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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문화기행

[백남준] 박생광의 무녀, 백남준의 전자무당

(지구촌 평화를 위해)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로 펼친 전자 굿/백남준이 비디오 선으로 펼친 지구촌 태평 성대를 위한 전자

굿/(세계 평화를 위한) 백남준의 비디오 굿/비디오로 굿을 하는 지구촌 전자무당 <수정중>

백남준은 굿의 소통방식을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굿의 소통방식은 서양의 소통방식인 산 자와 산 자의 소통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산 자와 죽은 자와의 소통마저도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초능력 소통(super communication)의 철학을 전자매체예술로 실험한 예술가다.

"무당이란 돈과 명예를 좇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는 치료사다. 굿은 종합예술이면서 토속신앙이고 흥겨운 잔치다" - 큰 무당 김금화 * 우리는 큰 무당을 '만신'이라고 한다. 신의 신이라는 최고 명칭을 붙인다.

한국의 '무녀'가 센가? 일본의 '기녀'가 센가?

박생광은 가야문화(가야금을 만들어낸 높은 수준의 문화국)의 전승자 "샤머니즘의 색채와 이미지, 무당, 불교의 탱화, 이 모든 것이 서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그야말로 그대로 나의 종교가 되는 것 같다" -박생광. 박생광은 100년에 한번 나올만한 천부적인 무녀인 김금화를 모델로 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박생광 I 무녀

<맺힌 '한(혹은 원)'을 '정(아무리 상대방이 원수로 보여도 예컨대 '측은지심[불교]'이나 '인의예지[유교]'의 마음)'으로 '승화'시켜 그걸 '신명'으로 풀어내다. 이런 구조 같네요> 맺힘-한-정-신명-풀림 '신명의 미학적 구조' -최광진

"무당이란 돈과 명예를 좇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는 치료사다. 굿은 종합예술이면서 토속신앙이고 흥겨운 잔치다" - 큰 무당 김금화 * 우리는 큰 무당을 '만신'이라고 한다. 신의 신이라는 최고 명칭을 붙인다.

고조선 무속, 고구려 벽화, 고려 탱화, 조선 민화, 단청 무늬 전통이 한국미술사의 근간일 수 있다. 백남준은 해학과 풍자, 신명과 판타지가 넘치는 민화를 높이 평가했다.그러면서 한국은 일본이 한국 민화 연구하는 것에 100분의 1도 못 따라간다고 혹독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추신> 문학 장르에서 '시(존재의 집 -하이데거, 인류 생명이 사는 집 즉 자궁)'는 절대 시대를 타지 않는다. 왜 그런가? 1 시는 언어이다 2. 시는 음악(리듬)이다 3. 시는 미술(이미지)이다. 4. 시는 춤(움직이는 몸짓)이다 5. 시는 시대 정신을 담은 혹은 그 경계를 넘어서는 사상이나 철학이다. 그렇게 때문에 문자 시대나 영상 시대나 구애 받지 않는다. 모든 예술과 철학이 시에서 나온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시보다 더 한 멀티미디어가 굿이다.

서양미술사가에게 세계미술사 맡기면 백남준 구석에 처박아둔다. 이제는 한국 출신 세계적 미술사가가 나와 세계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

결국 21세기 인간이 구원을 받는 길은 백남준 예술의 핵심어가 되는 '참여와 소통'이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파고 들어가야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맑스의 키워드는 착취와 소외를 극복하는 것이었다면, 백남준의 키워드는 배제와 불통(일방통행 one-way) 극복하는 것이다. 즉 참여와 소통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40년-50년 전에 백남준에게는 이런 철학을 예술 작품으로 퍼뜨렸는데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은 백남준을 몰랐지만 이런 개념을 그의 정치 철학의 키워드로 삼기도 했다. 물론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참신한 것이었다.

백남준은 변변하게 학력이 없다. 동경대 학사. 독일에서 3곳(뮌헨, 프라이부르크, 쾰른)을 다녔지만 학위가 없다. 그러나 1995년 뉴욕 유명 미대인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명예박사학위 받다 그래서 미대 학장도 잠시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그가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인사말을 해야 했고 단에 올라갔으나 아무말도 안 하고 '생큐'하고 내려왔단다. (내가 볼 때 이것은 고도로 계산된 일종의 퍼포먼스) 천재들에게 학위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미국의 천재급 빌 케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에게도 학위는 의미가 없었다.

<아래 사진> 백남준 여기 뮌헨 대학교(노벨상 수상자 40여명 넘게 배출한 유명 대학) 예술사학과에서 공부를 했지만 너무 보수적이라고 해서 1년 만에 때려치우고 다시 프라이푸르크 음악대학으로 학교를 옮기다

백남준 작품은 아주 단순하기에 Low Art로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철학이나 개념이 깊기에 High Art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백남준 그런 경계를 또한 허무는 작가다. 1984년 '굿모닝' 위성아트에서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을 기막히게 반반씩 섞어서 만들었다. 이런 점은 역시 미국에서 얻은 아이디어인지 모른다. 유럽은 아직도 고급 아트 취향이 많을 수 있다.

[우리는 백남준이라는 은하계 속에 살고 있다] (고)조선이라는 한자에서 조[朝] 자 구성을 보면 별(+)이 2개, 해(日)가 1개, 달(月)이 1개로 구성되어 있다. 2개 별 중 하나가 (위) 북두칠성이다. 백남준이 바로 이 북두칠성 은하수다. 왼쪽에 별이 위 아래로 2개 있고. 그 가운데 해가 1개 있다. 오른쪽에 달 1개가 있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라투르 교수와 기자간담회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우리시대 최고의 석학이다. // [서구는 한번도 근대인 적이 없다 -라투르(프랑스 인류학자) 이 말은 백남준 생각과 비슷한 서구지식인의 고백이다] 백남준의 위대한 점은 근대서구문명이 잃어버린 신성을 다시 회복하여 유럽의 보편주의가 아니라 세계의 보편주의로 나아가려는 데 있다. -김남수 "가장 강력한 커뮤니케에션의 수단은 심령력(PSI) 즉 정보의 힘이다" -백남준 [평] 백남준은 지식보다 정보를 더 중시했다. 그래서 뉴욕타임스 등 신문에서 시대정신을 뽑아내다. 물론 신문에는 가짜뉴스가 많지만 그 중 0.01%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백남준은 그걸 찾아낸 것이다.

한국의 점잖은 학자들은 맑시즘과 에로티시즘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백남준의 핵심은 맑시즘과 에로티스즘에 있다 그래서 백남준에 대한 좋은 책이 나오지 않는다. 이번에 뉴욕특파원을 지낸 남정호 기자가 쓴 백남준 책에서는 처음으로 에로티시즘을 조금 언급하고 있다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은 백남준의 은하계(galaxy) 속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백남준의 인터넷 젖줄(은하수가 가득한 은하계, milky way, galaxy)을 먹고 살고 있다. 은하계/은하수(galaxy), 그리스어 γαλαξίας (galaxías 우유로 만든 도로)

[엔지니어 예술가로서 백남준] 그의 비디오 합성기의 개발 과정”이고 다른 한 편은 “백남준의 기술철학: 노버트 위너와 마샬 맥루헌의 영향을 중심으로”이다. 첫 번째 논문에서는 비디오 합성기의 역사적ㆍ기술적 근원으로 오디오 합성기, 백남준의 초기 예술 작업, 비디오 합성기의 착안과 개발의 진행(1963-1969), 시걸의 영향과 비디오 합성기의 완성, 방송에서의 성공과 실패, 1970-1974, 비디오 합성기라는 기술과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같은 주제를 다룬다. 두 번째 논문에서는 1960년대 백남준의 “TV 철학”,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백남준의 ‘사이버네이티드 아트’, 맥루헌의 ‘쿨 미디움’으로서의 TV, 백남준 기술철학의 영향과 Radical software, 바이오 아트를 통한 기술 낙관론과 기술 비관론 극복 같은 주제를 다룬다. 이 두 논문은 본 연구를 시작하게 된 두 가지 문제의식에 대한 연구자의 결과물이다.

백남준은 1963년부터 그의 평생 친구였던 일본인 엔지니어 아베 슈야(Abe Shuya)와 함께 무선으로 조종하는 K-456이라는 로봇을 만들어서, 이를 가지고 미국에서 퍼포먼스 아트를 선보였다. 그는 동시에 비디오 합성기(video synthesizer)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비디오 합성기 직전에 발명되었던 오디오 합성기가 합성된 소리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비디오 합성기는 흑백 이미지 몇 개를 비선형적으로 합성하고 여기에 색을 입혀서 총천연색으로 매 순간 변하는 시각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백남준의 예술로 떠올리는 작품들 대부분은 비디오 합성기를 통해 만들어진 합성된 이미지를 이용한 것들이었다. 그는 1970년에 보스턴의 WGBH 방송에 사용될 수 있는 최초의 비디오 합성기를 개발했는데, 이러한 기술은 그의 예술관과 예술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 연구는 비디오 합성기, 로봇과 같이 예술가 백남준이 자신의 예술적 작업을 위해 개발한 기술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이러한 기술이 백남준의 예술에 미친 중층적인 영향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예술가는 자신이 생각한 특정한 목적을 위해 기술을 개발하기도 하고, 기존 기술을 변형시켜 이를 응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기술의 사회적 사용과 마찬가지로 기술이 예술에 응용되어 낳는 결과 역시 온전히 예측가능하거나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기술은 예술에 새로운 비틀림과 균열을 만들어서, 예술가가 의도한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예술가의 작업을 이끌 수 있으며, 그 사회적 영향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기술과 예술의 상호작용 역시 비선형적이고 불확실하다는 점을 드러내려는 것이 본 연구의 강조점이다.

<예술이란 자기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서양 동네에서 동양 작가가 그렇게 하기는 힘들지만 그렇게 했다. 앤디 워홀 그림을 누가 예술로 보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전시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백남준은 첫 전시에서 전시장 입구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대가리를 걸어놓았다. 한국의 '굿판'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백남준은 서구방식의 전시방식은 완전히 전복시켰다. 그리고 충격을 줬다. 백남준은 첫 전시에서 서양식 전시방식에 시비를 건 것이다. 그래서 서양식 전시 방식과 전혀 다른 새로운 전시방식을 취했다. 그게 바로 한국의 맘판 놀이굿처럼 굿의 형식을 취했다. 그것이 진정한 전시라고 믿었다. 서양인을 비웃는 백남준의 표정을 보라. 서양인들 똥씹은 모습 얼떨떨해지다 정신을 못 차린다. 백남준 예술이란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 그걸 그대로 실천하다.

모든 예술의 최종단계는 황홀경 신접 존재의 저 밖으로 나올 때 황홀경이 온다는 백남준의 에세이다. "나는 항상 내가 아닐 때, 나이고 나는 내가 나일 때 내가 아니다(I am always, what I am not and I am not, always what I am -Sartre)". 즉 백남준의 황홀경은 내가 남을 위해서 존재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 실존주의 맑시스트 철학자 사르트르와 100% 같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