 큰 축제 의식 일어나

질문: 축제는 언제 일어나나?

대답: 일상이 다 '예술(연애)'이 될 때, 내 삶이 세계적 사건 될 때, 모든 게 축제(?)가 된다. 백남준 일거수일투족 다 축제, 그래서 예술, FUN-FUN-FUN이다. "예술작품이 예술이 아니고 생활작품이 예술" 요리사는 생활 예술가

순간순간 소창조(소우주) 요리를 하면서도 축제감을 맛본다 역시 창의성을 발휘할 때 그렇다.

-지금은 진선미가 아니고 미선진의 시대다.

[축제란 창조적 도약의 전주곡이 된다] 한국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죽음마저도 축제화하는 천재들이다. 한국의 장례를 가보면 그렇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 영원화하는 게 예술의 본질이다. 백남준 마지막 10년 고통의 축제화 삶에 대한 열정 그것은 곧 창조에 대한 갈망에서 온다. 불교 고해 고통 지옥을 극락으로 만드는 에너지가 축제다.

20세기 진(철학 정치 이념화)-(종교 윤리 도덕 도그마)-(아름다움 경박한 가치) 그러나 21세기는 미선진 맞다.

[1] <축제론 예술에서 축제가 일어나지 않으면 가짜다> 예술이란 민중이 춤을 추도록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 "예술은 페스티벌이지요, 쉽게 말하면 잔치다. 왜 우리의 굿 있잖아요. 나는 굿쟁이예요. 여러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도록 부추기는 광대나 다름없다. 나의 예술 철학은 관념을 무너뜨리자는 거지요. 수직이 아닌 귀납(수평)이다. 획일을 막기 위해 자유스러운 작업을 한다. 민중이 춤을 추도록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지요" -백남준

1973년 글로벌 그로브 성공 요즘으로 치면 유튜브 최초 성공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은 결국 지구 상에서 가장 잘 노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다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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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백남준 미디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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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란 무엇인가 ? <이 세상에 미디어 아닌 것이 없다> 모두(사람과 사물)가 모든 것이 다 미디어다. 중간매개체(매체)로 한쪽과 다른 쪽을 연결하고 원활한 소통을 위해 다리 놓는 것이 다 미디어다. 자녀가 부모 사이의 피스 메이커 그래서 미디어죠.

뉴미디어-디지털미디어-1인 미디어-소셜 미디어-매스미디어-멀티미디어–인터 미디어-언론미디어 등등 너무나 많다. 선사: 고인돌과 동굴이 미디어 /고대: 샤면/중세: 영적 매개체(영매)가 미디어/근대: 종이와 인쇄술이 미디어/현대: 결혼의 중매쟁이부터 에이젠트가 기획사가 다 미디어. 모든 사람이 다 미디어죠..

<백남준과 미디어론> 허위 뉴스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 백남준 30년 전 허위(Fake) 뉴스 위기를 예언하다

1 백남준, 59(1991), 허위 뉴스 5가지 언급 뭔가? 1991년 허위 뉴스에 대한 경고장

2 <백남준과 언론 미디어> 6개 국어를 하는 신문 중독자인 백남준 1991년 가짜 뉴스 경고를 위한 폭탄선언.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 59세인 백남준, 참다 못해 가짜뉴스 특징에 대해 5가지 언급(말에서 크리스토까지에 나온다). 이에 대한 참혹한 평가를 내렸다. 언론의 특징 : 1. 섹스 sex 2. 폭력 violence 3. 탐욕 greed 4. 허영 vanity 5. 속임수 deception 6. 위 옐로 저널리즘만 아니라 고급 매체도 마찬가지다. [] 현대미디어는 미디어에서 말하는 말에 갇혀 버린 창의력과 개성을 상실한 무기력한 인간을 양산할 뿐이다.

3 [미디어는 메시지다 -맥루언] 이 난국을 풀어보려고 1인 미디어와 인터넷과 SNS: 유튜브, 페이스북, 트윗, 스마트폰 발명하다. 백남준의 최고 무기는 바로 '인터넷'이다. 그리고

[인터뷰] 장 폴 파르지에: "백남준은 미디어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는 진정한 미디어 역할을 하는 예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2016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백남준 10주기 전 때 서울에 온 장 폴 파르지에(파리 8 대학 교수 이 대학에서 백남준 강의 20) 프랑스에서 백남준 전문가답게 백남준처럼 유머가 넘치는 분이셨다.

4 백남준의 천재성은 닫힌 코로나 시대 거기서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탈출구를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19731인 미디어를 시대를 예언하면서 유튜브와 인터넷과 SNS 그리고 최근에는 ZOOM까지 Edith Decker-Phillips is an art historian and the author of <Paik Video> <We Are in Open Circuits> Writings by Nam June Paik

*최초 유튜브 1973년 백남준 1인 미디어 세상을 예언했나? 그 말에 담긴 메시지? 1. 1970TV 코뮌과 해원상생 어떤 관계? 2. 1973년 글로벌 그루브 어떤 작품? 지구촌 시대

5 예술 매체 확장과 지평 넓히기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맥루한 케이지

마샬 맥루한의 주저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

'바퀴는 발의 확장이고, 옷은 피부의 확장이며, 라디오는 귀의 확장이다.

집은 피부의 확장이고, 텔레비전은 시각청각촉각의 확장이며, 전자회로... 이런 면에서 볼 때, 전화는 차가운 미디어이고 라디오는 뜨거운 미디어이다.... 의복은 피부의 연장이며, 바퀴는 발의 연장이고, 책은 눈의 연장이고...

인류는 지난 3천 년 동안의 기계시대를 통해서 인간의 신체를 공간적으로 확장해왔다.

6 인류가 하나의 지구촌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온몸으로 구체적으로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는 비주얼 시각 세계를 구현했다. 1993년에 선보인 미켈란젤로 천장 벽화를 뉴미디어 디지털 아트로 변형시킨 작품은 미켈란젤로 원본보다 더 독보적인 작품으로 길이길이 높게 평가받을 것이다.

7 <교란자로서의 백남준> 랜덤 액세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혹은 모로 가나 기어가나 서울 남대문(南大門)만 가면 그만"- 한국 속담. 백남준이 말하는 랜덤 액세스는 이와 유사한 개념이리라. 이번 접근방식에 대해서 서양인들은 전혀 대처하지 못했다. 그래서 백남준과 문화 전투에서 서양인들 백전백패다. 이 방식을 백남준 첫 전시에 적용해 서양인들 기절초풍 시키고 넋을 나가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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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백남준의 선물 보따리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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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백남준 첫 전시 이 부분은 2부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1962> 백남준의 만 30살에 선언한 내가 황색 재앙이다무슨 메시지인가? 백남준 패기만만, "내가 문화 칭기즈칸이 되어 전 세계 미술판 쓸어버리겠다<1992> 백남준의 만 60살에 선언한 말이다. 우리가 세계와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꿔라(1992)

[1] 황색 재앙 그것을 바로 나다 30살 백남준의 패기 넘치는 말이죠. 세계 미술계를 쓸어버리겠다는 포부가 보인다. 동서의 장벽을 없애고 지구촌 사람들이 손에 손잡고 춤추는 코뮌 세상 백남준의 비디오 제국의 황제로서의 포부가 보이는 멋진 사진이군요. 백남준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 전시장 입구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걸어놓다. 서구인들 기죽이는데 이보다 더한 아이디어는 없다. 그의 대담성은 어디서 오나

그는 이 전시
1년 전에 "황색 재앙(몽골 지배에 대한 서구인의 공포 혹은 트라우마)은 바로 나다" 문화를 통해서 유럽(세계)을 쓸어버리겠다고 호령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백남준 서양사람들 기죽이는데 누구를 등장시켰나 바로 칭기즈칸이다. 그들은 지금도 그의 말만 하면 벌벌 떤다.

[3] 백남준과 인터뷰 도올, 인류학적 인터뷰 1992<백남준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나?>

백남준 예언, 30년 후 대량실업시대(?), 예술가 역할은? 김훈 등이 흥미롭다. <백남준 유럽 가보니까 다 쓰레기야> [1992년 백남준과 김용옥 인터뷰 중 일부내용] "내가 가서 보니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인상파도 독일의 작곡가들도 다 쓰레기야" - 백남준 김용옥 인터뷰 중에서 1992

1992년 환갑을 맞아 서울을 방문하다

우린 역사를 너무 잘 못 봐 선진이다 후진이다. 이런 거 없는 거야 선진이라는데 가보면 후진도 있고 후진이라는데 가보면 선진도 있지 내가 일본가보니까 일본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더라고. 그냥 우리랑 똑 같았어. 난 여태까지 일본 무서워해본 적 없거든 일본에서 음악공부 좀 하다가 질력이 나서 ...진짜 음악공부 해봐야겠다고 본고장으로 가자해서 경박한 나라는 안 가고 독일 찾아갔거든 그래서 독일에가서 보니깐 작곡가들이라는데 전부 엉터리들이었어. 그것뿐이 아니야 미술도 그래. 난 예술에 그 유명한 그림들 일본 놈들이 근사하게 인쇄해놓은 것으로만 봤잖아. 그래서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고 동경했지 그런데 직접가보니깐 허름한 캔버스위에 나달나달하는 페인트 형편없더라고 뭐 인상파다 르네상스 예술이다. 루벤스다 하는 것 직접 보니깐 형편이 없었던 비싸다고 하니깐 대단하게 보였던 거야 난 정말 실망했고 이따위 것 가지고 내게 그렇게도 동경했던가 하구 말이야. 박물관에 멍하니 앉아있었어. 작곡가도 말야 그 대단한 독일이라는데 쓸 만한 몸에 4-5명밖에 안 되더라고 4-5명 정도는 탑이었어. 그러나 나머지는 어차피 쓰레기 아냐 그러니깐 난 용기가 나더라고. 우선 4-5명밖에는 안 되는가 내가 낄 자리도 아직 많겠고 생각이 들었고 또 못겨두 어차피 시원찮은 놈들뿐인데 그 시원찮은 놈들 속에 내 시원찮은 이름 하나 더 끼어 넣는 들 죄송할 게 없잖아. 피차 마찬가진데 그래서 난 곧바로 작곡 행세를 해버린 거야 그리고 지금부터 굵게 놀았지 그러니까 내가 독일에서 작곡가가 된 것으로 훌륭한 작곡가 때문이 아니라 나쁜 작곡가들이 하도 많아서 자신감이 생겼던 것 뿐이지

다산 정약용은 당시 고갈된 백성들이 자존심을 이렇게 탄식했다

아아 우리 겨레여/마치 자루속에 같인것 같구나/삼면(三面)은 바다로 둘러 쌓이고/북방(北方)은 높은 산으로 가리웠으니/사지(四肢)는 항상 오므라들고 굽혀져서/기개(氣槪)와 뜻 어디에 편단 말인가/성현(聖賢)은 만리(萬里) 저 쪽에 있으련만/누가 능히 이 어둠을 열어주나/고개들어 세상 바라보니/견문(見聞)이 좁고 정()이 흐릿하구나/남의것 모방(模倣)하기에 급급하고/제것을 갈고 딲을 겨를이 없구나/백성들의 입안에 자갈을 물리고/어리석은 것 하나만을 받들게 하네/차라리 단군(檀君)때의/질박(質樸)한 고풍(古風)이 그립고나

이 사진을 보라 백남준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나 뒤로 단군이 보인다-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참가한 백남준

1991 프랑크푸르트 '프리 벨 맨' 앞에서

그의 자신감/베니스비엔날레에서 보여준/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자부심/그는 멜빵 패션/언제나 작업이 가능한 복장/해맑은 미소/천진의 얼굴/ 천재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그에게는 돈이 안 보인다/권력을 말할 것도 없고/명예도 우습다/단지 창조하는 자의 기쁨만을 즐긴다/그의 눈빛에는 경쟁자가 없다/앞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그는 랭보가 말하는 견자(Voyant)/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있다/3천 년대를 내다보고 있다/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3천 년대가 종종 나와서/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나는 불행하게도 그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하여간 이 사진을 보니/오늘 나의 맥 빠진 기운이 조금은 나아진다/내 기운을 살려주는 그의 기품이 멋지다/그는 정말 예술을 하는/보따리 노마드다

[4] 백남준 뒤셀도르프 대학 교수 취임 공개 수업
- 물아일체 속 소통 사람의 몸과 악기의 혼이 소통 http://omn.kr/963e

백남준 뒤셀도르프 대학 교수 취임 공개 수업 준비 모습

백남준 뒤셀도르프 교수 취임 공개 수업 1978년 

백남준 I '비디오 비너스(Video Venus)' 이 퍼포먼스는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서 197863-4일까지 이 대학교 조각가 여학생인 '자니스 거이(Janice Guy)'가 누드모델로 참여하여 이루어지다(Video Venus life performance starring Janice Guy) 사진저작권: 이보 데코빅(Ivo Dekovic) 주제 물아일체 속 소통 사람의 몸과 악기의 혼이 소통

<이 부분 관련 사진 올렸다가 차단당하다> 쌍방형 수업 전형: 학생 참여와 물아일체적 소통이 백남준 첫 공개수업의 특징이다. 백남준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제자를 존중한 그가 일방적 수업을 할 리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학생과 공동으로 현대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원시적 생명력을 되살리는 해프닝 수업을 하고 싶어 했다.

뒤샹은 비너스 퍼포먼스에서 급이 낮다 

그 원조 격인 1967년 샤먼과 함께 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도 이번에 선보이지만 10년 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자신보다 25살이 어린 같은 대학 제자 '자니스 거이'와 함께 백남준이 피아노를 치면 '누드 비너스'가 음에 맞춰 몸을 변주하는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오감을 최대로 확장시키며 모순되고 뒤틀린 우리 내면을 확 풀어주는 걸작이다.

이런 작품을 백남준이 교수가 되기 전부터 무척 하고 싶었지만 모델료가 너무 비싸 못 하다가 드디어 수업시간을 통해 천지인이 하나이듯 자연과 인간과 음악이 하나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침 그의 제자 '이보 데코빅'이 이 퍼포먼스를 영상에 담았다. 이런 포퍼먼스를 대학교수 취임 수업으로 받아들이는 독일도 대단하다. 왜 나치를 경험했기에

모든 게 문자화(관념화) 되면서 소통 단절

여기에 깔린 백남준의 철학은 바로 말 이전의 몸으로 사는 시대가 왔다. 인간이 신과 직통했는데 모든 게 문자화 되면서 그 소통은 단절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백남준은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적 생명이 넘치는 영매 즉 '미디어'를 통해 이를 되찾으려 여기서 '인터미디어 샤먼''디지털 샤먼'의 일면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4] <60년대 백남준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 선물: 자신감, 열등감 극복, 건강한 치유> 13세기 전쟁 칼을 빼들다 : 정복 / 21세기 전자 칼을 빼들다 : 공존, 달리 왈 "백남준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소통 한다(He communicates much more than words can express)" 달리 / 나중에 미국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벗는 호연지기도 역시 백남준 스타일이다. 백남준 앞에는 늘 이런 문장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다(He was born in Korea)’가 붙어 다녔다. 백남준 당시만 해도 한국이 지금처럼 문명국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교란 기법 https://seulsong.tistory.com/94

[5] 13세기 초반 무력의 황제 칭기즈칸은 북반부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발을 타고 칼과 피, 고통과 증오, 살육과 침략을 위해 전쟁 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문화 칭기즈칸 백남준은 마음과 마음, 가슴과 가슴. 마음과 가슴과 기술을 한데 묶어 칭기즈칸의 준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세계를 누빌 수 있는 전자 칼을 빼 들었다. 그것이 바로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6] 백남준 자부심, 자존감, 자신감으로 넘친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확실했다. 그는 남의 시선을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그의 패션을 보면 알 수 있다. 작업하기 좋은 멜빵 패션이면 끝이다. 그 행색은 초라하기 이룰 데 없다. 이로 인한 에피소드도 많다. 1990년 한 번은 이어령 씨가 문화부 장관 할 때인가 그를 찾아갔으나 수위의 저지를 받아 처음엔 못 들어갔다.

백남준은 돈은 물론이고 권력도 눈에 안 보였고 명예도 우습게 봤다. 다만 창조하는 자의 기쁨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그런 일을 당해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그의 해맑은 미소와 천진의 얼굴은 거기서 나왔다. 천재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을 보여줬다. 부잣집 아들, 정보화 사회의 본을 보이다.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다.

"그가 행한 예술적 작업 전부는 오늘날 지구적 창조문화(창의성 중시하는 정보사회)를 불러왔다." -이동식>

[백남준은 왜 중요한가?] 1) 우리에게는 한국을 알리는 최고의 문화유산이고 또 2) 온 인류에게는 지구촌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케 하는 SNS시대를 열었기에 또한 그는 정말 예술의 범위를 확장했고 거기에 최초로 하이테크와 TV를 도입하는 데 선구자 역할을 했다. 백남준의 작품과 예술관, 문명관에는 이런 것이 이미 다 통합적 상호작용하는 지식 즉 통섭(統攝, Consilience)돼 있다. 해프닝, 미 대통령 클린턴 앞 바지 벗기 이런 자신감도 우리에게 요구된다.

[9] <백남준 관련 인터뷰 2015>

나의 질문: 샤머니즘 같은 원시주의와 레이저 같은 하이테크의 결합이 과연 가능한가?

미국 작가 라파엘레 셜리(백남준 조수 7년 경력) : "백남준은 인류 보편적 생각을 가진 예언자로 기술과 문명의 궤적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술가만이 아니라 또한 그 이상을 뛰어넘는 철학자였다. 미국의 유명한 비디오 작가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진정한 예술가란 신비의 진실을 열어줘 세계에 도움을 준다'라고 말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면에서 보란 듯이 우리의 일상에 묻어나는 샤머니즘을 수준 높은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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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백남준과 샤머니즘 인류학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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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예술과 사상이 왜 난해한가? 인류학적이 접근 때문이다 백남준은 그의 예술의 원류를 샤머니즘에서 찾았다. 왜 인류학적으로 자신의 예술을 풀었나? 야생의 사고는 왜 그랬나? 아래 내용이 답이다. 소통을 원활하게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왜 인류학이 중요한가.

(설득력이 약한 무기력한) 철학이나 역사학이 현대문명을 제대로 설명을 못한다. 예컨대 한국미의 핵심인 굿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민속학적으로 제대로 설명을 못한다. 그래서 인류학이 필요하다.

백남준은 피아노는 걷어차고 요강으로 연주하다 그러나 백남준은 굿은 기존의 전통굿과 다르다 전자굿이다 그의 굿에는 항상 TV와 피아노가 있다. 이 두 가지는 천지인과 소통하는 새로운 매개체(미디어)이다 TV는 전통굿의 거울이고 피아노는 전통굿의 악기(방울)이다

2005년 작품 백남준 미디어론 예술론 총결산 집중적 요약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특히 문화인류학적인 면에서 샤머니즘 미학을 명쾌하게 정리해 놓았다> 영어·프랑스어·독어·일본어·한국어 5개 국어로 자신의 예술 골자가 담긴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고대 이집트 '로제타석' 상형문자 연구에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신의 예술혈통은 몽골 샤머니즘에서 왔다 굿 이것을 현대는 미디어라고 한다. 평화=화해=형통

뇌졸중 직전의 글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1996)>에서 그의 예술적 골자를 어떻게 요약? 인터넷을 연상시킨다.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  1995

- 다가올 정보화 사회에 디지털 노마드 시대에 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백남준에게 굿은 모든 예술의 원초적 근원이었다 (To Nam June Paik the shamanistic ritual of Good is the primitive source of art) -시게코.

(1) 자신의 예술혈통과 족보를 총정리] 그중 일부를 소개하면 1)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시베리아-몽골리언 요소를 좋아한다(Ich mag das chaotische sibirisch-mongolische [독일어])“Ich mag das chaotische sibirisch-mongolische 이히 마그 다스 카-오티슈 지비히슈-몽골리슈 <백남준 서양 친구들 겁줄 때 항상 하는 말이 "나 칭기즈칸 후손이야!" 서양사람들 지금도 칭기즈칸 하면 무서워한다>

(2) "굿의 어원은 '' 즉 정신자체이니 미디어와 굿은 거의 같은 말이다 [한국어]“

(3) "의심할 여지없이 나의 몽골 선조들은 이 문화 노마디즘(인류학적인 관점)으로 내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Mes ancêtres mongols m'inspirent sans doute ce nomadisme culturel [프랑스어]" 등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4)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그의 예술은 몽골 전승의 굿과 샤머니즘에서 온 것이고, 전자시대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미디어'라는 해석이다. 백남준에게 '미디어'란 중세 개념으로 신과 교류하는 '매개체(meditator)' 혹은 '영매(靈媒)'를 뜻한다. 다시 말해 굿과 샤머니즘, 미디어와 퍼포먼스는 서로 다른 게 아니라 같다는 설명이다.

(5) 왜 샤먼이 소통의 여왕인가? 산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로 데려다가 소통을 시키기 때문이다.

백남준에게 몽골 굿(샤머니즘)은 모든 예술의 원초적 근원이었다 [巫舞] 이에 열광하는 이유가 거기에 원시적 생명력이 넘친다고 생각하기 때문. 우리의 굿에서도 보면 무당이 산 자와 죽은 자마저도 소통시키는데 세상에 이렇게 원활할 '미디어'가 어디 있는가.

(6) 백남준과 클로드-레비스트로스

이런 면에서 볼 때 백남준은 서양과학이 추방시킨 야생적 사고의 복원을 요구한다. 서구에서 끔찍한 나치 역사가 그에게 큰 각성을 주었으리라. 그래서 백남준은 야생적 사고와 원시적 상상력 결핍이 현대인의 비극은 낳는다고 봤고 이것은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레비스트로스와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구조주의적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철학과 역사가 해결 못 하는 부분을 대답하려고 하다)는 선사시대가 21세기보다 더 선진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철학과 역사학의 한계를 뚫으려고 하는 학문이 인류학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으로 총체적 의미를 찾으려 했고 무능력한 철학을 대체하고 진리를 모색하려고 했다. 그래서 프랑스 엘리트 철학자 사르트르를 비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점도 있다. 이들은 주위만 맴도는 이전의 철학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르트르는 투신이라는 방식의 행동주의로 나갔고,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보다 더 멀리 단호하게 나아갔다.

(7) 그러면서 백남준은 말하기를, 그의 어머니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했다. 물론 백남준 자신은 어머니처럼 샤머니즘을 종교로 믿는 건 아니나 샤머니즘에서 예술적인 영감의 소재로 끌어와 샤머니즘을 예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작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장면

(8) 한반도의 통일과 세계의 평화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미디어란 '영매(靈媒)', 중매자(meditator)', '매치메이커(match maker)', '피스메이커(peace maker)': 그렇다. 우리는 강대국 속 분단국가에 살면서 어느 나라보다 많은 고통을 받았기에 그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 그것도 부족하면 미디어 그 자체인 백남준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미디어란 '영매(靈媒)', 중매자(meditator)', '매치메이커(match maker)', '피스메이커(peace maker)'로도 해석되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런 미디어가 돼야 한다.

<결론> 백남준도 "한국이 20세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에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 하지 않았나. 우리도 백남준이 앞서 보여준 삶을 본받아 오랫동안 나라 없이 떠돈 유태인이 인류문화사에 크게 기여했듯 21세기에는 우리도 세계문명사에 기여해야 한다. 우선은 주변 강국에 도움이 되는 통일을 슬기롭게 유도해 세계평화에도 촉진제가 돼야 한다.

5 <1984630일 중앙일보 기자 : 그럼 선생님의 예술철학은 뭔가요? -

대답: "관념(백남준은 헤겔 관념주의 반대, 니체의 디오니소스 축제 중시)을 무너뜨리는 것이지요. 수직(일방소통)이 아닌 수평(쌍방소통)이에요. 인포멀한(정보지식적인 것) 거죠. 획일(나치즘 같은 일사불란한 것 독재 등등)을 막기 위해 자유로운 작업(창조를 위한 파괴, 실험, 우연한 발,견, 랜덤액세스, TV아트 등 미개척 분야 도전)을 합니다. 민중(축제가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춤을 추도록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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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백남준의 사이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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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삼요소 레이저아트

예술과 기술의 만남, 과학기술의 인간화 예술화

[1] 비디오아트와 레이저아트 차이는 뭔가? <*플럭서스 행위아트, 뉴미디어아트, 비디오 아트, 커뮤니케이션 아트, 레이저, 디지털 아트> 2000년 레이저 아트 작품 백남준 아트센터 원형 삼각형 사각형 유명하다. 또 묻는다 왜 백남준 육체로 하는 예술세계 퍼포먼스 아트를 중시했을까? 그 대답: 관념주의의 배격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예술적 실천 머리만 아닌 몸으로

사이버네틱스(인터넷의 전신)를 발명한 수학자 '노버트 비너'와 비디오아트(사이버네틱한 삶의 창시자)의 선구자 '백남준' 그리고 20세기 미디어론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비저너리였던 '맥루한' 이 세 3사람이 인터넷 지구촌 세상을 만들었다 그것을 공식으로 만든 것이다. 난해하다.

[2] '
예술과 과학을 연결한 모험가 백남준' 그의 레어저 작품에 대해 국제 과학 저널 <네이처>에는 어떻게 소개? 이에 대해 2000년과 2005년 두 편의 논문을 실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예술역사가 마틴 켐프 교수가 기고했다.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에 설치됐던 현재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소장한 '삼원소'에 관한 작품 해설과 평가다. 백남준이 레이저 전문가인 노먼 밸러드와 협업한 미디어 작품 <삼원소>는 물, , 흙을 상징하는 삼각형, 원형, 사각형의 세 기하학적 형상으로 구성돼 있다. 레이저, 거울, 프리즘, 모터, 연기를 활용해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현대 물리학 기술을 활용하여 고대 원형을 우주의 무한 공간으로 확장한 작품이다. 새천년을 맞는 인류에게 주는 선물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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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백남준과 B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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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젊은이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BTS> BTS 유엔에서 Love Yourself 격려사 유명하죠. BTS 유엔에서 Love Yourself 격려사. 그런데 BTS 그것을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그것을 실천하고 있기에 세계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파장과 영감과 용기를 주는 것이다. 세계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인생을 포기하지 말라고. 반드시 새로운 가능성의 시대가 올 수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백남준은 이미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열등감 건강하게 벗어나지 못하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자신감을 가지자" <서양과 게임에서 이기지 못하면 그 룰을 바꾸자> 살아생전 청년들 '강한 이빨론' 강조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후예인 BTS, 지금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는 젊은 대중문화 전사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한다.

백남준 예술관에서는 대중예술을 고급 예술에서 전혀 배척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급 예술에 대중예술을 포함 시키려고 한 것이다. 예를 들면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에서 고급 예술과 대중예술을 차례로 보여주고 그 비중도 반반씩으로 배정했다. 그것은 백남준이 대중 예술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 즉 고급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 면에서도 백남준 매우 앞선 사고를 한 것이다. 요즘 케이팝의 영웅이 된 방탄소년단(BTS)을 백남준은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백남준이 없었다면 BTS도 없었다. 백남준은 1인 미디어 시대 SNS가 없었다면 BTS도 존재할 수 없었다. 2 코드 백남준 당시에 BTS가 있었으면 BTS를 함께 했겠지만 당시 BTS가 없었기에 영국의 천재적 엔터테이너 Bowie와 같이 작업하다 지금이라도 BTS 해야 한다. 3 코드방탄소년단, 발 딜런, 촘스키 이들의 공통점은 반전 평화세력이다. 백남준이야말로 평화주의자다.

BTS Have A Message For Their Fans: “Hope Is Everywhere - Keep Going” 미디어(미디움 중간자)Peace Maker 혹은 Match Maker. 즉 숨 막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전 세계인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특히 절망과 좌절에 빠진 전 세계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영감과 용기를 주는 메신저이다.. 우리 시대의 백남준이자 전 지구를 해원상생(win win world)으로 이끄는 은하수 같은 글로벌 안테나이다.

<방시혁 누구인가?> 그는 서울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다. 2013년 방탄소년단을 데뷔시켰고, 5년 만에 이들을 세계 최고의 보이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정부는 그 공로를 높이 사 '2017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시상식에서 해외진출 유공 문화교류 공헌 부문 최고상인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여러분! 저는 꿈은 없지만, 불만은 엄청 많은 사람입니다 방시혁. 역설적 독설이다. 대통령 표창받은 방시혁 대표 방시혁은 김민기 연상시킨다. 산업시대의 김민기와 정보사회의 방시혁 뭔가 통한다. 다 미술과 미학을 전공했다. 일단 백남준, 방시혁 대표의 S대 졸업 축사 어떻게 볼까? 그를 엄청나게 칭찬했을 것으로 본다.

방시혁 서울대 졸업생 축사를 한번 읽어보세요. 백남준은 전 세계를 다니면 숨이 막히게 하는 장애물에 구멍을 내가 다녔다. 나중에 이것이 귀찮으니까 인터넷을 착안했다. 방시혁 서울대 졸업 축사를 보면 우리가 나갈 길을 잘 제시한다.

"나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다만 분노(불만)가 있을 뿐입니다. 이 분노를 풀려고 하다 보면 뭔가를 성취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분노를 풀어줄 수도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론으로 나는 격하게 분노하면서(불만을 터뜨리면서) 소소한 행복을 맛보며 살고 싶습니다" -방시혁

8편견은 어디서 오나? 무지에서 온다. 뭘 모르니까. 자신을 정당화한다. 무지가 편견을 낳는다. 타인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더 나아가 자신마저도 억압한다. 그런 굴레에 갇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마음의 문을 열고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각자가 날마다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우리 사회가 보다 너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 BTS 예술혁명의 저자 이지영 철학 교수

BTS 왜 성공했나? -서울대 언론정보학 홍석경 교수의 분석: 세계의 청소년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기 때문이다. BTS 팬들은 왜 그들은 좋아하는가? 물어보면 "내가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나를 올라오게 하고 구해졌다"는 댓글이다. 절대 절망과 불안에 빠진 젊은 세대의 구세주인 셈이다. 한국어로 노래하는 방탄 소년단, 처음에는 미국이 무시했죠 <BTS 기사 국민일보>

그는 디지털 시대에 맞는 소통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팬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다양한 콘텐츠로 탄생해 막대한 파급력을 발휘했다. 데뷔 전부터 현재까지 방탄소년단이 성장하는 모습을 콘텐츠로 제작해 유튜브에 업로드했고, 멤버들의 일상적인 생각은 SNS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 모바일이 더 편한 세대였기 때문에 통할 수 있었던 방법들이었고, 때문에 많은 이들이 방탄소년단의 음악에 친근감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었다. 물론 좋은 음악과 좋은 무대를 보여주기 위한 끝없는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BTS가 성공한 것이 우리의 희망인 이유

BTS가 성공한 것이 우리에게 좋은 소식인 것은 성공할 사람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아직도 성공하면 안 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다. 그런 측면에서 BTS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용기를 주나. 10대 청소년들에게 아니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지각 있는 어른들에게 그럴 것이다. 이것은 백남준이 원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BTS 팬들은 왜 그들은 좋아하는가? 물어보면 "내가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나를 올라오게 하고 구해졌다"는 댓글이다. 절대 절망과 불안에 빠진 젊은 세대의 구세주인 셈이다.

[백남준: 강한 이빨론] 백남준은 1993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국 휘트니 비엔날레전 개막에 열면서도 미국에게서 배우는 것 이상으로 그들에게 한 수 가르쳐 줘야 한다고 신문 기고문에서 주장하다. “한국문화와 지극히 이질적인 미국 전시회일 뿐이다란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휘트니비엔날레를 통해 선진국에 딴죽을 걸 수 있는 불확실적 선택과 도박술을 배우자고 주장했다.

<
선진국에 딴죽을 걸 수 있는 불확실적 선택과 도박술을 배우자> "나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전람회를 끌어온 것은 아니다. 청년들에게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 이 고생스러운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백남준도 그렇지만 BTS 한 마디로 줄이면 세계의 미디어다. 백남준과 방시혁은 잘 통한다. 터무니없는 꿈에 대한 강박도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분노와 불만을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켜 보다 인간적이고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강렬한 열망과 의지와 비전이 보인다. 백남준과 똑같다.

들뢰즈나 백남준이나 (노마드)탈영토시대를 주장, 이제 땅의 영토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상 온라인 사이버 영토의 크기가 중요하게 되었다. 거기에 어떤 콘텐츠를 남기고 어떤 지도를 그리고 어떤 메시지를 남기느냐가 중요하다.

수업을 마치고 나서

목포대 미술학과 특강 후 기념사진 2021.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