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7월 20일<백남준 아트센터의 백남준 소개>
백남준은 현대 예술가들 가운데 매우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1932년 일본 지배 하의 한국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과 홍콩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한국 전쟁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근교에 위치한 가마쿠라에 있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동경대 인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어린 시절 일본 선불교의 본산이기도 한 불교 성지 가마쿠라에서 몇 년간 살았던 경험은 이후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의 이력에 정신적인 기반이되었다.대학에서 미학을 선택한 그는 유럽 철학과 현대 음악을 배웠고 쉔베르크의 음악에 대해 졸업 논문을 썼다.
▲1956년 뮌헨대학교 입학 9월
▲1957년 1년차 푸라이부르크대학교 다름슈타트 슈톡하우젠 만남 해외통신원<현대음악>
▲1958년 2년차 다름슈타트 9월에 존 케이지 만남 / 자유신문 통신원 윤이상
▲1959년 3년차 존 케이지 경의
▲1960년 4년차 존 케이지(피아노포르테) 넥타이
▲1961년 5년차 ‘플럭서스(Fluxus)’ 운동의 창시자 요제프 보이스, 조지 메키어너스 만남 관객참여형(오르기날레) 프로그램 작성
▲1961년 = ‘플럭서스(Fluxus)’ 운동의 창시자 요제프 보이스, 조지 메키어너스 만남. 네오다다 음악 발표. 20개의 방들은 위한 작곡> 발표 <머리를 위한 선(Zen for Head)> <에튀드 플라토닉크(Etude Platoniques No. 3)> 쾰른의 돔테아터(Domtheater)에서 <칼 하인츠 슈톡하우젠의 <괴짜들(Die Orgininale)> 공연.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경의>는 1960년 쾰른의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작업실에서 조금씩 바꿔가며 여러 차례 공연되었다. 또 1961년 스칸디나비아와 1962년 비스바덴의 플럭서스 페스티벌의 ‘행위 음악’ 순회프로그램에 포함되기도 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백남준은 마치우나스와 함께 공연하 고, 뉴욕-플럭서스 영향권으로부터 독일 플럭서스 영향권의 상호관계에 있었던 케이지의 인정을 받는 다.
슈톡하우젠은 쾰른의 돔테아터(Domtheater)에서 개최한 ‘괴짜들’ 공연에서 백남준에게 독립된 공간을 제공해 <머리를 위한 선(禪)>을 전시하도록 해준다. 백남준은 1962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한 ‘음 악에서의 네오-다다’에 라 몬테영의 음악을 연주했다. 백남준에게 1962년은 앨리슨 놀즈를 위한 한해였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앨리슨 놀즈에게 세레나데를 헌사하고, 1964년까지 지속적인 협력자였던 볼프 포스텔의 『데콜라주(De'-coll/age)』지에 앨리슨 놀즈를 극찬하는 기사를 싣는다. ) (1961년, 나는 퍼포먼스 아티스트의 길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 당시 강렬한 시기(무대 위에서의 갑작스런 영감, 몸과 세계 안의 다양한 이중주의 파기(상반되는 것들을 더 높은 단계에서 파기하는 것)를 등지고 자유, 다양성, 시각적 즐거움 그리고 인식론적 관심 같은 새로운 장르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음향기기, 전자 아인자츠(Einsatz)의 개입과 적용, 전자 TV의 세계가 필요했다. 변화에 대한 내 결심은 확고했다. 독일의 카머슈필레 극장(Kammerspiele)에서 네오-다다를 무대에 올리고,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의 작업에 참여했지만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 도착한 이후 나는 샬롯 무어맨을 만났다. 바로 그녀가 내게 퍼포먼스에 대한 흥미를 새롭게 일깨워준 장본인 이다. (사실, 그 당시 나는 청중들 앞에서 반라 차림으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할 젊은 여성 연주가를 찾고 있었다. 미에코 시오미(Mieko Shiomi)에게 부탁했지만 거절했다. 앨리슨 놀즈는 암스테르담에서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었다(로킨 갤러리(la galerie Rokin)에서 볼프 포스텔의 전시회 오프닝). 하지만 그녀는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 샬롯이 바로 이 두 조건을 갖춘 첫 번째 여자였다. 그녀는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용기, 미모, 섬세한 예술가의 기질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1962년 6년차 황색재앙(심플)
▲1962년 = 6월 뒤셀도르프 캄머슈빌레에서 열린 ‘음악에서의 네오다다’에서 <바이올린을 위한 독주(One for Violin)> 등 발표. 10월 암스테르담 모네화랑에서 앨리슨 노울즈와 <엘리슨을 위한 세레나데> 공연. 11월 코펜하겐에서 앨리슨 노울즈와 <먼 거리의 음악(Music for the Long Road> 공연. 파리 에펠탑에서 앨리슨 노울즈와 <청중이 없는 높은 탑을 위한 음악(Music for High Tower and without audience)> 공연. 샬롯 무어맨(1933∼)은 겨우 29살의 나이에첫 암수술을 받았다.
▲1962년 = 6월 뒤셀도르프 캄머슈빌레에서 열린 ‘음악에서의 네오다다’에서 <바이올린을 위한 독주(One for Violin)> 등 발표. 10월 암스테르담 모네화랑에서 앨리슨 노울즈와 <엘리슨을 위한 세레나 데> 공연. 11월 코펜하겐에서 앨리슨 노울즈와 <먼 거리의 음악(Music for the Long Road> 공연. 파리 에펠탑에서 앨리슨 노울즈와 <청중이 없는 높은 탑을 위한 음악(Music for High Tower and without audience)> 공연. <20개의 방들은 위한 작곡> 샬롯 무어맨(1933∼)은 겨우 29살의 나이에첫 암수술을 받았다.
▲1963년 7년 차 =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을 발표(뮤직 일렉트로닌TV전). '비디오예술'(Video-art)의 신기원을 열다. 만프레드 몬트베와 같이 <모든 감각을 위한 공연(Piano for all sense)>을 함.
▲1964년 = 일본으로 건너가 아베를 만나다 구보타도 만나고 5월에 쇼게츠 홀에서 공연하다 8월 미국으로 건너감.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뉴욕 제 2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괴짜들> 공연(카네 기홀) 및 <로봇 K-456>을 가지고 <로봇 오페라> 공연. 그 해 여름, 샬롯 무어맨은 불치병을 고백.
미국으로 건너감.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뉴욕 제 2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괴짜들> 공연(카네 기홀) 및 <로봇 K-456>을 가지고 <로봇 오페라> 공연. 그 해 여름, 샬롯 무어맨은 불치병을 고백.
▲1965년 = 1월 뉴욕 뉴스쿨에서 <백남준 일렉트로니크전>을 개최. 뉴욕 보니노 화랑에서 미국 최바우어마이스터 아틀리에). 샬롯 무어맨과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초연. 8월 무어맨과 ≪표현 자유 페스티벌》(장-자크 레벨 주최, 몽파르나스에 있는 미문화원) 공연.
▲1966년 = 4월 뉴욕 영화제작자 극장, 무어맨과 <눈에 보이게 무료하게>에서 <로버트 브리어에 주제에 의한 변주곡> 공연.
▲1967년 = 2월, 무어맨과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공연(뉴욕, 서 41번가 영화제작자 극장).
(백남준과 무어먼은 뉴욕공연에 앞서서 66년 6월 아헨, 그리고 67년 1월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에서 별다른 물의를 일으킴 없이 이를 공연하였다.)
▲1969년 = 뉴욕 하워드 와이즈 화랑에서 열린 <창조적 매체로서의 TV전>에 참가하여 무어맨과 공연. <참여 텔레비전>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텔레비전 브라>를 제작. 제 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물고기 소나타> 초연. 시카고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화에 의한 예술>에 <피아노 소나타>를 초연. 무어맨과 <상상스를 주제로 한 변주곡>을 연주. 르네 블록 화랑에서 <르네 블록을 위한 액션> 공연. 비디오 신디사이저 개발.
▲1970년 = 브랜다이스대학 로즈미술관에서 열린 <비전, 텔레비전>에서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공연. 쾰른미술협회에서 열린 <해프닝과 플럭서스>에 출품.
▲1971년 = 뉴욕 아모리에서 열린 <제 8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참가. 캘리포니아 산타클라 라대학에서 열린 <성 유다 비디오>초대전에 출품. 보니노화랑에서 열린 제 3회 개인전 <일렉트로닉 아트 3>에서 <TV첼로와 비디오테이프를 위한 협주곡> <백 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 <TV안경>을 각각 무어맨과 초연.
▲1972년 = 뉴욕 에버슨미술관에서 열린 뉴욕주 빈켐튼, 실험텔레비전 센터의 프로그램으로 <TV첼 로와 비디오테이프를 위한 협주곡> 무어맨과 공연. 뉴욕 머서 아트센터 키친에서 <라이브 비디오> 프로그램으로 <TV침대>를 무어맨과 초연. <제 9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TV침대>를 재연.
▲1973년 = 비디오테이프 <글로벌그루브> 제작. 뉴욕 그랜드 센트럴역에서 열린 <제 10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TV첼로와 비디오테이프를 위한 협주곡>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협주곡> <열차 첼로>를 무어맨과 협주.
▲1974년 = 뉴욕 보니노화랑에서 열린 제 4회 개인전 <일렉트로닉 아트 4>를 개최. 뉴욕 웨스트베 이스에서 머스 커닝햄 무용단과 <비디오 없는 머스 커닝햄을 위한 음악>을 공연. 쾰른미술관 및 쾰른 예술협회에서 열린 <프로젝트 74-1970년대 초두의 국제미술전>에서 <TV첼로와 비디오를 위한 협주 곡을 무어맨과 공연. 에버슨 미술관에서 <남준백-비디오 앤 비디올로지>전 개최. 뉴욕 플러싱 셰 스타디엄에서 열린 <제 11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 WGBH, WNET 공동제작으로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찬가> 제작.
▲1975년 = 뉴욕 마사 잭슨 화랑에서 열린 <화랑을 위하여>에서 <TV 브라> 공연. 뒤셀도르프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1960년대 시각음악의 오브제와 콘서트>에서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무어맨과 공연. 마사 잭슨 화랑에서 <하늘을 나는 물고기>전 개최. 제 13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미국관의 비디오전 참가.
▲1976년 = 베를린 르네블록 화랑 개인전에서 <달은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를 전시.
르네블록 화랑에서 열린 <플럭서스 하프시코드 콘서트>에서 <TV 쳄바로> 공연. 쾰른예술협회에서 대규모 개인전 <남준백(1946-1976)/음악⋅플럭서스⋅비디오>전 개최. 여기서 <비디오 물고기>, <TV 로댕> <TV 부처> 등 설치작품이 출품됨. 워커 아트센터에서 열린 <강-미시시피 강의 이미지>전에 출품.
▲1977년 = 위성방송 <도큐먼트6> 제작. 쿠보타 시게코와 결혼. 뉴욕 국제무역센터에서 열린 <제13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 뉴욕 타운홀에서 <아담과 함께 조셉 보이즈를 위한 ‘침투-첼로를 위한 동질’>을 상연.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프로젝트 백남준>전 개최. 함부르크미술대학 교수가 됨.
▲1978년 =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TV 정원> 전시. 동경 와타리 화랑에서 개인전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개최.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서 조셉 보이즈와 <조지 마치우나스를 위한 추모> 듀엣 공연.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가 됨. 파리시립미술관에서 <백남준전> 개최. 여기서 무어맨과 퍼포먼스를 함.
▲1980년 =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인터미디어아트 페스티벌>에서 <바이올린 독주> 공연 및 <생상스를 위한 변주곡>을 무어맨과 공연. 부퍼탈 폰데어 하이데 미술관에서 열린 <파르나스화랑에 모인 작가들: 1949-1965>에 출품.
▲1981년 =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비엔날레 1981>에 출품. 홀스트 바우만과 <레이저 비디 오전> 개최.
▲1982년 =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 <비라미드> <TV 달걀> <TV 시계> 등 대표작 전시.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도 전시회 개최. 퐁피두 센터에서 384대의 모니터를 활용한 <삼색비디오> 설치작품 의뢰.
▲1983년 = ‘시카고 아트페어 83’에 피라미드와 유채화 출품. 파리 에릭 파브로 화랑에서 개인전 <하늘의 랑데부> 개최.
▲1984년 = 인공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오웰> 전 세계 방영. 베니스 비엔날레 초대. 동경도 미술관 개인전. 몬트리얼 에스페란자 화랑 개인전.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열린 <빛나는 이미지>전에 참가.
▲1985년 =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 시카고 아트페어 참가.
▲1986년 =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인공위성 프로젝트 <바이 바이 키플링>제작.
▲1988년 = 서울올림픽에서 인공위성 쇼 <세계는 하나>.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개인전. 베를린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현대미술의 지형도>전에 출품. 밀워키 미술관 개인전.
▲1989년 =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전. 파리시립미술관에서 <전자요정> 제작요청. 휘트니미술관의 <이미지의 세계>전에 참가. 퐁피두 미술관 <지구의 마술사>전에 참가.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의 <전망>전에 참가. 몬트리얼에서 열린 <1989 미래의 이미지>전에 참가.
▲1990년 = 7월 20일 현대화랑에서 1986년 사망한 평생의 친구 요셉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 벌임.
샬롯 무어맨은 오토 피네(Otto Piene)의 주관 하에 MIT 공과대학의 ‘심층 시각 연구 센터’에서 그녀의 마지막 퍼포먼스를 열었다.
▲1991년 = 스위스 취리히 현대미술관 <백남준 회고전>. 바젤 현대미술관 회고전, 뒤셀도르프 개인 전, 카이저상 수상, 와타리화랑 개인전, 루프케화랑 개인전, 바이서라울화랑 개인전. 샬롯 무어맨 사망 (1933∼1991). 58세.
▲1992년 = 서울에서 ‘춤의 해’를 위한 백남준의 퍼포먼스공연. <비디오예술 30년 회고전>(갤러리 현대, 원화랑, 갤러리미건). 퐁피두센터 마니페스트 전시출품. 몬트리올 미술관 개인전. 한국국립현대 미술관 개인전. 2월 샬롯 무어맨 회고전이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림.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그녀를 위한 회고전에서 (1992년 2월) 데이빗 로스(David Ross)는 그녀의 용감한 변호사가 되어주었다. 존 핸하르트(John Hanhardt)가 그녀의 업적을 역사적인 차원에서 평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노 요코( Yoko Ono), 시몬 포르티( Simone Forti), 리하르트 타이텔바움 (Richard Teitelbaum), 얼 하워드(Earl Howard)가 그녀를 위해 아름다운 퍼포먼스 공연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노만 시맨(Norman Seaman)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여러 도시의 문들을 여는 열쇠를쥐고 있는 매력적인 그녀에 대해 그가 들려준 위트 넘치는 일화들을 잊을 수가 없다. 시장과 도지사의 보도 담당관인 시드 파강(Sid Fagan)은 얼마나 그녀가 도전하기 힘든 남자들의 성문을 깨버렸는지도 얘기했다. 예를 들어, 야구 경기장, 그랜드 센트럴 역, 월드 트레이드 센터, 잉그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가 <카사블랑카>의 마지막 장면을 찍었던 공항 등이 있다.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샬럿은 심지어 1970년대에 캘리포니아에 설치한 <러닝 펜스(running fence: 달리는 울타리)>(크리스토의 작품, 1976년 9-10월, 캘리포니아 대지에 설치된 높이 5.50 미터, 길이 4킬로미터의 하얀 나일론 커튼)의 문까지 열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겸손했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93년 =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출품. 대상(황금사자상) 수상. 대전엑스포 재생조형관 전시 참가.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 제작. 와타리 현대미술관에서 <반향과 예측>전.
▲1994년 = 후쿠오카미술관 개인전. 포트 로더데일 미술관에서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 개최.
▲1995년 = 베니스 비엔날레 <호랑이 꼬리>전에 출품. 인디애나미술관 개인전, 조선일보미술관 개인전, 박영덕화랑 개인전.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수상. 미국 뉴욕 프랫미술학교 학장 취임 강연.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백남준 95’ 전시회.
▲1996년 =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 마비. 제5회 호암상 예술부문 수상. 제1회 ’월간미 술’ 대상 수상. 독일 ’포쿠스’ 선정 ’올해의 100대 예술가’
▲1998년 = 미국 프랫미술대학 명예미술학 박사. 일본 교토상 수상.
▲1999년 = 백남준 설치미술전(양평 바탕골 예술관). 미국 마이애미 예술가상. 대통령자문 새천년준 비위원회 위원.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석좌교수. ’아트뉴스’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의 작가. 독일경제지 ’카피탈’ 선정 ’세계작가 100인’ 가운데 8위.
▲2000년 =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 금관문화훈장.
▲2001년 =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 등재
▲2004년 = 투병 후 첫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바침>. 독일 베를린에서 <글로벌 글루브 2004> 4월 30일 ’백남준 미술관(백남준 아트센터)’완공.
▲2005년 = <베를린에서 DMZ까지>(서울올림픽미술관) 참가
▲2006년 = 1월 29일 마이애미 자택에서 사망
▲2006년 =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 미술관(백남준 아트센터)’ 착공
1958년 독일에서 존 케이지와의 우연한 만남은 선불교, 신음악에 대한 관심을 전위 미술로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63년 엥겔스의 고향으로 알려진 독일 북부 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잘라진 소머리와 함께 미술의 역사상 처음으로 조작된 텔레비전 13대를 사용하였다. 동경으로 돌아온 백남준은 일본의 엔지니어 슈야 아베의 도움을 통해 TV 모니터를 조각이나 회화의 조형 수단이 아니라 그 내부의 구조적 원리를 이용하여 주사선을 변형 시키는 작업을 발전시킨다. 퍼포먼스,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자리잡은 백남준의 예술은 세계 예술계에 즐거운 혼돈을 불어넣은 실험이었고, 다다이즘 이후의 새로운 변화를 담아낸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1950년대 말 스톡하우젠, 보이스 등과 만나 독일에서 펼쳐진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피아노를 부수고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등 충격적이었다. 기존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저항과 공격을 담은 퍼포 먼스들은 곧이어 같은 생각을 지닌 조지 마치우나스 등과 같은 플럭서스 맴버들과의 공연으로 이어진 다. 1964년 미국으로 이주한 백남준은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을 통해 유럽에서 실현하지 못했던 퍼포 먼스들을 실현시켜 나간다. 백남준은 미국사회가 성에 대한 금기가 있음을 간파하고 샬롯 무어만과 <오페라 섹스트로닉> 공연에서 음란죄로 체포되면서 문화 테러리스트로 악명을 떨친다. 샬롯 무어만을 위해 음악, 미디어, 신체가 결합된 오브제를 제작하였으며 비디오 아트는 음악적 시각화라는 발상 에서 나온 백남준의 독보적인 예술 장르였고, 미디어와 예술의 본격 만남이었다.
백남준은 영상 이미지의 독특한 사용에서 테크놀로지와 인간 정신의 새로운 충돌을 보여줬다. 즉 의 禪, <참여 TV> 의 놀이 정신, 그리고 <스키타이왕 단군>의 샤머니즘 등등. 이는 기계 문명의 미래를 탐문하는 백남준의 문명사적 시각을 보여주는 예이다.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후 매 2년마다 <바이 바이 키플링>, <손에 손잡고> 등 위성 TV작 업을 통해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과 대중문화 아티스트들이 한데 어울리는 지구촌 규모의 축제의 장을 펼친다. 이는 백남준이 ‘세계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보여주며 알란 카프로의 말처럼 ‘백남준은 우리들 가운데 가장 현대적인‘ 아티스트였다.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
백남준은 말했다. "마르셀 뒤샹은 이미 비디오 아트를 제외하곤 모든 것을 다 이뤄놓았다. 그는 입구는 커다랗게 만들어 놓고 출구는 아주 작게 만들어놓았다. 그 조그만 출구가 바로 비디오 아트이다.
그리 나가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이다."
뒤샹의 출구 밖에서 펼쳐지게 될 무한 잠재성의 창조적 매개 공간.
백남준아트센터는 무량광명, 무량수명의 성찰적 아나키의 공간으로 계몽을 넘어선 계몽의 탈주 장소를 지향한다.
조형 예술이 아니라 미학과 음악에 조예가 있던 백남준은 전자 음악과 해프닝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출구를 발견하였고, 거대한 전파력과 통신망을 지닌 TV 매체와 비디오를 메시지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시간의 폭발, 만다라적 텔레비주얼의 공간, 그리고 이질적인 분야 간의 통섭이 이뤄지는 대중 참여 공간으로 인식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그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아 근대적 시공간 개념과 물리적 관념에서 이탈하여 미디어 시대 정보와 소통에 대한 새로운 매체 창조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미학적 윤리적 정치적 관점에서 새로운 문화 참여 공간을 만들어갈 것이다. 특정한 목적에 예술 행위를 준거 혹은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비자유성, 비자발성에 대한 성찰을 이끌고 비효과적, 창조적 소비를 증대시키고 자유를 위한 자유의 행위 공간을 전지구적으로 확산시켜가는 문화 매개 공간을 지향한다
백남준 연대기 1932-1992
1932년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음력 6월 17일)에 서울 서린동의, 오늘날로 치면, 서린호텔 자리에서 그 무렵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백낙승과 조종희의 3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우연한 만남’, ‘만남의 신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백남준은 1928년 같은 날에는 Jacqueline Kennedy Onassis가 출생했고, 1969년 같은 날에는 미국의 우주 비행사가 처음으로 달에 착륙했다고 하여 그날을 역사적인 날이라고 강조한다.
아버지 형제 4세대가 서린동의 커다란 집에서 함께 살며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어느날에는 어머니와 큰 어머니 세 분을 비롯한 집안의 여자들이 심심풀이로 몇몇은 남장을 하고 집앞 금강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재미있는 사진이라고 하여 사진관 주인이 그 사진을 쇼윈도우에 진열하는 바람에 모두들 부끄러워 한동안 나들이를 삼갔다고 백남준의 작은누이 백영득 여사가 전한다.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피아노 치기를 좋아했고 정능 별장에 있던 피아노를 가끔 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에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아버지께서 피아노를 못치게 꾸중하셨기 때문에 7살 백남준은 별장 앞마당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땅을 두드렸다고 한다. 백남준의 최초 행위 음악이었다고나 할까?
1945년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여 홍콩으로 떠날 때까지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사사받고 이건우에게 작곡을 사사받는다.
1949년
아버지와 함께 홍콩으로 건너가 그곳에 있는 Royden School에 입학한다. 아버지는 홍콩에 가서 인삼 수출의 홍콩 총대리인이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의 교제비로 쓸 달러가 필요한데 외화를 벌 수 있는 방법은 인삼 수출밖에 없다고 하면서 백남준의 아버지를 홍콩으로 보낸것이었고, 백남준은 아버지의 통역 자격으로 따라가게 된 것이었다. 백남준의 여권번호는 7번이었고 아버지의 여권 번호는 6번이었다.(최일남, <신동아> 1984년8월호)
1950~1년
서울에 살고 있는 조카의 백일 잔치를 보러아버지와 함께 귀국하였다가 625사변을 만난다. 백씨 일가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1951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최일남, <신동아> 1984년 8월)
1956년
Anold Schönberg에 관한 논문으로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가족과 헤어져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백남준은 파리로 유학가고 싶었으나 그곳은 데까당한 곳이라 좋지 않다고 하여 부모가 반대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진지한 독일 뮌헨으로 떠난다.(P. Gardner.<Artnews>1982년 5월) 캘커타와 카이로를 거쳐 뮌헨에 도착한 뒤에 그곳에 있는 University of Munich 에 입학하여 Thrasybulos Giorgiades밑에서 한 해 동안 음악사를 공부한다.
1957년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석하여 Karlheinz Stockhausen과 Luigi Nono 를 만난다. 프라이부르크의 Conservatory of Music에 입학하여 Wolfgang Fortner에게 작곡을 사사받는다. 그 무렵에 <String Quartet>을 작곡한다. <Bauhause of Music >이란 논고를 동경에서 발행되는 예술잡지인 <음악예술>에 발표한다.
1958년
John Cage를 만난다. 다름슈타트의 신음악을 위한 하기 강좌에 참가하여 그 과목을 맡았던 John Cage와 동료 David Tudor를 만난다. 케이지와의 만남은 백남준 예술과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한 백남준 생애의 가장 뜻 깊은 일로 기록된다.
퀼른으로 이사하여 University of Colongne에 입학한다. Stockhausen이 작업하던 Westdeutsche Rundfunk전자 음악 스튜디오에 들어가 전자 음악을 연구한다.
<The Music of 20.5 Century>라는 논고와, 그 무렵의 파리 음악계 동향과 ‘구체음악’을 소개하는 글인 <피엘 세어헬과 구체음악>을 서울 자유신문에 발표한다.
1959년
백남준의 데뷔 해프닝 작품인 <Homage to John Cage: Music for Tape Recorder and Piano>가 초연된다. - Jean Pierre Wihelm의 22번가 화랑, 뒤셀도르프(11월 13일)
그를 한번에 아방가르드 스타로 만든 이 작품을 헌정받은 케이지는 참석하지 못했고, 그 무렵 독일에 있던 작곡가 윤이상씨가 이 공연을 관람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백남준이 모르고 있는 사이에 앞으로 백남준과 각별한 우정을 나눌 요셉보이스가 이 공연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 무렵의 갤러리22는 모든 화가들이 동경해마지 않는 곳이었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그 화랑 주인 Wilhelm은 세 차례에 걸쳐 백남준 생애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고 그런 그를 백남준은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게 된다. 1967년 Wilhelm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백남준은 그의 묘소를 찾아가 갤러리 22를 기리는 뜻으로 2마르크짜리 화분 2개를 놓고 온다.(1989)
1960년
그룹 공연인 <Music, Text, Painting, Architecture>에 참가하여 <Homage to John Cage>를 재연한다. - Mary Bauermeister아틀리에, 퀼른(3월 26일)
이 공연장에서 백남준은 크리스토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크리스토는 1962년 그의 최초 전시회에 백남준의 피아노 두 대를 광목으로 싸서 전시하게 된다. 그 두 대의 피아노는 본디 백남준이 동료음악가인 벤자민 패터슨에게 빌려주었던 것들이었는데, 크리스토가 그 피아노를 광목으로 싸고 흰 페인트를 칠해서 작품으로 출품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10년뒤에 몇십만불이나 나가게 되는 크리스토의 초기 명작품을 망쳐버린 셈이었다. 그 피아노들은 오늘날에도 흰 칠의 흔적이 남은 채, 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백남준, 1989)
마리바우어 마이스터는 자신의 아틀리에 공연장으로 개방한 예술가로서 뒷날에 스톡하우젠과 결혼한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백남준의 예술을 이해하고 많은 지원을 해준다. 백남준은 뉴욕으로 이사한 뒤에도 뉴욕의 보니노화랑을 소개해준 그녀 덕분에 그 화랑에서 몇 차례의 전시회를 갖게 된다.
여름에 동경여행을 하는 길에 <Sèrie, Hasard, Espace, Après, Sèrie>라는 글을 동경 <음악예술>잡지에 발표한다.
<Etude for Pianoforte>를 초연한다. - Mary Bauermeister아틀리에, 퀼른(10월 6일)
공연하다 말고 객석으로 나아가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린 기행으로 말미암아 백남준은 음악적 테러리스트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 공연은 해프닝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으로 남는다. 백남준은 객석에 있던 케이지와 튜더를 공격하면서도 그들과 함께 앉아 있던 스톡하우젠은 공격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스톡하우젠과 전자음악에 대하여 이제는 관심이 없게 되었으므로 공격할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61년
<University of Avant-Garde Hinduism>이라는 독자적 예술 운동을 시작한다.
그룹공연 <Simultan>에 Vostell, Stefan Werverka등과 함께 참가하여 여러 가지 작품을 공연한다. - Laulus화랑, 퀼른(6월)
이해 여름 뒤셀도르프에서 요셉 보이스를 만났다. Schmela 화랑에서 열린 Zero그룹 개막식에 갔던 백남준을 눈초리가 매섭고 이상하게 생긴 한 중년 남자가 “파이크(Paik)”하고 부르더니, 1959년에 열린 백남준의 데뷔 공연(Homage to John Cage)이 매우 인상적이더라고 칭찬하고는 백남준에게 다음에 열리는 어느 공연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사람이 바로 보이스였다. 보이스와 백남준이 처음으로 만나는 이 장면을 사진사 Manfred Tischler가 카메라에 담아 제로그룹 카탈로그에 실었기 때문에 이 사진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백남준, 1989) 문제의 이 사진은 1989년 원화랑과 현대화랑이 공동으로 발행한 <Beuys Vox>의 표지에 다시 실린다.
<Action Music>이라는 공연에서, <Read Music 'do it yourself -Answers to La Monte Young>, <Simple>등을 초연했다. - Liljevalchs Kunsthall, Stockholm(9월 18일), 한편 오슬로의 Ny Musik와 코펜하겐의 Lousisiana미술관에서도 이 작품들을 공연한다.(9월 27일)
<Simple>은 콩을 던지고, 쉐이빙크림을 바르고, 욕조에 들어가 몸을 적시는 행위음악이다.
슈톡하우젠의 음악적 연극인 <Orginale>에 참가하여 <Zen for Head>, <Etrde Platonique>등을 초연한다. -Theatre am Dom, 퀼른(10월 26일)
<Zen for Head>에서 백남준은 머리카락을 붓으로 사용하여 먹물 묻은 머리로 바닥을 기어가며 그림을 그린다. 그 다음해에 비스바덴 미술관에서 열린 플럭서스 페스팀벌에서 백남준은 이 작품을 제안했는데, 그때에 그린 ‘묵화’가 먹물 묻은 넥타이와 함께 오늘날에도 비스바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후일 백남준 자신도 그 작품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1985년 덴마크 로스킬드에서 플럭서스 페스티벌이 열렸을때에 벤 보티에가 백남준의 <Zen for Head>를 재연하게 되었는데, 벤은 무대에서부터 복도 밖까지 깔아놓은 화선지 위를 기어가며 표현주의적 몸짓으로 열연하였다. 플럭서스에서는 무명성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공연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백남준은 이 무렵에 독일 아방가르드 그룹에 소개되어 Dècollage창시자 폴프 포스텔, 구조시인 Emmertt Williams,음악가 Benjamin Pattersom등과 교분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1964년까지 백남준은 보스텔의 데콜라주 신문 발행을 돕는다.
윌리엄즈는 처음으로 백남준을 만나던 때를 회상하며, “그가 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했을때 나는 일본말을 모른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독일어로, ‘나는 조금전에 영어로 말했는데요’해서 우리 둘은 무척 당황했다”고 전하고 있다(E. Williams, <How We Met>1976)
플럭서스의 조직자 마키우나스는 리투아니아 태생의 건축 학도였다. 그는 1961년에 케이지의 뒤를 이어 뉴욕의 뉴스쿨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맥스필드 밑에서 음악을 공부하면서 예술가들과 친분을 갖게 된다. 마키우나스는 1961년 3월부터 7월까지 그 스스로 운영하던 AG화랑에서 일련의 공연을 벌인다. 이 AG팀의 공연과 La Monte Young을 중심으로 하여 Yoko Ono의 화실에서 열리는 공연 시리즈가 미국내에서의 플럭서스 태동을 반영하는 최초의 움직임들이었다. 마키우나스는 매일 저녁에 열리는 공연에 만족하지 않고 예술잡지를 발간해야겠다는 꿈을 키워오다가 라 몬테 영과 잭슨 맥로와 함께 <An Anthology>라는 플럭서스 전신 출판물을 만들게 된다. 이 책이 출판되기 전인 1961년에 그는 뉴욕을 떠나 앞으로 플럭서스 역사가 펼쳐질 유럽을 방문하는데, 그 때에 백남준을 만나게 된다.
마키우나스는 유럽을 방문하기에 앞서, 플럭서스를 조직하자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시인 Helms와 작곡가 Bussotti와 백남준에게 보낸다. Helms와 Bussotti는 이 제안에 답장조차 하지 않았으나, 백남준이 이 제안을 받아들인 덕택에 플럭서스가 결성된다(백남준, <Beuys Vox>
1962년
Parmass화랑 그룹전에 마키우나스, 페터슨 등과 함께 참가하여 Ted Curtis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한다. - 부퍼탈
다다적 음악공연 <Neo-Dada in der Music>에 마키우나스 등과 함께 참가하여 <One for Violin Solo>, <Sonata Quasi Una Fantasia>, <Smile Gently(Etude Platonique No.5)>,<Bagatelles Americans>등을 초연한다. -Kammerspiele, 뒤셀도르프(6월16일)
<One for Violin Solo>는 바이올린을 가만히 들어올렸다가 밑으로 내려쳐부수는 단순한 음악적 ‘사건’이다. 이 작품은 ‘장치된 피아노’와 마찬가지로 플럭서스 음악의 대표적 레퍼토리가 되어 많은 동료 예술가들에 의해 재연되었다.
<One for Violin Solo>를 초연할 당시,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깨려는 순간에 그 공연을 관람하던 뒤셀도르프 시립관현악단 단장이 그 악기를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는 바람에 보이스와 뒤셀도르프 미대교수가 그악기 옹호자를 몰아내는 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공연하고 있던 백남준은 아무것도 모른채 바이올린을 무사히 깰 수 있었다고 한다(백남준,(Beuys Vox))
플럭서스 최초의 공연 행사인 <Fluxus International, New Music>에 참가하여 <Danger Music for Dick Higgins>를 초연하고, <Simple>, <Homage to John Cage>, <Etude for Pianoforte>등을 재연한다. - Sädtisches Museum, 비스바덴(9월 1일 ~23일)
백남준을 통해 독일 아방가르드들을 소개받은 마키우나스는 그들과 당시 독일을 방문중인 Dick Higgins, Alison Knowles 부부를 한데 모아 플럭서스라는 이름을 내건 최초의 공연 행사를 벌이게 된다. 이 행사는 플럭서스라는 이름의 잡지 발행의 꿈을 버리지 못한 마키우나스가 다시 잡지 발행을 계획하면서 그 부수 행사로 주관한 것인데, 잡지는 출판되지 못하고 공연만이 치루어져 그것이 플럭서스의 첫 공식 행사가 된 것이다. 비스바덴 페스티벌 참가자는 마치우나스, 백남준, 볼프 포스텔, 에메트 윌리암, 벤자민 페터슨, 딕 히긴스, 앨리슨 놀즈 등이었다. <Parallel Events of Music>에서 <Serenade for Alison>을 알리슨 놀스와 함께 관객없이 은밀하게 초연한다. 길거리에서도 E. Willians와 <Living Theatre No.1>을 초연한다.-Moner화랑, 암스테르담(10월 5일)
플럭서스 행사인 <Festum Fluxorum Fluxus>에 참가하여 <Music for the long Road>를 관객없이 Knowles와 공연한다. - Nikolai성당, 코펜하겐(11월 23일~28일)
Knowles와 에펠탑에 올라가 <Music for High Tower and Without Audience>를 아무도 모르게 초연한다. - 파리
<Festum Fluxorm Fluxus>에 참가하여 <To be Determined>를 초연하고 <One for Violin Solo>등을 재연한다. - American Artists Center, 파리(12월 3일 ~ 8일)
Décollage 해프닝에 참가하여 <Danger Music for Dick Higgins>등을 공연한다 - 퀼른
Décollage신문 제3호에 <About Music>,<Serenade for Alison>, <Young Penis Symphony>등의 음악 스코어를 발표한다.
그룹전 <Music Notation>에 참가한다 - Minami화랑, 동경
그룹전 <Notations>에 참가한다. - La Salita화랑, 로마
백남준의 이 무렵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마키우나스가 1962년 1월 18일 히긴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상세히 알 수 있다.
“백남준은 키도 작고 머리카락은 보리밭같이 삐죽 올라섰다. 겨울에도 샌들을 신고, 목도리를 눈 밑까지 하고 다닌다. 누구에게나 ‘할로할로’하면서 인사를 하고, 뉴욕 사람들과는 다르게 대단히 겸손하다. 그는 또 영어와 독일어를 일본말처럼 하는데, 처음에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마키우나스, <Fluxus Codex> 1988)
1963년
<Festum Fluxorum Fluxus>에 참가하여 <Prelude in D-minor>, <Fluxus Champion Contest>등을 초연한다. - Staatliche Kunstakademie, 뒤셀도르프(2월 2일~3일)
백남준의 첫 비디오 개인전이 <Exposition of Music: Electronic Television>이라는 이름으로 열린다. -파르나스 화랑, 부퍼탈(3월 11일부터)
이 개인전은 ‘장치된 피아노’3대와 ‘장치된 TV'13대와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갓 잡은 황소 머리를 전시하였던 문제의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 개막일에 요셉보이스는 난데없이 도끼 한자루를 들고 나타나 전시중인 피아노 한 대를 부수어버린 일화를 남기고 있다. 백남준은 보이스가 그 도끼를 집에서부터 들고 나온것인지, 그 화랑에서 구한 것인지 아직도 알 수 가 없다고 한다.(백남준, 원화랑 보이스 전시회 카탈로그 1987)
<Fluxus Festival>에 참가하여 <Piano for All Senses>를 초연한다. - Amstel 47(6월 22일)
Theatre Hypokriterion에서도 이 작품을 공연한다. -암스테르담 (6월 23일)
<Fluxus Festival of Total Art>에 참가하여 여러 작품을 공연한다. - Hotel Scribe, 니스(7월 25일~8월 3일)
백남준 자신의 작품해설을 담은 논고인 <To the symphony for 20 Rooms>를 플럭서스 출판물 <An Anthology>에 발표한다.
스코어 <Red Music - 'Do it yourself - Answers to La Mnote young>을 <Pop Art Do it Yourself>라는 책에 발표한다.
일본 공연 여행을 떠난다.
일본공연에서 <Prelude in E-flat Major>, <Homage to John Cage>,<Etude for Pianoforte>, <Simple>등을 발표한다. - 초월 아트홀, 동경
그 무렵에 전자 기술자들인 Hideo Uchida와 Shuya Abe를 만나고 아베와 <로봇 k-456>을 제작한다. 또한 동양 음악을 공부하고 카르마 사원에 3일간 머물면서 선불교를 경험한다.
이 여행의 또 하나의 수확은 장차 결혼하게 될 시게코 구보다를 만난것이다
1964년
뉴욕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Lieberman과 관객없이 공연한다 - 와이키키 해변, 호놀룰루
6개월쯤의 방문으로 생각한 뉴욕여행이 뉴욕 정착으로 바뀌었다. 1964년 뉴욕에 도착하자, 딕 히긴스가 퀸스 대학 영어 교수이며 소설가인 Willian Wilson을 소개하여 그의 집 첼시 타운하우스 꼭대기 층에 세 들게 주선하였다. 그 당시 백남준은 일본에서 형이 보내주는 일본 판화 및 책으로 집세를 물어야 하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Gardner, 1982년 5월호>)
나중에 소호 Mercer street에 자리 잡으면서 마키우나스와 이웃으로 지내게 되고 샤롯 무어맨을 만나게 된다. 무어맨은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한뒤에 Leopold Stokowski가 지휘하는 American Symphony Orchestra에서 첼로 주자로 활약하다가 60년대 초 요고오노와 방을 함께 쓰게 되면서 아방가르드에 경도된다. (Gardner, 1982년 5월)
<Fluxus Concerts>에 참가하여 <Prelude for Audience>,<One for Violin Solo>(마키우나스 공연), <Zen for Film><Street Composition to be Unveilde>등을 공연한다 - Canal Street, 뉴욕(4월 11일 5월 23일)
<Fluxus Concert>에 참가하여 <One Third for Violin>을 공연한다. - Carnegie Recital Hall, 뉴욕6월 27일)
<Fluxus a Little of New Music>에 참가하여 <One for Violin Solo>를 공연한다. - Goldsmith's College. London SE 14. University of London(7월 6일)
무어맨이 주도하는 뉴욕아방가르드 음악제 <The 2nd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하여 스톡하우젠의 <오리지널>의 한 파트로 <Robert Opera>, <Robot K-456>를 무어맨과의 협연으로 초연한다. - Judson Hall, 뉴욕(8월 30일 ~ 9월 8일)
저드슨 홀에서 스톡하우젠의 <오리지널>이 공연되는 동안에 극장 밖에서는 Henry Flint, Maciunas, Saito, Ay-o등 일부 과격과 플럭서스 멤버들이 “인종을 박멸하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를 벌인다. 유럽문명의 허구를 비난하는 이들은 스톡하우젠의 작품이야말로 문화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고발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시위를 벌이는 사이에, 안에서는 그들의 동료 백남준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위의 사건은 플럭서스 내부의 갈등을 반영한다. 다양한 배경과 독자적인 개성을 갖는 예술가들의 모임인 까닭에 이때쯤 되면 이미 마키우나스의 통솔력이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마키우나스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플럭서스 멤버들을 놓고 일종의 챠트를 만들었다. “진정 플럭서스인”, “어쩌다 플럭서스인”, “더 이상 플럭서스가 아닌”, “전혀 플럭서스가 아닌”의 네 범주로 나누어 “플럭서스 사람들”을 평가하고 그밖에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그에 속한 Al Hanson과 Moorman을 파문하기도 하였다. (H. Ruhé, <Fluxus>1979)
플럭서스 사람들이 그룹 활동 이외에 독자적인 예술영역을 갖고 있다는 점도 불화의 씨가 된다. 보스텔의 ‘Décollage', 벤 보티에의 ’Total Art',또는 히긴스가 운영하는 ‘Something Else Press',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서로를 화합시키기 보다 갈라놓게 작용하였다. 또한 보이스는 삶과 죽음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상징적으로 표출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표현주의로 마키우나스가 주장하는 무명성과 집단주의에 위배되어 마키우나스로부터 전혀 플럭서스가 아닌 범주로 지목받았다.
<Pop Sonata>를 초연한다. - Philadelphia College of Art(11월)
<Monday Night Letter>시리즈에서 알리슨 놀스의 <Assorted Night Riders>에 출연한다. Café á Go-Go,뉴욕 11월)
Rose Art Museum에서 공연한다. - Brandeis University,매사추세츠
1963년에 열린 부퍼탈 개인전 <Exposition of Music>에 관한 후기를 플럭서스 기관지 <A TRE>에 발표한다.
<A TRE>는 브레히트가 우연히 발견한 타다 남은 네온사인의 글자인데 그것이 신문 이름으로 채택된 것이다. <A TRE>는 1963년에 브레히트에 의해 단독 발행되다가 1964년부터 마카우나스와의 공동작업으로 발행되면서 <ccV TRE>로 그 이름이 바뀐다. cc는 마키우나스의 암호이다. Bob Watt는 k로, A.Knowles는 p로, Brecht는 c등으로 마키우나스에 의해 지정되었으나 아무도 그 연유를 모른다. cc는 이 신문 작업이 브레히트의 <Water Yam>에 이은 브레히트의 두 번째 작업이란 뜻이라고 한다.
A Knowles는p로 Brecht 는 c등으로 마키우나스에 의해 지정되었으나, 아무도 그 연유를 모른다. cc는 이 신문 작업이 브레히트의 <Water Yam>에 이은 브레히트의 두 번째 작업이란 뜻이라고 한다.
1965년
백남준의 미국 최초 개인전인 <Nam June Paik: Electronic TV, Color TV Experiments, 3 Robots, 2 Zen Boxes & 1Zen Can>이 열린다. -Wolf-man Hall,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뉴욕(1월 8일부터)
이전시회 기간 동안에 무어맨이 반 나체로 첼로를 연주하는 <Cello Sonata No 1 for Adults Only>가 초연된다.
백남준은 ‘에로스’를 ‘건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건설이고 무엇이 파괴인지는 견해에 따라 다르며, 썩는다는 것이 박테리아 입장에서는 건설일 수도, 생식일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최일남, <신동아> 1984, 8월>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ëns>초연에서 무어맨은 물통에 몸을 적셔가며 첼로를 연주하여 관중들을 또 한번 놀라게 한다 - Philadelphia College of Art(2월 26일)
무어맨과 유럽 순회 공연을 떠난다.
<Music Nova>에 참가, 여러 작품을 공연한다. - Reykjavik, 아이슬란드
Jean Jacques Lebel이 주도하는 자유 표현의 축제 <Festival de la Libre Expression>에 참가한다. - American Artists Centre,파리 5월)
이공연에 함께 출연한 Ben Vautier의 말에 의하면, 백남준은 공연을 앞두고 흥분해 있으면서도 관중들의 반응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은 백남준이 공연할 때에 조명과 음악 등을 도와주었는데 백남준은 다음날 자신의 공연에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한다(Ben, <How We Met>1976)
<Cello Sonata No. 1 for Adults Only>를 공연한다. - Zwirner화랑, 퀼른
프랑크프르트 대학 학생관에서 여러 작품을 공연한다.
Technixhe Hochschule에서 여러 작품을 공연한다. - 아헨
24시간 연속 공연을 하는 <24Stunden>에 참가하여 무어맨과 <Robot K-456>을 공연한다. -Parnass 화랑, 부퍼탈(6월 5일~6일)
이 공연에서 무어맨은 진정제로 먹은 약이 독한 수면제였던 터라 무대에서 잠이 들었다. 백남준은 무어맨을 깨우다 못해 자는 시늉을 하다가 잠이 들어버렸는데, 뒤늦게 깨어난 무어맨은 새벽 2시부터 혼자서 열연했다고 한다(백남준, <Beuys Vox>)
René Block화랑이 주최한 <Sixth Sirée>와 <Seventh Soirée>에 참가하여 <Robot Opera>를 공연한다. - René Block화랑, 서 베를린(6월 14일)
8월에 뉴욕으로 돌아온다. 새로 발명된 라디오 시스템이 시판되자, 백남준은 그것을 구입하여 교황바오로 6세의 뉴욕 방문 기념 행진을 찍고, 그 테이프를 <Electronic Video Recorder>라는 전시회를 열어 상영한다. - Café à Go-Go, 뉴욕 (10월 4일,11일)
그날 저녁 존 케이지의 작품 <26’1.1499 for a string player>를 무어맨과 공연한다. 이 작품에서 웃통을 벗은채, 무어맨 앞에 엎드린 백남준은 무어맨이 연주하는 인간 첼로가 된다.
케이지의<Variation No.5>에 참가하여 <Electronic Television>을 공연하고 전시한다. - 링컨 뉴욕센터
<First World Congress: Happening>에 참가한다. - Saint Mary's of the Harbor, 뉴욕 8월 30일)
<Once Festival >에 참가한다 - Ann Harbor, 미시간 (9월 1일)
<The 3rd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하여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ëns>를 공연한다. - Judson Hall, 뉴욕 <New Cinema Festival 1>에 참가하여 <Videotape Essay No1>,<Zen for Film No. 1>, <Zen for Film No.2> <Electronic Television>(Stan Vanderbeek과 공동작업), <Variations on a Theme by Robert Breer>등을 발표한다 - Film Makers Cinemateque, 뉴욕 11월 2일)
개인전<Electronic Art>를 통해 그의 첫 비디오 테이프 리코더 설치 작업을 선보인다 - Bonnio화랑, 뉴욕 11월~12월)
1965년에 뉴욕을 방문한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는 백남준을 보니노 화랑 주인 Fermado Bonino에게 소개해 준다. 백남준의 천재성을 알아차린 보니노는 그의 작품이 상업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5차례에 걸쳐 전시회를 열어준다. 보니노 화랑에서의 첫 전시회인 <전자예술>을 준비할 때, 전선과 전기도구로 온통 가득찬 화랑안에서 화랑 주인은 감전될까 봐 걱정하는데도 백남준은 개막일까지 화랑에서 웅크리고 자면서 준비에 몰두하였으며, 일이 잘 될 때는 한국 노래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전시결과가 좋아 하루 관람객 몇백명씩 몰렸다고 한다.(Gardner 09, <Artnews>, 1982년 5월)
위에서 말한 전시회를 위하여 백남준은 <로봇K-456>을 재정비하여 일반에게 선보이고 그것으로 인기를 끈다. 이 로봇은 1982년 폐기처분할 때까지 백남준의 전시회마다 한목 끼게 되는데, 자금 사정으로 한때는 팔아치울 생각도 했다고 한다. 1964년 아베와 그것을 만들 무렵에는 2400달러가 들었는데 그것을 1200달러에 팔아달라고 케이지에게 부탁하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띄운 적도 있다. “로봇 K-456을 내놓는 것은 여간 가슴 아픈 일이 아니지만 돈 많은 양부모를 찾아 입적시키고 싶으니 양자를 보살필 줄 아는 새부모를 찾아주기 바랍니다.”(유준상, <현대미술> 1988 가을)
<Gala Music for the 50th Anniversity of John Cage: Autobiograph>라는 논고를 <Happening U.A. Pop Art, Nouveau Réalism>란에 책에, 논고 <Pensée 1965>를 <24 hour>에 싣는다.
<Symphony No5>를 <Happenings, Fluxus, Pop Art, Nouveau Réalism>이라는 책에 발표한다.
1월에 뉴스쿨에서 있었던 <Electronic TV & Color TV Experiment>전시회에 관한 후기를 발표한다. 논고 <Laser Idea No.3>, <Utopian Laser TV Station>을 Something Else Press를 통해 발표한다.
1966년
Takehis Ksugi의 작품을 Asia House에서 공연한다. - 뉴욕(2월 14일) 코수지는 “뉴욕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일본에서 뉴욕으로 왔다”고 말하는 아방가르드 음악가로, 주로 존케이지와 함께 공연 활동을 하였다.
<Avant-Garde Music>에 참가하여 무어맨과 여러 작품을 공연한다. - Times Auditorium, Philadelphia College of Art(3월 13일)
<The 4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한다. - Gentral Park, 뉴욕
<Toward a More Sensible Boredom>에 참가하여 코수지와 함께 여러 작품공연한다 - Filmmakers Cinematheque, 뉴욕 4월 21일)
<Eastern U.S Physicists Conference>에 참가한다. - Museum of Art,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프로비덴스
<Programmed Art>그룹전에 참가한다. - Museum of Art,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프로비덴스
<Continuous Per Permances of New Music>에 참가하여 <Johann Sebastian Bussotti>를 Malcolm Goldstein과 협연한다. - Kirkland House Music Society, Havard University <Art Turns On>그룹전에 참가한다. -보스턴
흑백 비디오 테이프 <Dieter Rot on Street>를 제작한다. 흑백 비디오 테이프 <Variations on Johnny Carson vs. Charlotte Moorman>을 제작한다.
논고 <We art in Open Circuit>을 Something Else Press를 통해 발표한다. 유럽순회공연을 떠난다.
제3회 <Festival de la Libre Expression>에 참가한다. - 파리 4월 26일
곤돌라를 타고 공연한 <Gondola Happening>에서 케이지의 <26‘1.1499 for a String Player>를 공연한다. - Ponte Rialto, 베니스(6월 18일)
Libreria Feltrinelli에 참가한다 - 로마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ëns>를 공연하고, Yalkut와의 공동 작업인 <Cinema Metaphisique>를 발표한다. - Zwirner화랑, 퀼른
<As Boring As Possible>을 초연하고 Erik Satie의 <Vexations>를 공연한다 - Forum Theatre와 René Block화랑, 서베를린(7월 16~17일)
<Opera Sextronique>를 초연하고, <As Boring As Possible>, <Simple>, <Johnn Sebastian Bussotti>등을 공연한다. - Technische Rochs 9월에 프랑크푸르트의 Studio Galarie와 Goethe Universitat와 뒤셀도르프의 Staatliche Kunstakademie와 스톡홀름의 Pistol Teatirn에서 공연한다.
<Art and Technology Symposium of Fylkingen>의 일부로 개최된 <Vision of Today>그룹전에 참가하여<TV Cross>를 처음으로 전시한다. - Museum of Technology, 스톡홀름 9월)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ëns>, <Cello sonata No. 1 for Adults Only>, <Etude Platonique No. 3>를 공연한다. - Parree 화랑 및 101화랑, 코펜하겐 9월 30일)
1967년
유럽순회 공연을 마치고 1월에 뉴욕으로 돌아온다.
<Opera Sextronique>를 공연한다. - Philadelphia College of Art 1월)
<Opera Sextronique>를 공연한다. - Filmmakers Cinematheque, 뉴욕 (2월 9일)
무어맨의 과도한 노출로 공연 도중 뉴욕시 경찰 당국에 의해 공연이 저지되고 백남준과 무어맨은 연행된다.
TV프로그램 <The Mero Griffin TV Show>에 출연하여 무어맨과 <Variations No. 2 on a Theme by Saint-Saëns>를 협연한다. - Wnet-TV, 뉴욕
무어맨과 공연한다 - Black Gate Theatre, 뉴욕
<Concert Fluxus>그룹전에 참가한다. - la Bertesca화랑, 제노바(6월)
<The 5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하여 <Amelia Earhart in Memorium> <Cheque or Money Order>등을 초연한다. - Staten Island Ferry, 뉴욕(9월 29일 30일)
이 행사를 동반하는 그룹전에 <Electronic Television>, <Video Tape Study>를 전시한다.
<Twelve Evenings of Manipulation>에서 <Cutting My Arm>을 초연한다 - Judson 화랑, 뉴욕,(10월 5일)
<Festival of Light>그룹전에 참가한다. - Howard Wise 화랑, 뉴욕
<The Artist as Filmmaker>그룹전에 참가한다 - The Jewish Museum of Art,뉴욕
<Light, Motion Space>그룹전에 참가한다. - Walker Art Center, 미네아폴리스
Yalkut와의 공동 작품인 <Electronic Moon>을 발표하고 케이지의 <Variation 3>을 공연한다. - Barient Auditorium, Massachusetts University
알란 카프로의 초청으로 Statu University of New York의 거주예술가가 된다. - Stony Brook, 롱아일랜드
개인전<백남준>을 열다. - Stony Brook화랑,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College at Stony Brook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비디오 연구 장학금을 받는다. 이때부터 1978년까지 총 101,800달러의 록펠러 장학금을 받게 되는데, 백남준이 재단에 제출한 계획서는 비디오의 장래는 물론, 케이블 TV의 출현까지 예측하고 있다.(Gardner, <Artnews>1982년 5월)
흑백 비디오테이프 <Variations on George Ball on Meet the Press>를 제작한다.
<전자와 예술과 비빔밥>이라는 수필을 1976년 <신동아>12월호에 기고한다. ‘복합매체’-백남준 자신의 말로는 ‘혼합매체’를 - 비빔밥에 비교하면서 비빔밥의 맛은 그것이 콩나물도 숙주나물도, 표고도, 시금치도 아니며, 모든 것이 혼합되어 새로운 맛을 낸다는 점에 있다고 역설한다. 혼합매체라는 말을 가장 잘 사용하는 맥루한은 그 사람 자신이 혼합과 혼선과 모순과 타협의 비빔밥이란다.
인공두뇌학의 창시자 Nobert Wiener와 미디어 이론가 Marshall Mcluhan의 공통된 비전을 파헤친 논고 <Norbert Wiener and Marshall Mcluhan>을 런던의 <Institute Contemporary Arts bulletin>에 발표한다.
1. 위너와 맥루한은 모두 복합 매체 발상에 입각하여 한 사람은 수학과 물리학과 생물학의 경계에 존재하는 일종의 복합 과학인 인공두뇌학을 개발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전자기술로 통합되는 지구촌을 꿈꾸었다.
2. 맥루한의 “매체는 메시지”라는 말은 위너가 말하는 “메시지가 보내진 정보나 메시지가 보내지지 않은 정보나 정보라는 같은 기능을 갖는다”라는 것과 같은 얘기다.
3. 위너는 동물(인간)과 기계의 상호성을 주제로 삼고, 맥루한은 전자매체를 통한 인간의 확장을 논함으로써 둘 다 생리와 전자의 유추를 상정한다.
4. 비결정성은 위너에게는 엔트로피로 나타나고, 맥루한에게는 “차가운 매체”가 갖는 low definition으로 나타난다. 즉, 위너에 따르면, 메시지를 주는 정보가 조직적 체계라면 엔트로피는 혼란의 체계다. 메시지에의한 정보는 그러니까 엔트로피의 역인 부엔트로피이다. 다시 말해 메시지가 그럴싸 할수록 그것이 주는 정보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전한 잡음은 최대의 정보를 갖는다. 맥루한에 의하면 만화는 적은 시각적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차가운 매체다. 제한된 정보에만 의존하는 전화도 차가운 매체이다. 뜨거운 매체가 참여도가 낮은 반면, 차가운 매체는 참여도가 높다.(맥루한은 라디오와 영화는 뜨거운 매체, 전화와 TV는 차가운 매체로 분류한다). 복합 매체와 비결정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통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는 위너와 맥루한은 결국 백남준이 간파하듯, 하나가 안이라면 다른 하나는 밖이요, 한 사람이 비관주의자라면 다른 한 사람은 낙관주의자일뿐, 같은 시각을 가진 전자시대의 지성들인 것이다.
1968년
<Intermedia 68:Mixed Media Opera>에 참가하여 <Melange 66/67>,<Simple>과 그밖의 여러 작품을 공연한다. - Rockland Community College, The Museum of Modern Art, 그밖의 뉴욕시내 여러 장소(2월 16일~4월 12일)
1968-1979 백남준 11년 간 30세기(후기산업)사회를 위한 리포트 작성 "종이는 죽었다"
<Dias USA, 1968-Destruction in Art Symposium>에 참가하여 <One for Radio>를 초연한다 - Judson 화랑, 뉴욕(3월 22일)
<Spring Festival>에 참가하여 <Action Music>프로그램에서 다수 작품을 공연한다 - Wilson Auditorium, University of Cincinnati(4월 1일)
이 프로그램을 위해 제작된 포스터는 백남준 행위 음악의 에로티시즘을 그대로 반영한다.
<The 6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한다.
개인전 <Electronic Art II>를 연다. - Bonino화랑, 뉴욕(4월 17일부터)
<The Destruction Art Group 1968 Presents>에 참가한다 - Judson 화랑, 뉴욕(5월 10일~18일)
<Mixed Media Opera>에 참가하여 <Arias No, III and IV from Opera Sextronique>, <Variations on a Theme by Robert Breer>, <Variations No2 on a Theme by Saint-Saëns>등을 공연한다. - Town Hall, 뉴욕(6월 10일)
<Opera Sextronique>를 공연한다. - Lidelraum, 뒤셀도르프
백남준 초기 작품(음악적 오브제)을 거의 다 소장하고 있는 Wolfgang Hahn의 Collection 전시회가 <Sammlung Hahn>이라는 이름으로 열린다. - Wallraf-Richrtz-Museum,퀼른
<Cybernetic Serendipity: The Computer and the Arts>그룹전에 참가한다 -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London, The Cocoran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Palace of Art and Science, 샌프란시스코
<The Machine: As Seen at the End of the Mechanical Age>그룹전에 참가한다 - The Museum of Modern Art, 뉴욕
<Art in Edition: New Approaches>그룹전에 참가한다 - Pratt Center for Contemporary Printmaking and New York University, 뉴욕
<Expanded Education for the Paperless Society>라는 논고를 발표한다. 이 논고는 1967년 Stony Brook대학에 거주예술가로 3개월동안 머물때에 학생들에게 강의했던 내용을 정리했던 것이다.
1969년
보스턴 WGBH-TV가 백남준을 The Experimental Workshop의 거주예술가로 선정한다.
비디오테이프 <Electronic opera No.1>(컬러 5분) 을 제작한다.
WGBH-TV프로그램 <The Medium is the Medium>을 위해 제작, 동 프로그램에서 방영한다 - 보스턴
비디오테이프 <Experiment with David Atwood>(컬러)를 WGBH-TV스튜디오에서 제작한다 - 보스턴
미국최초의 비디오 구룹전 <TV as a Creative Medium>에 참가하여 <참여 TV>를 출품한다 - Howard Wise 화랑, 뉴욕(5월 17일부터)
이전시회 동반 공연으로 무어맨에 의한 <TV Bra for Living Sculpture>가 초연된다. 이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참여TV>를 건축 설계사 David Bermant가 500달러에 구입하여 뉴욕주 로체스터 교외 Long Ridge 쇼핑몰에 설치하였다. 그 덕분에 백남준은 비디오 작품을 처음으로 팔아보게 되었고, 쇼핑나온 로체스터 주민들은 처음으로 비디오아트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 앞에서 소곤거리고, 노래하고, 박수를 치면 재미있는 영상이 나오는 이TV는 금방 쇼핑센터의 명물이 되었다.(Gardner, <ARTnews> 1982년 5월)
<Electronic Art>그룹전에 참가한다 - University of California,로스엔젤레스
<New Ideas, New Materials>그룹전에 참가한다 - The Detroit Institute of Art
<Electronic Art>그룹전에 참가한다 - UCLA화랑, 로스엔젤레스
<Art by Telephone>그룹전에 참가하여 <Piano Sonata>를 초연하고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ëns>를 공연한다. - Museum of Contemporary art, 시카고
<The 7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서 <Fish Sonata>를 초연한다 - Wards Island and Mill Rock Island,뉴욕(9월 28일)
<Fish Sonata>에서 백남준은 마른 멸치 한 마리씩을 봉투에 넣고, 봉투 겉면에 “ 이 고기를 바다로 보내 달라”고 써서 일일이 관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윤명로,<신동아>1978년 1월호)
<Action for René Block>을 초연한다 - René Block화랑, 베를린
<Destorying All Notations>를 케이지의 저서 <Notation>에 기고한다.
<Acceleration of Calender>를 <Electronic Art>란 책에 기고한다.
<A Propos de Pussy TV>를 <Electronic TV and Color TV Experinent>란 책에 발표한다.
1970년
보스턴 WGBH-TV의 스튜디오에 아베의 도움으로 <벡-아베 신서사이저>를 설치한다. 백남준은 비디오 신서사이저 개발에 따른 노고를 달마의 고행에 비교하였다. 달마가 9년간을 꼼짝하지 않고 좌선하느라 배설물이 다리를 녹여 좌상의 부처가 되고 득도하였듯이 자신의 신서사이저 발명도 9년간의 “TV배설물”의 축정이라고 한다.
후일 Ben Vauiter는 그의 저서 <Fluxus and friends going out for a drive>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달마상을 찍어놓고 백남준이라 명명한다.
30,000달러가 소요된 오리지널 신서사이저 모델은 지금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에 소장되어 있다. 뒷날에 MIT 는 백남준을 교수로 초빙하려 하나, 맥남준은 시간이 없다고 하며 이를 사양한다.
비디오테이프 <Video Commune>(컬러)을 4시간 생방송으로 중계하면서 제작한다 - WGBH-TV,보스턴
비디오테이프 <Electronic Opera No2>(컬러 7.5분)를 Russell Corner 가 사회를 보는 WGBH프로그램인 <Video Variations>를 위해 제작한다.
최초의 미술관 비디오 그룹전인 <Vision and Television>에 참가하여 <TV Bra for Living Sculpture>를 공연한다. - Rose Art Museum, Brendeis University,메사추세츠
그룹전 <Happening & Fluxus>에 참가한다 - Kölnischer Kunstverein, 퀼른(10월)
논고 <Seven Billion Dollars>, <Generation Collage>, <Video Synthesizer Plus>, <The Most Profound Medium>, <Confession of a Cafe Revolutionary>, <Simulation of Human Eyes>,<Bagatelles Americanes>등을 여러 출판물을 통해 발표한다.
1971년
Yalkut와 공동 작업으로 <Hit and Run Screening of Video Films>를 전시한다 - Rizzoli Screening Room, 뉴욕
개인전 <Electronic Art III>를 열고 <Concerto for TV Cello and Videotapes>, <Paik-Abe Video Synthesizer>, <TV Glasses>를 초연한다 - Bonino화랑, 뉴욕(11월 23일부터)
<Video Film Concert>에 Jud Yalkut와 공동제작한 필름을 발표한다 - Millennium Film Workshop,뉴욕
<Cineprobe>전시에 Yalkut와 공동 작업한 필름을 발표한다 - The Museum of Modern Art, 뉴욕
<Sonsbeek 71: Sonsbeek Buiten de Perken>그룹전에 참가한다 - Amheim,홀랜드
<The 8th Annual New York Avant-Gard Festival>에 참가한다. - 69th Infantry Regiment Armory, 뉴욕
제 3회 <Festival Gruppe 70>에 참가한다. - Numera 화랑, 플로렌스
<St. Jude Video International>그룹전에 참가한다. - De Saisset Art Gallery and Museum, University of Santa Clara, 캘리포니아
New American Filmmakers Series의 제1회 행사인 <Video Show>에 참가한다 -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WNET-TV Channel 13의 Lab (David Loxton 주도) 거주예술가로 선정된다 - 뉴욕
비디오 테이프 <Paik-abe Synthesizer with Charlotte Moorman>(컬러 30분을 제작한다. - WNET-TV Workshop,뉴욕
보스턴의 WGBH-TV 방송을 위해 비디오 테이프를 제작한다. 보스턴 심포니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4번에 맞추어 큰 주먹으로 베토벤의 석고상을 계속 때리고 장난감 피아노를 불태우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작품을 의뢰한 보스턴 심포니측은 불만이었으나, 시청자들의 반응은 좋았다고 한다.
논고 <WCIA Calling>, <Tv Torured the Intellectuals for Longtime>, <Video Commune>, <Postmusic>등을 발표한다.
1972년
<Musica Nova>에 참가한다. - 브레멘
<Experimental Television Center, Binghamton, New York>에 참가하여 <Concerto for TV and Videotapes>,<TV Bra for Living Sculpture>를 공연한다. - Everson Museum of Art, 시라큐스
<Live Video>에서, <TV Penis>와 <TV Bed>를 초연한다. - The Kitchen, 뉴욕(6월 29일)
<Soho Festival>에 참가하여 무어맨과 <Peace Cantata>를 공연한다. - 뉴욕
<The 9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하여 <TV Bed>등을 공연한다. - New York Harbor abord the Alexander Hamilton <the Riverboat show>, South Street Seaport Museum,뉴욕
<The Twelfth Annual October St. Jude International: Videotapes>그룹전에 참가한다.-Everson Museum of Art, 시라큐스
Yalkut와 공동주최로 <Video Film Concert>를 개최하여 <Videotape Study No. 3>, <Cinema Metaphysique Nos. 1~5>, <Electronic Moon No.2>등을 발표한다. - Millennium Workshop,뉴욕
<Electronic Fables>, <Electronic Moon No.2>, <Beatles Electronic>을 발표한다. - The Kitchen,뉴욕
<TV Bra for Living Sculpture>, <Cinema Metaphysique>, <New Piece for Charlotte>등을 공연한다 - Andrew Dickinson White Museum, Cornell University
비디오테이프 <The Selling of New York>(컬러 7.5분을 제작한다 - WNET-TV,뉴욕
1975년에 이 테이프는 <Suite 212>라는 테이프에 병합된다.
비디오테이프 <Waiting for Commercials>(컬러)를 제작한다 - WNET-TV,뉴욕
논고 <Binghamton Letter>, <Deux Lettre à Hans Otte>, <My Symphonies>, <Communication Art>, <Nam June Paik - Charlotte Moorman>등을 발표한다.
<Binghamton Letter>가운데에는 “기생은 남성 쇼비니즘을 유지시키는 가장 오래된 여가 장치이다. 결혼은 섹스 접근을 위한 순간적 시스템이다. 전화는 점대 점의 소통 시스템이다. 라디오와 TV는 물고기 알같이 점대 공간의 소통이다. 비디오 소통 혁명의 최종 목적은 공간대 공간, 혹은 평원대 평원의 거침없는 혼선없는 상호 소통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Communication Art>는 시라큐스 에버슨 미술관에서 열린 더글러스 데이비스의 전시 카탈로그를 위해 쓴 글이다. 이 글에서 백남준은, 보들레르의 correspondence개념은 예술과 소통에 관한 연구나 다름없다면서, <악의 꽃>에서 ‘nature'를 ’video sphere'란 단어로 바꾸기만 하면 그 시는 현대 사회의 안테나 구실을 하는 예술가들의 지침서가 될 것이라고 역설한다.
1973년
Yosi Wada Band 와 무어맨과 함께 여러 작품을 공연한다. - The Kitchen 뉴욕
백남준 유튜브 예견( 앞으로 1인 미디어가 올 것이다 )
<Concerto for Piano and Cello>에서 <From Electronic Music to Electronic Opera>등을 공연한다. - Smith Music Hall, University
<Fluxus Sonata I>, <Fluxus Games>등을 초연한다. - 80 Wooster Street,뉴욕
<The Telvision Show>에 참가한다. WNET-TV,뉴욕(5월)
<TV Bra for Living Sculpure>를 공연한다. - Wesleyan University, Middletown, 코네티컷(9월 15일)
<The 10th Annual New York Avant -Garde Festival>에서 <Train Cello>를 초연하고 <Concerto for TV Cello and Videotapes>, <TV Bra for Living Sculpture>등을 재연한다 - Grand Central Station, 뉴욕(12월 9일)
<Circuit: A Video International>그룹전에 참가한다 - Everson Museum of Art, 시라큐스
<New York Collection for Stockholm>그룹전에 참가한다 - Moderma Museet, 스톡홀름
<Cremer Collection-European Avant-Garde, 1950~1970>그룹전에 참가한다. - Kunsthalle,튀빙겐
개인전 <Electronic Video: Intermedia Presents a New Experiment by Nam June Paik>을 연다 - The Kitchen,뉴욕
개인전 <Videotapes: from the Perpetual Pioneer of Video Art>를 연다. - The Kitchen, 뉴욕
비디오테이프 <A Tribute to John Cage> (컬러 60분, 1976년에 30분으로 개작됨)를 제작한다 - WGBH-TV, 보스턴 이 비디오 테이프는 1974년에 방송된다.
John Godfrey의 기술 협조를 얻어 비디오 테이프 <Global Groove>(컬러 30분)를 제작한다. - WNET-TV, 뉴욕
이 비디오 테이프는 1974년 1월에 WNET-TV에서 방송된다. 백남준은 이 작품에서 당시 뉴욕 체제 무용가 이선옥 씨를 등장시킴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의 전통 무용을 그의 작품에 활용하게 된다. 논고 <TV Chair>, <Global Groove and Video Common Market>을 발표한다.
스톡홀름의 Moderna Museet가 백남준의 <TV Chair>를 구입한다. 이<TV Chair>는 뉴욕 메이시 백화점에서 산 크롬의자에 수상기를 부착시켜 만들었는데, 비디오를 틀면 그레타 가르보와 마릴린 먼로를 콜라주한 화면이 나온다. 백남준의 말처럼, 의자에 앉아 밑을 내려다보면 세계 최고의 두 미인을 보게 된다. 백남준의 작품은 미국에서보다 유럽에서 잘 팔렸으며, 특히 독일 화상 르네 블록을 통해서 대부분 그 거래가 이루어진다. 퐁피두 센터는 <Video Fish>를 구입하고 암스테르담의 Stedelijk미술관은 뉴욕 메디슨가 골동상에서 구입한 부처상으로 만든 <TV Buddha>를 20,000달러에 구입하였다. <Gardner, <Artnews> 1982년 5월)
1974년
백남준의 미국 최초 비디오 테이프 회고전인 <Nam June Paik: Videa 'n' Videology 1958~ 1973>이 열린다 - Everson Museum of Art, 시라큐스 에버슨 미술관은 1971년부터 비디오부를 설치하고 비디오아트를 후원한 미술관이다. 설치 당시부터 큐레이터로 활약한 David Ross는 비디오의 고참이론가일 뿐 아니라, 현재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관장직을 맡고 있다.
개인전 <Electronic Art TV>에 <TV Sea>, <TV Garden>을 전시한다. - Bonino화랑, 뉴욕(1월 15일부터)
<Open Circuit: The Future of Television>그룹전에 참가한다 - The Museum of Modern Art, 뉴욕
70년대의 국제 예술을 조명하는 그룹전 <Projekt 74: Aspekte Intermationaler Kunst am Anfang der 70er Jahre >에 참가하여 <Video Buddha>, <TV Cello>를 전시한다 - Kölnisher Kunstverein,퀼른
<Exprmntl 5: International Film Festival>그룹전에 참가하여 <Triangle Buddha>를 전시한다 - Knokke Heist, 벨기에
<Art Now '74 : A Celebration of the American Arts>그룹전에 참가한다. - John F. Kennedy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 워싱턴
<Program of Video tapes>에 참가하여 <Fluxus Sonata>를 초연한다 - Anthology Film Archive, 뉴욕(11월 17일)
<The 11th Annual New York Anvat-Garde Festival>에 참가한다 - Shea Stadium, 뉴욕(11월 18일)
<Cinema Metaphysique No, 15>(16mm film, 4분), <Beatles Eletronique>(16mm color press. 3분), <Electronic Moon No.2>(16mm color film.2분)등의 테이프 작품들을 발표한다. - Anthology Film Archive, 뉴욕(12월 21일)
<Sans Video: Music for Merce Cunningham>에서 커닝햄 댄스 팀과 함께 공연한다 - Westberth, 뉴욕
Anthology Film Archive에서 공연한다 - 뉴욕
Galerie L'Artico에서 공연한다 - 로마
논고 <Bimghamton Letter to Radical Software>, <Abstrct Time>을 발표한다.
1975년
개인전 <백남준>에 <Paper TV>, <TV Buddha>를 전시한다. - René Block 화랑, 뉴욕(2월)
개인전 <Fish Files on Sky>를 연다 - Martha Jackson 화랑, 뉴욕
<Video Art>그룹전에 참가하여 <TV Garden>을 전시한다. - The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University of Pennsylvania, Chicago Art Institute
<Arte de Video>그룹전에 참가한다 - Museo de Arte Contemporaneo 카라카스
<Illuminous Realities>그룹전에 참가한다 - Wright State University, 오하이오
<Selections from the Collection of Dorothy and Herbert Vogel>그룹전에 참가하여 <The Clock Tower>를 전시한다. - 뉴욕
60년대 음악과 음악적 오브제를 소개하는 <Objekte und Konzerte zur Visullen Musik der 60er Jahre >에서 <TV Bra for Living Sculpture> <Opera Sextronique>,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ëns>, <Zen Smiles>를 공연한다 -
Städtische Kunsthalle, 뒤셀도르프
‘보고 듣는다’는 뜻의 <Voir et Entendre>전시에 참가한다.
<Piano Show>를 공연한다. - L'Attico화랑, 로마
베니스 비엔날레 <Stockey Mill Project>에 참가한다 - 베니스
<The Museum of Drawers>그룹전에 참가한다 - Kunsthaus, 취리히
제13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Video Art USA>로 참가한다. - 상파울로
<Art trnasition>그룹전에서 <Concerto for TV Cello and Videotapes>를 공연한다. - Center for Advanced Visual Studies, 메사추세츠, Institute of Technology 캠브리지
남미 순회전에 <TV Garden and Videotapes>를 전시한다.
<Exhibition of Videotapes>에 참가한다. - The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Benefit for the Once Gallery >에서 <TV Bra for Living Sculpture>, <Concerto for TV Cello and Videotapes>를 공연한다. - Martha Jackson 화랑, 뉴욕
<Fluxus Harpsichord Concert>를 공연한다 - Anthology Film Archive, 뉴욕(5월 5일)
<The 12th Annual New York Anvat-Garde Festival>에서 <Violin to be Dragged on the Street>를 공연한다 - Floyd Bennette Field, Brooklyn, 뉴욕(9월 27일)
비디오테이프 <Suite 212>(컬러 150분, 1977년에 30분짜리로 개작됨)를 제작하여 1972년에 제작했던 <The Selling of New York>을 병합한다 - WNET-TV, 뉴욕
비디오테이프 <Nam June Paik: Edited for Television>(컬러와 흑백 29분)을 제작한다. -WNET-TV, 뉴욕
CBS TV방송 프로그램인 <Camera 3>에 출연한다.
논고 <Marcel Duchamp n'a pas pensé à la vidéo>를 발표한다.
1976년
Jean Dupuy가 조직한 <Revolving Stage>전시회에 참가한다 - Judson Memorial Church, 뉴욕(1월 9일)
<Adelaide Festival of the Arts>에서 공연한다 -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Adelaide의 <Fluxus Tour>에 참가한다. - Soho, 뉴욕(5월)
John Kaldor의 <4th Project>에서 Bill Viola와 공동 작업을 한다.
<The River Images of the Mississippi>그룹전에 참가한다 - Walker Art Center, 미네아폴리스
대용매체 작품을 소개하는 <Monumente durch Medien Erstzen>그룹전에 참가한다 - Kunst und Museumverein 부퍼탈
<Soho Quadrat>그룹전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 Akademie der künste, 서 베를린(9월 5일)
Sven Hansen이 조직한 <Dodsringet>그룹전에 참가하여 <Electronic Sixina Chapel>을 공연한다 - Charlottenborg,덴마크
개인전 <Fish Flies on Sky>에서 <TV Bra for Living Sculpture>를 공연한다 - Bonino 화랑, 뉴욕(2월)
개인전 <Moon is the Oldest TV>를 연다 - René Block화랑, 뉴욕
Yalkut와 <Video Film Concert>전을 개최한다 - The Kitchen, 뉴욕
제1회 P.S.1초청작가로 선정된다
이 프로젝트는 휴교중인 Public School 1 을 화가 작업실로 활용하는 것으로, 뉴욕 주정부 재정 지원을 받아 The Institute for Art and Urban Resources가 주관했는데, 첫해에 총 78명의 작가를 선정해서 초청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일년 뒤에 백남준과 결혼할 시게코 구보다 개념예술가 Joseph Kosuth, Daniel Buren, Denis Oppenheim, Walter de Maria, 비디오예술가 Vito Acconci, Bruce Nauman,조각가 Richard Tuttle, Carl Andre,Richard Serra등이 있다. 백남준은 이 프로젝트에서 <TV Candle>을 제작하여 전시하였다(6월 9일 ~26일)
비디오 테이프 <A Tribute to Nam June Paik>제작을 위해 공연한다 - René Block화랑, Bonino화랑, WNET-TV 의 공동주최
비디오테이프 <Guadalcanal Requiern>제작을 위해 공연한다 - King George School, Guadalcanal, 솔로몬 제도
방송용 비디오 테이프 <Nam June Paik>을 제작한다. 이 비디오테이프는 Calvin Tomkins와 Russell Corner가 출연하여 WNET-TV에서 7월에 방송된다.
<Rembrandt Automatic>(1963), <Video Fish>, <Tv Buddha>,<Tv Rodin>을 전시하고 공연한다. - Stedelijik Museum,암스테르담(39)
<Paper TV>를 전시한다 - Francoise Lambert 화랑, 밀라노 개인전<Nam June Paik: Werke 1946~1976, Musik-Fluxus-Video>를 연다 - Kölnischer Kunstverein, 퀼른(76년 12월 ~ 77년1월)
1977년
<From Jail to Jungle >에서 <Opera Sextronique>, <Guadalcanal Requiem>을 공연한다. - Carnegie Hall, 뉴욕(2월 10일)
Anthology Film Archives그룹 공연에 참가한다(5월)
요셉 보이스의 <Infiltration-Hamage für Cello>를 공연한다. - Town Hall, 뉴욕
개인전 <Fulxus Traffic>을 연다 - René Block 화랑, 서 베를린(2월)
개인전 <백남준>을 연다 - Malacoda화랑, 제네바
<Projects: Nam June Paik>을 전시한다 - Museum of Modern Art, 뉴욕
<Documenta 6>에서 <TV Garden>을 전시한다. - Hessissche Rundfunk,카셀 6월)
media documenta였던 이 <Docu menta6>에서 Douglas Davis 와 Jeseph Beuys와 함께 9분간 위성 중계방송 공연을 한다(6월 24일)
휘트니 미술관 비엔날레인 <1977 Biennalle Exhibition>에 참가한다 -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멕시코 시티 CAYC총회에 참가한다.
함브르크 미술학교 Hochschule für Bildende Künste의 초청교수가 된다.
일본인 비디오 아티스트 시게코 구보다와 결혼한다.
시게코는 1963년 동경 초월 홀에서 공연하는 백남준을 보고 한눈에 그가 세계적인 예술가임을 알았다고 한다. 시게코는 첫눈에 백남준에게 반했으나 백남준이 작업을 위해 결혼할 수 없다고 버티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독일로 그를 따라다니다가 1977년 3월 21일 뉴욕에서 14년의 구애 끝에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시게코는 일본 니이가따 출생으로 어머니가 음악을 전공한 예술가 집안에서 자라 동경 교육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으나, 백남준을 만난 뒤에는 해프닝과 비디오아트에 종사한다. 현재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과 같은 주요 미술관이 그녀의 개인전도 개최하고 작품도 소장하고 할 만큼 그녀의 국제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백남준은 결혼하는 이 해부터 당뇨병으로 고생한다. 그는 자갈을 뜨겁게 달구어 갖고 다니면서 몸을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본인은 당뇨병이 생기면서 작품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몸 속의 당분이 뇌세포를 자극하기 때문이란다.
비디오 테이프 <Guad및무미 Requiem>(컬러50분, 1979년에 29분으로 개작됨)을 제작한다 - WNET-TV,뉴욕
논고<Input Time and Output Time>이 I. Schneider와 B.Korot이 편집한 <Video Art>선집에 실린다.
1978년
뒤셀도르프 국립 미술대학의 교수로 초빙된다.
개인전 <A Tribute to John Cage>를 연다 - Watari화랑, 동경
개인전 <Tv Garden>를 연다 - Musée d'Art Moderne, 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 Pompidou,파리
개인전 <백남준>에서 <Concerto for Cello and Videotapes>,<TV Bra for Living Schupture>를 공연하고 전시한다 - Musée d'Art de la Ville de Paris,파리
마키우나스 추모 공연에서 보이스와 함께 <Piano Duet in Memoriam to George Maciunas>를 공연한다. - Staatlich Kunstakademie,뒤셀도르프(7월7일)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마키우나스는 동양의 윤회설을 믿고 그의 친구 Bakaitis에게 자기는 차생에는 개구리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90년 백남준은 마키우나스를 생각하며 <Frog Watching Frog>란 제목의 작품을 제작한다.
1978년 2월에 마키우나스가 폐암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을때에 백남준은 입원비를 마련하려고 모금운동을 시작하여 9,000달러를 모은다. 그중 2,000달러는 이미 유명해진 보이스가 낸 것이었다. 그때 마키우나스는 공짜는 싫다고 하며 보이스에게 그에 상당한 본인의 작품을 보내기를 원해 백남준이 그 작품을 보이스에게 전하게 된다. 그것을 주고 받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모금을 좀 더 추가하기 위하여 듀엣 콘서트를 하기로 합의한다. 르네 블록의 주최로, 보이스가 1972년에 쫒겨난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서 공연을 하게 되는데, 이들은 사전에 아무 연습이나 약속없이 74분간(‘74’는 마키우나스의 나이인 47을 거꾸로 한 숫자임)피아노를 듀엣으로 연주한다(백남준, <Beuys Vox>
비디오테이프 <Merce by Merce by Paik>(컬러, Part 1: Blue Studio(5부) 30분, Part II: Merce and Marcel 30분)을 제작한다. WNET-TV, 뉴욕
비디오테이프 <Media Shuttle: Moscow New York>(컬러와 흑백30분)을 제작한다. - WNET-TV,뉴욕
비디오테이프 <You Can't Lick Stamps in China>(컬러30분)를 WNET-TV Lab과Cable Arts Foundation의 <Visa>시리즈를 위해 제작한다.
WNET-TV Lab과 공연을 끝낸다.
<신동아>1978년 1월호가 <현대 세계의 예술가 129>을 선정하는 별책부록을 마련하였는데, 추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화가 윤명로 씨가 백남준을 선정하여 소개한다.
1979년
<Sammlung Hahn>소장전이 열린다 - Museum Moderner Kunst, 비엔나
그리스의 키네틱 아티스트 Takis와 함께 <Duet Paik Takis>를 초연한다 - Kölnischer Kunstverein,퀼른
1980년
비디오 테이프 <Lake Placid '80>(컬러 4분)을 제작한다.
이 비디오 테이프는 제 13회 동계 올림픽 예술제 조직 위원회로부터 제작을 의뢰받아, 현지에 출장을 가 촬영한 것이다. 이 테이프는 1981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될 뿐 아니라, 1982년에 제작되는 <V-ramid>설치 작품의 영상 이미지로도 활용된다.
<Intermedia Arts Festival>에 참가하여 <One for Violin Solo>,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ëns>를 공연하고, Emie Gusella와 함께 ,<Video Sonata>를 초연한다 - The solomon Guggenheim Museum, 뉴욕
한국의 시간예술을 소개하는 <Musik der zeit I: Begegnung mit Korea>에서 <Concerto for Cello and Videotapes>,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ëns>를 공연하고, 무어맨 지휘로 <Sinfonie No.6>를 초연한다. - WDP-Westdeutsche Rundfunk, Funkhaus,퀼른
이 공연에는 한국의 작곡가 강석희 씨도 참가했다. 강석희 씨의 작품 <한사람의 타악기 주자와 전자 음향을 위한 청동 시대>는 대형 징을 쳐서 난 소리가 어떻게나 컸던지 일부 관중들은 도망갔고, 대형 징은 끝내 바닥에 쓰러졌는데, 공연이 끝난 뒤 백남준은 징이 쓰러질 때가 가장 좋았다고 평했다고 한다(강석희, <공간> 1982)
‘눈과 귀를 위하여’라는 뜻의 <Für Augen und Ohren>그룹전에 참가한다 - Akademie der Künste,서 베를린
파르나스 화랑 그룹전 <Treffpunkt Parnass 1949-1965>에 참가한다 - Von der Heyde Museum, 부퍼탈
퀼른 명물 궁형 성당을 위한 프로젝트 <Mein Kölner Dom>에 <The Cathedral as Medium>으로 참가한다. - Kölnischer Kunstverein, 퀼른
비디오 테이프 회고전인 <백남준>을 연다. - The New American Film-makers Serries,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개인전 <Videa>를 연다 - Watari 화랑, 동경
자신의 작품에 나타난 존 케이지의 이미지 50개 가운데 하나를 골라 판화로 제작하려던 백남준은 50개의 숫자가 52매의 카드와 유사한 데에 착안하여 판화대신 50개의 ‘케이지 카드’를 만들어 와타리 화랑에 전시한다. 와타리 여사는 세계적인 카드 수집가라고 한다(백남준, <Beuys Vox>)
독일 광선 학자 Horst Baumann의 도움으로 <Laser Video>전을 개최한다 - Städtische Kunsthalle,뒤셀도르프
백남준의 레이져 광선에 대한 관심은 이미 1965년 무렵부터 시작된다. 그 무렵 <Laser Idea No3>와 <Utopian Laser TV Station>이라는 논고를 통하여 백남준은 고성능 레이져 광선을 이용하여 소수 TV 스테이션의 독점 방송을 극복하고 다수의 전문 방송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피력한다. 즉, 모차르트 단독 방송, 케이지 단독방송, 험프리 보가드 방송, 또 그 밖에도 underground film 방송까지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백남준의 레이저 광선 작업은 그러나 방송 차원보다는 레이저 광선을 이용하여 비디오 이미지를 공중에 띠우는 영상 작업으로 발전한다. 레이저 영상은 비디오 영상과는 또 다른 인식 경험을 하게 해준다. 예를 들면 광선으로 비물질화되어 허공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커닝햄의 춤추는 모습은 마치 무중력 속에서 활보하는 우주 비행사와도 같이 비사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객은 그렇게 기체화된 이미지를 관통하여 들락거릴 수 있음으로써 눈으로 본다기 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새로운 경험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임의 추출방식의 정보’라는 뜻의 논고인 <Random Access Information>을 미국 저명 미술잡지 <Artforum>9월호에 게재한다.
그 내용은 백남준이 뉴욕 근대미술관(MoMa)에서 1980년 3월 25일에 강연한 내용을 그 미술관 비디오부 큐레이터 Barbara London이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다. “21세기 회화는 극도로 복잡하면서도 극히 단순한 프로그램이 가능한 전자 벽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규격화 된 전자 캔버스가 등장할 것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정보가 가득 차 있어도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 항목이건 어느 페이지건 찾고 싶은 곳을 찾아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디오 테이프나 TV를 볼 때는 만들어진 순서대로 보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에, 임의로 찾아볼 수있는 random access방법이 개발될 때 까지는 책이 존재할 것이다. ” 이 말은 백남준이 일찌감치 선언한 종이의 죽음을 당분간 보류하는 것이다(“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종이가 죽었다고 말한다. 화장지만 빼고는.”)
1981년
<Partitur>그룹전에 참가한다 - Gelbe Musik,서 베를린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1981년 Biennial Exhibition전에 비디오 테이프 <Lake Placid '80>로 참가한다.
<Westkunst>그룹전에 참가하여 <Robot>, <The Moon is the Oldest TV>를 전시한다. - 퀼른 국립미술관
<Ein Klein Düsel Village Video>그룹전에 참가한다 - Kunstakademie,뒤셀도르프
동경 Sony 홀에서 비디오테이프 개인전을 개최한다.
개인전<Random AccessPaper TV>을 연다 - Watari화랑, 동경
이 개인전은 트럼프 카드 2세트와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등의 비디오 이미지를 섞어 만든 판화 전시회였다.
<Laser Video >(홀스트 바우만과의 작업)전시에 <Laser Video Space I>, <Video Laser Environment>등을 발표한다. - Die Nutzliche Künste,서 베를린
이 전시를 마친 뒤에 Neue Berliner Kunstverein으로 여행을 떠난다.
개인전 <Autobiography in P->를 동경에서 개최한다.
비디오와 음악과 무용의 센터인 The Kitchen Center의 창립 10주년 행사 <The 10th Anniversary Concert for the Kitchen>에 참가하여 <A Tribute to A Mannik by Nam June Paik & A tribute to Nam June Paik by Mannik>를 공연한다. 이 작품은 스테이지 디자이너이며 백남준의 설치 작업을 도와주는 Andy Mannik에게 헌정한 것으로 Mannik이 설치한 무대에서 무용가 Denise Gordon과 함께 <Life's Ambition Realized>를 초연한다 - 뉴욕(10월 12일)
뉴욕에 체류하던 필자는 이 공연을 통하여 백남준 씨를 처음 만나게 된다.
백남준과 고든의 공연이 끝나고 그 공연을 현장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가 뒤로부터 거꾸로 상연되었는데, 그것은 비디오 매카니즘이 야기하는 시간의 문제와 보도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였다. 공연이 끝나고 당시 머스 커닝햄 댄스 컴퍼니 이사장인 Barbara Toole의 소개로 백남준과 인사를 나누고, 공연중 백남준이 깨버린 전축판과 바이올린 파편들을 쓸어버리기 전에 주워 갖고 나왔다. 뉴욕을 떠나기 직전에 마침 백남준을 만날 수가 있어서 그때에 주은 ‘음악 쪼가리들’을 보였더니 사인은 공짜니까 하면서 매 조각마다 유화로 정성들여 사인을 해 주었다.
1981년 가을 <계간미술>19호에 당시 중앙일보 뉴욕 특파원 김재혁씨가 백남준과 인터뷰하여 쓴 <구미 실험 예술의 기수 백남준의 밀실 스튜디오를 가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게 되어 처음으로 백남준 탐방 기사가 한국에 소개된다
현대미술비평가 Battcock에게 바치는 <A Tribute to Gregory Battcock>을 공연한다. - Anthology Film Archive,뉴욕
Battcock은 백남준에 관한 논고 <From Jail to Jungle : The Work of Charlotte Moorman and Nam June Paik>을 1984년에 그 자신이 편집한 <The Art of Performance: A Critical Anthology>에 싣는다.
비디오 테이프 <My Mix 81>을 제작한다.
베를린 미술 아카데미가 제정한 Willi Grohmann Prize를 수상한다.
베를린의 DAAD 장학금을 수여받는다.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이 백남준의 회고전(백남준)을 연다.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4월 30일 ~ 6월 27일)
해프닝에서 비디오로 이어지는 전 작업을 전시한 대규모의 개인전인 이 전시회를 위해, 휘트니 미술관은 백남준이 제작한 <V-yramid>를 미술관 소장품으로 구입하여 상설 전시한다. 전시를 동반하여 5월9일부터 6월 20일까지 7차에 걸쳐 백남준의 주요 비디오 테이프 작품이 상영되고, 6월 2일과 3일 이틀에 걸쳐 무어맨과의 해프닝 공연이 있었는데, 주로 지나간 작품을 재연하거나 약간 수정하여 보임으로써 과거의 해프닝 작품을 소개하였다. 또한 5월 21일에는 전위 음악가 John Cage, 휘트니 미술관 비디오부 큐레이터 Han-hardt,퀼른 미술관 관장 Dr. Herzogenrath,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장 Pontus Hulten, 보스턴 현대미술관장 David Ross(현재 휘트니 미술관 관장)등을 초청하여 panel discussion을 하기도 하였다.
이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에 그 무렵 뉴욕 주제 KBS특파원이었던 김기덕씨가 그 전시 현장을 취재하고 백남준과 인터뷰하여 그 내용을 방송하니,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백남준이 방송으로 소개된다. 아쉬웠던점은, 인터뷰 가운데 백남준은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1965년~67년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서양 민족과는 달리 한국인 등 우랄알타이계 사람들은 달을 보며 토끼가 떡방아 찧는 장면을 상상하고 많은 설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달이 가장 큰 볼거리였기 때문에 달이 가장 오래된 TV라고 설명했는데, 테이프가 그 중요한 이야기를 담지 못한채 인터뷰가 끝나고 만 것이다.
휘트니 전시가 끝나고 시카고 Museum of Contemporary Art로 여행을 떠난다.
미국미술잡지 <Artnews>5월호가 백남준을 표지인물로 한 특집(Paul Gardner의 글)을 싣는다.
로봇 K-456을 없앤다.
1982년에 백남준은 20년 가까이 동고동락하였던 로봇 K-456을 처분하기로 마음먹고, 메디슨가 휘트니 미술관 앞 찻길에서 차에 치어 죽게 하는 교통사고를 꾸민다. 지나가는 무고한 차가 ‘살인’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CBS -TV팀이 그 사건 현장을 촬영하기로 한다. 비오는 날에 자기 아버지의 손에 죽게 되는 야릇한 운명을 가진 이 로봇은 아무 것도 모른채 카메라 앞에서 각본대로 죽어갔다. ‘21세기 최초의 사고’라고 이름 붙은 이 사건을 찍은 비디오 테이프는 <Living with the Living Theatre>라는 이름으로 Living Theatre무용단 창시자 겸 단장 Julian Bech에게 헌정되었다. 그 무용단 공연에 상연되었다. 우연의 일치랄까, 필름 속에서 로봇이 죽는 순간이 무용단 주인공의 극중 죽음과 일치하였다. (Fargier, <Nam June Paik>1989)백남준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그 로봇을 왜 죽였을까? 파괴를 통한 창조였을까? 새로운 기술로 비디오 로봇을 만들기 위해 낡은 자동 장치 로봇을 희생시킨 것이었을까?
개인전 <Tri-Color Video>를 연다 - Musée d'Art Moderne, 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 Pompidou,파리
독일의 비디오 예술을 정리하는 <Videokunst in Deutschland 1963~1982>그룹전에 참가한다. - Kölnischer kunstverein,퀼른
<60‘80 Attitudes Concepts Images>그룹전에 참가한다. - Stedelijk Museum, 암스테르담
비디오 테이프 <Allan 'n'Allen's Complaint>(컬러 30분)를 부인 시게코와 공동으로 제작한다. - WNET-TV
음유시인 Allen Ginsberg는 백남준 비디오아트의 단골 게스트중 한 사람이다. 그는 백남준을 한국의 호랑이라고 부른다.
<Korean-American Sensibility>그룹전에 비디오 테이프 <Allan 'n' Allen's Complaint>로 참가한다 - 뉴욕 한국 문화원
이 전시회는 당시 뉴욕 주재 한국 문화원의 문정관 천호선이 불란서계 미국 큐레이터 Michel Cone을 초빙하여 재미 한국 화가들의 작품을 선정하여 미국 전지역을 2년간 순회 전시한 그룹전이다. 백남준은 이 전시회에 출품함으로써 한국과 처음으로 공식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 초청 작가는 김차섭, 김원숙, 박관욱, 이병용, 현학비, 김소문, 황인기, 박애영, 박혜숙, 변종권, 문미애, 임충섭, 조성희, 김웅, 정연희, 최분자, 이상남, 홍신자(공연)이다.
플럭석스 창립 20주년 기념 전시회 및 공연 <1962 Wiesbaden Fluxus 1982>에 참가한다 - Museum Wiesbaden (9월 17일~ 11월 14일)
여기에는 Eric Anderson, George Brecht, Giuseppe Chiart, Philip Corner, Jean Dupuy, Robert Fillou, Jeoffrey Handriks, Benjamin Patterson, Willem de Rider, Takeko Saito, Ben Vautier, Emmett Willians, 백남준이 참가하였다.
이 기념 행사는 René Block의 주관으로 이루어졌고, 20년전 플럭서스 첫 공연이 개최되었던 비스바덴에서의 행사가 끝난 뒤에는 카셀(1982년 12월 12일~ 1983년 1월 23일)과 베를린 (1983년 1월 21일 ~ 4월 24일)에서도 전시 및 공연이 있었다.
1983년
휘트니 비엔날레 <From Minimalism to Expressionism>에 비디오 테이프 <Allan 'n' Allen's Complaint>로 참가한다. -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Carl Solway 갤러리 그룹전에 참가한다 - Cincinnati,오하이오
비디오 조각 <Auto Portrait>를 제작하여 전시한다 - Staatliche Kunstakademie, 뒤셀도르프 미술학교
수필<Du Cheval à Christo>를 발표한다.
1984년
우주 오페라 삼부작의 제1편 <Good Morning Mr. Orwell>을 뉴욕, 파리, 베를린, 서울을 우주 중계로 연결하면서 공연한다(1월 1일)
이 공연에는 로리 앤더슨, 피터 가브리엘,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알렌 긴스버그, 이브 몽땅, 필립 글래스 같은 거장들이 출연한다.
당시의 kbs의 이원홍 사장은 유태완 뉴욕 문화원장과 함께 이 우주 중계 공연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한국도 중계지역으로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2년뒤의 우주 작업부터는 kbs가 주최 기관의 하나가 된다.
중계 방송 당시 백남준은 퐁피두 센터에서 총 지휘를 하느라 파리에 있었는데, 박성범 파리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TV가 독재 압박의 수단이 아니라 자유 표현의 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방송이 끝나고 퐁피두 근처 Le Mont Lozere카페에서 ‘뒷풀이’를 할 때에는 그 무렵에 독일 유학중이었던 김영동이 내려와서 대금을 불어 백남준 및 관계자들의 흥을 돋구었다.
<오웰 씨>가 국내에서 방영된 이후의 시청자들의 충격을 kbs이동식 기자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1월 2일 졸음을 쫒느라 눈을 비비며 기다리다 KBS-TV화면을 지켜본 전국의 시청자들은 백남준이 히치코크처럼 적어도 한 시간 동안의 생방송 예술제에서 단 한두 장면에서라도 얼굴을 보여줄 것을 기대했으나, 그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그 대신 시청자들은 더욱 변화무쌍한 백남준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 그것은 새로운 현대 첨단 예술에 대한 상면이며, 새로운 감각, 새로운 소재, 새로운 표현으로 특징지워지는 종합 예술에 대한 개안이었다 - ‘예술의 힘찬 생명력을 보여준 획기적 잔치’, ‘과학과 예술의 결합을 보여준 문화사적인 충격’, ‘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보여준 행사’, ‘기술 문명을 인간의 삶의 즐거움에 이용한 좋은 본보기’등등의 반응과 찬사를 <오웰 씨>는 받았으며, 1984년 벽두는 이렇게 백남준의 충격과 함께 화려하게 닥쳐왔다.”(월간 방송 1984년 2월호)
개인전 <Mostly Video>를 연다. - Tokyo Metropolitan Art Museum, 동경
개인전 <Tribute to Marshall Mcluhan>을 연다 - Esperanza화랑, 몬트리올
에스페란자는 정기적으로 백남준의 전시회를 열어 캐나다 미술 애호가들에게 백남준을 소개할 뿐 아니라 몬트리올 현대미술관에 백남준의 작품을 기증하기도 한 백남준의 팬이다.
<Content>그룹전에 참가한다 -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워싱턴
1984년 <신동아>2월호에 황병기 씨가 <백남준과 비디오 예술의 미학>이란 논고를 발표한다. 그 논고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이 눈에 띤다. “백남준이 자신을 학자로 생각하는 이유는 예술을 과거와 미래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을 통하여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예술을 통하여 특히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흥미가 있어도 역사학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데 역사학은 <사기>이후의 역사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 해 6월23일에 백남준은 부인 시게코를 동반하고 35년만에 귀국한다. <오웰 씨>로 유명해진 터라, 잡지 인터뷰 신청이 밀려 들고 신문마다 보도되고 하여 일약 명사가 된다. 어렴풋이 괴짜, 기인 등으로만 알려졌던 백남준이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가 되어 금의 환향한 것이다. 숙소로 잡은 워커힐 호텔 방 번호가 귀국 날짜의 숫자와 일치하는 2603호였던 것은 우연일까? 백남준은 원래 1986년이 되어서야 귀국할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재미교포 한의사이며 점성술에도 뛰어난 박동환 씨에게 점을 쳤더니 55세 되는 해에 귀향하면 대길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김재혁, <계간미술>19호, 1981년 가을)
6월 26일자 <조선일보>에 <신화를 파는 것이 나의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정중헌씨가 쓴 인터뷰 기사는 백남준이 말한 “예술은 사기”라는 구절 때문에 장안의 화제가 된다.
그가 한 말은 이러하다. “한마디로 전위 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지요, 자유를 우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한 실험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지요.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은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엉터리와 진짜는 누구에 의해서도 구별되지요, 내가 30년가까이 해외에서 갖가지 해프닝을 벌였을때, 대중들은 미친 짓이라고 웃거나,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kbs-tv<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세계>라는 제목의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다. 고려대학교 김화영 교수를 모더레이터로 하여 김정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정병관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박영상 한양대학교 교수, 이미재 청주대학교 교수, 비디오 작가 박현기 씨 등을 초청하여 백남준과의 대담을 마련한 것이다. 백남준의 작품 <Global Groove>,<Lake Placid>,<Merce by Merce by Paik>,<전자 Opera>1,2번 등 테이프 작품이 소개되었고, 백남준은 각 분야 전문가들의 질문에 가끔은 엉뚱하게, 가끔을 질문을 무시하는 투로, 그리고 쉬운 말 같으면서도 이해하기 어렵게 답변하였다. 그 가운데 재미있는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사기꾼은 마르셀 뒤샹이다. 그는 사기를 철학화 했다.” “예술 자체에는 양심이 있을지 몰라도 예술가들은 실업가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비양심적이다”
“내가 처음 tv를 샀을때는 무엇이 나올지 전혀 몰랐다. 주사선만을 조작했는데도 펑펑 새로운 그림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비디오 무용을 만들때는 꼭 무용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세상만사 아무거나 찍어서 이으면 무용이 된다”
“<Good Morning Mr. Orwell>은 세계 최초의 쌍방 방송이다. 나는 이것을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자랑할 수 있다. TV문화는 레이더로 시작되었으며, 레이더는 쌍방향이다. 즉 TV는 쌍방향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예술은 음악, 무용, 무당 등 시간 예술뿐이다. 이것을 캐는 것이 인류에 공헌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유목민이었으며, 유목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주어도 가지고 다닐 수가 없다. 즉 무게가 없는 예술만이 전승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7월3일자 <한국일보>에는 백남준과 그의 유치원 친구인 수필가 이경희씨와의 대담이 실린다. 이 대담에서 백남준은 어려웠던 한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1966년까지 일본의 형님이 돈을 보내주어 도움을 받았으나, 그후 돈이 끊어져 한때 고생많이 했어. 뉴욕에 있을때 bell Lab이란 세계적 과학 연구소에 있었는데, 그때 45센트가 없어서 내 방에 올라가 15센트짜리 라면을 끓여 먹었지. 67년부터 록펠러 재단에서 돈이 나와 1년에 1만8천 달러씩 얻어 그걸로 쓰고 있었어”
<신동아>8월호에 최일남 씨가 백남준과 인터뷰한 기사 <비디오 예술의 황제 백남준 씨: “예술도 장사와 마찬가지예요”>가 실린다.
그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이렇게 말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지금 우리나라는 겨우 대들보 세우고 지붕 얹히려고 서둘지만 장차는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 경제가 성장하려면 하이테크놀로지 경제가 발전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제일 중요한 것이 소프트웨어입니다. 그리고 하이테크놀로지와 비디오의 관계는 말하자면 사돈 관계입니다.”
Berger부부의 현대미술 소장전 <Multiples und Objekte aus der Sammlung Ute und Michal Berger>에 참가한다 - Museum Wiesbaden Kunstsammlungen, 비스바덴(7월 2일 ~12월 8일)
Rose Art Museum에서 <The Color of Time>라는 제목의 비디오 조각을 전시한다 - Brandeis University,메사추세츠(9월 6일~10월16일)
이 미술관 큐레이터 Nancy Miller와의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1965년에 나는 콜라주가 오일 페인팅을 대신하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보면 콜라주는 오일 페인팅을 대신하지 못했어도, 브라운 관은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 확실하다. 제3세계에서는 붓이 값싸고 페인팅이 대중에게 인기가 있으니까 오일 페인팅이 민속 미술로는 남겠으나, 서양 미술사의 주류는 비디오아트가 될 것에 틀림없다. 앞으로 2인치 두께의 얇은TV가 나오고 크기가 30미터x40미터까지 되면, 우리는 유명한 화가들과 경쟁하는 입장이 아니라 그들을 뛰어 넘을 것이다. 1915년 에디슨이 축음기 발명 때문에 비틀즈가 스톡하우젠보다 더 존경받게 되었다. 이제 비디오시대에 비틀즈 타입의 화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상기 전시회 카탈로그)
<Video : A Retrospective 1974~1984> 그룹전에 참가한다 - Ling Beach Museum of Art, City of Ling Beach(1차: 1984년 9월 9일~11월4일, 2차: 1984년 11월 25일 ~ 1985년 1월 20일)
롱비치 미술관은 1974년부터 비디오부를 설치, 비디오아트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제12회 베니스 비엔날레 <XII Exposizione Internationale la Biennale de Venezia>에 참가한다.
<Art and Time>그룹전에 참가한다 - 브뤼셀
‘여기로부터’라는 뜻의 <Von Hier Aus>그룹전에 참가한다. - Messegelande Halle 13, 뒤셀도르프(9월 29일~ 12월 2일)
도큐멘타 정도의 큰 규모로 벌어진 이 현대 미술 국제전을 화가 김창열 씨, 비평가 오광수 씨, 원화랑 정기용 씨등 한국 미술계 인사들이 관람하였고, KBS문화부 이동식 기자가 취재차 왔다가 백남준의 소개로 요셉 보이스 화실을 방문하고 인터뷰를 하는 기회를 가진다.
이 전시회에도 참가한 보이스는 독일 국민의 우상으로 그 인기가 대단하여 전시장 안에는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팬들이 줄을 이었고, 중계차 나온 독일 방송 카메라도 여타 다른 작가들은 제치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만을 포착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암스테르담의 Stedelijik Museum에서 개최된 비디오 그룹전에 참가하여 <Homage to Stanly Brown>,<Egg Growns>, <Hydra Buddha>, <Autoportrait II>등을 전시한다.
<Autoportrait II>는 백남준 자신의 마스크가 화면에 피드백되도록 설치한 폐쇄회로 작업인데, 조각가 한용진 씨가 백남준의 마스크를 주물 제작하였다.
Seibu Museum의 후원을 받아 Joseph Beuys와 2인전을 개최하여 <Swiss Clock-V-Matrix>를 전시한다. - Watari화랑, 동경
1985년
개인전 <백남준: 로봇 가족>이 Carl Solway화랑에서 열리고, 같은 작품이 시카고 아트페어에 소개된다. - Chicago International Art Exposition
일본 쓰꾸바 과학만국박람회에 참가한다. 소니관은 외벽에 높이 25미터 넓이 40미터의 대형 화면에 밝기가 보통TV의 30배가 되는 점보트론을 설치하고 백남준의 테이프 작품 <All Star Video>를 방영하였다. 6월28일에 박람회장을 방문한 백남준은 점보트론 앞에서 비디오가 페인팅을 대신하리라는 그의 비디오 이상이 실현됨을 목격하고 기꺼워 하였다.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참가한다 - 브라질
‘평화’라는 특정 주제를 내건 <Biennale des Friedens>전시에 참가한다. - Kunsthause und kunstverein, 함부르크(85년 12월 1일 ~86년 1·월12일)
르네 블록이 주최한 이 행사에는 많은 플럭서스 거장들이 출연했는데, 보이스는 지병인 심장병이 약화되어 참석치 못하고 대신 전화를 통한 이색적인 공연이 이루어졌다. 보이스와 백남준 그리고 덴마크 음악가 Henning Christianson셋이 피아노 삼중주를 연주할 계획이었으나, 보이스의 피아노 밑에는 보이스 대신 산소통이 놓이고 위에는 침상의 보이스와 연결된 전화기가 놓였다. 보이스의 친구 Wolfgang Feelish가 보이스 전화 지시에 따라 산소통의 산소를 쉬쉬 품어대고 칠판에 어려운 철학을 받아썼다. 이것이 보이스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이 전시회에는 간호원 출신의 함부르크 거주 작가 노은님도 초청되어 그녀의 작품 <우주인>(Kosmologischer Mensch)등이 소개되었다.
1986년
1월 23일 65세의 일기로 요셉 보이스가 세상을 뜬다. 일생 동안 신비에 쌓여 많은 신화를 남기고 인생과 예술이 구별되지 않는 극적인 삶을 살았던 보이스는 백남준의 작업 동료이자 백남준과 가장 잘 통하는 ‘쌍둥이’ 같은 존재였다. 보이스는 제2차 대전중 비행사로 복무하다가 남부 러시아 크리미아 반도에서 소련군의 폭탄을 맞고 추락하게 된다. 안전 벨트를 묶고 있던 옆자리의 조종사른 그 자리에서 숨졌으나, 벨트를 묶지 않았던 보이스는 비행기가 지상에 부딪히면서 창을 뚫고 튕겨나와 눈바닥에 떨어져 목숨을 구한다. 그 지방의 주민들인 몽고계 타타르 사람들이 보이스를 발견하고 온몸에 버터를 바르고 담요로 싸서 썰매로 실어다 간호해 준 덕택에 보이스는 회생하였다. 그의 작품에 기름 덩어리 혹은 왁스, 회색 펠트지, 손전등, 썰매, 약품 등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몇 번씩 들락거린 이러한 개인적 경험에서 유래한다. 또한 그러한 기억 때문에 동양과 샤머니즘과 백남준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는다. (그는 타타르족이 굿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보이스는 백남준과 한국에서 무당굿을 벌일 계획을 몇 년 전부터 하고 있었으나 그 뜻을 살리지 못하고 타계한 것이다. 백남준은 1990년 7월 서울 현대화랑에서 보이스의 추모굿을 올림으로써 그와의 약속을 이행한다.
체이스 맨하탄 소장전<American Icons : Selections from the Chase Manhattan Collection>에 참가하게 되고, 참가 작품들은 Bruce Museum, Greenwich(코네티컷), Heckkscher Museum(헌팅턴), The Robertson Center for Arts and Sciences(빙햄턴)에서 순회 전시된다.
<The Freedom Gallery : The First Decade>그룹전에 참가한다 - Freedman화랑, 펜실베니아
<Toy as Art>그룹전에 참가한다 - First Street Forum, 세인트루이스, 미주리
<Something Pacific>이란 제목으로 <TV Buddha>등을 USCD야외조각장에 설치한다.
USCD(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아고 분교)의 Stuart Collection(James Stuart Desilva가 학교 당국과 함께 1981년에 시작함)이 백남준을 비롯하여 Bruce Nauman, Alexis Smith등 10여 작가를 선정하여 USCD에 야외조각을 설치하였는데, 백남준의 <Something Pacific>은 USCD의 Media Center 앞에 자리 잡았다.
시카고 아트페어인 <Chicago International Art Exposition>에 참가한다.
서울 동경, 뉴욕을 연결하는 우주 오페라 제2편 <Bye Bye Kipling>을 위성 방송으로 공연한다.(10월 3일)
Dick Cavett이 사회를 본 이 공연에는 필립 글래스, 키스 해링, 루 리드, 이세 미야께, 아라타 이소자키와 함께 황병기와 박상원,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한국 전통무용가 김영임, 화가 김창열과 이우환 등이 출연한다.
<키플링>은 백남준 자신보다 KBS이원홍 사장의 요청에 의하여 추진된다. 이원홍 사장이 KBS를 떠난뒤에 <키플링>프로젝트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지다가 마지막 순간에 힘겹게 성사된다.
KBS등 후원 기관의 자금 협조에도 불구하고 미국 스텝진의 서울 체제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백남준은 자신의 판화를 판매해야 했다. 그밖에도 이 작업을 위하여 백남준은 상당한 액수의 개인 부채를 지게 된다.
백남준은 <키플링>을 계획하면서 마라톤 선두주자의 골인 장면을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 씨가 뛰어오는 장면으로 대치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단계에 가서 이 구상을 포기하였다. 이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일본 선수의 우승 장면이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10월 11일 <조선일보>에 <키플링>은 예술을 내세운 일본 선전쇼라고 비난하는 정중헌 기자의 기사가 실린다.
11월 <춤>지는 백남준 특집을 게재하였는데, 백남준은 송정숙 서울신문 논설위원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악평 같은 거, 내가 일생동안 악평 오죽 보았어요. 미국에서는 이제 악평같은 거 받음 받을수록 예술가가 자라지요, 달리나 피카소는 일생을 그걸로 성장했으니까요, 나도 콘서트 하다가 노출 때문에 경찰에도 가고, 피아노 파괴했다고 파괴주의자라고 얻어맞았지만 그거 개의하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한국 언론이 어떻게 생각하나, 일본 언론이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거 하다가는 아무 것도 안돼요, 그러니까 이번도 신념가지고 했으니까 부정적으로 나오면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운명이니까. 저절로 깨닫도록 기다려야지. 그렇잖아요?”
또한 같은 <춤>지에서 당시 재미 평론-연출가 김태원씨는 상기 <조선일보>의 기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우리가 진정 우려해야 할 것은 국제 사회에서 당당히 인정받고 있는 한국의 예술가를 정당한 비평 절차에 의존하지 않고 한낱 이방인이거나 일개 가십거리밖에 되지 않는 듯 뒤팅켜버리는 그 무의식적 ‘문화적 폐쇄성’이다. 불과 2,3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인 몇 퍼센트가 백남준이란 이름 석자를 알았을까? 그리고 현재도 한국의 식자중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과 비디오 조각을 접해 본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12월에 김홍희는 <예술과 비평>지 겨울호를 통하여 백남준의 위성예술은 시각적 환희나 민족적 자긍심을 충족시키려는 입장에서 볼 것이 아니라, 그의 비디오 예술의 핵심인 시간성의 개념과 소통의 문제를 다루는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전 <Nam June Paik : Sculpture, Painting and Laser Photography>를 연다. - Holly Solomon화랑, 뉴욕(9월 24일~10월25일)
미국아방가르드의 후원자 가운데 하나인 홀리 솔로몬은 앤디 워홀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을만큼 명사이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백남준은 이 화랑의 전속 작가로 계약된다.
개인전 <Nam June Paik : Bye Bye Kipling>을 연다 - Watari 화랑, 동경
<Triumphal Arc Double Face>를 퐁피두 센터에 설치한다.
Franklin Furnace "Artie" Award. American Film Institute Award, New York State Governor's Award등 일년에 세 번의 수상을 기록한다.
1987년
<ARCO '87>그룹전에 참가한다 - 마드리드
<Documenta 8>에 <Beuys/ Voice>를 제작하여 출품한다 - 카셀
<Art in America> 9월호가 <Documenta 8>취재 특집 기사를 보도하면서 백남준의 설치 작품인 <Beuys/Voice>를 표지에 싣는다.
<Art LA '87: Contemporary Korean Art>전에 참가한다 - Jean Art화랑, 로스엔젤레스
<Animal Art>그룹전에 참가한다 - Steirischer Herbst, 그라츠
<Sculptur Porjekte/Münster>조각 그룹전에 참가한다. - 뮌스터
<L.'Epoque. La Mode. La Morale, La Passion>그룹전에 참가한다 - 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 Pompidou,파리
<Currents: Eight Contemporary Artists, American's Korean>전에 참가한다 - 로스엔젤레스 한국문화원
<Computers and Arts>그룹전에 참가한다 - Everson Art Museum, 시라큐스
1987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가한다 -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뉴욕
1988년
개인전 <Nam June Paik : Beuys and Bogie>를 연다 - Dorothy Goldeen화랑, 로스엔젤레스
개인전 <Nam June Paik : Color Bar Paintings>를 연다 - Holly Solomon화랑, 뉴욕
개인전 <Nam June Paik : Family of Robot>를 연다. - South Bank Center,런던
<Positions in Art Today>그룹전에 참가한다 - Akademie der Küste, 베를린
<Interaction : Light, Sound, Motion>그룹전에 참가한다 - The Aldrich Museum, Ridgefield,코네티컷
<American Baroque>그룹전에 참가한다 - Holly Solomon화랑, 뉴욕
<Private Reserve>그룹전에 참가한다 - Dodothy 화랑, 산타모니카, 캘리포니아
<1988: The World of Art Today>그룹전에 참가한다 - Milwaukee Art Museum,위스콘신
<Video Art : Expanded Forms>그룹전에 참가한다 -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at Equitable Center, 뉴욕
<Arco '88>그룹전에 참가한다 - 마드리다
서울 현대화랑에서 개인전 <TV Family>를 연다. (9월 14일~ 30일)
<다다익선>을 제작, 과천 현대미술관의 원형 공간에 영구 설치한다.이 작품은 10월 3일 개천절을 뜻하는 1003개의 모니터로 초거대 나선형 탑을 구축한 것이다. 삼성전자가 수상기를 기증하고, 건축가 김원씨가 구조적 설계를 맡아 제작된 이 탑은 원래 Vladimir Tatlin의 나선형 탑 <Monument to the Third International, 1919~20>을 염두에 두고 <타틀린에게 보내는 찬가>라는 이름으로 구상되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그렇게 이름을 붙이는 대신, <다다익선>이라는 이름을 붙여 타틀린에게 바쳤다.
<다다익선>제작을 위하여 백남준 씨는 ‘86년부터 건축가 김원 씨와 현대미술관을 드나들면서 다양한 구상을 하게 되는데, 건물 공간과의 조화를 위하여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 소장된 <V-rymid>와 파리 퐁피두 센터 광장에 전시되었던 <Tricolor Video>의 두가지 요소를 갖춘, 즉 올려다 보아도 좋고, 내려다보아도 좋은 작품을 구상한다. 한편 김원씨는 “건축가로서 단순한 통로에 불과했던 공간을 훌륭한 전시 공간으로 바꾼다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라고 하며 기꺼이 아무 보수없이 설계에 응한다(’86년 10월26일자 서울신문 임영숙 기자)
<다다익선>이라는 제목과 관련하여 백남준은 이렇게 말한다. “방송이란 것은 물고기 알과 같은 것이다. 물고기 알은 수백만 개씩 대량으로 생산되나, 그 가운데 대부분이 낭비되고 수정되는 것은 얼마 안된다. 지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수억의 세계 인구를 상대로 발신한 것이었는데, 이 발신의 내용이 얼마나 수정되었는지는 그야말로 다다익선이다”(유준상, <현대미술> 1988년 가을)
‘88년 서울 올림픽에 동반하여 백남준 우주 오페라 제3편이자 마지막인 <손에 손잡고, Wrap Around the World>를 공연한다. 서울KBS-TV와 뉴욕 WNET-TV의 공동 주최로 열린 이 공연에는 중국, 소련을 포함한 10여개국이 참가한다. 이 공연에서 백남준은 뉴욕 스튜디오에서 한국전통 의상을 입고 해프닝을 벌인다.
백남준은 서울 올림픽에 영상 예술로 참가할 것을 구상할 때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세계가 파괴를 향하고 있는 현재, ‘스타워즈’가 아닌 ‘스타피스 Star Peace'를 만들어 보고 싶다. 서울을 비롯해 미주, 유럽, 아시아등 세계 각지를 동시 중계로 연결하겠다. 테크놀로지는 지금까지 옛 분화를 파손시켜왔으나, 최신 테크놀로지인 영상통신 기술은 각지의 고유 문화를 교류시켜 대립이 계속되는 지구를 둘러싸 한데 모을 수 있다” 백남준은 이러한 발상과 함께 <Wrap Around the World>라는 제목을 정하기 전에, “Olympic Fever", "Good Morning is the Good Evening", "Space Rain-bow", "Chip Olympics"등 다양한 제목을 구상했었다.
백남준은 1988년 9월 5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더 이상위성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앞으로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누군가가 남한과 북한, 미국과 소련, 서독과 동독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면 좋겠다고 부언하였다.
New York Times는 9월12일에 상기 위성공연을 리뷰하면서 백남준은 이번에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다. 리틀엔젤스와 같은 지루한 공연등, 한국 선전이 너무 많았다고 비난하였다.
<손에 손 잡고>를 마치고 이어령 씨와 대담하면서 백남준은 “<Wrap Around World>는 5대양 6대주를 보자기로 부드럽게 싼다는 뜻이다. 보자기는 책 한권이나 열권이나 다 쌀 수 있고, 비가 올때에는 우산도 되는 무궁무진한 베리에이션을 갖는다. 이와 같이 용량에 제한 없이 이것저것 융통성 있게 넣을 수 있고 처음부터 틀을 정하지 않고 시작하는 예술도 참 재미있다. 나는 TV의 틀을 깨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현대미술> 1988년 가을)
1989년
개인전 <One Candle >을 연다 - Porticus,프랑크프르트
개인전 <La fée électronique>에 <Olympe de Gouges>등을 출품. -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파리
<Video Skulpture, Retrospectiv and Aktuell 1963~1989>에 참가한다 - Dumont,퀼른
불란서 혁명 200주년 기념전 <Les Magiciens de la Terre>에 참가하여 비디오 설치 작품 <Cargo Cult>등을 출품한다 - Musée d'Art Moderne, 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 Pompidoo, 파리
불란서 혁명200주년 기념전 <Image 여 Future 89>에 참가하여 로봇 <David 와 Marat>를 출품한다 - Cité des Arts et des Nouvelles Technologies de Montréal, 몬트리올(5월 31일 ~ 9월 24일)
<Image World: Art & Media Culture>에 참가하여 <Fin de Siécle II >, <Magnet TV>를 출품한다 -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1989년 11월 8일 - 1990년 2월 18일)
개인전 <Nam June Paik 1989 : Recent Works>를 연다 - Esperanza 화랑, 몬트리올 (1989년 12월 7일 ~ 1990년 2월 15일)
1990년
요셉 보이스를 위한 추모 공연을 올린다 - 서울 현대화랑(7월 20일)
백남준은 한국에서 굿판을 벌이기로 생존의 보이스와 약속했었다.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에 보이스가 세상을 뜬 것이다. 백남준은 진오귀굿 기능 보유자인 박수 김석춘과 그의 처인 무당 김유선을 초청하여 실제 굿판을 벌이고 그의 혼이 좋은 곳으로 가도록 기원하였으니, 어떠한 형태로든 보이스와의 약속은 지킨 셈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선보인 백남준의 해프닝이 전통 무속들과의 협연으로 굿의 형태를 취하였기 때문에 한국 관객은 생소함보다는 친숙함으로 해프닝을 대할 수 있었다. 해프닝과 샤머니즘은 하나는 예술의 형태를 띠고 다른 하나는 제식적으로 치루어질 뿐, 기본 원리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굿도 볼거리를 제공하는 일종의 공연예술이며, 해프닝이나 굿이나 모두 자기 정화라는 치유적 기능을 갖는다. 또한 무당도 아방가르드 못지 않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용기있는 사람이다. 더구나 굿이나 해프닝이나 모두 관객의 참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상호적 매체들이다. 결국 해프닝은 샤머니즘의 현대적 표현으로서, 해프닝의 수행자는 특히 어려서부터 굿판을 보고 자란 백남준은 첨단의 아방가르드인 동시에 전통 무당이 되는 것이다. 이 굿판이 벌어진 날이 7월20일 바로 백남준의 생일이었다. 쌍둥이 같은 분신인 보이스의 진혼제를 자신의 생일날에 거행함으로써 백남준은 우연의 신비를 창출하고 죽음과 탄생의 관계를 규명한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오래 살아서 생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고 서슴치 않고 아방가르드 처세론을 펴는 백남준은 보이스의 죽음이 본인의 죽음만큼 안타깝고 서글펐겠으나, 진혼제를 통하여 보이스가 자신의 몸에서 부활하기를 간구하였을 것이다.
1991~1992년
유럽 순회 개인전 <Nam June Paik : Video Time-Video Space>에 초기 작품들과 함께 1989~91년 사이에 제작한 로봇 군상 13점 <My Faust, 13Channels>를 선보인다 - Kunsthalle Basel(1991년 8월 15일 ~ 10월 27일)Kunsthaus Zurich (1991년 8월 16일 ~10월 6일), Städtische Kunsthalle Düsseldorf(1991년 11월 30일 ~ 1992년 1월 12일), Museum Moderner Kunst Stiftung Ludwig Museum des 20 Jahrhunderts Wien(1992년 2월 27일 ~ 4월 12일)
백남준 아트 센터 자료
2000History
- 2000 (68세)1월 1일 위성 생방송 프로그램 방영.
2월 11일-4월 26일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 전시.
백남준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동시적 변화’라는 레이저 작업을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의 꿈에 도전. - 2001 (69세)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 전시.
- 2002 (70세)뉴욕 록펠러센터에서 <트랜스미션> 퍼포먼스 및 레이저 작품 야외 설치.
- 2006 (74세)1월 29일 마이애미 자택에서 소천
1990History
- 1990 (58세)7월 20일 현대화랑에서 1986년 사망한 평생의 친구 요셉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 벌임.
- 1992 (60세)뒤셀도르트 한스 마이어 화랑에서 <새로운 비디오 조각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최초 회고전 <백남준, 비디오 때, 비디오 땅>
갤러리현대, 원화랑, 갤러리 미건에서 <백남준 비디오 아트 30년 회고전> - 1993 (61세)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청됨. <전자 고속도로>전.
- 1995 (63세)제1회 광주 비엔날레 <인포아트>전을 기획
- 1996 (64세)4월 20일 뉴욕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짐
- 1999 (67세)독일 브레멘 쿤스트할레에서 대규모 회고전.
독일 캐피탈지 선정 세계 100대 작가 중 8위.
아트뉴스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25인에 선정.
1980History
- 1981 (49세)베를린 미술 아카이브가 제정한 Will Grohmann Price 수상
- 1982 (50세)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 <백남준>
오랫동안 동행했던 <로봇 K-456>와 결별하는 제의로서 교통사고(’21세기 최초의 사고’) 연출.
비스바덴미술관에서 플럭서스 창립 20주년 기념 <플럭서스는 가라> 행사 참가. - 1984 (52세)새해 첫날밤 우주 오페라 삼부작 1편 <굿모닝 미스터 오웰> 전세계 방송.
뉴욕 파리를 인공위성으로 연결하는 리얼 타임 퍼포먼스 생중계. 재방송을 포함하여 전세계 2천5백만명 시청. - 1986 (54세)10월 3일 서울, 동경, 뉴욕을 연결하는 우주 오페라 2편 <바이바이 키플링> 방송.
동서양을 결코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19세기 영국시인 키플링에 대한 20세기 백남준의 응답. - 1988 (56세)1,003대의 TV로 구성된 <다다익선>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영구 설치.
<손에 손잡고>는 서울과 뉴욕 공동 주최, 세계 10여 개국이 참여한 위성 방송.
1970History
- 1970 (38세)WGBH 방송국 및 록펠러 재단 지원으로 슈야 아베와 함께 비디오 신시사이저 개발.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최초의 작품인 4시간짜리 <비디오 꼬뮨>를 방송. - 1973 (41세)뉴욕 WNET 방송국을 통해 <글로벌 그루브> 방송.
WGBH, WNET 공동제작으로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찬가> 방송. - 1974 (42세)뉴욕 에버슨 미술관에서 회고전 <백남준: 비데아와 비디올로지>
- 1977 (45세)플럭서스 동료이자 비디오 아티스트 구보타 시게코와 결혼, 이 무렵부터 당뇨병으로 고생함.
- 1978 (46세)뒤셀도르프 국립 미술아카데미 교수로 초빙.
1960History
- 1960 (28세)10월 6일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에서 2대의 피아노를 부수고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퍼포먼스.
- 1961 (29세)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 공연 참가.
<머리를 위한 선> - 1962 (30세)<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독주>
비스바덴 플럭서스 창립기념 공연 <플럭서스. 새로운 음악을 위한 국제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스마일 젠틀리> 등을 연주.
마키우나스, 보이스 등을 만나 플럭서스의 자기조직 운동에 가담. - 1963 (31세)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백남준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우치다 히데오, 슈아 아베와 만남. - 1964 (32세)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오리기날레> 공연 및 <로봇 K-456>을 가지고 <로봇 오페라> 공연.
- 1965 (33세)미국 최초 개인전 <전자 예술> 보니노 화랑, 뉴욕.
- 1967 (35세)샬롯 무어만이 참여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퍼포먼스 공연 도중 음란죄로 경찰에 연행.
- 1969 (37세)보스턴의 WGBH 방송국을 통해 <매체는 매체다> 방송.
백남준은 <전자 오페라 No.1>으로 방송의 마지막 프로그램.
1950History
- 1950 (18세)귀국, 6.25동란으로 부산을 통해 일본 고베에 도착, 가마쿠라에 정착.
- 1952 (20세)일본 동경대 공학부와 교양학부 문과에서 동시 입학허가 취득 후 문화를 선택.
- 1954 (22세)동경대 미학 및 미술사학과에 입학.
- 1956 (24세)동경대 졸업. 독일 뮌헨대 철학과 입학. 음악학과 미술사 수학.
- 1957 (25세)다름슈타트 하기강좌에서 음악가 슈톡하우젠을 만났고, 현악 4중주를 처음 작곡.
- 1958 (26세)존 케이지를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서 만남.
- 1959 (27세)<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Homage to John Cage)> 발표, 갤러리 22, 뒤셀도르프.
1940History
- 1945 (13세)경기보통중학교 입학, 재학 중 피아니스트 신재덕과 작곡가 이건우, 20세기 신음악에 관심을 갖게 됨.
- 1949 (17세)홍콩으로 이주. 로이덴스쿨 입학.
1930History
- 1932만주사변 이듬해 7월 20일 종로구 서린동에서 출생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의 3남 2녀 중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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