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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 라우센버그, 두 사람 어떤 관계(?)

[존 케이지] 1952년 8월 29일 뉴욕 우드스탁에서 <4분33초> 초연
[라우센버그] 1953년 뉴욕 Stable Gallery에서 <white painting> 전시


백남준(1932년생),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년생)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다.

Robert Rauschenberg at an exhibition of his work at the Stable Gallery, in New York, in 1953. Photograph by Allan Grant / The LIFE Picture Collection / Getty

'흰색 회화'(1951) 앞에 앉아 있는 라우센버그. 백남준 '영화를 위한 선(1961)' 초기 작품에 영감을 주다

흰색은 원초적인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든 가능성을 수용하는 색이다. 동양의 흰색은 무색이 아니고 유색이며 모든 색이 숨어 있는 색이다. 라우센버그는 그림이란 화면에 그려진다는 고정관념을 깨다. 시대적 관점을 뛰어 넘는 예술에 대한 생각은 수행자를 닮았다. 득의망상( 得意忘象 뜻을 얻으면 상을 버린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존재하는 것은 사라진다. 화이트 페인팅이 그렇다.

라우센버그는 존 케이지의 유명한 작품 4분 33초 침묵 음악에도 영감을 주다. 라우센버그도 블랙 페인팅 레드 페인팅을 그렸지만 블랙 페인팅하면 역시 유럽미술의 대가(Classical Master) '고야'가 있고 반면 현대미술에서 화이트 페인팅하면 '라우센버그'가 있다. 개념과 관념은 서로 반대개념이다. 개념은 창조적인(유동적인) 것이고 관념은 창의적이지 못한(고정적인) 것이다. 이 두 개를 혼돈하기 쉽다. 라우센버그는 일종의 선(Zen) 페인팅이고 개념미술이다.

<참고자료> 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7611

 

‘보이지 않음’을 표현… ‘諸行無常’을 담다 - 현대불교신문

중국·티베트 등 아시아 여행 내면적 가치 대한 성찰 계기 흰색 캔버스에 흰색을 페인팅 먼지 등 보이지 않은 것 표현 백남준에게도 깊은 영감 영향 예술은 정신의 자유서 나온다 길을 가다가 무

www.hyunbulnews.com

禪과 현대미술 -로버트 라우센버그 편 : (Robert Rauschenberg)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흰색그림이다. 흰색 캔버스(동일한 크기의 7개)에 흰색의 물감을 칠하여 모두가 흰색의 캔버스로 되었을 때 작품은 완성이 된다. 얼핏 보면 그냥 흰색의 캔버스 7개가 옆으로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다. 7개의 캔버스를 약간의 간격을 둠으로 해서 벽과의 관계성을 새롭게 하고 있다. 하지만 색에서는 벽의 색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아 벽의 또 다른 유형으로 볼 수도 있다.

라우센버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 작품을 하였을까? 백남준은 이 작품을 보고 크게 영향을 받아 <영화를 위한 선(1962~64)>을 제작하기도 하였을 정도로 이 작품은 당시에 커다란 논란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흰색 캔버스에는 무수히 많은 먼지와 미생물 등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존재하는 존재성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백남준은 흰색 스크린에 영사기를 비춤으로 해서 보여 지는 공간의 먼지 등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보여준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라진다. 시간성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먼지처럼 흩어지며 인연에 의하여 다시 새로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선(禪)적 사유는 당시에는 많은 논쟁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일정부분 이어지고 있다고 보여지지만, 서양인의 관점에서 이러한 인식과 이를 작품으로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은 작가의 커다란 인식의 전환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영화를 위한 선(1961)

<참고사이트> www.kmdb.or.kr/story/14/1062

 

영화를 위한 선(백남준, 1964)

‘~을(를) 위한 선’이라는 제목이 붙은 백남준의 작업은 1961년부터 196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가장 먼저 선보인 작업은 <머리를 위한 선>(1961)으로, 작곡가 라 몬테 영(La Monte Young)�

www.kmdb.or.kr

<영화를 위한 선(1962)> ‘비어 있는’ 필름의 프로젝션이다. 즉,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리더 필름을 영사기에 넣고 빛으로 쏴 흰 화면을 만든다. 이 화면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필름에 난 스크래치나 묻어 있는 먼지 때문에 무언가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것뿐이다. 일반적으로 필름 프로젝션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의 형식과 내용은 어디에도 없는 이 반영화(antifilm)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존 케이지는 이미지 없이 프로젝션 되는 <영화를 위한 선>을 보고 라우센버그의 <흰색 회화 White Painting>(1951)를 떠올렸다고 한다. 케이지가 라우센버그의 회화에 영향을 받아 <4분 33초>(1952)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라우센버그는 “캔버스는 절대로 비어있지 않다”라고 믿었고, 케이지는 “소리는 언제나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이에 응답했다. 그림 없는 회화, 소리 없는 음악, 그리고 이미지가 없는 영화. 서로 상이한 매체지만 이들은 모두 비어있는 것이자 가득 찬 것에 대한 실험이었다.

라우센버그가 시각의 영역에, 케이지가 소리의 영역에 있었다면, 유령과 같은 이미지가 물러난 백남준
의 화면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기대되는 서사가 아니라 영화를 구성하는 물적 조건인 기계 장치가 만들어내는 시간은 투명하다. 볼 것 없는 화면과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소리 앞에서 관객은 자기 자신의 시간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게 된다. 백남준은 기본적으로 지루함의 미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지루함이 발생할 때 경계가 사라지는 일종의 미학적 순간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루함은 흥미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음악의 전시’ 서문에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니 해보라. 처음에는 (아마) 흥미롭겠지만 나중에는 지루해질 것이다. 견딜 것! (아마) 다시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지루해질 것이다. 견딜 것!” 백남준이 보기에 영화라는 것은 시간을 구조화하는 주요한 시간 기반 매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드러내기 위해 영화를 지배하던 형식과 내용이 직조된 기존의 구조를 제거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한범

<New Yorker> www.newyorker.com/culture/cultural-comment/how-to-look-at-a-rauschenberg

 

How to Look at a Rauschenberg

How long should a person regard a Rauschenberg painting? Some people walk right by, some stare thoughtfully—and the problem is not trivial.

www.newyork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