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이 휴식" -피카소. "작업이 휴식" -양혜규. 몰입하면 가능하다. "작업이 곧 휴식.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손님 맞이 등은 날 피곤하게 해" -피카소.
오마이뉴스 피카소 기사 http://omn.kr/1tt9z
이번 전시 총감독 서순주 선생의 이번 전시 해설집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21/05/431230/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기간: 2021년 5월 1일~8월 29일,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주최: 예술의전당, 센터뮤지엄랩, 주관: (주)비채아트뮤지엄, 후원: 주한프랑스대사관, 주한스페인대사관, 전시작품: 약 110여점 (유화, 조각, 세라믹, 판화 등) 한겨레 관련 기사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993900.html
Toute ma vie, je n'ai fait qu'aimer. On ne peut concevoir la vie sans amour -Picasso 나는 평생 사랑만 했다. 사랑 없는 삶은 생각할 수가 없다. -피카소 그는 전쟁을 혐오했고 그래서 내전으로 혼란에 빠지 스페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피카소 본대로 그리지 않고 생각한 대로 그리다. 본대로 그리면 객관적인 그림이고 생각대로 그리면 주관적인 그림이다. 사실 주관적 그림은 인상파에서 시작되었고 피카소에서 완성되었다.
오늘은 주말 연인들이 많이 왔다. 오늘을 피카소 그림보다 관객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사실 그렇게 좋은 작품은 거의 오지 않았다고 하는 게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피카소의 입체적인 화풍 그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주제다.
피카소는 여인의 따라 그의 화풍이 바뀐다. 예를 들면 귀족적인 올가와 살 때는 잠시 신고전주의로 돌아가다. 마리 테레즈와 살 때 그의 삶 자체가 초현실주의적이었다. 올리비에와 살면서 청색시대 분홍시대로 바뀌다. 한국인의 학살 발표한 시기는 프랑수아즈 살때인데 그때 공산당에 가입, 최고의 유토피아를 구가하다. 말년 자크린느와 살때 서양미술사를 재정리하다. 입체파가 나왔을 때는 누구하고 살았나 올리비에다 그러나 그때는 여자보다 남자친구들 특히 시인들의 영향에서 온 것 같다. 브라크와 똑같이 시작하다. <아래 신고전주의 시대 작품>파블로 피카소, 편지 읽기, 1921, 캔버스에 유화ⓒ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사진도 아이이고 관객이 아이라 잘 어울린다. 실내가 어두워 사진 찍기가 어렵다
피카소의 주요 연인과 살았던 기간: 20대 1명(올리비에 기간 6년) 30대 2명(에바가 결핵으로 일찍 죽다. 에바 6년, 올가 10년) 40대 1명(마리 테레즈 11년) 50대 1명(도라 마르 7년) 60대 1명(프랑스아즈 질로 9년) 70-80대 1명(자크린느 19년) 배 다른 자녀는 4명, 올가 1명 마리 테레즈 1명 프랑스아즈 질로 2명 <아래> 피카소 올가에서 얻은 아들이다.
피카소는 정말 다양한 실험을 많이 시도한 작가다 이번에는 도자기
피카소에게 미인도가 빠질 수 없다. 그는 미인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그것을 그리기 위해서 화가가 되었다
이번 전시에 좋은 작품 충분하지 않다. 이것만 봐도 모든 것을 보상받는다. 서양미술에서 학살을 주제로 한 회화에는 계보가 있다. 가장 대표적 그림이 바로 마네와 고야가 있다 누가 누구를 학살한 것인가 라는 테마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게 처리하다. 다만 <한국에서의 학살> 피카소가 당시 프랑스 공산당원이었기에 여기에서 가해자와 민간인 피해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그의 천재성 드러난 가장 대표적 작 중 하나다.
<한국에서의 학살 그가 비록 공산당을 지지하는 프랑스 공산당원이기는 했지만 아래 그림이 이념적이지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좋은 작품이 안 나아오고 세계적 작가에 걸맞는 인류보편적인 주제가 될 수 없다. 전쟁이 나면 언제나 어린이와 아녀자가 가장 큰 희생을 당한다는 보편적 의미도 담기도 또 서구에서는 학살도가 하나의 양식이다. 고야가 그렇고 마네가 그렇다 유럽의 역사라는 것이 한 마디로 전쟁과 학살의 역사가 아닌가>
<그는 열렬한 평화주의자였다> 20세기 피카소는 생애는 하루도 전쟁이 없는 날이 없었다. 정말 그가 평화를 그렇게 갈망한 이유다 1차대전 2차대전 스페인 내란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전쟁 투성이다. 게다가 사회주의 혁명도 있었다. 피카소 1948년 세계평화회의에 참가하다. 그는 당시로는 오래살다보니 누구보다 많은 친구의 죽음을 봤다. 그는 서구미술의 한계와 위기를 느끼면서 그 돌파구로 아프리카 원시미술에서 답을 찾았다.
<피카소가 70살에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그가 비록 프랑스 공산당원이기는 했지만 아래 그림이 이념적이지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좋은 작품이 안 나아오고 세계적 작가에 걸맞는 인류보편적인 주제가 될 수 없다. 전쟁이 나면 언제나 어린이와 아녀자가 가장 큰 희생을 당한다는 보편적 의미도 담기도 또 서구에서는 학살도가 하나의 양식이다. 고야가 그렇고 마네가 그렇다 유럽의 역사라는 것이 한 마디로 전쟁과 학살의 역사가 아닌가> 1955년 <한국에서의 학살> 앞에서 생각에 잠긴 피카소. ©2021 Sucession Pablo Picasso SACK(Korea)©2021 Sucession Pablo Picasso SACK(Korea)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일기를 쓰는 또 다른 형태이다." "Painting is just another way of keeping a diary."
20세기 서양사,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와 스페인 예술가 피카소 대결. 누가 이겼나. 피카소가 프랑코보다 1살 어렸다.
피카소의 반전 정신은 투철했다. 〈게르니카〉(Guernica)는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군이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1937년 4월 26일 24대의 비행기로 폭격하는 참상을 신문으로 보고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250~1,600명 그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또한 부상당하였다.
<게르니카>를 그린 지 몇 년 안 돼 '어린이 스케치 전시'를 들러보고 피카소가 이렇게 말했단다. "나는 이 정도 어린이 나이 때 이미 라파엘 정도의 스케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들 어린이 같은 스케치를 배우는데 평생 걸렸다." 거장다운 말이다. 피카소 1967년 프랑스 최고훈장 레종 도뇌를 훈장을 거부하다. 사실 너무 늦었다.
한달 만에 완성한 <게르니카>는 파시즘 독재의 공포 앞에 의연히 맞선 분노의 외침이며 혁명의 상징이었다. 피카소는 이렇게 외쳤다. "회화는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적과 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도구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 도시는 2차대전때 독일폭격기가 3시간동안 무차별 폭격을 가해 시민 1천8백명이 숨지고 도시전체가 불바다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당시 피카소 연인은 스페인 출신 사진가 '도라'였다. 그녀는 이 작품 진행 과정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와우 당신의 작품을 수없이 봐왔지만 이토록 고통스럽고 격렬한 그림은 처음이에요"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 피카소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비록 총을 들지는 않았지만 나치의 블랙리스트 1번으로 기재되어 있었던 화가였다. 파시즘에 대항한 레지스탕스 간판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그래서 프랑스는 해방기념의 첫 사업으로 파카소의 전시를 열었다. 그리고 앙드레 말로와 헤밍웨이 등 스페인 내란에 민주인사로 참가한 문인들과 만났다.
피카소 3대 걸작 1. 26살 때 아비뇽의 처녀들 2. 56세 때 게르니카 3. 70세 때 한국에서의 학살. 아래는 전쟁의 증오를 이념적보다는 상징적으로 표현하다.
역시 피카소다. 그는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와 싸우기 위해서 프랑스로 망명하다. 그래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다.
피카소는 조국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와 싸우기 위해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다. L'Humanité(Humanity) 미디어는 '장 조레스'에 의해 117년 전인 1904년에 창간하다) 는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이다. 1940년대는 프랑스 공산당이 가톨릭교회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
전문 글쟁이 소설가 <김원일> 피카소 전기를 쓰다. 580쪽 | 1,267g | 판형 188*254*35mm 원고지 2600매 2년간 매달리다. 2004년에 나오다. 정말 대단하다. 피카소의 1951년 작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한 매우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여기 보면 학살자는 미국이고 피해자는 북한 무고한 주민(민간인)이다, 혹은 남한의 무고한 주민도 포함된다. 이 작품의 오리지널 정보는 1950년 10월에 일어난 '신천 학살 사건'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김원일은 말하다. 그러나 반전이라는 인류보편적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황해도 신천 민간인 4분의 1일 학살 당했다고 황석영은 <손님>이라는 소설에서는 연합군이 신천을 점령하기 직전에 또 학살이 있었다고 반공학생 청년기독교인이 인공 치하 때 당한 복수로 당시 공산주의자 주민을 학살했다고> 피카소는 고야와 마네의 극적 학살 장면을 구도로 잡았다. 학살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그렇듯, 강대국이 비무장한 아녀자와 어린이를 무참히 학살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것을 피카소가 목적을 두고 그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강대국과 약소국이 전쟁을 할 때당할수밖에 없는 약소국의 비극을 그린 보편적 그림으로 보는 의견도 있었다. 이것이 반미그림이라는 것을 피카소 자신도 반대했다.
피카소는 회화에서는 확실히 천재다 '칸' 풍경을 입체적으로 그리다 눈부신 햇살이 강력하게 감지된다.
"여인의 얼굴은 매일 나 자신의 자아를 그리는 캔버스이다" - 피카소
이번에 피카소의 대표적 미인도 안 나올 수가 없겠죠. 얼굴을 3면을 동시에 그리다. 일종의 3D 작업이다
전시 후 아트 숍 작은 추억을 피드백하는 장소다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 자클린은, 피카소가 발로리스(남프랑스에 위치)에서 도자기 작업을 할 때 만났다. 자클린은 30대로 도자기 공장 관리인의 조카였다. 공장 일을 돌보고 있었다. 젊은 이혼녀였던 자클린은 피카소를 필사적으로 유혹하여 결혼한 후 피카소에게 헌신적인 여자였다. 그러나 피카소가 죽은 후 그를 너무 그리워하다가 정신질환을 앓고 1986년 권총으로 자살했다.
1960년 피카소와 그의 마지막 동반자 자크린. 아래 피카소 작품 제목은 <소나무 아래 누드 여인>
피카소 65세 때 연인이었던 21살의 질로 때문에 프랑스 국립 피카소 미술관 생기다.
21살의 미모의 여성은 프랑수아즈는 1944년 피카소(63세)를 그림을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그녀는 법대를 다닌 적이 있는 매우 지적 여성이었다. 그러나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그녀는 피카소에 대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저는 사랑하는 아버지나 어렸을 적부터 사랑한 남자친구와 대화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보다 3곱절이나 연상인 피카소를 만나면 그렇게 말이 잘 통할 수가 없었어요"
프랑스 피카소 국립 미술관. 이 미술관은 피카소가 65살에 사랑한 21살 애인 '프랑스아즈 질로(법대생이었으나 후에 화가가 되다)' 때문에 생겼다. 질로는 10년간 피카소와 살았고 자녀도 2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질로의 친구 등 많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자, 이번에는 질로가 피카소를 차 버렸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질로는 법대생이었기에 미리 선수를 쳐 2명의 자녀에게 피카소 작품의 상속권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의 소장품이 모여 피카소 국립미술관이 된 것이다.
<보도자료> 피카소와 여인(Picasso and Women) 피카소의 예술은 그가 사랑한 여인들과 분리해서 논할 수가 없다. 입체파시대를 함께 했던 [1] '페르낭드 올리비에'로부터 젊은 나이에 병사한 [2] '에바 구엘', 첫 부인 [3] '올가 코클로바', 청순하고 어린 [4] '마리 테레즈 발테르', 게르니카의 산 증인이었던 [5] '도라 마르', 피카소의 두 자녀를 낳고 그를 떠난 [6] '프랑수와즈 질로',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7] '자클린 로크'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등장하는 여인들과 함께 발전한 그의 예술을 조명하는 장이다. 파블로 피카소, 마리 테레즈의 초상, 1937, 캔버스에 유화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프랑스아즈 질로에게서 난 프랑스아즈 질로에게서 난 딸 팔로마 피카소, 나중에 어떤 인물이 되었나, 나중에 어떤 인물이 되었나
피카소 I '아비뇽의 처녀들' 유화 1907년. 뉴욕 모마(MoMA)에서 찍은 사진(2015년) 피카소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서양미술의 구원처를 아프리카 원시미술에서 찾았다. 이 작품은 결국 아프리카 미술은 유럽 미술로 번역한 작품이다. 입체파라는 그릇에 담이 이런 명작을 남겼다 서양 회화사에서 최고의 작품이다 거리의 창녀들이 현대미술의 주인공이 된 점도 흥미롭다. 그만큼 20세기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특히 하층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시대다.
1944년 파리. 세계문화의 중심지 독일이 물러난 후 생기가 넘치는 파리 분위기가 느껴진다. 정신분석가 라캉부터 시인 엘리아르 피카소 보부아르 사르트르 카뮈 등 당대 최고 문화인들 다 모였다. 그 중 피카소가 돋보인다.피카소는 시인이기도 했고(2번째 연인 올가가 폐병으로 죽었을 때는 그녀에 대한 애도시르 많이 쓰다) 연극 시나리오도 썼다. 그의 연극 발표(1944년 꼬리달린 욕망) 때 모인 파리의 지식인들 장소는 피카소 스튜디오. 장 콕토가 발레연극을 발표할 때 무대미술을 맡기도 했다 피카소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나중에 승락했다.
1917년 장 콕토의 발레연극 피카소 무대미술 중간막 그림 곡예사 아를르캥(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목검(木劍)을 찬 익살광대) 악사 흑인시중꾼 남녀무용수들이 나온다 여기 음악은 프랑스의 유명한 작곡가 <에릭 사티>가 맡았다.
1917년 장 콕토의 발레연극 <퍼레이드> 무대 중간막 그림 작업을 하는 피카소 모습. 작업 보조자들도 보인다.
[피카소와 시인들] 피카소는 문학가 중 시인들(막스 자콥, 아폴리네르, 폴 엘리아르, 앙드레 브르통 등등) 각별히 좋아했다. 아래 영화는 피카소 초기에 시인 막스 자콥을 만났을 때 이야기다. 피카소는 네루다와도 친했다. 네루다 역시 스페인 내전으로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그래서 그들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시를 많이 노래했다. 파블로 피카소. 그가 시인과 친했다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자신도 한 시절 시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아폴리네르에게 여성화가이며 시인인 마리 로랑생을 소개해준 사람도 피카소다 <피카소와 막스 자콥과 만나는 장면> https://www.youtube.com/watch?v=xq4XX1WChzs
시인 엘리아르와 피카소는 절친, 엘리아르는 첫번째 부인 갈라를 달리에게 빼앗기다. 그래서 2번째 부인으로 뉘쉬 맞이하다 그녀는 주변의 시인들과 만레이 피카소 그림 속 모델로 등장하면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3번째 사진은 피카소가 그린 뉘쉬
피카소 <소녀의 초상> 1914. 행사 표지화로 쓰이네요. 평화로운 초록색 바탕에 소녀가 신비하게 나타나고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뭔가 마음에 울림 준다
"작업이 휴식" -피카소. "작업이 휴식" -양혜규. 몰입하면 가능하다. "작업이 곧 휴식.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손님 맞이 등은 날 피곤하게 해" -피카소.
피카소가 그린 <실베트 다비드> 옆모습은 입체주의 기하학적으로 그리고 뒷머리채는 사실주의로 그렸다 피카소가 그린 <실베트 다비드> 1954년 날카로운 콧날 묶은 머리 인상적
피카소가 그린 <실베트 다비드> 옆모습은 입체주의 기하학적으로 그리고 뒷머리채는 사실주의로 그렸다.1950년대 중반부터 피카소는 북구적인 미인 <실베트 다비드>를 많이 그렸다. 피카소에게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내가 어떤 여자의 초상을 그리기 전에 한두 달 정도는 같이생활해야한다는 뜻이다. 피카소를 갑자기 여자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것은 거부했다
서양근대미술의 시조인 마네의 풀밭위에 점심식사를 100년이 지난 후 80세 피카소가 평면주의 화풍을 입체주의 화풍으로 번역해 다시 그리다
<피카소가 남긴 말>
[1]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일기를 쓰는 또 다른 형태이다." "Painting is just another way of keeping a diary."
[2] "내가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그 생각은 곧 또 다른 형태의 사물로 변화한다." "I begin with an idea and then it becomes something else."
[3]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이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성장하면서도 여전히 예술가로 남아있는가 하는 것이다." "Every child is an artist. The problem is how to remain an artist once he grows up."
[4] "나는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그린다." "I don't say everything, but I paint everything."
[5] 예술가는 모든 장소로부터 다가오는 강렬한 감동을 위한 저장소이다; 하늘로부터, 대지로부터, 메모지로부터, 일시적인 형태로부터, 우주를 뒤덮은 거미줄로부터." "The artist is a receptacle for emotions that come from all over the place; from the sky, from the earth, from a scrap of paper, from a passing shape, from a spider's web."
피카소는 1972년 4월 8일 92세로 남프랑스 무젱의 별장에서 사망했고 그리고 그의 스승인 세잔의 고향인 생빅투아르 산 기슭에 묻혔다.
나는 그림을 통해서 그림을 그린다. 다른 화가의 작품에서 좋은 요소를 찾아서 나의 작품 속에서 그것을 수집하고 적용한다. 그러나 나의 그림은 늘 다른 것이다. - 피카소
피카소는 회화 조각 판화 무대미술 콜라주 파피에콜레 도자기 등 전전후 항공모함 같은 미술가였고 또한 시인이자 극작가였다. 그는 다양한 미술 장르에 열정적인 호기심으로 늘 도전과 실험하는 작가였다. 그는 시각언어를 통해서 철학을 한 사람이었고 파시즘 독재와 억압과 맞서는 이상적 공산주의자였다. 이런 인물은 서양미술사에서도 극히 드문 경우다. 그리고 누구보다 여성을 사랑하는 최고의 연인이기도 했다. 이런 인물이었기에 70살에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명작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20세기미술에 큰 충격을 준 사람이다.
피카소가 1904년부터 1909년까지 5년간 살았던 세탁선 거의 판자촌 수준이다. 여기가 피카소의 화실이었었다. 피카소 뿐만 아니라 브라크, 반 동겐, 후안 그리. 르 누아르, 모딜리아니, 르베르디, 맥 오를랑, 막스 자콥 등이 20세기 초 서양 미술사에 빛냈던 인물들이 여기 살았다.
<보도자료> 피카소와 여인(Picasso and Women) 피카소의 예술은 그가 사랑한 여인들과 분리해서 논할 수가 없다. 입체파시대를 함께 했던 [1] '페르낭드 올리비에'로부터 젊은 나이에 병사한 [2] '에바 구엘', 첫 부인 [3] '올가 코클로바', 청순하고 어린 [4] '마리 테레즈 발테르', 게르니카의 산 증인이었던 [5] '도라 마르', 피카소의 두 자녀를 낳고 그를 떠난 [6] '프랑수와즈 질로',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7] '자클린 로크'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등장하는 여인들과 함께 발전한 그의 예술을 조명하는 장이다. 파블로 피카소, 마리 테레즈의 초상, 1937, 캔버스에 유화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
1917년 장 콕토의 발레연극 피카소 무대미술 중간막 그림 곡예사 아를르캥(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목검(木劍)을 찬 익살광대) 악사 흑인시중꾼 남녀무용수들이 나온다.
1917년 장 콕토의 발레연극 <퍼레이드> 무대 중간막 그림 작업을 하는 피카소 모습. 작업 보조자들도 보인다.
피카소는 시인이기도 했고(2번째 연인 올가가 폐병으로 죽었을 때는 그녀에 대한 애도시르 많이 쓰다) 연극 시나리오도 썼다. 그의 연극 발표(1944년 꼬리달린 욕망) 때 모인 파리의 지식인들 장소는 피카소 스튜디오. 장 콕토가 발레연극을 발표할 때 무대미술을 맡기도 했다 피카소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나중에 승락했다.
피카소의 철학은 한마디로 20세기 부조리하고 잔혹한 전쟁 속에 치열한 예술창작으로 그런 인류 문명의 비극(참담함)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는 열렬한 평화주의자였다> 20세기 피카소는 생애는 하루도 전쟁이 없는 날이 없었다. 정말 그가 평화를 그렇게 갈망한 이유다 1차대전 2차대전 스페인 내란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전쟁 투성이다. 게다가 사회주의 혁명도 있었다. 피카소 1948년 세계평화회의에 참가하다. 그는 당시로는 오래살다보니 누구보다 많은 친구의 죽음을 봤다. 그는 서구미술의 한계와 위기를 느끼면서 그 돌파구로 아프리카 원시미술에서 답을 찾았다.
프랑스 정부는 피카소를 무정부주의적이고 위험한 인물로 분류되어 프랑스 시민권이 바로 나오지 않고 다시 말해 귀화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나중에 늦게 나왔다. 나중에 프랑스 최고훈장을 준다고 했지만 거부했다. 그리고 피카소가 공산당에 가입하자, 1946년 미정보부로부터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끊임없이 감시를 당하다.
피카소는 여인의 따라 그의 화풍이 바뀐다. 예를 들면 귀족적인 올가와 살 때는 잠시 신고전주의로 돌아가다. 마리 테레즈와 살 때 그의 삶 자체가 초현실주의적이었다. 올리비에와 살면서 청색시대 분홍시대로 바뀌다. 한국인의 학살 발표한 시기는 프랑수아즈 살때인데 그때 공산당에 가입, 최고의 유토피아를 구가하다. 말년 자크린느와 살때 서양미술사를 재정리하다. 입체파가 나왔을 때는 누구하고 살았나 올리비에다 그러나 그때는 여자보다 남자친구들 특히 시인들의 영향에서 온 것 같다. 브라크와 똑같이 시작하다. <아래 신고전주의 시대 작품>파블로 피카소, 편지 읽기, 1921, 캔버스에 유화ⓒ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1910년대 예술가의 거리 피카소 시절이 사실 파리의 전성기다. 가운데 그의 평생 친구 시인 막스 자콥과 피카소가 보인다. 자유의 도시 파리 거리를 누비고 다니다. 이 당시 파리에는 세계에서 유명한 예술가가 가장 많았다. 시대의 기운이라는 것이 있는데 파리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다
피카소 I '만돌린을 켜는 여자' 1910년 입체파의 전형
오르타 데 에브로 언덕 위의 집 1909. 데포르마시옹(변형)이라는 말이 실감 입체주의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린다.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과 독창성이 필요하다. 종합적 분석적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피카소에게 '광대'는 백남준에게는 '무당'과 같은 존재다. 이들은 무명의 유명한 예술가들이었다. <아래 곡예사의 가족 1905년>
세잔은 유명한 말을 했다. "자연은 원통, 원뿔, 원구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입체파가 나왔다.
<파이프를 든 소년>(1905 | 캔버스에 유채 | 100*81.5㎝ | 개인소장) 은 지난 2004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약 1억 400만 달럭의 가격에 판매되면서 유명세를 치렀던 작품이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그림으로 불렸던 이 작품은 피카소(1881-1973)의 나이 24세에 완성됐다. 그의 장밋빛 시대를 대변하는 가장 시적인 이 작품음, 청색 시대의 차갑고 침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는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1904년 이래 몽마르트르의 전기도 안 들어오는 판자촌 같은 세탁선 작업실 가난 속에서 살아오던 피카소는 1905년, 근 18개월 동안 그려온 여위고 수턱한 인물상들에서 벗어나 좀더 조화로움이 돋보이는 고전주의 화풍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바로 이때 그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은 것은 서커스 곡예사. 인근에서 공연하던 어릿광대 같은 인물들이었다
피카소의 입체파는 왜 나왔나? 물론 그의 스승 세잔 때문. 그런데 이런 말도 했다. "화가는 드러난 현상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내면을 투시해야 한다" <아래> 모마에서 찍은 사진
피카소는 문학가 중 시인들(막스 자콥, 아폴리네르, 폴 엘리아르,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등등) 각별히 좋아했다. 아래 영화는 피카소 초기에 시인 막스 자콥을 만났을 때 이야기다. 피카소는 네루다와도 친했다. 네루다 역시 스페인 내전으로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그래서 그들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시를 많이 노래했다. 파블로 피카소. 그가 시인과 친했다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자신도 한 시절 시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아폴리네르에게 여성화가이며 시인인 마리 로랑생을 소개해준 사람도 피카소다 <아래사진> 마리 로랑생이 1908년에 그린 아폴리네르와 그의 친구들>
<피카소가 남긴 말> <1> 나에게 작업은 휴식이다
[2] "내가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그 생각은 곧 또 다른 형태의 사물로 변화한다." "I begin with an idea and then it becomes something else."
[3]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이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성장하면서도 여전히 예술가로 남아있는가 하는 것이다." "Every child is an artist. The problem is how to remain an artist once he grows up."
[4] "나는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그린다." "I don't say everything, but I paint everything."
[5] 예술가는 모든 장소로부터 다가오는 강렬한 감동을 위한 저장소이다; 하늘로부터, 대지로부터, 메모지로부터, 일시적인 형태로부터, 우주를 뒤덮은 거미줄로부터." "The artist is a receptacle for emotions that come from all over the place; from the sky, from the earth, from a scrap of paper, from a passing shape, from a spider's web."
20세기 서양사는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와 스페인 예술가 피카소 대결이었다. 누가 이겼나. 피카소가 프랑코보다 1살 어렸다.
열정적 에로스에서 맛보는 환희의 세계를 그리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 I '누워 있는 여인' 캔버스에 유화 38×46cm 1932. '꿈'(상단). 두 작품은 같은 해 같은 모델로 그린 작품이다. 이번엔 피카소의 '누워있는 여자'를 감상해보자. 앞에서 언급한 마티스와 피카소는 서로에게 열렬한 팬이면서 또한 날카로운 비평가였다. 마티스가 경쾌하고도 현란한 색채로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면 피카소는 분출하는 열정적인 에로스의 환희를 맛보았다. 누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의 앞모습, 뒷모습, 옆모습을 동시에 다 보고 싶은 것이다. 피카소는 한 곳만 봐도 다른 곳을 다 볼 수 있는 3차원 입체파미술을 이렇게 형상화했다.여기 주인공은 피카소가 40대에 만난 10대 어린 애인 마리-테레즈다. 지그시 감은 소녀 꿈꾸는 듯한 눈빛과 그 주변을 흐르는 관능과 열락의 세계가 빛난다. 탱탱한 피부와 풍만한 엉덩이와 젖가슴의 볼륨감과 완만하게 부드러운 어깨선은 정말 눈부시다. 같은 해 그려진 그의 유명한 '꿈'도 같은 분위기다. 피카소가 죽자 그녀는 자살한다.
서양근대미술의 시조인 마네의 풀밭위에 점심식사를 100년이 지난 후 80세 피카소가 평면주의 화풍을 입체주의 화풍으로 번역해 다시 그리다
<게르니카>를 그린 지 몇 년 안 돼 '어린이 스케치 전시'를 들러보고 피카소가 이렇게 말했단다. "나는 이 정도 어린이 나이 때 이미 라파엘 정도의 스케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들 어린이 같은 스케치를 배우는데 평생 걸렸다." 거장다운 말이다. 피카소 1967년 프랑스 최고훈장 레종 도뇌를 훈장을 거부하다. 사실 너무 늦었다.
피카소 <소녀의 초상> 1914. 행사 표지화로 쓰이네요. 평화로운 초록색 바탕에 소녀가 신비하게 나타나고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뭔가 마음에 울림 준다.
인생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기는 힘들다. 그러나 피카소, 백남준, 앤드워홀, 뒤샹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죽었다. 자기 삶의 황제 혹은 독재자
피카소와 시인 엘리아르는 절친이었다. 피카소 여자친구도 많았지만 남자친구도 많았다 대부분 남자친구는 엘리아르 아폴리네르 등 시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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