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90주년] 그와 만나니, "나의 환희는 거칠 게 없어라!" My jubilee ist unverhemmet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백남준 음악의 바깥에서 또 다른 바깥을 보았다. 먼저 서양음악의 최고 전위였던 쇤베르크의 무조음을 해체하고 그리고 쇤베르크의 제자인 존 케이지의 소음과 침묵을 음악의 영역으로 포함한 그가 1958년에 만난 스승 격인 그런 무작곡 음악마저도 해체하고 이 세상에 한번도 없었던 전후무후한 전대미문의 음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는 이마저 넘어서 전자추상음악을 TV라는 매체를 통해서 구현하려고 했다 백남준에게 TV는 물리적 음악이자 최고의 악기로 삼아 세계미술사의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1980년 ‘한국과의 만남’과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백남준, 1961년 이 세상에 한 번도 없었던 음악 작곡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 최후 1초, 교향곡 2번>
<백남준, 독일 등 외국동료 얼떨떨하게 만들고 넋 빼놓다 그들 압도하다>
[오르기날레(Originale) 괴짜들 : 슈톡하우젠이 작곡한 실험적인 음악연극]
[시간] 1961년 10월 26일~11월 6일까지 매일 오후 8시 30분
1961년 1차 《오리기날레》 독일 쾰른 초대자: 슈톡하우젠, 1964년 《오리기날레》 미국 뉴욕에서 초대자: 샬럿 무어먼
[장소] 쾰른극장(Theater am Dom)에서 공연하다.
[방식] 음렬음악의 형식과 초기 해프닝 구조가 혼재, 여러 매체가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다
[공연] 여기에 행위 작곡가 백남준은 괴짜 음악가로 초대받아, <Simple>, <Zen for Head>, <Etude Plantonique No.3>을 공연
[평가] 슈톡하우젠은 매번 같은 방식으로 악보를 연주했고, 완벽한 깨달음을 얻었다. 반대로 나는 전통과 완벽성보다 유연성과 즉흥성을 더 선호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백남준 정말 훌륭했다
[출연] [01] Composer Karlheinz: StockhausenStage [02] Director: Carlheinz Caspari [03] Pianist: David Tudor
[04] Percussionist: Christoph Caskel(타악기) [05] String player: Kenji Kobayashi
[06] Action Composer: Nam June Paik [07] Street Singer: Lilienweiß & Belina
[08] Poet: Hans G. Helms [09] Painter: Mary Bauermeister
[10] Cameraman: Wolfgang Ramsbott [11] Lighting Director: Walter Koch
[12] Sound Engineer: Leopold von Knobelsdorff [13] Child: Christel & Markus Stockhausen
<백남준, 독일 등 외국동료 얼떨떨하게 만들고 넋 빼놓다 그들 압도하다>
텔레비전, 텔레(멀리)+비전(보다) :백남준 1960년 초에 모든 소리를 모아서 sound collage 이것을 모바일 이미지로 mobile image로 변형하는 것에 관심이 높았다. 음악이 미술이 되고 미술이 음악이 되는 음악과 미술의 경계가 없는 세상을 동경하다/완벽한 최후의 1초 교향곡 2번 텍스트 스코어 악보 / 작가들 쉽게 손을 못 댄다. /사운드 아티스트 작가들 작품과정의 여러가지 고충과 주제 등에 대해 설명 / <백남준은 음악가답게 그의 모든 공연 작품을 작곡으로 봤다>
<1층>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Archaeology of Avantgarde)》기획: 이수영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사 2022.3.3~9.18 <2층>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와벽한 최후의 1초-교향곡 2번》 기획: 한누리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사 2022.3.3.~9.18 주최주관 : 백남준아트센터, 경기문화재단 협찬 : 노루페인트, 데스커 <작성 중>
[백남준90주년] 그와 만나니, "나의 환희는 거칠 게 없어라!"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My Jubilee ist Unverhemmet) 1977년 작품.
백남준 45살 때다 백남준 다음 해 독일 교수가 되는데 그의 40대 중반 자신의 삶과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고양된 시기인 것 같다.
백남준 자신의 환희와 열락으로 넘치는 예술세계를 한국의 태극기를 더 단순화해서 그리다 백남준이 여기서 주체할 수 없는 환희를 느낀 것을 바로 그의 10대 최고의 선생인 쇤베르크의 전위음악도 파괴시키고, 20대 최고의 선생인 존 케이지의 실험음악도 파괴시키고, 백남준만의 행위음악을 넘어서 유래없는 비디오 전자페인팅을 창조한 것에 대한 자부심 드러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창조자로서의 존재감을 참을 수 없고 거칠 것이 없다라고 전혀 주저함 없이 표출시키다. 이 작품에는 그의 첫 스승인 쇤베르크의 1899년 작품 <정화된 밤(Transfigured Night)>을 4배 느리게 재생한 소리도 함께 담았다. 역시 쇤베르크와 충격적 예술의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백남준 아트센터 김성은 관장 인사말 난이도 높은 작품 최선 다했다 백남준 아트센터 한누리 큐레이터와 취재 기자의 긴밀한 소통과 사실 확인.
[전시개요] [1] 전시명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Archaeology of Avantgarde)》 [2] 전시 기간 : 2022.03.03~09.18 [3] 전시장소 : 백남준아트센터 제1전시실 [4] 기획: 이수영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사 [5] 참여작가 : 백남준 [6] 주최주관 : 백남준아트센터, 경기문화재단 [7] 협찬 : 노루페인트, 데스커 기획: 이수영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사
백남준 아트센터 김성은 관장 인사말 난도 높은 작품 최선 다했다 백남준 아트센터 한누리 큐레이터와 취재 기자의 긴밀한 소통과 사실 확인하다.
[전시소개]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 경기문화재단 백남준아트센터(관장 김성은)는 오는 3월 3일부터 9월 18일까지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 》를 개최한다. 2022년 첫 번째 전시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는 백남준 생애와 작품의 중요한 순간을 돌아보는 열 장면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번 전시는 영화의 플래시백 기법처럼 백남준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열 가지 순간을 되짚어가며, 백남준이 항상 새로운 매체와 예술에 도전하는 삶을 살았던 근원적 이유가 바로 아방가르드 정신에 있었음을 제시한다.
2000년 레이저 작품 앞에 있는 백남준에서 시작하여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설치 중인 백남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지휘하던 백남준을 거쳐 1960년대의 청년 백남준까지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시간의 역순으로 보여준다.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는 그동안 국내에서 많이 선보이지 않았던 작품들을 포함한다.
1977년 백남준이 발표한 음반 <나의 축제는 거칠 것이 없어라>를 비롯하여, <자화상>(1998)(서울시립미술관 소장)과 대규모 미국 순회전 《전자 초고속도로》(1994-1997)의 출품작 〈사이버포럼〉(1994)(한국민속촌 소장) 등을 볼 수 있다.
아방가르드의 고고학 [백남준 비디오 고고학 1965] [01] 1954년: RCA 최초의 전자식 컬러 TV 출시
[02] 1957년: 소련 최초 인공 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03] 1961년: Ampex 최초의 가장용 비디오 테이프 출시,
[04] 1964년 필립스 최초 1인칭 롤테이프 EL3400 발명,
[05] 1965년 소니 최초 휴대용 2분1인치 테이프 레코드 포타팩Portapak AV 3400출시 등등 1990년대까지 이어진다.
[06] 1966년 금성 국내 최초의 TV VD-191 생산 유매틱(U-matic) 출시
[07] 1974년 JVC 홈 비디오시스템 VHS 출시
[08] 1982년 소니 최초의 캠코더: 베타 무비 출시
[09] 1984년 한국 모든 TV 방송 컬러 송출 시작하다
[10] 1986년 디지털 비디오 시대 개막 소니 4:2:2 콤포넌트 시스템 개발 =====>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My jubilee ist unverhemmet)" -1977년(백남준 45세) 쇤베르크와의 운명적 만남이야기. -<아방가르드의 고고학>
2주만 있으면 나도 마흔다섯 살이 된다. 지금이야말로 '아방가르드의 고고학’을 만들 때가 아닐까. 1940년대에 나는 한국에서 살았는데, 그때는 거의 모든 정보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인쇄된 일본 서적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1947년 무렵, 나는 운 좋게 쇤베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악마라든가, 가장 극단적인 전위주의자라고 평하는 것을 듣고 즉시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쇤베르크의 악보는 <피아노를 위한 곡 op.33a> 의 해적판이 유일했다.
그 음반을 구하려고 나는 2~3년간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정화된 밤이라는 제목의 이 음반은 일본에는 이미 전쟁 전에 소개되었다. 처음이 음반을 두 손에 쥐었을 때 나는 마치 이집트의 묘지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흥분했다. 그리고 곧이어 느낀 절망감도 잊을 수 없다. 그의 음악은 바그너 식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주 232 : My jubilee ist unverhemmet: 리비어 - 호스만 사에서 출시된 음반 케이스에 적힌 글, 함부르크 · 브뤼셀, 1977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25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뉴욕의 벼룩시장에서 쇤베르크의 같은 음반을 발견했다. 나는 머스 커닝햄의 발레 공연에 사용하려고 천천히 네 번 들어보았다(16배속으로). 머스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자네가 쇤베르크를 업그레이드했군!” - 1977년 7월 2일, 함부르크
P.S. 오늘 나는 왜 내가 쇤베르크에게 관심을 보였는지 생각해본다. 그가 가장 극단적인 아방가르드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면 왜 그의 '극단성'에 관심을 보였을까? 나의 몽골 유전자 때문이다. 몽골… 선사시대에 우랄 알타이 쪽의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란드까지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그들은 농업 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 여행을 떠나 새로운 지평선을바라보았다. 그들은 언제나 더 먼 곳을 보러 떠나야만 했다.
텔레-비전은 그리스어로 '멀리 보다' 라는 뜻이다. 멀리 보다 = 텔레비전을 보다 - 텔레-비전
라플란드: 스칸디나비아 반도 핀란드 북구 러시아 콜라 반도를 포함한 유럽 최북단지역으로 '사프미'라고도 한다.
MS-플럭서수스(교향곡 7번): 물 속에서 바이올린 연주
[1980년 독일에서 교수 시절, 백남준 교향곡 7번 MS-FLUXUSSUS] 백남준 〈MS-플럭서수스(교향곡 7) Nam June Paik, MS-Fluxuss 1980
백남준 라인강가에서 무선조종기로 바이올린을 조종하며 연주하다. 얼핏보면 낚시하는 장면으로 착각할 수 있다 Nam June Paik standing by the river Rhein plays the violin by using a wireless controller Paik is wearing a Beret and winter coat
바이올린에 달린 작은 프로펠러가 강의 거센 물결을 거스르고 소리를 낼수 있을까. 플럭서스 정신에 입각해 예술이 취할 수 있는 형태의 급진적 변화를 모색한 백남준에게, 넓은 의미의 음악은 예술의 원천과도 같았다.
특히 이 작품에는 “교향곡7번”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바이올린의 소리 외에 수많은 물결과 물결을 일으키는 바람, 주변의 소리까지도 모두 교향곡의 일부가 된다.
백남준의 작품은 배터리로 작동하며 물에 떠다니는 바이올린으로, 조종기로부터 전방 1km까지 제어 가능하다. 무선제어 조립식 모형 배 전문 제조사인 로베(Robbe)의 2-채널 송신 기능을 갖춘 40MHz 이코노믹 AMS 원격 조종 시스템을 사용했으며, 바이올린은 수제 현악기 전문 제작사인 피라스트로(Pirastro)에서 만든 것으로 뒷면을 사각으로 뚫어 엔진을 장착했다.
이 작품은 1981년 뒤셀도르프의 호프가르텐 공원의 라인 강변에서 백남준이 초연하였으며, "아쿠아 콰르텟”이라는 이름으로 네 명의 1986년에는 독일 홈브로이히 미술관에서 <MS-플럭서수스(교향곡 7번)>를 연주한 연주자들이 연못에서 바이올린을 건져내어 적도 있다.
독일 라인강변에 작은 프로펠러가 달린 바이올린이 떠 있다. 백남준은 강가에 서서 무선조종기를 들고 바이올린을 조종하고 있다.
MS 플럭서수스 ( 교향곡 7 번 )
독일 라인 강변에 작은 프로펠러가 달린 바이올린이 떠 있다. 백남준은 강가에 서서 무선 조종기를 들고 바이올린을 조종하고 있다. 바이올린에 달린 작은 프로펠러가 강의 거센 물결을 거스르고 소리를 낼 수 있을까.
플럭서스 정신에 입각해 예술이 취할 수 있는 형태의 급진적 변화를 모색한 백남준에게, 넓은 의미의 음악은 예술의 원천과도 같았다. 특히 이 작품에는 “교향곡 7번”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바이올린의 소리 외에 수많은 물결과 물결을 일으키는 바람, 주변의 소리까지도 모두 교향곡의 일부가 된다.
백남준의 작품은 배터리로 작동하며 물에 떠다니는 바이올린으로, 조종기로부터 전방 1km까지 제어 가능하다. 무선 제어 조립식 모형 배 전문 제조사인 로베(Robbe)의 2-채널 송신 기능을 갖춘 40MHz 이코노믹 AMS 원격 조종 시스템을 사용하였으며, 바이올린은 수제 현악기 전문 제작사인 피라스트로(Pirastro)에서 만든 것으로 뒷면을 사각으로 뚫어 엔진을 장착하였다.
이 작품은 1981년 뒤셀도르프의 호프가르텐 공원의 라인 강변에서 백남준이 초연하였으며, 1986년에는 독일 홈브로이히 미술관에서 “아쿠아 콰르텟”이라는 이름으로 네 명의 연주자들이 연못에서 바이올린을 건져내어 <MS-플럭서수스(교향곡 7번)>를 연주한 적도 있다.
2주만 있으면 나도 마흔다섯 살이 된다. 지금이야말로 '아방가르드의 고고학’을 만들 때가 아닐까. 1940년대에 나는 한국에서 살았는데, 그때는 거의 모든 정보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인쇄된 일본 서적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1947년 무렵, 나는 운 좋게 쇤베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악마라든가, 가장 극단적인 전위주의자라고 평하는 것을 듣고 즉시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쇤베르크의 악보는 <피아노를 위한 곡 op.33a> 의 해적판이 유일했다. 그 음반을 구하려고 나는 2~3년간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정화된 밤이라는 제목의 이 음반은 일본에는 이미 전쟁 전에 소개되었다. 처음이 음반을 두 손에 쥐었을 때 나는 마치 이집트의 묘지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흥분했다. 그리고 곧이어 느낀 절망감도 잊을 수 없다. 그의 음악은 바그너 식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백남준은 1965~1993년 인터넷이 나오기까지 30년간 다양한 전자제품을 사용하다. 그 변천사를 읽을 수 있다 고고학이란 말이 좀 거창하기는 하지만 인류문명사 이래 정보수집기술과 복제기술 전자하이테크 기술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발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60년대 진공관이나 녹음에서 90년대까지 모든 전자기술품이 총동원된다. 지금 비교하면 너무 형편없는 기술이지만 그 당시로는 첨단기술이었다 백남준 1회용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영구 혁명처럼 영구 아방가드르드를 추구했다.
백남준은 1965~1993년 인터넷이 나오기까지 30년간 다양한 전자제품을 사용하다. 그 변천사를 읽을 수 있다 고고학이란 말이 좀 거창하기는 하지만 인류문명사 이래 정보수집기술과 복제기술 전자하이테크 기술이 이렇게 빠른 시간에 발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60년대 진공관이나 녹음에서 90년대까지 모든 전자기술품이 총동원된다. 지금 비교하면 너무 형편없는 기술이지만 그 당시로는 첨단기술이었다 백남준 1회용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영구 혁명처럼 영구 아방가드르드를 추구했다
1966년 금성 국내 최초의 TV VD-191 생산, TV 수상기 있는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한일 전 레스링 중계할 때 그랬다삼성이 LG 따라잡은 것이 얼만 안 된다 1960~70년대는 삼성은 전해 맥을 못 쓰다 다 금성 LG 뿐이었다
텔레-비전은 그리스어로 '멀리 보다' 라는 뜻이다. 멀리 보다 = 텔레비전을 보다 - 텔레- 비전 라플란드: 스칸디나비아 반도 핀란드 북구 러시아 콜라 반도를 포함한 유럽 최북단지역으로 '사프미'라고도 한다.
비디오 고고학 중 중반에 와 있다.사이버네틱스(1965년 언급) 사회 속 인간의 전형인 <전자 노마드(유목민)>과 <SNS 쌍방소통방식의 포럼> 작품 제목 1994 사이버 포럼 백남준
백남준은 자신의 예술적 성향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돌아보며 그 근본을 깊이 탐구하는 과정을 ‘아방가르드의 고고학’이라고 불렀다. 백남준은 열다섯 살 무렵에 들었던 “쇤베르크가 가장 극단적인 전위주의자다”라는 말에 즉시 마음이 끌렸다고 말했다.
마치 영혼의 깊숙한 바닥으로부터 무언가가 울려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전위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일생의 방향을 정한 것이다. 백남준은 그가 아방가르드에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이 자신의 유전자로부터 유래한 것, 즉 자신의 본래의 성격에 아로새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남준은 우랄 알타이 사냥꾼들이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언제나 멀리 떠나 새로운 지평선을 바라보았듯이, 아방가르디즘이 자신의 삶을 항상 새로운 예술로 잡아끄는 근원이었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왜 백남준이 그토록 멀리 보는 기계, 즉 텔레비전(tele-vision)에 끌렸었는지, 그리고 왜 항상 새로운 매체를 찾아 작업을 했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1970 신디사이저를 개발>
1970년 백남준과 아베가 젖 먹던 힘까지 다 발휘하면서 죽을 고생 고생 끝에 신디사이저를 개발한 매우 중요한 해다. 백남준은 이때부터 대중 예술가와 적극적으로 협업을 했고 상업방송매체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 비디오편집기가 나옴으로써 인터넷의 발아점이 시작된다.
1970년에 발명한 신디사이저를 원작이 워낙 낡아서 못 쓰게 되자 누구나 비디오를 피아노치듯 쉽게 장난치면서 편집해 보라고 백남준 돌아가신 후 다시 제작해 만들었다 지금 백남준아트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이것을 만들 때 피똥 샀다고 백남준 달마대사의 고행(앉아서 9년간 면벽 수행을 했다.수행하기에 변 처리가 안되고 하반신이 없어질 때까지 수행)의 비유하기도 했다.
1971년 뉴욕 보니노 갤러리에서 열린 백남준 전시에 참가한 오노요코와 존 레논 그리고 백남준 기술 담당 동료인 아베 그런데 오늘 백남준 아트센터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 전시에서 이 사진의 배경이 되는 4개의 TV 세트를 재현하다.
백남준은 마흔다섯 살을 2주 앞두고, 지금이야말로 ‘아방가르드의 고고학’을 만들 때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흔 살의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지 알 수 없지만 마흔다섯 살 생일을 앞두었던 백남준의 생생한 고민을 돌이켜 들을 수는 있다.
백남준이 마흔다섯 살이 되던 1978년에 그의 상황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그는 생계 때문에 친구였던 요셉 보이스의 뒤를 이어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승낙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 전시에서 선보였던 <사이버포럼>은 위성 안테나를 지붕으로 하는 작은 법정에 서 있는 로봇을 연출한 것으로, 인간이 아닌 로봇마저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미래적인 사유를 보여준다.
처음 본 백남준 대형 작품 경기도 박물관 소장품 제목 <사이버 포럼>1994 비디오 고고학 중 중반에 와 있다. 사이버네틱스(1965년 언급) 사회 속 인간의 전형인 <전자 노마드(유목민)>과 <SNS 쌍방소통방식의 포럼> 작품 제목 1994 사이버 포럼 백남준
처음 본 백남준 대형 작품 경기도 박물관 소장품 제목 <사이버 포럼> 1994
백남준 1965년 사이버네틱스란 용어를 쓰기 시작하다. 정확하게 사이버네틱스 그리고 포럼이란 쌍방적 소통이 인간의 도구로 역시 백남준의 민주주의 원치를 중시한다.
백남준아트센터 2층 전시 오래간만에 수준이 있다. 그러나 수준 높은 전시의 향연을 보이다 내일 다시 소개하죠. 백남준 1963년 첫 전시에서 음악의 전시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 작품의 원류가 되는 작품 <음악의 전시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을 젊은 작가들이 <완벽한 초후의 1초 교향곡 2번> 새로운 사유로 재해석해서 도전한 전시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순회전의 형식으로 미국 전역에서 개최되었던 《전자 초고속도로》 역시 전자 매체로 표상되는 인터넷이 앞으로 물리적 세계를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개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시다.
이후 백남준은 카이저링 상(1991), 유네스코 피카소 기념상(1992), 후쿠오카 문화상(1995), 호암상(1996), 괴테 메달상(1997), 교토상(1998)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특히 1995년 첫 번째 광주 비엔날레를 공동 기획하며 한국 미술의 세계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칭기즈 칸의 복권 1993년 베니스 때 백남준의 전성기다. 백남준 비디오와 레이저만 한 것이 아니라 미술이나 음악과 관련도 모든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대채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채널을 가지고 지구와 자연과 우주를 보기를 권하기도 했다.
칭기즈 칸의 복권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에 전시되었던 작품으로, 자전거를 탄 로봇이 열 대의 텔레비전을 자전거 짐받이에 가득 싣고 있는 조각 작품이다. 자전거 짐받이에 실린 텔레비전 케이스의 안쪽은 네온관으로 만든 기호와 문자로 채워져 있어서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1970년에 발명한 신디사이저를 원작이 워낙 낡아서 못 쓰게 되자 누구나 비디오를 피아노치듯 쉽게 장난치면서 편집해 보라고 백남준 돌아가신 후 다시 제작해 만들었다 지금 백남준아트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이것을 만들 때 피똥 샀다고 백남준 달마대사의 고행(앉아서 9년간 면벽 수행을 했다.수행하기에 변 처리가 안되고 하반신이 없어질 때까지 수행)의 비유하기도 했다.
1993년 독일관 대표로 황금사자상을 받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은 “전자 초고속도로: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라는 전시 주제를 통해 동서양의 교류와 소통을 다루는 한편, 자신이 28년 전 예견하였던 ‘전자 초고속도로’, 즉 인터넷의 시대가 실현되고 있다는 견지에서 매체에 대한 기억과 역사를 다루는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그러니까 백남준은 1960년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동급으로 봤다. 즉 유라시아 문화를 연결시킨 것이다. 게다가 끝부분에는 반드시 <관객 참여 프로그램(예를 들면, 나무 조각, 돌, 자갈, 금속 조각, 흙을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관객이 거기에 발길질하라고 촉구한다)>을 집어넣는다. 요즘 말로 인터렉티브 아트(interactive art)를 실험하다.
몽골어 사인이 내 뒤로 우연성의 의해 반영(feedback) 되다. 백남준이 장난으로 내 어깨를 툭 치고 가네요!! 이런 고스트샷(ghost shot)의 주인공은 미술관 남자
P.S. 오늘 나는 왜 내가 쇤베르크에게 관심을 보였는지 생각해본다. 그가 가장 극단적인 아방가르드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면 왜 그의 '극단성'에 관심을 보였을까? 나의 몽골 유전자 때문이다.
몽골… 선사시대에 우랄 알타이 쪽의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란드까지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그들은 농업 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 여행을 떠나 새로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제나 더 먼 곳을 보러 떠나야만 했다. 행위 음악을 통해서 현대음악의 존재 이유를 찾는 몸부림이었나
1965년 사이버란 용어를 쓰기 시작하다. 정확하게 사이버네틱스 그리고 포럼이란 쌍방적으로 소통의 인간들의 도구로 역시 백남준의 민주주의 원치를 중시한다
백남준처럼 반전 메시지가 강한 퍼포먼스를 한 예술가도 없다. 2차 대전 치열한 전쟁터로 직접 달려갔다 1977년 4월. Nam June Paik and Charlotte Moorman on set during videotaping for Guadalcanal Requiem in wrecked airplane from World War II Guadalcanal Solomon Islands April 1977 Photo by Frank Pileggi. 백남준과 무어먼이 2차 세계 대전 과달카날 솔로몬 제도에서 난파된 비행기 안에서 과달카날 레퀴엠을 위한 비디오 촬영 세트 앞에 서 있다 1977년 4월 사진: Frank Pileggi.
백남준아트센터 2층 전시 오래간만에 난이도 높은 그러나 수준 높은 전시의 향연을 보이다 내일 다시 소개하죠 백남준 1963년 첫 전시에서 음악의 전시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 작품의 원류가 되는 작품 <음악의 전시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을 젊은 작가들이 <완벽한 초후의 1초 교향곡 2번> 새로운 사유로 재해석해서 도전한 전시다 젊은 작가(7명)이 이번 전시하면서 진땀을 뺏다는 후일담이다. 1961년 백남준이 작곡한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 쾰른 악보를 보면 대부분 콘텐츠가 유럽과 아시아 반반씩이 들어간다 그리고 미국 것도 들어간다. 그러니까 백남준은 1960년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동급으로 봤다. 즉 유라시아 문화를 연결시킨 것이다.게다가 끝 부분에는 반드시 <관객 참여 프로그램(예를 들면, 나무 조각, 돌, 자갈, 금속 조각, 흙을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관객이 거기에 발길질하라고 촉구한다)>을 집어넣는다. 요즘 말로 interactive art 를 실험하다
[1-1] 2000년 구겐하임 백남준 전시 레이저 아트 점검을 하면서 백남준 뒤에 서 있는 여자(오늘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본 영상)가 바로 백남준 조수를 7년 한 작가 '라파엘레 셜리 위 사진(그녀 남편은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기술분야 시니어 큐레이터)' 그녀는 한국에 7번이상 방문한 적이 있다.
[1-2] 내가 2015년 뉴욕에 백남준 탐방을 갔다가 거기서 그녀를 미국인 친구 소개로 운좋게 만나게 되었고 1996~2000년 당시 상황과 전시 과정에 대해서 그녀의 집에 가서 인터뷰한 적이 있다. 마지막 사진은 그녀가 백남준의 조수를 하면서 그의 작품에 대해서 토론하는 모습이다. 아래 기사는 그녀의 인터뷰 중 한 가지만 소개한다.
오마이뉴스 셜리와 인터뷰 기사 http://omn.kr/f9qg
[1-3] 인터뷰 일부 질문: 백남준은 어떤 인물인가? 에피소드라도 하나 소개한다면?
대답: "백남준은 매우 지적(highly intelligent)이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동양과 서양, 과학과 종교와 예술을 큰 틀 안에서 연관시키는 사유를 했다. 그는 내가 만난 본 사람 중 마음의 스케일이 가장 컸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명상의 형태로 즐겼고, 레이저 빛 아래 어둠 속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레이저조각을 몇 시간 동안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2] 백남준은 서구 사회에 선을 소개했던 스즈키 다이세츠의 유연한태도가 결코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고 지적한 것이다. 제발 아시아를 이상화하지 마라! 하지만 제발 아시아를 멸시하지 마라! 아시아를 멸시하면 제국주의로 치달을 것이고, 아시아를 이상화하면 제국주의를 위장하게 될 것이다.
1990년대 백남준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유목민과 같은 삶을 살았다. 백남준은 매번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전시하고 작업하는 아방가르드였다. 어져 있는데, 각 악장에는 ‘TACET’이라는 존 케이지의 침묵만 존재했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작가들 쉽게 손을 못 댄다. 사운드 아티스트 작가들 작품과정의 여러가지 고충과 주제 등에 대해 설명 주 232 : My jubilee ist unverhemmet: 리비어 - 호스만 사에서 출시된 음반 케이스에 적힌 글, 함부르크 · 브뤼셀, 1977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25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뉴욕의 벼룩시장에서 쇤베르크의 같은 음반을 발견했다.
나는 머스 커닝햄의 발레 공연에 사용하려고 천천히 네 번 들어보았다(16배속으로). 머스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자네가 쇤베르크를 업그레이드했군!” - 1977년 7월 2일, 함부르크
내 뒤통수가 나왔네요. 몽골어 사인이 내 뒤로 우연성의 의해 반영(feedback) 되다. 백남준이 장난으로 내 어깨를 툭 치고 가네요!! 이런 고스트샷(ghost shot)의 주인공은 미술관 남자
백남준 2000년 구겐하임 전시 때 레이저 아트를 시도했는데 마침내 성공한 순간의 모습을 찍은 사진 같다 -라파엘레 사진 중에서 레이저 빛이 레이저 빛을 받아 계속 하늘로 상승하는 모양이죠 이때 이것을 성공시킨 사람은 백남준과 함께 바로 노먼 밸러드(Norman Ballad)이다 그는 한국을 방문한 적도 몇 번 있지만 정말 레이저 아트의 대가다.
그를 서울시립에서 만났을 때 그와 함께 사진을 찍은 적도 있다. 댓글 아래 사진 가운데 분이 노먼이다 당시 그가 백남준 조수를 한 것이다. 당시 눈에 보이지 않게 수고한 분은 당연히 이정성 대표(백남준 전자 테크니션)이다.
<음악의 신존재론(New Ontology of Music)> 1963, 종이에 프린트 ©백남준
[부록] <저서: 피드백 노이즈 바이러스(현실문화)> - 부제 백남준, 앤디워홀 그리고 이미지 정치에 대해서. 저자: 데이비드 조슬릿 하버드 미술사학 박사(뒤샹전공) 뉴욕주립대 등 교수. 이 저서의 서문 " 텔레비전 시대에 정치는 미디어(media)가 만들어낸 아이콘을 통해 시행되며, 아이콘은 여론 조작을 목적으로 구축된다" "글로벌 정책으로서의 '이미지메이킹,' 즉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된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엄청난 무기들 중에서도 실로 새롭다"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텔레비전: 개별 이미지의 나열 목록이었던 미술사는, 빛이 이미지를 창조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자(agent)의 자리에 직접 들어서게 되자 끝나버렸다. 이미지는 무한히 복수적이고 복잡하며 어디에나 스며들게 되었다. 혜성이 곧 빛이다.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 텔레비전은 빛을 사유재산으로 만들어 혜성을 길들인다. 그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 정보를 향해 진보해온 예술적 실험의 상업적 도플갱어(doppelginger)로, 유령처럼 미술사에 출몰한다. 형상(figure)과 배경(ground)이 대립하듯, 예술은 텔레비전과 대립한다. 그리고 텔레비전은 공적 발언을 사유화하고 방송 접근권을 엄격히 통제해 민주주의에 대립한다. 텔레비전 시대에 정치는 미디어(media) 가 만들어낸 아이콘을 통해 시행되며, 아이콘은 여론 조작을 목적으로 구축된다. 시각적 매체(medium)로서민주주의는 형상이 배경에 대립하는 것처럼 예술에 대립한다. 국방부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의 요청으로 작성된 베트남 전쟁 정책 결정 보고서 「펜타곤 문서Pentagon Papers)가 1971년에 공개되자 저명한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런 상황을 정확히 인지한 응답을 들려주었다. 아렌트는 특유의 기민함과 신중함으로, 존슨(Johnson)행정부가 중시한 것은 베트남에서의 실제 승리가 아니라 승리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여기서 궁극적인 목표는 권력도 금전적 이익도 아니었다. 심지어 세계에 대한 특정하고 구체적인 영향력, 즉 지구상의 최대 권력'이란 명성에 걸맞게 필요와 목적에 따라 사용되어야 할 특정하고 실리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 당사자가 쓴 바로 그 말, 즉 극장에서 차용한 시나리오와 '관객'이라는 표현 속에 명시되어 있듯, 목표는 이미지 그 자체였다. (…) 글로벌 정책으로서의 '이미지메이킹,' 즉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된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엄청난 무기들 중에서도 실로 새롭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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