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 연극의 기수 이오네스코(1912~1994)론] <말을 지껄이나 소통은 안 된다> 1994년 원고
언어유희시대에 현대인의 언어소통의 단절과 불능성을 비극적 희극으로 재구성한 작가
NPG x31639, EugËne Ionesco by Ida Kar,photograph,1960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대머리 여가수는 매일 같은 식으로 머리를 빗는다. "그의 연극 언어는 구소련 붕괴만큼 현대 연극에 대한 엄청난 파급 효과를 주다. 그의 연극 제목 예컨대 <대머리 여가수>나 <코뿔소> <의자> 등 그 자체가 상징적이고 희화적이다.
물이 썩어 가듯이, 말이 썩어 가는 세상, 말의 과잉․과소비, 닫힌 언어 속에 막힌 대화, 억제된 언어의 충동 욕구, 고향 이전의 고향의 말을 추적하는 이오네스코의 연극적 테마는 역으로 극도의 의사소통 단절과 소외에 사는 현대인을 감동시켰고 그들에게 엄청난 공감과 감동을 준 것이다.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는 루마니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20세기 최고의 희곡작가다. // 그가 20살인 1931년부터 문필 활동을 시작하여 초기에는 시를 쓰다가, 차츰 연극에 관심이 더 기울어지고, 출판사를 다니면서 습작 기간을 보낸다
1950년 기계적 언어와 극히 단순화된 무대 설치 그리고 무모할 정도로 되지도 않는 말이 이어지는 그의 처녀작 <대머리 여가수>가 파리의 녹탕뷜 극장에서 초연을 때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그의 연극은 조금씩 알려지면서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후 이오네스코는 1960년 <코뿔소>라는 작품으로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게 되고, 그의 연극은 본격적 장기 공연에 들어가게 된다.1966년 <허기와 갈증>은 그의 후기 작품 중 대표작으로, 그의 연극 세계는 완숙기 너머 최고의 절정기를 맞게 된다.
그의 언어는 당연히 비극적이다. 그러나 비극적 언어의 내용은 희극적이다. 비극을 희극으로 표출하는 것만큼 희극적 연극이 어디 있을까! 소위 그의 반연극(anti-théâtre) 혹은 부조리 연극(théâtre absurde)은 전통적 의미의 리얼리즘을 거부하고, 무대 구성이나 사건의 전개, 의미 전달에 있어서 일체의 논리와 설명을 배제한 연극이다.
언어적 혼돈의 극치 속에서 발견된 새로운 언어의 꿈과 창조는 이런 조명을 통해서 새로운 연극은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부조리는 카뮈나 사르트르의 인간 조건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뇌와는 다른 그냥 부조리한 단순한 의미다. 예를 들면, <대머리 여가수>에 나오는 이런 대사다.
"대머리 여가수는 매일 같은 식으로 머리를 빗는다."
이런 대사는 말 그대로 부조리(non-sens)한 것이다. 어떻게 머리가 없는 여가수가 머리를 빗을 수 있으며, 하물며 그녀가 대머리라 하더라도 어찌 맨머리로 무대에 설 수 있는가? 이는 언어의 부조리함을 블랙 언어로 바꾼 것이고, 부조리한 언어의 현상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러나 관객이 언뜻 들으면 이 말은 의미가 통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 이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그럴싸한 사이비 언어에 무감각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오네스코의 연극을 보는 관객은 전혀 예상 못한 낯선 대화와 몸짓, 의미가 통하지 않는 괴상한 말들, 그리고 혼돈과 모호함을 담은 세계와 부딪치게 되어 어리둥절해진다. 여기서 관객은 감동보다는 충격을 받는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이 점은 근대 연극의 해체와 현대 연극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이런 대중성 없는 연극은 처음에는 뒷골목에서 무명의 소극장에서 주로 공연되었다. 전통 연극을 해체하는 이런 새 연극은 점차 관객들에게 삶의 부조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메시지가 받아 들려지면서 점차 관심을 끌게 되고, 또한 관객들의 현실의 부조리함을 씻어 주는 환상에 빠지게 해, 연극을 통한 기복과 전환의 절묘한 맛을 보게 된다.
이런 그의 연극은 차츰 각광을 받더니, 10년이 채 못 되어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연극이 된다. 그의 메시지가 현대인의 언어 소외와 언어 단절을 꿰뚫고 보았기 때문이다.
<코뿔소>의 성공은 유럽에 대두한 집단 폭력주의의 조롱과 고발과 맞물려 그의 기발한 언어와 연극적 상황이 관객의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준다.
그의 연극은 '연극이라는 문학 장르'를 그 위기에서 탈출시켜 준 비상구 역할을 하게 했다. // 그는 말한다. "작가는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발명하는 것이다. 인기 없는 연극만이 대중적 연극이 될 수 있다. 연극이 될 기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대중적이란 일반 대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연극 언어는 구소련의 붕괴만큼 현대 연극에 대한 엄청난 파급 효과를 주었다. 그의 연극 제목 예컨대 <대머리 여가수>나 <코뿔소> <의자> 등 그 자체가 상징적이고 희화적이다.
그는 말한다. "연극은 감정을 극단적으로 과장하는 것에 속하며, 평범한 일상 현실을 해체시키는 과장된 표현 속에 있다. 해체 - 그것은 언어의 붕괴를 말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시대에 부응하는 연극을 거부했다. 유행의 뒤를 쫓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연극의 주인공은 인간성을 상실한 로봇이다. 무대 장치는 극히 단순하고 인간 언어의 통화 불가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니 폭로한다는 쪽이 더 가까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성 발기 불능성과 같은 것으로 현대인을 소외시키고 왜소하게 하고 절망과 좌절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언어의 물질화․기계화는 인간들을 숨막히게 한다. 인간 사이의 언어소통(communication)의 단절은 상호 불신의 전염병을 낳는다. 언어는 더 이상 인간의 전달 수단이 되지를 못한다. 그의 연극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똑같은 말, 진부한 말, 틀에 박힌 말을 반복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을 꼬집는 것이다.
인간들은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있고, 그 언어의 감옥에 갇혀 스스로 무덤과 함정을 파며, 고독과 단절의 늪에 빠진다. 현대인을 <말을 한다는 것>보다는 <지껄인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첨단 통신 장치의 시대에도 여전히 언어는 불통이다. 언어의, 언어의 본말을 뒤집는다.
급기야는 헛껍데기 언어만 남고 인간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의사소통이 힘들어 진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사실도 모르는 채 열심히 떠들어댄다. 이제 언어는 난센스와 상투적 말을 운반하는 연장, 또한 아예 어법을 초월하거나 비논리적 허상을 확대 재생산하는 말장난이 될 뿐이다.
이런 유희 언어 즉 궤변과 파괴적인 언어의 표출은 인간의 언어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파멸의 길러 몰고 간다. 더 나아가 인간의 상실, 인류 문명의 위기를 낳게 한다. 그의 연극 속에 언어는 현대인의 죽임을 상징하는 시간이 정지된 언어를 여과 없이 연출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언어이 형이상학적 텅 빔, 삶의 무의미, 허무, 죽음에 대한 공포의 냄새를 피우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인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다 죽어 가는 언어를 부여안고 산다. 언어의 사장화와 부패화는 더욱 심화되어, 언어 소외와 의사소통의 불능은 끝이 없어 보인다. 등장인물의 논리는 갈수록 가파른 절벽으로 치닫고, 결국은 진실의 말은 완전히 질식할 것 같다.
언어의 시체가 썩는 곳에 산소와 같은 말이 필요하듯, 숨막히는 언어의 단절 속에 참 살아있는 말이 시급하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공해 언어의 대량 가스 사고는 손도 못 댄 정도다. 물․공기의 공해와 함께 말․언어의 공해는 정말 심각하다.
그래서 작가는 어린 시절의 꿈과 행복의 언어로 돌아간다. 그 질식할 것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 한 줌의 산소와 같은 언어를 마시고 싶어한다. 어린 시절 태초의 언어만이 그의 유일한 유토피아다. 그는 이 언어의 환희와 상상의 기쁨을 꿈꾸고 싶어한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언어가 자서전적이고 정신 분석적이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 행복한 추억을 이오네스코는 무의식중에 그의 연극의 밑그림으로 삼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언어소통의 단절은 극심하다. 언어의 대량 소비 사회에서 말장난의 위세, 모든 언어의 개그화는 나날이 심화되고 있고, 이제 언어는 하나의 유희일 뿐 어떠한 의사소통의 코드가 되지 못한다.
채플린의 언어와 너무 닮은 그의 연극 대사는 인간 언어와 인간 존재의 파괴에 저항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언어의 죽음은 형이상학적 죽음이 아니라 물질적 죽음이다. 여기 저기 널려진 수많은 언어의 시체들은 바로 인간 종말의 위기를 담보한다. 사실 현대인의 언어는 너무 장식적이고 틀에 박혀 있고 기계적이다.
노자는 "참말은 말이 서투르다." 라고 했지만, 이오네스코는 새 언어의 비상구를 동양의 노자․장자 풍의 언어에서 찾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연극은 강한 윤리적 메시지가 담고 있다. 원죄 의식, 태초의 말을 파괴하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 폭력 언어에 대한 거부, 선동․선정 언어의 경계, 광고 언어가 주는 환상주의에 대한 경고는 너무나 당연하다.
초자아의 세계 탐구, 무의식적인 언어 충동, 죄의식, 콤플렉스, 죽음의 질서이며,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서 충만한 혼과 생기가 넘치는 세상 말글살이를 갈망하고 있다. 초자아의 세계를 탐구하며, 무의식적인 언어 충동과 죽음의 질서에 대한 도전하며,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서 충만한 혼과 생기가 넘치는 세상의 말글살이를 갈망한다.
물이 썩어 가듯이, 말이 썩어 가는 세상, 말의 과잉․과소비, 닫힌 언어 속에 막힌 대화, 억제된 언어의 충동 욕구, 고향 이전의 고향의 말을 추적하는 이오네스코의 연극적 테마는 역으로 극도의 의사소통 단절과 소외에 사는 현대인을 감동시켰고 그들에게 엄청난 공감과 감동을 준 것이다.
그의 반연극은 사무엘 베케트와 함께 현대 프랑스 부조리 연극의 선각가로 20세기 현대 연극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현대 연극의 빗장을 열면서 숨통을 트게 한 우리 시대의 연극의 산증인이고, 21세기 연극의 가능성을 펼쳐 낸 큰 산맥이었다.
<대머리 여가수>를 비롯하여 이 작가의 연극이 한국에서는 70년대 부조리 연극으로 사무엘 베케트와 쌍벽을 이루면서 많이 소개되었죠. 그의 주장은 아주 단순합니다. 쉽게 말하면 현대인들은 말을 많이 하고 있으나 단지 지껄일 뿐이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결론이다. 말은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의 언어의 소외 인간을 얼마나 비극적으로 몰고 가겠습니까. 지금 첨단통신시대가 되었는데 이런 인간의 소외와 불행과 고독을 막을수는 없는 모양이다
현대인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다 죽어 가는 언어를 부여안고 산다. 언어의 사장화와 부패화는 더욱 심화되어, 언어 소외와 의사소통의 불능은 끝이 없어 보인다.
1970년대 초, 프랑스 부조리 연극의 선구자 이오네스코 이화여대 특별 초대를 받다. // 이 강의에 이대생이 2000명 정도 모인 것처럼 보인다. 당시는 정보가 그렇게 풍부하지 않는 시대, 세계적 작가를 직접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 그의 강연의 골자는 <나는 왜 쓰는가?> 아래 3가지 주제로 // 1 떼묻지 않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말하고 싶어 // 2 지상은 암흑, 내적 갈등 누군가 열어줘야 // 3 이데올로기는 서로를 죽이는 베일일뿐, 이런 타이틀 보인다.
1976년 대학시절, 이오네스코 원어 연극, 대학 극장에서 한번 하고, 프랑스인들 앞에서 한 번 하고, 두번 했다. 아래는 알리앙스에서 프랑스인들 초대해서 하다 // "대머리 여가수는 날마다 같은 식으로 머리를 빗는다" - 명대사 // 오늘도 우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대사 속에 살고 있다. 말을 지껄이기는 하는데 소통이 전혀 안 된다. 이런 걸 '부조리 연극'이라고 하죠 '사무엘 베케트'와 '이오네스코'가 가장 대표적 작가죠. 내 옆(오른쪽)에 앉아있는 여자(흰 브라우스)가 김대중 대통령 2번째 며느리(신선련)다. // 오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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