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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자-사상가

[정신분석대사전] 프로이트, 지그문트 FREUD S.(1856-1939)

프로이트, 지그문트 FREUD Schlomo Sigismund/Sigmund (1856-1939) 빈 의사, 정신분석 창시자

이 사전처럼 프로이트에 대해서 이 보다 더 자세하고 전문적인 내용은 드물다. 그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무의식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다. '리비도'라는 너무나 중요한 개념인 정신분석어를 만들다. 동양보다는 의학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다. 동양에서는 BC 2000년 전부터 무정부적인 사유, 자연과 하나 되는 무위자연 모든 사유를 뛰어넘는 무념무상 등 무의식에 대한 개념은 흔했다. 백남준은 '무음악(a-music)'을 창안하다

어떤 저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세계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열 몇 권의 전기는 그에게 바쳐졌다. 그 저자는 프리츠 비텔스*(Fritz Wittels), 피터 게이(Peter Gay)를 비롯한 루 안드레아스-살로메*(Lou Andreas-Salomé), 토마스 만*(Thomas Mann), 지크프리트 베른펠트*(Siegfried Bernfeld),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 올가 안데르손(Ola Anders- son), 앙리 F. 엘랑베르제*(Henri F. Ellenberger), 막스 슈어*(Max Schur), 커트 아이슬러* (Kurt Eissler), 디디외 앙지외*(Didier Anzieu), 카를 쇼르스케(Carl Schorske) 등이다. 30여 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24[여기서 두 권은 공저이다. 하나는 요제프 브로이어*(Josef Breuer), 다른 하나는 윌리엄 불리트(Wiliam Bullitt)와 공저이다]의 책과 123편의 논문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각종 서문들, 고인에게 붙이는 글, 학회에서의 다양한 토론, 그리고 사전에 기고 등이 포함된다. 프로이트의 24권 저서는 이 사전에서 포함하여 소개되었다.

아이슬러*(Kurt Eissler)는 프로이트가 쓴 편지가 총 15천통이 되는데, 그 중 미국 국회도서관에 1만여 편의 편지가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 5천통은 소실되었다고 밝혔다. 독일 역사학자 피히트너(Gerhart Fichtner)는 이와는 다른 통계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약 2만 통의 편지를 썼다. 이 가운데 1만 통은 파손되었거나 분실했고, 5천통은 보관 중이며, 5천통은 21세기에 되찾을 수 있는데, 그래서 전체 1만 통이란 통계가 나온다. 여기서 주지할 사항은 답장을 보낸 사람의 편지, 특히 플리스*(Wilhelm Fliess)의 편지를 프로이트가 파기했고, 잃어버리거나 잘 정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의 32백 통의 편지는 출판되었고, 그 가운데는 에두아르트 질버슈타인* (Eduard Silberstein), 빌헬름 플리스*(Wilhelm Fliess), 루 안드레아스-살로메*(Lou An- dreas-Salomé),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산도르 페렌치*(Sandor Ferenczi), 로맹 롤랑*(Romain Rolland), 아르놀트 츠바이크*(Ar- nold Zweig), 슈테반 츠바이크*(Stefan Zweig), 에도아르도 바이스*(Edoardo Weiss), 오스카르 피스터*(Oscar Pfister)[부분 삭제된 출판], 카를 아브라함*(Karl Abraham)[부분 삭제된 출판] 등과 서신 교환이 포함되어 있다.

프로이트 전집 독일어 판은 두 질이 완성되었다. 그 하나는 그가 살았을 때 󰡔프로이트 전집 초기 독일어판(Gesammelte Schriften)󰡕, 다른 하나는 그가 죽은 후 󰡔프로이트 전집 독일어판(Gesammelte Werke, GW)󰡕이 처음에는 런던에서, 그 이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판되었다. 프로이트 전집 독일어판(GW)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유통되는 전집이다. 이 전집은 두 권, 󰡔인덱스(Index)󰡕와 안겔라 리하르트(Angela Richards)와 일제 그루브리히-지미티스*(Ilse Grubrich-Simitis)에 의해 완성된 󰡔부록(Nachtragsband)󰡕이 덧붙여져 완성되었다. 또한 알렉산더 미처리히*(Alexander Mitscherlich)로부터 작업이 시작된 선집(選集) 󰡔연구 논총(Studienausgabe)󰡕이 첨가되었다. 미처리히*(Mitscherlich)와 그루브리히-지미티스*(Grubrich-Simitis)의 지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집(GW)을 비판한 어떠한 판()도 독일에서 출간될 수 없었다.

제임스 스트레이치*(James Strachey)에 의해 완성된 영국판 󰡔프로이트 전집 표준 영어판(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of Sigmund Freud, SE)󰡕은 프로이트 저서에 대하여 유일하게 비판적인 판이다. 그 이유는 이 영국판이 아직은 프로이트 저서 전집, 독일어판(GW)보다 전 세계적으로 더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후손들[에른스트 프로이트(Ernst Freud)와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의 반대 때문에, 1886년 이전의 어떠한 프로이트 저서도 다양한 전집 속에 통합되지 못했다. 그러나 1877년에서 1886년에 이르는 정신분석적이라고 불린 시기 동안, 프로이트는 다양한 주제[신경학, 의학, 조직학, 코카인 등]에 관한 21편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이 논문들은 1973년 로제 뒤프레슨(Roger Dufresne)에 의해 검증되었다.

1967년 라플랑슈(Jean Laplanche)와 장-베르트랑 퐁탈리스(Jean-Bertrand Pontalis)430개의 용어로 복합된 정신분석 용어 내부에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프로이트적 개념 90개를 분리하였다. 이 개념들은 프로이트주의* 이론과 임상 대가들, 가령 산도르 페렌치* (Sandor Ferenczi),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자크 라깡*(Jacques Lacan), 도널드 우즈 위니코트*(Donald Woods Winnicott), 하인츠 코후트*(Heinz Kohut) 등에 의해 수행된 다양한 용어를 재검토했다.

프로이트가 다섯 개의 임상 사례를 출판했고, 그 사례는 그의 후계자들이 주석을 붙이고 개정했다는 점을 유념하자. 그 사례는 이다 바우어*Ida Bauer(Dora), 헤르베르트 그라프*(Herbert Graf)[꼬마 한스], 에른스트 란저*(Ernst Lanzer[쥐 인간]), 다니엘 파울 슈레버*(Daniel Paul Schreber), 세르게이 콘스탄티노비치 판케예프*(Sergueï Constantini- vitch Pankejeff[늑대 인간]) 등이다. 1994년 에른스트 팔제더(Ernst Falzeder)에 의해 완성된 분석 족보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60명 이상의 교육 분석가를 양성했다. 그들 대부분은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영국인, 헝가리인, 네덜란드인, 미국인, 스위스인이고, 신원이 파악되지 않는 환자도 포함된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1942년 프로이트의 실제 모습과 가장 흡사한 초상을 글로서 남겼다. “우리는 이보다 더 용감한 정신의 소유자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명확하고 준엄한 선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염려를 끼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하는 바를 그때그때마다 밝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입장을 굽힘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원만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프로이트가 자기 이론의 80%만이 대학에서 저항감 없이 발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서 만약 그가 섹슈얼리티*(sexualité)’ 대신에 에로틱(érotique)’, ‘리비도(libido)’ 대신에 에로스(eros)’란 말로 자신의 이론을 포장했다면, 그리고 만약 사물의 본질 깊숙이 항상 가지 말고, 그것을 암시하는 정도로 갔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의 교육과 진리가 문제시되면서부터 그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다. 닫힌 것이 저항할수록 해결 방안은 더 강해진다. 내가 도덕적 용기를 포장할 만한 대상을 찾을 때, 나는 언제나 내 앞에 있는 곧고 씩씩한 시선에 까만 눈동자를 한 프로이트의 남성답고 아름다운 얼굴을 본다.”

185656, 모라비(Moravie)의 프라이베르크(Freiberg, 체코 공화국의 Pribor)에서 출생하고, 슐로모/잘로모 지기스문트(Schlomo/Salomo Sigismund)라는 이름을 가진,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아말리아(Amalia Freud)와 야코프(Jacob Freud)의 아들이다. 그리고 직물업에 종사한 아버지의 세 번째 결혼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또 그 부부 아말리아와 야코프 사이에서 일곱 명의 아이, 율리우스(Julius), 안나(Anna), 데보라(Debora), 로자(Rosa), 마리(Marie[(Mitzi)], 아돌피네[돌피](Adolfine [Dolfi]), 파우리네[파우라](Pauline[Paula]), 알렉산더(Alexander)가 태어났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두 형, 엠마누엘 프로이트(Emanuel Freud)와 필립 프로이트(Philipp Freud)는 잘리 프로이트(Sally Freud, 야코프 프로이트 첫 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계모)와 야코프의 첫 결혼에서 태어났다.

출생할 때 할례를 받은 지그문트는 계몽주의 철학의 영향 속에서 비전통적인 유대 교육을 받았다. 그는 나의 황금 지기[Sigi, 지그문트의 애칭]라고 자신을 호칭한 어머니의 경애를 받았고, 고전적 유대주의의 가치를 심어 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체코 출신의 가정교사이며 가톨릭 교인인 모니카 자직(Monika Zajic)을 특별히 좋아하였다. 나니(Nannie)라는 애칭을 가진 그녀는 지그문트를 성당으로 이끌었고, 그에게 좋으신 하느님을 전하였고, 유대주의와 유대 민족성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프로이트가 섹슈얼리티*를 배워 나가는 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185910월 야코프는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사업이 기울어지자 프라이베르크(Freiberg)를 떠난다. 그는 라이프치히(Leipzig)에 정착하여 직물업을 위해 더 나은 조건을 찾고자 희망한다. 한편 엠마누엘(Emanuel)과 필립(Philipp)은 맨체스터로 이민을 갔다. 1년 후에도, 경제적으로 더 나은 조건을 찾기가 힘들자, 야코프는 빈의 유대인 구역, 레오폴트-슈트라세(Leopoldstrasse)에 머무르기로 마음을 먹는다. 1865-1873년 지그문트는 레알김나지움(Realgymnasium)을 다녔고, 그 후 오버김니지움(Obergymnasium)을 다녔다. 그 때 질버슈타인*(Eduard Silberstein)과 친분을 쌓는다. 그와 함께 프로이트는 지적으로 뛰어난 첫 서신 교환, 특히 철학자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와 서신을 교환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아버지의 친구인 사업가의 딸, 기젤라 플루스*(Gisela Fluss)와 사랑에 빠진다. 그 후, 그는 하인리히 브라운(Heinrich Braun, 1854-1927)과 우정도 맺게 되는데 그를 통해 정치학에 관심을 가졌고, 이어서 그 관심은 사회학으로 연장된다.

1873년 프로이트는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실험과학(science positive)과 특히 다윈의 생물학[자신의 모든 이론에 모델을 제시할]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1874년 베를린에 가서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 von Helmholtz)의 강의를 듣고자 꿈꾼다. 1년 후, 그의 동물학 교수, 카를 클라우스*(Carl Claus)의 주선으로, 그는 수컷 민물 뱀장어의 생태를 연구하기 위해 트리에스테(Trieste)에 갈 수 있는 장학금을 얻는다. 1877년 출판된 이 논문을 보면, 프로이트가 신경세포[미래의 신경 단위, 뉴론]의 특별 기능에 관한 이론 구상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1895󰡔과학적 심리학 초고󰡕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경험 이후, 프로이트는 동물학(Zoologie) 연구소에서 생리학(Physiologie) 연구소로 옮겨, 헬름홀츠*(Helmholtz)에 의해 창설된 비생기론 학파(École antivitaliste)의 대표적 학자인 브뤼케(Ernst Wilhelm von Brücke)의 제자가 된다. 6년간 머문 이 연구소에서 프로이트는 요제프 브로이어*(Josef Breuer)와 사귄다. 1879-1880년 군복무를 위해 연구소를 그만두고,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네 편의 에세이를 번역하면서 소일한다. 이 책은 오스트리아 그리스 연구가이자 작가이고 정치적 자유주의 이론가이며 영국 철학자의 독일어판 전집 출판 책임자인 테오도르 곰페르츠(Theodor Gom- perz, 1832-1912)의 기획으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1882년 의학박사 학위를 얻은 후, 그는 부인이 될 마르타 베르나이스(Martha Bernays/ Martha Freud])와 약혼한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그는 연구가의 길을 포기하고, 직업적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후 3년 간 빈의 일반 병원인 헤르만 노트나겔*(Hermann Nothnagel), 그리고 테오도로 마이네르트*(Theodor Meynert)에서 일한다. 거기서 그는 나단 바이스*(Nathan Weiss, 1851-1883)를 알게 된다. 이 새로 알게 된 친구가 목매달아 자살하여, 프로이트에게 큰 충격을 준다. 그는 부인 마르타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그의 삶은 소설 속의 한 인물 같았다. 그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파국이었다.”

유명하게 되기를 꿈꾸며,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결혼했던, 그는 코카인의 효력을 발견했다고 믿고는 불치의 병에 걸린 그의 친구 에른스트 폰 플라이슬-막소우*(Ernst von Fleischl-Marxow)에게 그것을 복용시킨다. 그는 마약으로 치닫게 될 코카인의 성분을 파악하지 못했고, 칼 콜러*(Carl Koller)가 발견하게 될 코카인의 마취 성분도 몰랐다.

1885년 신경학 대학교수 자격을 얻고 사()강사(Privatdozent)로 임명된 프로이트는 파리로 갈 수 있는 장학금을 얻는다. 그는 장 마르탱 샤르코*(Jean Martin Charcot)를 만나기를 열망한다. 그가 경험한 히스테리 증세가 프로이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의 첫 체류는 프로이트로 하여금 정신분석을 발견하도록 안내할 과학적 모험의 위대한 시작이었다. 생 마르탱(Saint-Martin) 극장에서 프로이트는 베르하르트(Sarah Ber- hardt)에 의해 연기된 연극 빅토리아 시대의 사르두(Victorien Sardou)’를 보고 큰 감명을 받는다. “어떠한 여배우도 그처럼 나를 놀라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가 하는 모든 대사를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파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소아과 전문의인 바긴스키(Adolf Baginsky) 강의를 듣기 위해 베를린으로 간다.

빈에 돌아온 그는 라타우스슈트라세(Rathausstrasse)에 사무실을 마련하여 개인 의사 업무를 시작한다. 일주일에 삼 일, 오후에만 그는 카소비츠(Max Kassowitz, 1842-1913)에 의해 운영된 첫 소아과 공립 기관인 슈타인들가세(Steindlgasse) 병원에서 신경학 의사로서 일한다. 18869월 그는 마르타와 결혼했고, 1015일 의학 학회에서 남자 히스테리*에 관한 강연을 하지만 냉담한 반응을 받았다. 그 이유는 그가 나중에 말한 것처럼, 그의 명제[병원학적] 때문이 아니라, 빈 의사들에게 이미 알려진 개념의 뿌리가 샤르코*에게 기원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887년 딸 마틸데(Mathilde [Hollitscher])가 태어난 한 달 후, 프로이트는 베를린에 사는 명석한 유대인 의사 빌헬름 플리스*(Wilhelm Fliess)를 알게 된다. 플리스*는 생리학과 양성애*에 관하여 폭넓은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허물없고 과학적인 서신 교환과 긴 우정의 시작이었다. 여러 실험에도 불구하고, 플리스*는 프로이트의 담배에 대한 집착을 치료하지는 못했다. 1929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24살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궐련을 피웠고 나중에는 엽궐련[시가]만 피웠다. 나에게 담배는 작업 능력을 엄청나게 증가시키고, 나 자신의 훌륭한 스승이었다.”

18919월 프로이트는 베르크가세(Berggasse) 19번지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사한다. 거기서 그는 1938년 망명 때까지 여섯 자녀 마틸데(Mathilde), 마르틴(Martin), 올리버(Oliver), 에른스트(Erst), 조피(Sophie) 할버슈타트(Halberstadt), 안나(Anna)와 처제 민나 베르나이스(Minna Bernays)에 둘러싸인 채 머문다. 분석가로서 그는 주로 히스테리* 장애에 이른 환자와 신경증 환자로 분류된 빈의 부르주아 여인을 돌본다. 치료적 허무주의를 떨쳐 버리면서, 그 당시 빈의 의학적 분위기에 매우 민감했던, 프로이트는 결국 자신의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며, 그들의 정신적 고통을 경감시켜 주고자 했다. 1년 간 그는 그 당시에 받아들여진 치료 방법, 즉 마사지, 냉수 치료법, 전기 치료법 등을 사용했다. 그러나 곧 그는 이 치료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확인한다. 그는 이폴리트 베르냉* (Hippolyte Bernheim)의 암시법(suggestion)에서 착안한 최면술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는 1889년 파리에서 개최된 첫 국제 최면 학회 때 베르냉*을 방문한다. 1891년 그는 개인 연구 논문 󰡔실어증 개념에 기여(Contribution à la conception des aphasies)󰡕를 출판한다. 이 글에서 프로이트는 단지 신경생리학적 언어 장애가 아닌, 기능적 정지를 제안하는 휴링스 잭슨*(Hughlings Jackson) 이론을 지지했다. 프로이트는 뇌의 장소 감각(localisa- tions cérébrales)’ 이론 대신, 연합설 이론을 사용했다. 이 이론은 메타심리학에서 보듯이 심적 기제개념을 정립하기 위한 한 과정이었다. 그는 1896년 그 첫 형태를 제공하였고, 󰡔꿈의 해석󰡕* 7장에서 그 토대를 마련했다.

브로이어*(Breuer)와 연구하면서, 프로이트는 카타르시스*(catharsis)’ 덕분에 점차 최면술을 버리고, 자유연상(libre association), 그리고 정신분석(psycho-analyse)을 만들어 갔다. 이 정신분석이란 단어는 1896년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그의 발견을 브로이어* 덕분이라고 전가했다. 1897년 노트나겔*(Nothnagel)과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Ri- chard von Krafft-Ebing)과 우호적인 관계에 의해, 프로이트는 특별 교수의 최고 자격을 받도록 추천된다. 그의 임명은 1902년 황제 프란츠-요제프에 의해 승인된다.

유대인 자신에 대한 증오로 물든 빈의 많은 지성인과는 달리, 유대인이고 비신자이고 비신앙인이며, 모든 의식과 종교에 적대적인 프로이트는 결코 자신의 유대 민족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마네스 스페르베(Manès Sperber)가 강조하듯이, 프로이트는 자신이 의식적인 유대인임을 어느 누구 앞에서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긍지를 갖고 그것을 드러냈다. 여러 차례 그는 빈 사람을 미워했고, 그가 자란 이 도시를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을 수 없는 관계 때문에 이 도시에서 뿌리 내리고 살아야 했다.”고 말한다.

플리스와의 우정 관계를 통해 프로이트 삶에 있어서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진행된다. 즉 자기-분석*, 사례 교환[엠마 엑슈타인*(Emma Ekstein)], 여러 여인들[베르타 파펜하임*(Bertha Pappenheim), 파니 모저*(Fanny Moser), 아우렐리아 욈*(Aurelia Öhm), 안나 폰 리벤*(Anna von Lieben), 루시 엘리자베트 폰 R.(Lucy, Elisabeth von R.), 마틸데(Ma- thilde H.), 로잘리(Rosalie H.)]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술한 󰡔히스테리 연구󰡕* 출판, 그리고 유혹 이론*의 포기 등이다. 유혹 이론*을 포기함으로써, 모든 신경증*을 실제 트라우마로 설명한다. 정신분석 역사*에서 근본적인 이 거부는 1897921일 내려진다. 프로이트는 상기된 어조로 플리스*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에는 유명한 말 나는 더 이상 나의 신경증(neurotica)을 믿지 않는다.”는 글귀가 쓰여 있다.

그래서 그는 판타즘 이론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꿈, 억압*에 둘러싸인 무의식, 그리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새로운 개념을 착안했다. 그의 소포클레스 비극에 대한 관심은 󰡔햄릿(Hamlet)󰡕에 대한 열정에 못지않았다. 프로이트는 영국 문학을 즐겨 읽는 독서가였다. 특히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1897년에 프로이트는 플리스*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의 갈등은 또한 󰡔햄릿󰡕의 핵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셰익스피어가 고의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제 한 사건이 그 시인으로 하여금 이 드라마를 쓰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즉 그가 드라마 주인공의 무의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그의 무의식이 바로 그 실제 사건인 것이다.”

1926년 이후, 제임스 스트레이치*(James Strachey)와의 긴 토론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셰익스피어가 그 작품의 저자가 아니었다는 믿음을 고수한다. 부성 또는 정체성 부여의 대치라는 이 테마는 프로이트 작품 여러 곳, 특히 모세를 이집트인이라고 한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발견된다.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이론은 1899년 출판된 두 번째 저서에서 나타난다. 그 책에서 프로이트는 18957월 벨뷔(Bellvue)라는 마을, 빈 숲 속 작은 별장에서 체류하면서 이르마에게 놓은 주사라는 꿈을 이야기한다. 1900612일 플리스*에게 쓴 편지에서 프로이트는 당신은 이 집에 ‘1895724일 신비한 꿈이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에게 나타났던 집이란 현판이 붙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그것은 단지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1901-1905년 사이, 프로이트는 그의 첫 임상 사례(Dora)와 세 권의 저서.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 󰡔재담과 무의식의 관계󰡕(1905), 󰡔성 이론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1905)를 출간한다. 1902년 알프레트 아들러*(Alfred Adler), 빌헬름 슈테켈*(Wilhelm Stekel), 막스 카하네*(Max Kahane, 1866-1923)와 루돌프 라이틀러*(Rudolf Reitler, 1865-1917)와 함께, 프로이트는 프로이트주의*에서 첫 모임인 수요 심리 학회*를 만든다. 계속해서 빈의 여러 사람, 가령 파울 페데른(Paul Federn), 오토 랑크*(Otto Rank), 프린츠 비텔스*(Fritz Wittels), 이지도르 자드거*(Isidor Sadger) 등이 이 모임에 가입한다. 이 모임에서 문학, 인류학, 역사 등 모든 지식 전반에 정신분석의 응용 가능성이 실험된다. 프로이트 자신은 판타지 부류에 속하는 󰡔옌젠의 그라디바(Gradiva)’ 중에 나타난 망상과 꿈󰡕(1907)을 출판함으로써 응용 정신분석* 개념을 정립한다.

1907-1908, 프로이트 첫 제자 모임은 한스 작스*(Hanns Sachs), 산도르 페렌치* (Sandor Ferenczi), 카를 아브라함*(Karl Abraham),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 에이브러햄 아든 브릴*(Abraham Arden Brill), 막스 아이팅곤*(Max Eitingon) 등이 정신분석 가입으로 더 확산된다.

20세기 첫 25년 간, 프로이트주의*는 영국, 헝가리, 독일, 미국 등 여러 나라에 뿌리를 내린다. 스위스에서는 정신분석 운동 역사에서 주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취리히 부르괼츠리(Burghölzli) 클리닉 병원장,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는 정신분석 방법을 정신증* 치료에 적용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정신 분열 개념이 만들어진다. 바야흐로 새로운 약속의 땅에 프로이트의 교리가 펼쳐진다. 이 땅은 정신의학적 지식을 탐구할 수 있게 하고, 인간의 광기*라는 수수께끼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게 한다.

190733일 블로일러* 제자이자 조교인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프로이트를 만나기 위해 빈에 온다. 여러 시간 이야기를 나눈 후, 그는 새 스승에 의해 완전히 매료된다. 그는 프로이트 제자 가운데 처음으로 비유대인이었다.

1909년 프로이트는 그랜빌 스탠리 홀*(Grandville Stanley Hall)의 초청으로 융*과 페렌치*와 함께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Worcester) 시에 있는 클라크(Clark) 대학에 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다섯 번 강연을 하고, 그것은 후에 󰡔정신분석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출간된다. 제임스 잭슨 풋남*(James Jackson Putnam)과의 우호적 만남과 주목할 만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미국 대륙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일생 동안 순수하고 엄청난 환호로 자신의 생각을 맞이하는 이 나라의 청교도적이고 실용주의 정신을 경계했다.

반유대주의를 두려워하고, 정신분석이 유대인만을 위한 학문이 되는 것을 염려하면서, 프로이트는 초기 운동의 선두 주자로 융*을 둠으로써 정신분석을 비유대주의화하고자 결심했다. 1908년 모든 지역의 협회가 잘츠부르크에 모여서 첫 학술회를 가진 후, 프로이트는 1910년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페렌치*와 함께 국제 정신분석 학회 (Internationale Psychanalysche Vereinigung, IPV)를 조직한다. 1933년 독일식 약자 표기를 포기하고, 국제 정신분석 학회(International Psychanalytical Association, IPA)*로 바뀐다.

1909-1913, 프로이트는 두 권 저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 시절 기억󰡕(1910), 󰡔토템과 터부󰡕*(1912-1913)를 출판한다. 1910년부터 이 운동이 확장되면서 사람들 사이의 논쟁과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점에 대한 논쟁에 봉착하여 이탈로 이어진다. 즉 치료 기간, 전이*와 역전이*, 섹슈얼리티*의 자리매김과 무의식의 개념 정의에 대한 비판은 나르시시즘적 경쟁의식과 뒤섞인다. 1911년 아들러*와 슈테켈*은 프로이트 모임에서 떠나간다. 2년 후, *과 프로이트는 모든 관계를 청산한다. 자기 이론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프로이트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정신분석 운동의 역사에 관하여󰡕라는 팸플릿을 발간한다. 여기서 그는 융*과 아들러*의 배신을 드러낸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최고 용사들로 구성된 비밀 위원회*를 만든다. 그 회원들에게 충성의 반지를 나누어준다.

이탈이 일어나기 전, 이 여정은 새로운 논쟁으로 치닫는다. 어니스트 존스*에 의해 지지된 베를린 사람[아브라함과 아이팅곤*]은 제도적 정통주의를 찬양한다.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사람[랑크*와 페렌치*]은 분석 기술 혁신에 더 관심을 두었다. 새로운 이탈은 이 첫 프로이트주의* 역사, 즉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에 관련된 이야기로 표출된다.

1930년경, 이탈 현상은 대중운동으로 정신분석을 변형시키고자 하는 특징인, 분파되는 현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제 서로 대결하는 것은 그들의 스승과 경쟁 관계에 있는 제자 또는 개척자가 아니라 단체 간의 다툼이다. 빈에 갇혀 있었다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프로이트는 이 운동의 정치를 제어하지 않았고 저서 집필을 계속해 나갔다. 1919-1933년 국제 정신분석 학회(IPA)*는 정신분석가 양성과 관계된 모든 기술적 문제를 규칙화하는 관료적 기계처럼 변형된다.

1차 세계대전 말, 심적 상흔들인 트라우마의 특징에 관한 토론이 전쟁 신경증* 환자들의 등장과 함께 문제가 제기된다. 프로이트는 오래 전부터 그의 경쟁 상대인 율리우스 바그너-야우레크*(Julius Wagner-Jauregg)와 맞선다. 야우레크는 꾀병 환자(simulateur)로 판단된 병사에게 무용한 전기 치료법을 사용하다가 고소당한다. 이 논쟁에서 프로이트는 대가답게 다른 모든 방법보다 정신분석이 우월함을 보여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와 아울러, 베를린은 프로이트주의*의 중심지가 된다. 그 증거로는 베를린 정신분석 연구소(BPI)* 창설, 오토 페니첼*(Otto Fenichel)좌파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다양한 활동을 들 수 있다. 미국인들이 스승의 분석 침대 위에서 수련 받기 위해 빈으로 들어올 무렵, 그 스승은 자신의 딸 안나 프로이트*를 분석한다. 그녀는 머지않아 학파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동 정신분석*에서 그녀의 경쟁자인 멜라니 클라인*과 맞선다. 1924년부터 국제 정신분석 학회(IPA)*에서 전개될, 그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할 영국 학파와 빈 학파 사이의 대립은 점차로 정신분석에서 여성의 위치를 증언한다. 이 논쟁에 있어서, 프로이트는 여성 기피증을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리비도* 이론과 남근*(phallus) 중심 사상을 고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개인적으로 가부장적 부르주아 가정 개념을 갖고 있었지만 지성 있는 여성과 우정에서는 현대적이고 평등하고 정중한 태도를 보인다. 그의 이론과 치료의 위상을 통해 그는 여성 해방의 역할을 담당한다.

1920년대에 프로이트는 세 권의 주요 저서,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1920), 󰡔대중심리와 자아 분석󰡕*(1921), 󰡔자아와 그것(거시기)󰡕*(1923)을 출판한다. 이 저서를 통해 그는 자신의 제2차 위상학*을 정리하고, 무의식 이론과 충동적 이원론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완전히 개정한다. 이러한 개념적 개정 움직임은 이미 1914년 나르시시즘* 문제에 공헌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1915년 메타심리학 연구와 전쟁과 죽음에 대한 에세이 출판으로 그것을 확신한다. 후자의 저서에서 프로이트는 주체*에게 있어서 삶을 지탱하기 위해 죽음의 견지에서 조직되는필요성을 강조한다. 현대 프로이트주의*의 다양한 흐름은 삶과 죽음의 변증법, 자아와 그것(거시기)*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개정으로부터 나타난다. 그 흐름은 에고 심리학*, 셀프 심리학*, 라깡주의*, 안나프로이트주의*, 독립주의* 등을 말한다.

죽음의 충동*의 실존을 가정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그리스 신화의 두 큰 흐름, 에로스 (Eros, 삶의 충동*)와 타나토스(Thanatos, 죽음의 충동*)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오리지널 이론의 개정은 세기말부터 이미 죽음에 사로잡힌 빈 사회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절대적 부정에 직면한 시기에 나타난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가 강조하듯이, 그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희미한 빛, 불확실하고 회색의 그림자 이상으로 유럽의 지도 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19232월 절단해야만 하는 작은 종기가 프로이트 입안 오른쪽에서 발견된다. 처음에 자신의 주치의 펠릭스 도이치*(Felix Deutsch)는 이 종기의 해로운 본성을 그에게 숨겼다. 6개월 후, 빈의 외과 의사, 피히러(Hans Pichler)는 입안의 오른편과 턱뼈를 절제하는 수술을 한다. 막스 슈어*(Max Schur)의 기록에 의하면 계속해서 31번의 수술이 진행된다. 프로이트는 인공 보정기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괴물로 불린다. “츠바이크(Zweig)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공 구개를 한 프로이트는 말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 그는 그의 대화 상대자와 자유자재로 이야기하지 못하였다. 그의 강철 같은 영혼은 그의 의지로 그의 육체를 강타한 미약한 고통보다 더 강력함을 그의 친구들에게 증명하는 데 각별한 열정을 보였다. [] 그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싸움은 치열해졌고, 더 승화되었다. 내가 그를 볼 때마다 죽음이 그의 얼굴 위에 더 확연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 어느 날 나는 그를 마지막으로 방문하면서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와 함께 갔다. 내 생각으로 그는 프로이트를 존경하는 젊은 세대 가운데 가장 천부적인 화가이다. 내가 말을 거는 동안 그는 초상화 밑그림을 그렸는데 차마 그에게 그것을 내보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임박한 프로이트 죽음을 꿰뚫는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 병이 계속 활동하고자 하는 프로이트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는 오히려 그 병으로 정신분석 운동의 제반 사항에서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1934년 이후 국제 정신분석 학회(IPA)*의 운명을 지배한 사람은 존스*(Jones)이었다. 이 때 막스 아이팅곤*(Max Eitingon)은 독일을 떠나라는 강요를 받았다.

텔레파시*에 열정을 갖고 있었던 프로이트는, 1921-1933년 합리적, 과학적 그리고 의학적 토대를 정신분석에 부여하고자 결심한 존스*의 정책적 흐름과는 반대로, 페렌치*와 함께 신비적경험에 전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926년 라이크*(Theodor Reik)에게 제기된 소송에 따라, 프로이트는 󰡔일반인에 의한 분석 문제󰡕를 출판하면서, 의사가 아닌 정신분석가를 강력하게 옹호한다. 그 다음 해, 그는 󰡔환상의 미래󰡕*를 출판하면서 그의 친구 오스카르 피스터*(Oskar Pfister)와 함께 논쟁에 참가한다. 이 책에서 그는 종교와 신경증*을 비교하고, 1930󰡔문명 속의 불안󰡕에서는 인간을 패망으로 몰고 갈 파괴적 충동*이 지배하는 근대 민주 사회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2년 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과 서신 교환에서는, 문화의 발전은 항상 전쟁을 반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1929-1939, 프로이트는 마카엘 몰나르(Michael Molnar)에 의해 1992년 런던에서 출판된 가장 간소한 연대기를 쓴다.

프로이트는 인간성의 미래에 대하여 차츰 비관적이 되고, 나치즘*이 유대인과 정신분석을 취급하는 방식에 대해 어떤 환상도 품지 않는다. 츠바이크*(Zweig)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사상가는 참된 인간으로서 심한 심적 동요가 있긴 했으나, 짐승과 같은 무시무시한 침략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는 라이히슈타크(Reichstag) 화재가 난 다음 날에, 아이팅곤*(Eitingon)과 함께 베를린 정신분석 연구소(BPI)*의 존속을 약속한다. 비록 그가 존스*에 의해 찬양된 정신분석 구출(sauvetage)를 위한 정책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괴링*(Mattias Heirich Göring)과 어떠한 방식으로든 화해하는 것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괴링*은 권력가 히틀러의 도래 이후 모든 정신분석 활동을 정지시켰기 때문이다. 반면 그는 분열자[라이히와 아들러주의자]와 대항하는 싸움에서 특권을 주는 오류를 범했다.

19383월 독일군에 의해 오스트리아가 병합되자, 스터바*(Richard Sterba)는 존스*의 정치를 거부하기로 결심을 하고, 괴링*(Göring)에 의해 베를린에 설립된 사례처럼 아리안족화된(독일화된)’ 조직을 빈에 만들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괴링*에 반대하는 행동을 한다. 그런 결정으로 빈 정신분석 학회(WPV)는 붕괴되고, ‘프로이트가 머물게 될 그 곳으로 그 기관을 옮긴다. 미국 외교관 불리트(William Bullitt, 1891-1967)의 개입과 마리 보나파르트*(Marie Bonaparte)가 지불한 보석금 덕분에, 프로이트는 가족과 함께 빈을 떠날 수 있었다. 출발 당시, 그는 그와 주변 사람들이 국가-사회주의당(나치즘)* 당원에 의해 괴롭힘을 당한 일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런던에서 그는 미래에 프로이트 박물관*이 세워질 메어즈필드 가든(Maresfield Gardens) 20번지에 정착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 저서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를 집필했다. 그는 집단 수용소에서 몰살한 네 명의 여동생의 운명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

1939년 초, 그는 매일 라디오를 들었다. 이것이 마지막 전쟁인지 어떤지 묻는 주위 사람들에게 그는 나의 마지막 전쟁이라고 간단하게 답한다.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의 소설 󰡔도톨 가죽(La Peau de chagrin)󰡕을 처음으로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한다. “이것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쇠약(衰弱)에 의한 수축과 죽음을 말하고 있다.” 921일 그는 막스 슈어*(Max Schur)의 손을 잡고, 그와의 첫 만남과 추억을 떠올린다. “당신은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소. 그러나 지금은 그것은 고문일 뿐이네. 그 약속은 더 이상 의미가 없소.” 그리고 그는 이어 말한다. “안나에게 말하시오. 안나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합시다.” 숙고한 안나는 운명의 순간을 미루고 싶었다. 그러나 슈어*는 그녀가 그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한다. 그는 세 번에 걸쳐 모르핀 3센티그램을 프로이트에게 투여했다. 923일 새벽 3, 이틀간 혼수상태 후, 이 노인은 평온하게 숨을 거둔다. 츠바이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숭고한 삶의 숭고한 결론이었다. 살육 시대의 대살육의 와중에서 기억할 만한 죽음이었다. 우리 친구들이 관을 내릴 때, 우리는 우리 조국이 가졌던 가장 훌륭한 것을 영국 땅에 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유골은 골더스 그린(Golders Green) 화장터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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