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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화전] '스무빛깔 인생의 심리초상: 우리 이야기가 역사가 될 때'

<이은화전> [스무 빛깔 인생의 심리초상 <Tell me the story: 우리 이야기가 역사가 될 때>

성남은 모순적인 도시다. 첨단 IT기술의 상징인 판교테크노밸리와 개고기의 메카로 불리며 철퇴 대상으로 낙인찍힌 모란민속5일장이 공존한다. 정치, 교육, 부동산, 재건축 등 첨예한 사회적 이슈에서 빠지지 않고 늘 거론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성남은 다시 신도심과 구도심으로 양분되고, 두 지역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성남시민들은 타 지역민들에 비해 정체성이 약한 편이다. 특히 분당, 판교로 대변되는 신도심 주민들에게 성남인의 정체성은 그리 크지 않다. 성남시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대규모 도시빈민투쟁 광주대단지(1971)’ 사건을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다. 사실 성남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는 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텔미 더 스토리: 우리의 이야기가 역사가 될 때는 성남시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남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탐색해보는 미술 프로젝트다. 도시는 거대한 욕망들의 집합체다. 과거 작업에서 나는 도시 자본가들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거나(신바벨 도시(2016)/금지된 영역(2023)), 도시인들의 숨겨진 감정 상태를 담은 초상화 연작(대화연작(2004)/숨겨진 표정(2022))을 제작했었다. 이를 위해 컴퓨터 자판의 기호나 문자, 회화, 기성 오브제, 조명 설치, 3D 프린팅 등 다양한 방식과 매체가 활용됐다.

이번에는 내가 거주하는 도시와 이웃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실제 성남시민들을 인터뷰하며 이야기를 수집했고, 이를 텍스트와 영상, 회화로 기록했다. 미술과 기록이 융합된 프로젝트이기에 미술 창작이라는 미술가의 사적인 행위를 공공의 영역으로 확장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인터뷰 참가자는 SNS를 통해 공개 모집했고, 때로는 직접 섭외하거나 지인의 소개를 받았다.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삶의 배경을 가진 20명의 성남시민을 인터뷰이로 만날 수 있었다. 분당아름다운인생학교 설립자, 아나운서, 소아청소년과 의사, 공군 소령, 전 대기업 임원, 문화기획자, 기업가, 교수, 화가, 시인, 주부, 학생, 요리 인플루언서, 모란시장 상인 등 직업도 다양했다.

매 인터뷰는 스무 빛깔의 인생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이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인터뷰어로 변신해 이웃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성남에 살게 된 계기, 성남인으로서의 정체성, 하고 있는 일, 가장 행복했던 또는 슬펐던 기억,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삶의 만족도, 꿈과 희망 등을 묻고 들었다. 각 인터뷰는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5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그렇게 수집된 이야기를 미술의 언어로 재구성했고, 이를 심리초상화Psychology Portrait’라 명명했다. 인터뷰이의 외모가 아니라 심리를 그린 초상화이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끝나면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을 캔버스에 연필로 옮겨 적었다. 텍스트와 스토리가 밑그림인 셈이다. 이후 인터뷰이의 심리를 나타낸다고 판단된 모양과 색, 문양과 리듬을 만들어 그려나갔다. 인터뷰이가 좋아하는 그림 이미지가 콜라주처럼 덧붙여지기도 했다. 밑그림 자체가 개인 정보를 담고 있다 보니, 최종 단계에서는 인터뷰이를 상징하는 색의 페인트가 캔버스 전체에 흩뿌려졌다. 추상화 형식의 심리초상화들이 그렇게 하나씩 완성됐다. 각 초상화의 제목은 인터뷰 때 나온 단어나 문구를 참조해 붙였다. 인터뷰 영상과 텍스트는 따로 아카이빙 되고 편집돼 별도의 작품이 되었다.

사실 이번 프로젝트는 작가인 내게도 큰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방대한 작업이기도 했다. 20명의 심리초상화를 구상하고 새로 제작하는 데만 몰두해도 모자랄 시간에 참여자를 섭외하고 인터뷰하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내용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긴 인터뷰의 경우 텍스트로 정리하는데 무려 12시간이나 걸렸다. 주어진 기간 안에 작가 혼자 해내기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인터뷰에 대한 조언과 텍스트 정리에 아낌없는 도움을 주신 아키비스트 권혜경 선생님, 매 인터뷰 때마다 촬영을 도와주시고 편집에 열정을 다해주신 문화기획자 백혜정 선생님, 두 분의 헌신과 도움이 없었다면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없었을 테다. 무엇보다 낯선 작가 앞에서 자신의 소중한 이야기를 기꺼이 들려주신 인터뷰이들께 두 손 모아 감사 인사드린다. 성남에서 살며 사랑하고 싸우고 울고 절망하고, 다시 일어나 도전하고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는 그분들의 인생 이야기는 이미 하나의 작품이었고,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자 완성이었다.

성남시민을 대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이 프로젝트의 지향점은 나와 다른 인생을 사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연결이다. 소중하지 않고 특별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인터뷰할 때마다 절실히 깨달았다. 길든 짧든, 한 사람의 인생이 책이고 드라마고 우주라는 것을. 개인의 서사가 모이고 연결되면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20개의 이야기가 50, 100, 1000개로 계속 자라나길, 우리의 이야기가 새로운 역사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