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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로트렉] 앵콜전시 '한가람미술관'1층, 6월 6일

[툴루즈로트렉-앵콜전시]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제1,2전시실 2020년 6월 6일(토) ~ 2020년 9월 13일(일), 매주 월요일 휴관 10시 ~ 19시 / 18시 입장마감 TV CHOSUN, 예술의전당 주관 메이드인뷰, 한솔BBK 협력 Herakleidon Museum, Arthemisia, Aurea 후원 주한 프랑스대사관, 주한 프랑스 문화원, 우리은행, 기술보증기금, 제주신화월드, 한국전시기획사협회 일반 15,000원, 청소년 12,000원, 어린이 10,000원 문의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 150길 23(논현동) 2층 Tel 02.3446.9542 -Fax 02.3446.9543 전시 구성 EXHIBITION SECTIONS

[Section ①] 연필 드로잉
연필은 툴루즈 로트렉의 평생 친구였다. 로트렉은 늘 연필을 지니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 장소, 상황에 따라 떠오르는 영감을 끊임없이 드로잉 했다. 로트렉은 연필과 펜으로 그리는 스케치나 드로잉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바로바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느꼈으며, 유화와 판화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여겼다. 그는 평생 이 생각을 버리지 않고 원칙처럼 지켰다. 로트렉의 연필은 어린 시절 다리가 부러진 후 오래 침대에서 지내는 동안 그의 충실한 동반자였으며, 삶의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또한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는 사이 작은 형대의 일탈로도, 세계를 보고 해석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했다. 친구인 반 고흐(Van Gogh)도 로트렉과 거의 같은 운명을 경험했듯이, 1899년, 그가 3개월 정도 수용되어 있던 정신병원을 탈출하기 위한 열쇠를 정확히 찾아내는 유쾌한 공범이기도 했다. 드로잉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얼굴, 포즈, 실루엣, 캐리커처 등의 스케치이다.

이 섹션에서는 놀랍도록 현대적이고 절묘한 로트렉의 연필과 펜 드로잉을 만날 수 있다. 그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연필을 놀려 사물을 묘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연필 드로잉이 자신의 삶을 지지하는 원동력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로트렉이 17살 때 아버지를 그린 <알퐁스 드 툴루즈 로트렉(Alphonse de Toulouse-Lautrec) 백작의 초상, 1881년>과 로트렉이 자신의 노골적인 누드를 재치있게 표현한 작품 <툴루즈 로트렉 누드(Toulouse-Lautrec Nu),1894년> 등 희귀한 드로잉 작품들도 선보인다.

[Section ②] 뮤즈
‘몽마르트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은 파리의 밤 문화를 화려하게 꽃 피워낸 몽마르트의 여인들을 즐겨 그렸다. 그가 화폭에 그들을 희극적으로 또는 비극적으로 묘사한 것은 그들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위선과 가식으로 똘똘 뭉친 상류사회를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는 뮤즈들을 통해 화려했던 한 시대와 그 시대를 대표하는 파토스(pathos, 애수)를 정직하고도 진실한 이미지로 세상에 남겼다. 로트렉의 작품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하나는 도시의 밤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창작한 광고 포스터들이다. 로트렉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스타들을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자신 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그려냈고, 연예인들은 이 포스터 덕분에 일약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로트렉은 파리의 유명한 카바레 스타인 제인 아브릴 (Jane Avril, 1868~1943)과 친분을 쌓았고, 그녀는 로트렉이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켜준 친구였다.

로트렉은 그녀를 <디방 자포네(Divan Japonais), 1893년>라는 포스터에서 카페 콘서트를 관람하는 매력적인 여인으로 그려 내기도 했지만, 다른 포스터 <에글란틴 무용단(La Troupe de Mile Églantine), 1896년>에서는 다른 댄서들과 함께 자유롭게 캉캉 춤을 추는 모습도 보여준다. 로트렉이 제인의 옷을 입고 있는 유명한 사진(1892년)은 지금까지도 로트렉의 유머감각을 나타내는 불멸의 사진이 됐다. 이 의상은 주간지 ‘쿠리에 프랑스’가 주최한 여성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코스프레한 것이다. 로트렉의 포스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는 싱어송라이터 겸 샹송가수 아리스티드 브뤼앙(1857~1925)이다.
로트렉은 여러 작품에서 브뤼앙을 묘사했는데, <앰배서더 카바레의 아리스티드 브뤼앙(Aristide Bruant dans son cabaret), 1892>이라는 포스터에서 그는 풍성한 망토를 걸치고, 챙넓은 모자를 쓰고, 붋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는 브뤼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일한 색채가 화면을 넓게 차지하게 구성한 로트렉 만의 독특한 현대적 감각은 예상치 못하게 그를 일약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배우이자 가수인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 1868‒1944)의 개성에 매료된 로트렉은 그녀에게 석판화로 표지를 만든 앨범을 헌정했다. 이베트의 트레이드 마크는 팔꿈치까지 덮는 길고 까만 장갑이었다. 로트렉은 제인 아브릴이 부각된 ‘디방 자포네’ 포스터를 그리면서 얼굴은 보이지 않고 길고 까만 장갑만 보이는 인물을 무대에 그려 넣음으로써 그녀가 바로 이베트 길베르임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했다. 이베트의 이미지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형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 된 것은 전적으로 로트렉의 그림 덕분이다.

[Section ③ ] 몽마르트 카페
이번 섹션은 대중적인 카바레 쇼에서부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리는 그리스의 비극이나 클래식 콘서트 같은 고급스러운 공연에 이르기까지,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장면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소개된다.
로트렉이 카페나 극장의 장면을 그린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는 일본의 목판화나 풍자화가인 오노레 도미애(Honore Daumier)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영향으로 빛과 그림자의 역동적인 대조 및 효과적인 움직임, 과감한 생략이나 단순화를 통해 드라마나 코미디의 강렬함을 표현한다. 또한, 로트렉은 인물의 특징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번 섹션에 소개되는 작품들에는 1893년 ‘르 카페 콩세르(Le café Con- cert)’ 컬렉션을 위해 제작된 웃음을 자아내는 석판화들도 포함돼 있다.
로트렉은 “어떤 쇼가 벌어지든 상관없다. 나는 언제나 극장에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런 로트렉이 쇼 비즈니스 세계에 발표하는 작품들은 언제나 매혹적이어서 파리지앵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전했다.

ection ④ ] 여자
현대 프랑스 문학의 경우 (플로베르에서 모파상의 단편소설까지)와 마찬가지로, 추악하거나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는 주제와 등장인물은 대게 예술로 대체됐다. 세기의 전환기 파리. 카바레의 화려한 무대 위에서 캉캉댄서들, 가수들, 코메디언들이 펼치는 퍼포먼스와 춤과 공연 덕분에 웃음과 박수가 끊이지 않던 파리지앵들의 생활은 로트렉의 눈에는 그림의 아주 좋은 소재로 비쳐졌다.
그가 그린 여성들의 초상화는 아무런 과장이나 미화없이 보이는대로, 아마도 그 이상 보다 더 진지하게 그려낸 그림들이다. 로트렉 이전에는 가수나 여배우 등 연예인들의 강요된 관능과 유혹 아래에 감춰진 억눌린 열정, 외로움 그리고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을 아무런 편견없이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성공한 예술가는 없었다. 1892년에서 1895년까지 3년동안, 로트렉은 몽마르트의 유곽에서 일주일내내 보냈다. 여기서 그는 몇 시간이고 여자들이 쉬고 있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들과 함께 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 여성들의 자유분방한 일상생활이 로트렉의 눈에는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프랑스 19세기 후반, 판화의 최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로트렉의 <엘르(Elles).1896> 석판화 연작은 이런 환경을 바탕으로 탄생했고, 또한 이런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들이다. <엘르> 연작은 처음 발표된 이후로도 여러 차례 한정판 책으로 묶어 출판됐다. 로트렉이 그린 대표작 중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꿈’을 표현한 그림이 있다. 로트렉은 아프리카로 가는 배 위에서 이 신비한 여성과 마주쳤고 헤어졌다. 로트렉은 이 여성을 <54번 객실의 여행자(The Passenger in Cabin 54), 1896>라는 타이틀로 아주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 냈다.

[Section ⑤] 잡지와 출판
19세기 말 프랑스는 각종 잡지가 쏟아져 나온 매거진 저널리즘의 황금기였다. 당시 파리 미술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로트렉은 여러 잡지로부터 원조청탁이 쇄도했다. 로트렉이 잡지를 위해 제작한 일러스트나 만화, 그래픽 디자인 등은 로트렉 예술의 중요한 영역 중 하나이다.
이 시기에 파리에서 출판되던 풍자 잡지<르 리르(Le Rire), 비웃음>은 스타들의 밤문화를 비록해서, 유명인사들에 대한 가십거리와 정치 풍자, 부패, 군대 스캔들에 초점을 맞춘 기사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로트렉은 이 <리 리르>잡지에 풍자 그림을 자주 기고하는 단골 작가였다. 이 섹션에는 로트렉이 기고한 그림들과 잡지 실물 등이 소개된다. 1893년 로트렉은 무정부주의자인 조르주 다리앵(Georges Darien)이 편집한 주간지 ‘레스카 무슈 L’Escaramouche,전투)'에 몇 편의 일러스트 작품을 기고했다.

이 작품들은 사라베른하르트(Sarah Bernhardt)와 관련된 비극의 장면을 포함한 연극 주제들을 다루었고, 또한 정치, 사회적 풍자의 이미지들을 다루었다. 로트렉의 아버지 알퐁스 로트렉 백작이 샌드위치를 마구 꿀꺽꿀꺽 삼키는 모습의 일러스트에 노골적인 캡션 “천박해! 진짜 천박해!”를 붙인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인물의 특징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퉁렬하게 표현해 내는 로트렉의 천재성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로트렉은 낯 생활의 대부분을 자신의 스튜디오와 잡지 <라 레뷰 블랑슈((La Revue Blanche>’의 사무실에서 지냈다. 화가들이나 작가, 음악가 또는 언론인, 학자들과 다양한 우정을 쌓았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1895년, 로트렉은 <라 레뷰 블랑슈>의 광고 포스터를 편집자의 아내인 미시아 나탕송 (Misia Natanson)을 모델로 디자인했다. 이 포스터는 파리의 큰 화제가 됐고, 미시아도 일약 파리의 유명 인사가 됐다. 프랑스 공화국의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Eugéne Benjamin Clemenceau)가 쓴 책, <시나이 아래에서(Au Pied du Sinai>의 표지와 책에 실린 모든 삽화를 로트렉이 그렸는데, 이 작품들은 유럽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 커뮤니티의 삶을 블랙 유머로 묘사하고 있다. 처음 디자인한 표지와 3점의 일러스트는 당국에 의해 게재가 거부당한 작품 4점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이 일러스트들은 당시 프랑스의 정치 상황을 아주 날카롭고 적나라하게 풍자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 섹션에서는 또한, 로트렉이 일생 동안 가장 열정을 쏟은 위대한 석판화(lithography)의 세계를 소개한다. 로트렉이 직접 제작한 석판화의 판석과 스케치 등을 통해 석판화 작품이 탄생하게 되는 창작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석판화 판석에는 당대 최고의 작곡자이자 바순 연주자인 데지레 디하우(Desiré Dihau)의 바순 연주 모습을 담은 작품 <당신께 Pour Toi!), 1893>가 새겨 있다.

[Section ⑥] 말과 승마
로트렉의 친구이자 저널리스트인 타데 나탕송(Thadée Natanson)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앙리는 남성보다는 동물을, 동물보다는 여성을 좋아했다. 그는 미칠 정도로 말을 좋아했지만 말을 타지는 못했다.” 귀족들 틈에서 자란 로트렉은 말에 대한 열정이 컸다. 로트렉의 아버지 알퐁스 백작은 숙련된 기수였으며, 야외활동을 좋아해 말을 타고 독수리를 데리고 오랜 시간 사냥을 다니곤 했다.

이 섹션의 그림 중 일부는 로트렉의 청소년기 작품들이며, 로트렉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1899년 봄, 로트렉은 알코올 중독과 과대망상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로트렉은 요양원에서 퇴원하기 위해 종종 자신이 좋아하는 다양한 말의 드로잉을 그렸다. 석판화 <경마(The Jockey), 1899>는 이러한 작품 중 하나다.

1898년에 그린 <조랑말 필리베르(Pony Philibert)> 초상화도 이번 섹션에 소개된다. 그의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로트렉의 상태는 크게 악화되었고, 점점 더 움직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로트렉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많은 말들 중 마지막 말인필리베르를 이용해 파리 일대를 여행했다.

[Section ⑦] 현대 포스터의 선구자 툴루즈 로트렉
프랑스의 19세기는 예술가들의 역할이 급진적으로 변혁을 가져온 시기이다.그때까지 예술가들은 귀족이나 부유층 고객 만을 위해 예술품을 만들었다면, 이후부터는 그 동안의 진부한 작업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자신 만의 예술작품을 창작해서 프리마켓(시장)에다 팔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이 추구한 새로운 주제나 혁신적인 형태, 그리고 새로운 스타일은 산업지대의 도래 및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고객들을 끌어들이려고 애썼다. 19세기 중후반까지, 석판화나
사진 등 대량으로 예술품을 제작하는 새로운 방식이 개발되면서 일반 대중들도 예술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된 것이다.

또한, 1890년대 들어 컬러 인쇄의 기술적인 진보와 포스터의 거리 부착을 제한하는 법률의 완화로 인해 파리 시내 곳곳에는 광고 포스터가 넘쳐났다.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은 보다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포스터를 대량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로트렉은 사회, 문화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작품의 소재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댄스홀, 카페, 극장 등 번창하는 파리 ‘벨에포크’의 활기찬 매력을 포스터에 담아냈다. 로트렉의 포스터는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인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우키요에(부세회, 浮 世 絵)에서 영향을 받은 로트렉은 대각선 구도, 과감한 자르기, 배경 생략,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 굵고 진한 선, 사선 문양 등을 활용하여, 당시 화가들의 고전적인 회화 기법을 훨씬 뛰어넘는 솔직함과담백함을 보여주었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던 클로드 모네(1840-1926),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부르주아적인 전통방식을 거부하고 아방가르드 방식을 모색했다. 이런 로트렉의 미술적인 실험은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나타나는 계기가 됐다. 툴루즈 로트렉의 포스터는 최초의 현대적인 포스터로도 평가받는다.

당시의 수집가들은 그의 포스터를 높게 평가하였으며,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 가지려고 혈안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에밀졸라(Emile Zola, 1840-1902)는 그의 저서「작품(L’oeuvre)」(1886)에서 “이 젊은 화가가 모든 곳에서 전통적인 미술 아카데미를 모욕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19세기의 무정부주의이자 예술 비평가였던 펠렉스 피네옹 (FélixFénéon, 1861-1944)은 “감초를 사용해 민망한 쾌락을 느끼게 만드는 엉터리 그림들보다, 훨씬 활력있는 툴루즈 로트렉의 포스터를 손에 넣으라”,고 하면서 그의 포스터를 파리의 벽에서 떼어 가질 것을 부추기기도 하였다.

로트렉은 짧은 생애 동안 31점의 포스터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들은 예술가의 전위적인 시작 언어가 보다 폭넓은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역할을 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것은, 미술작품이 대중 소비를 위해 제작되고 활용되는 최초의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1890년대, 툴루즈 로트렉의 포스터에서 발견되는 예술 감각과 논리와 관행은 오늘날 현대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