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작가의 작은 그림 속에는 이 세상의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그 어떤 틀에도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인으로서 너무나 큰 우주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가 세속(세상)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 무상: 일체의 집착을 떠난 경지 /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난 해탈도인이 그린 도상화 / 오마이뉴스 기사 https://omn.kr/2607y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직무대리 박종달)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관장 이계영)과 공동주최로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을 9월 14일(목)부터 내년 2월 12일(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개최한다. - 9월 14일(목)부터 2024년 2월 12일(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하나] 유화, 먹그림, 매직펜 그림, 표지화와 삽화, 도자기 그림 등 270여 점 - 1920년대 학창 시절부터 1990년 작고할 때까지 60여 년 화업 인생 총망라 - 신규 발굴·소장한 장욱진 최초의 가족도 1955년작 <가족> 최초 공개 - 장욱진의 생전 마지막 작품 <까치와 마을>(1990) 및 한국 전쟁 후 가족 생계를 위해 그린 『국제신보』 「새울림」 삽화 56점 전체 최초 공개
[둘] 장욱진 예술세계 ‘주제 의식’ 및 ‘조형 의식’으로 나눠 재구성 - ‘까치’, ‘나무’, ‘해와 달’ 대표 소재 상징 및 변모 과정 등 ‘장욱진 그림 읽기법’ 제시 - 불교 주제 회화 및 먹그림 통해 철학적 사유 및 불교적 세계관 조명 - 아카이브 백여 점 통해 미술단체·전람회 활동 포함, 누락된 장욱진 초기 행적 보완, 기존 작품명과 연보 오류 바로잡은 연구성과공개 - 1975년 김철순과 협업한 장욱진 생전에 미출판된 목판화집 Zen: Wisdom of Asia를 별도 제작한 단행본 『선(禪) 아님이 있는가』
장욱진 다시 보다 해탈도인 불교와 노자를 뛰어넘는 넉넉하고 큰 마음으로 그림을 작게 그리는 해와 달을 통해 영원성을 추구하는 인간 중에는 어린이를, 새 중에는 까치를, 자연 중에서는 나무를, 동물도 가족으로 그리는, 진진묘 진실한 아름다움이 담긴 자그마한 그림 그는 이미 현대 회화의 가벼움의 미학을 선각적으로 터득하여 독특한 발상으로 그만의 조형과 정체성을 추구하다 //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유희하는 진정한 자유인을 그리다.
이번 전시는 그간 축적된 장욱진(1917-1990) 연구와 전시들을 되짚어 보며, 1920년대 학창 시절부터 1990년 작고할 때까지 약 60년간 꾸준하게 펼쳐 온 장욱진의 미술 활동을 총망라하여 유화, 먹그림, 매직펜 그림, 판화, 표지화와 삽화, 도자기 그림 등 270여 점을 한 자리에서 조망한다.
이번 전시는 장욱진의 시기별 대표작을 엄선해 선보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화가 장욱진이 진정으로 추구한 예술의 본질과 한국적 조형미의 구축이 한국미술사 안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장욱진 호암미술관에서 봤을 때 감동이 20년이 넘었다>
장욱진 화백과 부친과 동갑. 그의 장녀 장경수(경운박물관 관장)과 짧은 인터뷰 하다가 끊어졌다. 방송 인터뷰를 해야 했기에 그녀는 아버지를 찾아오는 스님이 참 많았는데 장욱진은 그들에게 "중놈이 되지 말고 깨달은 자가 되라고" 막 뭐라고 하면 따님이 옆에서 보고 있다가 민망해서 "아버님 그러지 마세요: 해도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따님을 가까이하니 장욱진의 체취가 느껴진다.
장욱진 '풍경' 1937(19살) 리움미술관 소장. 새로운 표현에 눈뜨다, 재현이 아니라 표현으로 나아가는 도중이다.
전시 제목‘가장 진지한 고백’은 "그림처럼 정확한 내가 없다”고 말한 장욱진의 언급에서 착안했다. 장욱진은 그의 화문집(畵文集) 『강가의 아틀리에』 서문에서 밝혔듯이 참된 것을 위해 뼈를 깎는 소모까지 마다하지 않는 진솔한 자기 고백으로 창작에 전념했고, 그림 그리는 시간의 대부분을 방바닥에 쪼그려 앉아 수공업 장인처럼 그렸다.
이렇듯 지속적이고 일관된 그의 창작 태도는 작품에서도 드러나는데, 장욱진은 60여 년 화업 인생 동안 제한된 몇 가지 소재들을 반복해서 그렸다. 그러면서도 재료를 가리지 않는 자유로움과 하나의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창작 태도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장욱진은 서양화를 기반으로 동양적 정신과 형태를 가미해 한국적 모더니즘을 창출하고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연 화가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장욱진의 작품 세계를 청년기(10~20대), 중장년기(30~50대), 노년기(60~70대)로 재구성하여, 궁극적으로 그가 추구하던 ‘주제 의식’과 ‘조형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변모해 나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장욱진 예술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특히 장욱진 관련 아카이브를 통해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이후 미술단체와 전람회 활동을 포함하여 새롭게 밝혀진 장욱진의 초기 행적 및 기존에 알려진 작품명과 연보의 오류를 바로잡은 연구 성과를 공개한다. 장욱진의 조형 언어와 행적을 미술사적으로 규명함으로써, ‘동심 가득하고, 작고, 예쁜 그림’이라는 단편적인 평가를 넘은 장욱진 예술의 진면목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크게 4부로 나뉘는데, 전시실 1층 1부와 4부에서는 초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연대별로 작품 세계를 볼 수 있게 구성하였다. 2층 2부에서는 장욱진 그림에서 반복되는 소재들을 ‘내용’과 ‘형식’으로 접근하여 장욱진 그림을 보다 쉽고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2층 3부에서는 장욱진의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적 사유에 대해 면밀히 다룬다. 관람객은 전시장의 도입부 <자화상>(1951)에서부터 마지막 장욱진이 타계 두 달 전 그린 <밤과 노인>(1990)에 이르기까지 장욱진의 예술세계를 동행하듯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1부, 첫 번째 고백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는 그의 학창 시절부터 중장년기까지의 작품을 살펴본다. 학생작품전에서 상을 탄 <공기놀이>(1938)와 문자를 추상화 시킨 과정을 보여주는 <반월·목半月·木>(1963), 뼈대나 윤곽만으로 대상을 조형화시키며 기호화된 형태를 그린 <자화상>(1973) 등을 통해 초기 화풍의 형성과정을 볼 수 있다.
완숙한 장욱진 작품의 전형(典型)이 완성되기까지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장욱진만의 독창적인 한국적 모더니즘이 창출되는 여정을 따라갈 수 있다. 또한 장욱진 관련 아카이브들을 통해‘신사실파’이외의 알려지지 않았던 미술단체들의 활동 이력과 전람회 출품 등 새롭게 밝혀진 장욱진의 초기 행적과 기존에 알려진 작품명의 오류를 바로잡은 연구 성과도 확인할 수 있다.
장욱진(1918~1990)은 9세 때 '전국소학미전'에 입상하고, 경성제2고보(경복고등학교)에 들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높이뛰기와 기계체조 선수로도 활동했다. 고교 3학년 때 일본인 교사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다 퇴학당해 한동안 빈둥거렸다. 체육 특기생으로 양정고보에 편입해 졸업하고, 23세 때 도쿄 제국미술학교(무사시노 미술대학 전신)로 유학을 떠났다. // 질무니 당신 뭐하는 사람이오? 대답: 나 까치 그리는 사람이오. * 그의 그림의 60%가 까치다.
2부, 두 번째 고백 <발상과 방법: 하나 속에 전체가 있다>에서는 장욱진 회화의 대표적 모티프 가운데‘까치’,‘나무’,‘해와 달’을 선정해 각각의 소재들이 지니는 상징성과 의미, 도상적 특징의 변모 과정을 살펴본다.
<까치>(1958), <새와 나무>(1961) 등에서 그의 분신 같은 존재인 '까치', 그의 온 세상을 품는 우주인 '나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성의 매개체를 상징하는 '해와 달' 등 장욱진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들의 의미와 이들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의 ‘발상과 방법’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장욱진의 생전 마지막 작품인 <까치와 마을>(1990)이 최초로 전시되며, 그가 처음 그린 표지화 초안과 더불어 한국 전쟁 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렸던 『국제신보』「새울림」 (글 염상섭, 삽화 장욱진) 삽화 56점 전체가 최초로 공개된다.
3부, 세 번째 고백 <진眞.진眞.묘妙>에서는 장욱진이 남긴 불교적 주제의 회화들과 먹그림, 목판화 선집 등을 통해 장욱진의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적 사유를 들여다본다. 장욱진과 불교와의 인연은 청년기부터 여러 일화가 언급되지만 실제로 불교 주제의 작품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장욱진은 경전의 종교적 도상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자기성찰을 통해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과 요소들을 강조하고 변용했다. 장욱진이 최초의 불교 주제 회화로 아내의 초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장욱진에게 ‘가족’이란 불교적 세계관이 투영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전시에서 <진진묘>(1970)를 시작으로 해학성이 돋보이는 <심우도>(1979), <무제>(1979) 등을 선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발굴된 장욱진 최초의 가족 그림인 1955년작 <가족>을 최초 공개한다. 또한 1975년 김철순과 장욱진이 협업했으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한 목판화집 Zen: Wisdom of Asia를 별도 제작한 단행본 『선(禪) 아님이 있는가』가 공개된다.
4부, 네 번째 고백 <내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은 1970년대 이후 그의 노년기를 살펴본다. 동양의 정신과 형태를 일체화시켜 한국적 모더니즘을 창출했다고 평가받는 수묵채색화 같은 유화 및 특유의 비현실적 화면 구성 등이 정점을 이룬 작품들을 볼 수 있다.
1973년 전후로 그의 작품에서는 1960년대까지 주를 이루던 강한 마티에르 대신 얇아진 색층이 등장하면서, 조형성이 강했던 졸박한 반추상에서 표현성을 가미한 담채풍의 담졸(淡拙)한 양식으로 변화가 본격화된다. <나무와 가족>(1982), <닭과 아이>(1990) 등 먹으로 그린 동양화를 캔버스에 옮긴 듯 한 말년 작품을 선보인다.
장욱진, <나무와 가족>, 1982, 캔버스에 유화 물감, 28x19.8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한편,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디지털 기반 참여형 워크숍 <나의 진지한 고백>은 장욱진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도상, 이미지를 관찰하고 관람객이 자신의 삶을 도상으로 표현하는 워크숍이다.(현장 및 온라인, 상시 참여)
또한 장욱진의 글을 읽고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그림과 글로 표현해보는 워크숍 <내 마음으로서 그리는 그림>이 2전시실 앞에서 진행된다. 더불어 성인을 위한 작품 감상프로그램이 매일 3회차(12시, 14시, 16시) 진행된다.
이외에 장욱진 작품을 보고 만지며 소통할 수 있는 교육자료로 개발된 <촉각 그림책>이 전시실 내에 비치되며,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 및 수어해설, 점자책과 큰 글자 감상 자료가 제공되어 관람객의 감상과 해석을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대부분 화가들이 달항아리를 그릴 때 그는 장독대를 그리다. 그의 그림 60%는 까치다. 여기도 까치가 보인다. "일상 나는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이 저항이야말로 자기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 장욱진 1969.6.7 동아일보 // 장욱진은 달 항아리의 저항으로 장독대를 그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근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 장욱진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뿐만 아니라 그간 축적된 장욱진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보완하여 장욱진 예술세계를 보다 온전하게 평가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장욱진 화백이 남긴 말들 // 장욱진, 저항정신이 나의 존재의 근간이다. 그는 여명을 즐기는 새벽형 인간으로 만사에 철저한 성격이었다. 그는 일상의 괴로움을 고맙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풍만하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17 11월 26일(양력 1918.1.8.)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에서 태어남.
1931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입학. 미술반에서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1897-1945)의 지도를 받음. 1932 동아일보 주최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과 《제4회 선만鮮滿중등학교미술전》에서 입선.
1934 경성제2고보를 그만둠. 1938 동아일보 주최 《제7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에서 입상. 조선일보 주최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서 조선일보사장상을 수상. 1939 양정고등보통학교 제23회 졸업.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학과 입학. 1940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
<제목 : 마을> 장욱진 이상향인가. 유유자적하는 이런 천진과 신선의 세계가 없다. 한국인의 태생적 마음을 그리다. 소가 있고 집이 있고 나무가 있고 집 안에 어린 소녀가 있고 개도 보이고 마을 공동체의 전형을 그린 것인가?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이 안정감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1941 이병도 박사 맏딸 이순경李舜卿(1920-2022)과 결혼. 1945 국립박물관 진열과 취직. 1949 《유화 신작전》에 참여. 《제2회 신사실파동인전》에 처음 참여.1951 부산 피란중, 종군화가단 가입. 고향인 충남 연기군으로 잠시 귀향. 1953 《제6회 종군미술전》에 출품한 〈장도壯途〉가 단장추천상(서양화부분) 입상.
195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우조교수 취임. 《제3회 국전》에 입선. 아내 이순경 ‘동양서림’ 운영. 1955 대한미술협회의 위원으로 선출된 후, 곧 이어 한국미술가협회의 위원으로도 선출. 《제1회 백우회전》에서 〈수하〉가 ‘이범래상’ 선정. 《제4회 국전》 입선. 1956 《제2회 백우회전》, 《제1회 한국미술가협회전람회》에 참여. 《제5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출품. 1957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미네소타대학의 교류 미술전
1958 뉴욕 월드하우스갤러리 개최 《한국현대회화전》에 참가. 《제7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출품.《제4회 백우회전》에 참여. 1959 《제3회 현대작가초대미전》과 《제5회 백우회전》에 참여. 《제8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출품. 1960 《제9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출품. 1961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동문과 《제1회 2.9 동인전》에 참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그만둠.
1962 ‘신상회’ 결성 참여. 《제2회 2.9 동인전》에 출품. 1963 덕소화실 생활 시작. 《제3회 2.9 동인전》에 출품. 1964 첫 개인전 반도화랑에서 《장욱진 개인전》 개최. 《제4회 2·9 동인전》에 출품. 1968 《제5회 앙가쥬망전》에 처음으로 참가. 이후 1977년까지 지속적으로 참여. 1969 《제18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9년 만에 참여. 1970 《제19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참여. 1971 《제20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참여. 1972 《한국근대미술60년전》에 출품. 《제21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참여.
국립현대미술관은 장욱진 최초의 <가족>을 발굴해 소장품으로 60년만에 수집하는데 성공했다
1973 《제22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참여. 1974 두 번째 개인전을 공간화랑에서 《장욱진 작품전》 개최. 《제23회 국전》에 초대작가 참여. 1975 명륜동 화실 생활 시작. 선禪 사상의 화두를 담은 목판화집 삽화제작, 이후 1975년까지 50여 점을제작산문집 『강가의 아뜰리에』 발행. 《제24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참여. 1976 《제25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참여. 불교학자이자 정치가인 백성욱(1897-1981)과 함께 지역사찰답사.
그림이 하늘을 날다 순간의 깨달음 시각적으로 그리되 붓놀림을 줄이고 선불교의 미학적 요소를 극대화하다 "나의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툭툭 튀어나온다. 마음속으로부터... 마음 속에는 잡다한 얼룩과 찌꺼끼가 많다. 슬픔과 기쁨 욕심과 잡념 엉켜서 열병처럼 끓게 한다 텅 빈 마음으로 보면 모든 사물이 순수하게 비친다. 그런 마음에 되어 붓을 든다" - 장욱진 1979년
1977 앙가쥬망 동인들과 전라남도 완도 스케치 여행.양산 통도사의 삼소굴에서 경봉鏡峰 스님(1892-1982)에게 비공非空이라는 법명 받음.법당 건립기금 마련 위해 현대화랑에서 비공개 《도화전》 개최. 1978 도예가 윤광조와 합작전인 《장욱진 도화전》 개최. 《신사실파회고전》에 출품, 전후연의 권고로 매직그림 공판화 제작. 1979 차남 홍순(당시 16세) 타계. 《장욱진 화집발간 기념전》 개최.
아내를 관음보살로 느끼는 남자, 이보다 더한 사랑가는 없다. 그가 전성기 52세에 그린 '진진묘'는 서양의 모나리자에 비교될 만한 미인도로 한국 미술사에 최고의 걸작이다. 불교의 꽃인 보시행을 꾸준히 실천하려 한 예술가의 처절한 몸부림이 예술로 승화된 작품이 아닌가. 황갈색은 은은하지만 속으로 우려 나오는 황홀한 색채다. 가는 선으로 인체의 균형과 조화를 극대화하다.
1980 수안보 화실 생활 시작. 《제20회 앙가쥬망 겨울전》에 오랜만에 출품 1981 백내장 수술. 공간화랑에서 《장욱진 개인전》 개최. 1982 미국 LA 스코프갤러리에서 개인전 《UCCHIN CHANG》 개최. 1983 유럽여행. 판화집 출판기념 《장욱진 판화전》 개최.
1985 수안보 화실 정리, 서울 명륜동 이주. 1986 고희전古稀展 《장욱진 작품전》 개최. 용인 화실 생활 시작. 1987 대만과 태국 여행. 1988 인도와 발리 여행. 1989 미국 뉴저지 버겐예술·과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 Korea Contemporary Art》에 초대. 1990 한국병원에서 타계.
[전시 구성 및 주요 작품 소개]
1.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첫 번째 고백:
“누구나 그러하듯이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저항 속에 사는 것 같다. [...] 누구를 막론하고 직업인은 모두가 자기 직책을 빌려 스스로의 생명에 대한 순수성을 지키려 하고 안간힘을 쓰며, 이 순수성에 대한 타인의 침해를 막으려 드는 것이 상례이다 [...] 나의 경우도 어김없이 저항의 연속이다.
행위[제작 과정]에 있어서 유쾌할 수만도 없고, 소재를 다룰 때 기교에 있어 재미있게 나왔다 해도 결과[表現]가 비참할 때가 많다. 이렇다 보니 나의 일에 있어서는 저항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일상(日常) 나는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이 저항이야말로 자기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 장욱진, 「저항」, 『동아일보』, 1969.6.7.
장욱진의 첫 번째 고백, 여기서는 그의 학창 시절부터 중장년기까지의 작품들을 살펴본다. 그의 10~20대 청년기 작품들은 고전색과 향토색이 짙게 느껴지는 조선적 모티프들이 주를 이룬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흑백과 갈색의 모노톤으로 토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장욱진은 30~40대 장년기를 거치며 명도와 채도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인 주목도를 높이고, 형태를 더욱 평면화, 도안화시키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아동화적 도상을 분할 구성하여 표현해낸 시도나, 서양 동화 같은 정경에 동심이 천진하게 깃든 정감 어린 풍경 등이 그러하다.
이후 40~50대 중년기에 이르면 실존의 절대적인 형상으로서 뼈대나 윤곽만으로 대상을 조형화시키며 기호화된 형태들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물감층을 쌓아 만든 까칠한 질감의 마티에르가 점점 원근법적 공간을 지우며, 그림 표층의 질감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화면을 더욱 다양하게 조성하고 심미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 아래 아이/들' 1960년 리움 미술관 소장품 // 소와 나무와 어린아이가 하나다 // 사람 중 어린아이가 있다면 자연 중 소와 나무가 있다. 인간 중에서 어린아이만이 소와 나무와 동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다. '소'는 나무 위에 날고 있고 '어린아이'는 땅바닥에 누워서 명상을 하다. 장욱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인가 인간이 소와 나무보다 못하다.
한때는 구상과 추상을 혼성한 반추상의 상태에서 더 나아간 순수추상화도 2년 정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더 이상 이러한 사조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1960년대 중반 즈음 되면 장욱진 그림에 다시 형상성(形像性)이 회복되며 졸박(拙朴)한 양식이 이어진다.
이처럼 첫 번째 전시실에서는 완숙한 장욱진 작품의 전형(典型)이 완성되기까지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장욱진만의 독창적인 한국적 모더니즘이 창출되는 여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전시된 그의 작품들 뿐 아니라 전시장에 함께 진열된 장욱진 관련 아카이브들을 통해서도 유기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장욱진, 자화상, 1951, 종이에 유화 물감, 14.8xx10.8cm, 개인소장 6.25전쟁 이후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장욱진이 종군화가로 복무 중에 잠시 고향인 충남 연기군(지금의 세종시)에서 머물던 시기 그린 작품이다. 그는 이 시기 방황에서 잠시 안정을 찾으니 작품 의욕이 솟아 “미친 듯이 그리고 또 그렸다”고 전한다. 한 뼘 크기의 작은 종이 위에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자화상〉은 누렇게 황금 물결을 이룬 벼 이삭과 기찻길처럼 하염없이 펼쳐진 붉은 황토색의 논두렁 사이로 콧수염을 기른 모던한 모습의 장욱진이 걸어오고 있다. 결혼식 때 입은 하이칼라 프록코트 차림으로 귀향 중인 그를 따라 동네를 서성이던 검둥개와 새들이 뒤따른다. 노년기에 등장하는 서너 마리가 일렬로 줄지어 나는 새들의 비행 도상도 이 작품에 처음 등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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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공기놀이>, 1938, 캔버스에 유화 물감, 65x80.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공기놀이〉는 양정고보 5학년 때 1938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사장상社長賞을 수상한 작품이다. 서울 내수동 집을 배경으로 네 명의 소녀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물들의 동세와 옷의 명암처리를 통해 인체 구조와 양감을 어색하지 않게 표현하였고, 소녀들의 머리카락과 댕기, 아기의 얼굴 부분까지 빛의 흐름을 잘 묘사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 전람회장 제4실부터 제6실까지 중등부와 사범부의 유화 섹션에 진열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벽면 중앙에 배치된 작품이다. 장욱진이 졸업한 해인 1939년 양정고보 23회 졸업앨범에도 이 작품의 사진이 실려있으며, 당시 작품명은 〈유희遊戲〉로 표기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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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반월·목半月·木>, 1963, 캔버스에 유화 물감, 60x50cm, 개인소장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직을 내려놓은 뒤, 1963년 덕소로 화실을 옮긴 장욱진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몰두한다. 이 작품은 다음 해인 1964년 서울 반도화랑에서 개최된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문자 추상에 가까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나무를 상형화해 얻은 것으로 서체의 예서隸書에 가까운 이미지를 띠고 있으며, 특히 금석이나 돌에 새겨진 글씨를 탁본해 음각으로 하얀 부분을 물감으로 메운 듯한 작업 과정을 보여준다. 반달의 재현적 모습은 구상적인 면모를 보이면서도, 문자로 압축된 나무는 기호화된 상징을 추상적 세계로 이끄는 추상 과정을 보여주는 듯해 주목된다. 이 무렵부터 장욱진의 서명도 ‘ucchin, chang’에서 ‘ucchin, c’를 주로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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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부엌과 방>, 1973, 캔버스에 유화 물감, 22x27.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덕소에서 소박하게 생활하며 이웃한 동네의 다양한 삶에도 관심을 가졌던 장욱진은 가옥의 건축 구조를 특유의 방식으로 묘사했다. 단층적 분할 면으로 드러나는 가옥에 철선묘로 묘사한 인물의 쭈그리고 앉은 모습은 특정 인간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실존적 형상을 선으로 압축하여 조형화한 것이다. 특히 부엌의 오행감을 정면으로 투시하면서도 화면 왼편에는 부뚜막의 가마솥과 큰 주걱을 그리고, 측면 좌상의 인물 배치를 통해 공간의 깊이를 나타내었다. 캔버스 천을 그대로 바탕으로 사용하고 짙은 농묵과도 같은 굵은 선과 면으로 표현하여 마치 목탄으로 그린 평판화와 같은 인상을 준다. 이 작품은 생각과 표현을 줄이고 덜어 내면서 얻어 낸 화면을 통해 탈아脫我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해 특히 주목되는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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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자화상>, 1973, 캔버스에 유화 물감, 27.5x22cm, 개인소장 이 작품은 등장인물의 자세가 화가의 평소 모습을 꼭 빼닮았다는 유족의 증언에 따라 <자화상>으로 불리는 그림이다. 1951년 작 〈자화상〉이 파란 하늘과 노란 보리밭이 대조를 이루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 끝에 장욱진이 서 있는 풍경을 그린 반면, 이 작품은 모든 배경을 생략하고 오로지 사람의 형상, 즉 얼굴, 몸, 팔다리를 물기가 넉넉한 중봉의 필선으로 마감한 인물화이다. 최소한의 붓질을 구사하되 신체를 동그라미와 직선의 도형으로 간략하게 묘사하였다. 그림 속 장욱진은 직립 상태가 아니라 한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둔 채 삐딱하게 서 있는데, 이러한 자세는 불상에 표현된 트리방가(tribhanga) 자세를 연상케 해 흥미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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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상과 방법: 하나 속에 전체가 있다 두 번째 고백:
“사람마다 내 그림을 보고는 그림의 설명을 요구해 온다. 그림을 그리는 누구도 그렇겠지만, 나는 항상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 생각이란 게 그림의 발상(發想)으로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생각이 좋고 나쁜 것으로 그림의 됨됨이 또한 결정되기도 한다.
나의 생각이란 것은 무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외부에서 오는 여러 가지 포름(forme)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즉 산만한 외부 형태들을 나의 힘으로 통일시키는 일이다 [...] 한 작가의 개성적인 발상과 방법만이 그림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있었던 질서의 파괴는 단지 파괴로서 결말을 지어서는 안 된다.
개성적인 동시에 그것은 또한 보편성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의 언어를 가지는 동시에 동시대인의 공동한 언어임을 또한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 이런 점이 오늘날 작가들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장욱진, 「발상과 방법」, 『문학예술』, 1955.6.
장욱진의 두 번째 고백, 여기서는 그가 그림에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 소재들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화가로서 어떠한 ‘발상’을 했고, 이를 어떠한 ‘방법’으로 구성했는지 살펴본다. ‘보고 싶은 대로 그냥 보고 있는 것’과 ‘지식을 가지고 관찰해서 보는 것’은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그가 그림 한 점을 그릴 때마다 점 하나, 선 하나에도 지나칠 만큼 엄격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장욱진의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가 조금은 더 진지해져도 되지 않을까?
두 번째 전시실에서는 장욱진 회화의 대표적 모티프 가운데 ‘까치’, ‘나무’, ‘해와 달’을 선정해 각각의 소재들이 지니는 상징성과 의미가 무엇인지, 도상적 특징은 어떻게 변모되어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전시장에 가득한 ‘까치’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고, ‘나무’는 그의 온 세상을 품는 우주였으며, ‘해와 달’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성의 매개체로서 결국 모든 것이 하나임을 보여주려 한 장욱진의 의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림의 구성과 의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소재를 통해 그림의 의미를 분석해 보았다면, 각각의 소재들을 활용한 구성 방식 또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 각각의 소재들은 10호(약 53×45cm)도 안 되는 작은 그림들 속에서 자유롭게 변주되어 조형적 완결성을 매듭짓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들 소재들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단 한 점도 똑같은 그림이 전해지지 않을 수 있는지, ‘콤포지션’이란 코너를 따로 마련하여 그가 고민했던 작품의 발상과 방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장욱진, <까치,>, 1958,, 캔버스에 유화 물감, 40x31cm, 국립현대미술관 화면을 가득 채운 둥근 형상의 나무 속에 정적인 자세로 서 있는 까치, 나무 끝에 걸려 있는 초승달을 단순화하여 그린 작품이다. 모든 대상은 원근법과 비례를 무시하고 평면적으로 그려졌으며, 화면을 지배하는 푸른 색조로 인해 설화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나무, 까치, 달 등은 장욱진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로서 작은 화면에 단순하게 그려진 탓에 마치 아동화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간결한 형태와 세련된 색채에서 치밀한 구성력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고 다시 긁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만들어진 화면의 마티에르를 통해 자연스러운 밀도감을 느낄 수 있다. 긴 밤이 끝나게 지저귀며 새해를 알리는 까치 소리를 날카로운 필촉으로 화면의 물감층을 무수히 긁어내어 청각적 요소까지 시각화한 수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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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새와 나무, 1961, 캔버스에 유화 물감, 41x32cm, 개인소장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 출신 화가들이 개최한 《2·9 동인전》(1961)에 출품한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근무 시절 직장 동료이기도 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김원룡 교수가 전시회에 찾아와 당시 한 달 월급인 2만 환을 봉투째 놓고 구입해 간 작품이다. 이 작품은 별칭인 <야조도夜鳥圖>로도 유명한데, 이는 그림을 구입한 김원룡 교수가 지은 제목으로 ‘밤에 나는 새’를 의미한다. 김원룡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화면의 주조는 표현할 수 없이 밝고 깊은 독특한 푸른색이고, 그것이 새의 흑색과 잘 조화해서 사람을 고요한 환상의 세계로 끌어당기고 있다”라고 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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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1월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백우회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독지가의 이름을 딴 ‘이범래상’을 받았다. 근경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 상반신을 탈의하고 양팔을 베고 누운 인물을 화면 중앙에 배치했는데, 인물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무나 하늘, 혹은 그 너머를 응시하는 눈빛과 표정이 다소 심각하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인물은 구도자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황톳길을 따라 걷는 검둥개와 나무 속에는 숨어 있는 네 마리의 새들은 마치 1951년도 〈자화상〉의 인물을 따라 이동해 온 것 같다. 작품 상단의 원경에는 마을을 배치했는데, 나무와 건물들이 바닥과 하늘의 구분 없이 비현실적으로 그려졌다. 이렇게 양팔의 베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도상은 이후 변주되어 여러 작품에서 그렸고, 신문, 삽화 등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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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수하>, 1954, 캔버스에 유화물감, 33x24.7cm, 개인소장 | ||
장욱진의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대칭 구도’를 기본으로 하는 조형적 치밀함이다. 세로축을 중심으로 위에서부터 언덕, 집, 소, 개, 사람이 아래로 이어지고, 좌우로 해와 달, 나무와 화분이 쌍으로 배치된다. 이러한 대칭 구도는 안정적 균형미를 주지만 단조로울 수 있다. 화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로축에 있는 소와 개, 사람의 방향을 교차로 배치했으며, 달의 형태와 색, 나무 위 까치, 화분의 형태와 색을 서로 다르게 표현했다. 화면에 대한 화가의 조형 어법이 얼마나 세련되었는지를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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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마을>, 1984, 캔버스에 유화물감, 35.3x27.2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 ||
경사진 비탈길 위에 나무 한 그루와 세 가족을 그려 넣은 풍경화이다. 비탈길에 서 있는 가족이 한쪽으로 쏠려 불안한 자세로 서 있지만 우람한 나무가 이들을 든든하게 감싸면서 안정감을 준다. 각도를 달리하며 화면을 가로지르는 비탈길과 나무는 남송대南宋代 산수화에서 사용된 변각邊角 구도를 연상시킨다. 장욱진은 캔버스 천의 직조가 드러나도록 색을 엷게 칠하거나 색상 없이 바탕의 질감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모든 사물을 윤곽선이 생략된 몰골법으로 처리했으나 사물 내부보다 외곽에 가까울수록 진한 색을 선염했다. 그 결과 각각의 사물은 윤곽 부분이 더욱 선명하게 찍히는 탁본을 보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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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언덕 위의 가족>, 1988, 캔버스에 유화물감, 33x24cm, 개인소장 |
장욱진의 그림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를 살피고, 각각의 역할이 무엇인지 보는 ‘장욱진의 그림 읽기법 혹은 감상법’을 통해 장욱진 그림의 내용을 더 많이 이해하고, 그의 고백을 진지하게 볼 수 있기를 바란다.
3. 진眞.진眞.묘妙 세 번째 고백:
“자기의 생활은 자기만이 하며 자기의 생활을 그 누구의 생활과도 비교하지도 않았으며 때문에 창작 생활 이외에는 쓸데없는 부담밖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승려가 속세를 버렸다고 해서 생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처님과 함께하여 그 뜻을 펴고자 하려는 또 하나의 생활이 책임 지워진 것과 같이 예술도 그렇듯 사는 방식임에 지나지 않으리라“ - 장욱진, 「예술과 생활」, 『신동아』, 1967.6.
장욱진의 세 번째 고백, “참으로 놀라운 아름다움[眞眞妙]”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첫 불교 관련 작품인 <진진묘>(1970)로 시작되는 세 번째 전시실에서는 장욱진의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 정신세계를 살펴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진진묘’는 장욱진의 부인 이순경 여사의 법명(法名)이다.
아내를 보살상으로 표현할 정도로 존중하고 가족을 귀하게 여겼던 장욱진은 하다못해 동물을 그려도 동물 ‘가족’을 그렸다. 가족도, 동물도 모두 소중한 인연(因緣)으로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던 그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것이다.
그와 불교와의 인연은 청년기부터 여러 에피소드가 언급될 정도이지만 실제로 불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작품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먹그림 역시 이 시기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다. 전시된 그의 먹그림들은 장욱진의 불교 인식과 태도가 딱히 종교적인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적어도 예술이라는 개념에서 ‘깨달음의 과정’이자 ‘깨달음의 표현’이었음을 말해준다.
나아가 그의 간결하고도 응축된 작품들이 서구 모더니즘의 추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 오히려 불교적 사상과 개념으로 추구된 ‘절제’와 ‘득도’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음을 알게 한다. 특히 이 전시실에서는 60년만에 일본에서 돌아온 장욱진의 최초의 가족도가 보존처리를 마친 채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꼭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진진묘’는 이순경 여사의 법명(法名)으로, 장욱진이 직접 제목을 붙인 작품이다. 장욱진은 명륜동 집에서 기도하던 여사의 모습을 지켜보다 ‘화상(畵想)’이 떴다며 갑자기 덕소 화실로 향했고, 그 추운 곳에서 일주일간 오직 제작에만 몰두했다. 작품을 완성한 장욱진은 그 길로 부인에게 달려와 득의(得意)의 작품이라며 그림을 건네고 한동안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이 드라마틱한 일화를 지닌 〈진진묘〉는 장욱진의 첫 불교 관련 작품으로, 단순히 기도하는 부인을 그린 초상화의 성격뿐만 아니라 불보살상을 떠올리게 하는 종교성이 짙은 그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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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진진묘>, 1970, 캔버스에 유화 물감, 33x24cm, 개인소장 | |
〈여인상〉은 작은 화면 중앙에 둥근 얼굴의 여인이 꽉 들어차 있다. 흰색의 상하의를 입은 여인은 반듯하게 가르마를 타고 곱게 빗은 쪽머리를 했으며, 두 손을 모으고 두 발은 오므려 서 있다. 배경에는 장욱진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해와 푸른 하늘을 나는 새, 초록 들판 사이를 가로지른 붉은 길, 길 끝의 마을, 검은 개가 그려져 있다. 여인의 손은 마치 불교의 상품상생(上品上生) 수인(手印)과 같은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신비로운 미소를 띤 여인의 모습은 서왕모(西王母)를 비롯한 대모신(代母神)의 이미지, 혹은 무속신앙의 마고할미나 삼신할미와 같은 여신상과 혼성한 듯 보인다. 얼굴이 둥근 여인을 화면 가득 채운 형태의 작품이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하고, 이후 서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 또는 아기를 품은 모습 등으로 변주되며 여러 점을 제작했다. 이러한 여인 단독상은 어머니, 아내, 딸 등 장욱진의 가족들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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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여인상>, 1979, 캔버스에 유화 물감, 15x10cm, 개인소장 | |
단순하고 생략된 선과 형태를 중심으로 하는 평소의 조형 방식과 달리 부부에 대한 인물 묘사가 비교적 상세하다. 또한 집 안에 있는 가족의 모습이 아닌 이 작품에서는 야외를 배경으로 마치 가족 기념사진을 찍듯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밝은 색조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12년간의 덕소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이 있는 서울 명륜동 집에 살면서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하는 여유로움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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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가족>, 1976, 캔버스에 유화 물감, 13.7c17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 |
청년기 수덕사 견성암에서의 생활, 독실한 불교 신자인 부인과의 사찰 순례, 선사(禪師)들과의 조우 등을 계기로 장욱진은 달마상, 팔상도, 심우도 등 불교적 소재의 그림을 그렸다. 선종화를 대표하는 주제인 〈심우도〉는 선종의 궁극적인 목적인 참선을 통해 본성을 깨닫는 과정을 동자가 소를 찾아가는 것에 비유하며 그린 그림이다. 화면에는 소를 타고 있는 동자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 개가 등장한다. 동자는 불도를 닦는 수행자이며, 소는 인간의 본성을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으로 이 장면은 동자가 소를 길들여 집으로 향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작품은 붓놀림을 줄이고 대상의 형태를 간략하게 요점만 표현하였으며, 순간의 깨달음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선종화의 미학적 요소를 잘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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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심우도>, 1979, 종이에 먹, 67x44cm, 개인소장 | |
우뚝 솟은 산을 양쪽에서 오르고 있는 인물들이 보이는데, 화면 우측으로 개가 뒤따르고 있다. 산 정상에 있는 암자 같은 곳을 오르고 있는 인물 중 하나는 아내를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 아래 자화상처럼 보이는 인물이 산세의 험준함에 놀라면서도 서둘러 앞서간 이를 따라가고 있다. 개를 동반한 것으로 보아 평범한 등산가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 구도는 시시포스의 신화, 혹은 《마하바라타》에서 유디스티라의 승천을 연상케 한다. 신화가 의미 있는 것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네 삶을 비유해서가 아닐까. 산 가운데 서명을 넣은 것은 마치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不二禪蘭〉처럼 파격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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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무제>, 1979, 종이에 먹, 63x32.5cm, 개인소장 | |
이 작품은 옅은 바탕에 바람 속에 있는 듯한 나무와 그 곁의 검은 개, 나무 위 새 한 마리, 세 개의 산봉우리와 붉은 해를 그렸다. 작은 태양과 산의 부분을 제외하면 대상을 모두 검은색으로 그렸다. 캔버스에 그린 유화이지만 마치 종이 위에 먹으로 그린 그림처럼 느껴진다. 장욱진은 1980년경부터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나무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특히 붓질의 빠른 속도와 즉흥성으로 인해 나무의 생동감이 두드러져 인상적이다. 불교 주제의 그림은 아니지만 깨달음의 순간을 상징하듯 빠르게 몇 개의 선으로 그려 내는 선종화풍이 감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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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나무와 산>, 1983, 캔버스에 유화 물감, 30.5x29.3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
4. 내 마음으로서 그리는 그림 네 번째 고백: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툭툭 튀어나온다. 마음속으로부터 …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밝은 거울이나 맑은 바다처럼 순수하게 비어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잡다한 얼룩과 찌꺼기들이 많다. 기쁨, 슬픔, 욕심, 집념들이 엉겨서 열병(熱病)처럼 끓고 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지워 간다. 다 지워 내고 나면 조그만 마음만 남는다. 어린이의 그것처럼 조그만 … 이런 텅 비워진 마음에는 모든 사물이 순수하게 비친다. 그런 마음이 돼야 붓을 든다.” - 「京鄕화랑」, 『주간경향』, 1979.10.7.
장욱진의 네 번째 고백, 여기서는 그의 1970년대 이후, 곧 노년기를 살펴본다. 흔히 이야기하는 수안보 시기부터 용인(신갈) 시기까지의 작품들이다. 장욱진은 평생 730여점의 유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80퍼센트에 달하는 580여점이 이 마지막 15년 동안 그려진 것이다.
실제 1973년 전후로 그의 작품에서는 1960년대까지 주를 이루던 강한 마티에르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으며, 그림의 색층은 더욱 얇아지고, 수묵화나 수채화처럼 묽은 물감이 스며드는 듯한 담담한 효과를 유지한다. 마치 먹으로 그린 동양화를 캔버스에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다. 또 민담이나 고사 같은 한국적인 이야기나 조선시대 문인화에서 보았던 소재들도 새로이 등장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나 민화를 연상시키는 화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동양의 정신과 형태를 일체화시킨 그의 유화는 결국 『금강경』의 핵심 사상인 ‘무상(無相)’으로 집약된다. 하늘로 둥둥 떠다니며 공중 부양하는 사람들, 시공간을 초월한 그의 말년 작들은 모든 사물은 공(空)이라 일정한 형태나 양상이 없다는 ‘응무소주(應無所住)’, 즉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모든 집착을 떠나 초연한 지경, 즉 차별과 대립을 초월하여 무한하고 절대적인 상태인 ‘무상(無相)’을 여실히 드러낸다.
무상(無相 alaksana/animitta)이란? : 모든 사물에는 고정적,실체적 특질이 없다는 의미. 상(相)은 특징을 말한다. 유상(有相)의 반대어이다. 무상은 공(空)의 사상을 근본으로 한다. 모든 사물은 공이며 자성(自性)이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며, 무상이기 때문에 청정(淸淨)하게 된다. 또한 무상은 차별․대립의 모습(相)을 초월한 무차별의 상태를 말하기도 하는데, 그 수행을 무상관(無相觀), 무상삼매(無相三昧)라고 한다. 또한 불교 수행의 최고경지인 삼해탈문(三解脫門 : 空․無相․無類)의 무상은 일체의 집착을 떠난 경지를 말한다. 따라서 무상은 열반(涅槃)의 이명(異名)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평면성과 압축성을 보이는 그의 초기작들이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사물의 속성을 추출하여 본뜬 ‘추상(抽象)’의 작업이었다면, 말년으로 갈수록 깊어진 그의 성찰과 내면세계는 ‘무상(無相)’의 작업으로 이어져 생략과 압축, 시공간의 초월을 통해 진정한 한국적 모더니즘을 창출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화면 중앙 언덕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와 그 아래 아빠, 엄마, 아들로 보이는 가족 세 명을 그려 넣은 산수인물도이다. 장욱진은 〈나무와 가족〉에서 동아시아 인물화의 형식인 수하인물(樹下人物)을 도입했다. 표현 기법을 살펴보면, 세 명의 인물상에는 비수(碑首), 태세(態勢), 농담이 서로 다른 간략한 필선이 구사되었다. 반면 나무 둥치와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나뭇가지에는 물감에 테레핀유를 많이 섞어 농도를 묽게 한 거친 필선이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긴 독특한 번짐과 얼룩이 그대로 말라 나무 형상이 되었다. 장욱진은 나무를 그릴 때 파필(把筆)도 시도했다. 그 결과 붓이 멈춘 자리에는 물감이 엉켜 붙은 독특한 얼룩이, 붓질이 빠르게 지나간 자리에는 붓끝의 갈라짐과 삐침이, 그 결과로 예상치 못한 여백, 즉 비백(飛白)이 연출되었다. 한 방향으로만 구사된 파필은 바람 때문에 왼쪽으로 쏠린 나무 형상을 실감 나게 표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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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나무와 가족>, 1982, 캔버스에 유화 물감, 28x19.8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 |
〈시골풍경〉은 중앙에 우뚝 솟은 나무가 수직축이 되어, 하단에는 둥근 연못과 길이, 상단에는 해가, 좌우에는 시골을 산책하는 가족이 배치된 작품이다. 화면에 중심을 이루는 나무는 잎사귀가 생략된 채 가지만 뻗어 있고 그 위에 새가 한 마리씩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하늘에 뜬 붉은 해, 가지만 뻗어 있는 나무, 그 위에 앉은 새의 조합은 고구려 고분 벽화인 각저총의 씨름 장면에서 발견되는 소재들이다. 동양 고전에서는 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에 신성한 나무인 부상수(扶桑樹)가 자란다고 기술했다. 장욱진도 부상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붉은 해의 기운을 받은 나무를 표현했다. 그렇다면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는 해의 상징인 까마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서명 방식이다. 장욱진은 이 그림에 이름과 제작 연도를 ‘旭’, ‘一九八六’의 한자로 표기했고, 그 아래 ‘張旭鎭’이라 새긴 주문방인(朱文方印)의 인장을 찍었다. 이 인장은 청사 안광석(1917-2004)의 전각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시골풍경〉은 장욱진이 한국 고미술의 도상 및 함의뿐만 아니라 옛 그림의 형식까지 두루 섭렵했음을 알게 해 주는 그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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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시골풍경>, 1986, 캔버스에 유화물감, 37.6x22.2cm, 개인소장 | |
장욱진은 1986년 1월 15일부터 2월 24일까지 잠시 해운대에 머문적이 있다. 〈수안보 풍경〉은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탁 트인 넓은 동해를 바라보며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벽지의 작은 화실을 떠올린 듯, 제목은 〈수안보 풍경〉인데 화폭에는 해운대 풍경을 담았다. 까치와 나무가 배치된 육지, 방향을 달리하며 유영하는 물고기 두 마리, 노 젓는 뱃사공, 떼지어 나는 새들, 정중앙에 떠 있는 붉은 해는 장욱진이 1980년대 후반 그린 강 풍경에서 쉽게 보이는 소재이다. 여러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점도 그가 자주 적용한 표현 방식이다. 반면 동양화 모필의 ‘일필휘지’를 응용한 푸른 물결과 오륙도를 연상시키는 큰 섬은 장욱진의 다른 강 그림에서 보기 드문 요소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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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수안보 풍경>, 1986, 캔버스에 유화 물감, 35x27.6cm, 개인소장 | |
장욱진의 회화는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동화적인 순진무구함과 아이들이 그린 것 같은 맑고 깨끗한 동심이 반영된 예술로 평가받는다. 또한 작은 화폭에서 실현된 단순하고 고졸한 표현, 화사한 색상, 미완성의 사물로 인해 민화와의 깊은 친연성이 언급된다. 〈닭과 아이〉에서도 민화의 특성인 단순성, 해학성, 상징성이 발견되는데 수탉은 이 그림의 주인공답게 당당한 포즈를 취하며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동일한 굵기의 노란 윤곽선과 주황, 초롱, 하양의 채색이 배합된 장식적인 수탉은 윤곽선 없이 단색으로 깨끗하게 선염된 나무와 집들과 대조를 이룬다. 상단에 달과 함께 배치된 소년이 하늘을 날며 하강하는 모습은 그림의 해학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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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닭과 아이>, 1990, 캔버스에 유화 물감, 41x32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 |
〈밤과 노인〉은 장욱진이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에 그린 그림이다. 화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오인되기도 하나, 실제로는 유화 작품인 〈까치와 마을〉을 비롯하여 몇 점의 드로잉이 있고, 타계 사흘 전인 1990년 12월 24일 동아일보사의 의뢰를 받아 그린 신년 축화(祝畵)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왼쪽 상단에는 흰 도포를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노인 혹은 도인이 있는데 장욱진의 모습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화가가 사랑했던, 그리고 그의 일부로 표현되는 대상인 집, 까치, 나무, 아이가 있다. 노인의 표정은 세속에 초탈한 듯하고 만사를 관조하는 모습이다. 자신이 사랑한 것은 저 아래에 있지만,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기에 나의 마음이 평화롭다고 말하는 듯하다. 막내아들의 죽음 앞에 자약(自若)한 태도를 보인 일화는 죽음에 대해 초연한 그의 태도를 보여주며, 생전 언술에서 알 수 있듯, 장욱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명(命)대로 살기를 원했다. 이는 생(生)과 사(死)가 하나라고 여기는 장자의 사유와도 상통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 즉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만 몰두한 장욱진의 이상향은 주어진 명에 따르고, 운명에 충실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은 현실의 세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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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밤과 노인>, 1990, 캔버스에 유화물감, 41x32cm,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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