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인간을 사랑했기에 전쟁은 혐오한다" 오마이뉴스 기사 http://omn.kr/1tt9z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신화 속으로>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8월 29일까지
피카소 I '콧수염이 있는 남자' 유화 패브릭 65.5×46.6cm 1914. 주말에 전시장에 연인들이 북적인다. ⓒ 2021 Succession Pablo Picasso SACK(Korea)
피카소(1881~1973) 탄생 140주년 맞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그의 특별전이 열린다. 약 110여점(유화, 조각, 세라믹, 동판화 등)이 전시된다. 여러 제약으로 국내에서 전시할 수 없었던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작)’이 70년 만에 공개된다. 그동안 코로나 등으로 거장전이 뜸했는데 이번 전시가 관객의 그런 허기짐이 좀 채워주는 것 같다.
피카소는 30대 1차대전, 50대 스페인 내전, 60대가 다 되어 2차대전 등 전쟁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70대에는 이런 전쟁은 또 아시아에서 냉전으로 이어졌고, 한국과 베트남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가 사망한 1973년에도 베트남전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평생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았다. 그러니 예술가로서 평화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90을 넘게 살았기에 친구들이 참전해 전사하고, 동료 예술가들 수없이 죽어가는 종말을 봐야 했다. 그래서 그의 예술은 20세기 부조리한 전쟁 속에서 인류 문명의 비극과 그것이 낳은 잔혹함을 봤기에 그걸 이겨내려는 치열한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반전(反戰)회화 완성, '한국에서의 학살'
1995년 '한국에서의 학살' 앞에 선 피카소. ⓒ 2021 Succession Pablo Picasso SACK(Korea)
피카소는 스페인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의 생애를 단순화하면, 그는 평화적 방식인 예술로, 프랑코의 폭력적 방식인 파시즘과 맞서 싸우는 투사였다. 피카소는 프랑코보다 1살 아래였다. 결국, 역사는 전쟁을 반대하고 인류와 연대와 사랑을 강조한 평화주의자 피카소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닌가 싶다.
피카소의 생애는 이렇게 '반전과 평화'와 '인류와 연대와 사랑'이 평생 주제다. 피카소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평생 사랑만 했다. 사랑 없는 삶은 생각할 수가 없다”
피카소 대표작인 '게르니카'를 이번에 볼 수는 없지만, 대신 '한국에서의 학살'을 볼 수 있어 의미가 크다.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2차대전 때 독일전투기가 이 도시를 무차별 폭격해 이곳 주민들 수천 명이 숨지게 한 것에 격분해 그린 작품이다. 그러면서 피카소는 "그림이란 때로 적과 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도구"라는 말도 쏟아냈다.
피카소 I '한국에서의 학살' 유화 110×210cm 1951.01.18. '발로리스'에서 제작. 그해 5월 '살롱전' 출품 ⓒ 2021 Succession Pablo Picasso SACK(Korea)
다시 '한국에서의 학살' 돌아가 보자. 이 작품이 한국에서 문제인 건 피카소가 당시 프랑스 공산당원이었기에. 그런데 피카소는 왜 공산당에 가입했을까? 궁금해진다. 한가람미술관 벽면에 이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해설이 붙어 있다. 피카소가 1944년 10월 29-30일 자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위마니테(Humanité)에 기고한 글이다.
"내가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내 삶과 내 모든 작품의 논리적 결과이다. 나는 진정한 혁명가로서 항상 내 그림을 통해서 싸워왔다. 그러나 이제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보아온 끔찍했던 억압의 세월은 내가 예술로만 싸울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입했다."
1940년대 레지스탕스 활동에서 '프랑스공산당(PCF)' 역할이 가장 눈부셨다. 그래서 당시 공산당은 가톨릭교회보다 더 인기가 높았다. 1945년 파리가 해방되자, 피카소는 비록 총을 들고 싸운 건 아니나 나치의 '블랙리스트' 1위에 올라가 있었고, 파시즘에 대항한 유력인사 중 간판스타로 주목받았다. 그해 종전을 기념해 피카소 오마주전도 열렸다.
소설가 '김원일'은 피카소에 매료돼 2년 넘게 원고지 2600매에 <피카소 전기>를 썼다. 여기서도 작가는 이 그림의 가해자와 피해자 문제를 다룬다. 가해자는 미군이고 피해자는 남북한 양민이라고. 1950년 10월에 일어난 '신천 학살사건'을 근거로 했다고. 그러나 김원일은 이 그림을 '반미'라는 이념보다는 '반전'이라는 인류 보편적 의미로 해석했다.
피카소는 전쟁이 터지면, 강대국이 약소국의 비무장한 아녀자와 어린이를 죽이고 학살한다는 그런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학살'을 잘 보면 왼쪽 7명은 갓난애를 안은 여인, 2명 임신부, 어린이 등은 비무장이고, 오른쪽 5명 군인은 중무장이다. 이 회화 양식은 '고야'와 '마네'의 구도를 차용한 것으로 이런 주제는 유럽에서 장르화 돼 있다.
피카소와 인연 맺은 여인과 시인들
피카소 I '마리 테레즈의 초상(Portrait of Marie-Therese Walter)' 1937년 유화 100×81cm 1937. 당시 그녀는 20대 후반. ⓒ 2021 Succession Pablo Picasso SACK(Korea)
이번엔 피카소가 열정적으로 사랑한 연인과 뜨거운 우정을 나눈 시인에 대해 알아보자.
피카소는 전쟁을 싫어한 만큼 인간사랑은 더 강했다. 여성과 사랑과 친구와 우정은 그의 생애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피카소 생애에서 중요한 여성만도 7명이나 된다. 여기서 피카소는 여성 파트너가 바뀔 때마다 그의 화풍도 변해 이런 점이 피카소 연구에 중요하다.
'올리비에' 시대에는 장밋빛 회화가, 병사한 '에바 구엘' 시대에는 '(종이) 콜라주'가, 첫 부인인 '올가' 시대에는 신고전주의가, 나이 어린 '마리 테레즈' 시대에는 초현실주의가, 사진가 '도라 마르' 시대에는 반전회화가, '질로' 시대 후기에는 도예작품이 나왔다. 마지막 동반자 '자클린 로크' 시대에는 거장들 명화를 재해석한 작품이 등장한다.
피카소는 미인을 통해 열정적 에로스를 맛보는 환희의 세계를 그렸다. 그는 미인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화가 같다. 그는 '여인의 얼굴은 매일 나 자신의 자아를 그리는 캔버스'라고 할 정도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마리 테레즈의 초상', 피카소는 인물화를 그릴 때 모델과 한두 달 정도 같이 생활해야 한다고 봤다. 그 정도로 그 내면을 중시했다.
위 주인공은 '마리 테레즈', 피카소가 45세 때 만난 여자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17살, 완전한 몸매를 갖춘 피카소의 이상적 모델이었다. 피카소는 그녀에게 집요하게 집착했고 그녀는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여기서 피카소는 그녀를 3면 입체화로 그려냈다. 3차원 회화가 되었다. 다양한 구조와 바탕색에 꿈꾸는 듯한 눈빛이 신비롭다.
피카소는 뭣보다 '입체파' 화가
피카소 I '아비뇽의 처녀들' 유화 243.9×233.7cm 뉴욕현대미술관(모마) 소장. '모마'에서 촬영
피카소는 여인만 아니라 문인 특히 시인들과 우정이 깊었다. 예를 들면 '막스 자코브, 아폴리네르, 폴 엘뤼아르, 앙드레 브르통' 등이 그들이다. 아폴리네르에게 여성화가 '마리 로랑생'을 소개해준 사람도 피카소다. 그들은 자유의 도시 파리를 마음껏 누볐다.
피카소의 무엇보다 입체파 화가다. 서양미술 400년 전통을 허물었다. 그의 스승 '폴 세잔'의 영향이다. 세잔은 유명한 말을 했다. "자연은 원통, 원뿔, 원구에서 비롯된다" 또 "드러난 현상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내면을 투시해야 한다" 여기서 입체파가 나온다. 입체파는 이렇게 사물의 겉이 아니라 속을 그렸고 공간의 역동성에 역점을 두었다.
피카소 입체파 하면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가 떠오른다. 그는 '본대로 그리지 않고 생각한 대로, 주관적으로 상상한 대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더 돋보이는 점은 서양미술의 위기를 감지한 피카소는 이 그림에 아프리카 원시미술까지 도입했다는 점이다. 거리 창녀들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 점도 센세이션하고 흥미로운 일이다.
피카소, 평생 끝없는 도전과 실험
피카소 I '목욕하는 여자의 장식' 백토, 유약, 에나멜 47×31cm 1929 ⓒ 2021 Succession Pablo Picasso SACK(Korea)
그런데 피카소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뭔가? 그는 평생 붓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과 실험정신을 불태웠다. 피카소는 "작업이 휴식이다"라는 놀라운 말을 했다. 우리나라 양혜규가 요즘 그렇다. 그녀는 최근 2년간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여러 전시를 열었다.
피카소는 잘 알다시피 회화와 조각에만 머물지 않았다. 다양한 변신을 보였다. 말기에는 위에서 보듯 도자기 작업에도 몰두했다. 피카소는 미술만 아니라 시인이기도 했다. 또 '장 콕토' 발레극 <퍼레이드> 무대장치도 맡았다. 1944년에는 <꼬리 달린 욕망> 연극 시나리오도 썼다. 이 연극을 올릴 때 사르트르, 카뮈, 라캉 등도 참가했다.
피카소는 현대미술에서 독자적 '정부(政府)'였다. 누구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공산당 가입 전후로 '미정보부'의 감시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그를 위험한 인물로 분류했다. 프랑스시민권도 늦게 줬다. 그래서 피카소는 1967년 '레지옹 도뇌르' 프랑스 훈장도 거부했다.
백남준, 워홀, 뒤샹은 세계적 천재들 그랬듯, 피카소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400년 서구 회화전통을 입체파의 창안으로 무너뜨려 큰 충격을 준 항공모함 같은 화가였다. 삶에서 자신이 곧 황제였고, 사랑의 독재자였고 거부였다. 그는 1972년 4월 8일 92세로 사망했다. 그의 스승인 세잔의 고향인 '생빅투아르' 산기슭에 묻혔다.
덧붙이는 글 | 관객이 모여 설명 듣는 대신 배우 '이정진'가 진행하는 '오디오 도슨트'를 통해서도 해설을 들을 수 있다.
피카소 특별전 홈 페이지 www.picasso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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