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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A-호퍼전] 미국의 '빛과 그림자', 리얼리즘으로 그린 화가

[SeMA-호퍼전] 미국 역사를 작가의 깊은 내면으로 그린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 길 위에서 Edward Hopper: From City to Coast'전 2023.04.20-08.20 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전층 장르: 회화 드로잉 판화 아카이브 270여 점

휘트니 (미국) 미술관 2015년 여길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휘트니가 소장한 호퍼 작품 중 하나

**호퍼 사후 모든 작품 휘트니 미술관에 기증(장부에 정리한 2,500여점) 현재 이 미술관에 호퍼 작품 아카이브 포함해서 31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자료> 휘트니미술관은 1968년에 조세핀 니비슨 호퍼(1883~1968)에게 작고한 남편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2,500여 점과 작품 관련된 정보를 꼼꼼히 기록한 장부를 기증받았다. 또한 휘트니미술관은 2017년에 아서 R. 산본 호퍼 컬렉션 트러스트가 보유한 4,000여 점의 아카이브를 이어받아, 에드워드 호퍼와 관련된 독보적인 연구 자산을 확보하고 있다.

아담 와인버그 앨리스 프랫 브라운 관장

<호퍼는 어디에 가나 관찰자였다. 그만의 독보적 시각적 화법과 내면의 인상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아냈다> - 휘트니미술관 아담 와인버그 앨리스 프랫 브라운 관장(아래사진 오른쪽)

19일 호퍼전 기자간담회에서 뉴욕 휘트니 미술관이 보유한 에드워드 호퍼의 가장 중요한 회화, 유화, 판화, 드로잉 등 컬렉션 일부를 산본 호퍼 아카이브의 자료와 함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해외소장품 걸작전의 일환으로 소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면서 휘트니 미술관은 세계 최대의 에드워드 호퍼 작품과 아카이브를 소장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매체를 합쳐 3100여 점을 보유하고 있고 또 휘트니가 소장하고 있는 한 작가의 작품으로 봐도 호퍼의 작품이 가장 많다고 말했다.

호퍼는 어디에서나 관찰자의 역할을 했다. 뉴욕의 고가 전차를 타거나 어두운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파리의 샌 강변을 산책하거나 메인주 오건킷의 바람 부는 해안을 거닐거나 조세핀 호퍼가 케이프코드에서 스케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호퍼는 그만의 독보적인 시각적 화법과 내면의 인상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금번 전시는 호퍼가 뉴욕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부터 확장을 해서 그가 방문했던 장소들 중 그의 작품에 대한 접근 방식에 영감을 주었던 의미 있고 중요한 장소들을 따라가게 된다. 그중에는 파리, 뉴잉글랜드, 케이프코드 등이 있다라면서 호퍼는 어디에서나 관찰자의 역할을 했다. 뉴욕의 고가 전차를 타거나 어두운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파리의 센 강변을 산책하거나 메인주 오건킷의 바람 부는 해안을 거닐거나 조세핀 호퍼가 케이프코드에서 스케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호퍼는 그만의 독보적인 시각적 화법과 내면의 인상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출처 www.ikoreanspirit.com * 간담회 늦게 도착 이 부분 듣지 못하다

에드워드 호퍼: 미국 역사를 그림으로 쓴 화가. 인간의 깊은 내면을 도시 건물과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표정을 통해 삶을 고독한 여정의 관점에서 묘사하다. 미국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저력을 조용하게 드러내다

[호퍼전] 기자간담회 킴 코나티(Kim Conaty 경력: MoMA에서 7년간 큐레이터) 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와 이승아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간담회 시간을 착각해 늦게 도착하다 작품 119여 점 소개 7개 섹션으로 나누다. 특히 그의 초기 드로잉도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그의 부인 조세핀에 대한 회화와 자료는 1층에서 전시된다.

"위대한 예술이란 예술가의 내면의 삶을 밖으로 표현한 것으로 내면의 삶에 대한 예술가의 개인적 심상은 빚어낸다. 회화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려내는 장르다" - 에드워드 호퍼.

[전시기획의 글] 서울시립미술관(SeMA)은 해외 유수의 미술 기관과 협력하여 세계적 명화를 소개하는 ‘해외소장품 걸작전’의 일환으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Edward Hopper: From City to Coast》를 개최한다.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과 뉴욕 휘트니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작가의 첫 국내 개인전이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는 20세기 초 현대인이 마주한 일상과 정서를 독자적인 시각으로 화폭에 담아낸 대표적인 현대미술 작가이다. 시공을 초월하는 예술성을 지닌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 미술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 2020년 영국 『가디언』지는 「오늘날 우리는 모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다. 그는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의 예술가인가?」라는 기사를 게재한다. 고립, 단절, 소외의 정서가 만연한 오늘날에 1900년대 초 미국 작가인 호퍼가 재조명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대한 예술이란 예술가의 내면의 삶을 밖으로 표현한 것”1)이라는 호퍼의 말처럼, 과묵했던 그에게 그림은 세상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내는 작가만의 화법이다. 그의 시선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무관심으로 흘려버리는 평범한 것”2)에 머물고, 대상과 공간을 세심히 관찰하여 포착된 현실은 호퍼 특유의 빛과 그림자, 대담한 구도 그리고 시공간의 재구성 등을 통해 자기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호퍼의 그림은 풍경 너머 내면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모습은 우리와 닮아있다. 그것이 창문 너머 누군가의 뒷모습뿐만 아니라 마천루와 대비되는 낮은 건물의 지붕, 철로 위를 비추는 석양일지라도 말이다.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는 파리, 뉴욕, 뉴잉글랜드 일대, 케이프코드 등 작품 속에 작가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를 따라, 도시의 일상에서 자연으로 회귀를 거듭하며 예술적 지평을 넓혀간 호퍼의 65년에 이르는 화업을 돌아본다. 전시 제목 ‘길 위에서’는 호퍼가 그 장소로 향하는 길이자, 그곳에서 호퍼다운 화법을 전개하고, 각각이 이어져 독보적인 예술이 되어가는 모습, 나아가 그 길 위에서 우리가 호퍼를 조우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본 전시에서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드로잉, 판화, 유화, 수채화 등 작품과 산본 호퍼 아카이브(Sanborn Hopper Archive)의 자료 270여 점을 7개 섹션으로 나누어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충실히 조망한다. 흔히 호퍼라 하면 현대인의 고독을 다룬 작품을 떠올리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다채롭고 심오하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되어 간다는 느낌입니다.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사물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당신도 잘 알겠지요.”3)라는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여러 장소에 대한 특유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섬세한 관찰에 자신만의 기억과 상상력을 더한 화풍을 평생에 걸쳐 발전시켰다. 이번 전시가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의 작품이 여러모로 지친 우리에게 공감과 위안을 주기를 기대한다

[호퍼 연대기 자화상] 호퍼는 누구인가?

1882년 뉴욕주 나이액에서 태어난 호퍼는 그림과 문학을 즐기며 성장한다. 부모 권유로 1899년 실용미술 위주의 뉴욕일러스트레이팅학교에 진학하나, 이듬해 뉴욕예술학교로 편입하여 20세기 전반 미국 사실주의 화단을 이끈 로버트 헨라이 등의 수업을 들으며 예술가의 꿈을 이어간다. 호퍼의 삶과 궤를 함께하는 자화상과 일련의 작품들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1900년 초 학생 시절에는 얼굴과 상반신, 특히 손을 수차례 그리는데, 예술적 표현과 기술적 숙련을 위한 노력, 성공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상업 화가에서 전업 작가로 나아가는 과도기인 1910-1920년대의 자화상에서는 예술가로서의 자아 성찰적 측면이 부각된다. 극장을 가거나 야외 작업을 다니며 애용하던 중절모와 에칭프레스기가 본인의 상징물로 등장하며, 직업적 자의식이 안팎으로 영감을 얻으며 성장하는 면모가 드러난다.

이후 예술가로서 역량과 명성이 무르익은 1940년대에도 자화상과 손 그리기를 반복하여 세밀한 근육의 묘사, 명암의 사용 등에 있어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허드슨강 인근의 나이액 고향 집은 예술가의 꿈을 키우고, 문명과 자연의 대비라는 주제적 관심을 형성해 나가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자화상, 스케치, 책, 노트 등이 보이는 〈나이액 예술가의 침실〉(1905-1906년경)은 예술가로서 자아를 형성한 침실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역시 나이액의 집을 떠올리며 작업한 후기작 〈계단〉(1949)의 구도는 문명의 상징적 공간인 집에서부터 수풀이 우거진 문밖 미지의 풍경으로 시선을 이끈다. 그의 작품에서 숲은 종종 문명의 대척점으로서 해석되어 왔으며, 계단, 창문, 현관문 등의 모티프는 안과 밖을 경계 짓고 양자 간의 시선 이동을 유도하며 상상을 촉발시킨다. ** 그의 화가 초기 생계를 위한 선택한 삽화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결국 회화란 드로잉에서 그 능력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2] 파리 견학 시절


당시 미국은 문화적 역사가 없었기에 세계의 수도인 파리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래 피에로는 작가자신을 묘사한 것이지만 미국의 다른 화가들과 다르게 자유분방하거나 퇴폐적으로 놀지 않고 매우 절제된 일상을 5년 정도 보냈다. 아래 파리의 풍물들 루브르 센강 다리 등 습작으로 많이 그렸다. 인상파 등의 영향이 있어 보인다.

1906년 뉴욕에서 삽화가로 일을 시작한 호퍼는 예술가의 꿈을 안고 당대 예술의 수도로 여겨졌던 파리로 향한다. 도시화로 인해 끝없는 개발이 반복되는 뉴욕과 달리 옛 모습을 간직한 파리의 매력에 빠진 호퍼는 1906년에서 1910년 사이 3회에 걸쳐 파리에 체류한다. 그는 자율적으로 파리와 근교의 거리로 나가 자연과 건축물, 사람들을 면밀히 관찰한다

에드워드 호퍼, 보내고, 주변 유럽 도시를 여행하며 거장들의 작품을 관람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소재와 영감을 찾는 시도를 통해 호퍼의 작품은 매 방문마다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첫해인 1906년에는 여전히 스승 로버트 헨라이의 영향 아래에서 그가 지내던 침례교 교회 건물 내부와 주변 도시 풍경을 고동색과 짙은 회색 등의 어두운 색조로 표현한다. 전위적인 야수파와 큐비즘 대신 빛의 효과를 강조하는 인상주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호퍼는 1907년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야외 작업에 임한다. ‘센강과 강변-건물-하늘’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화폭은 밝은 톤, 빠른 붓 터치, 부드러운 빛을 머금기 시작하고 수평 구도를 시도하며 캔버스의 크기도 변화한다.

1909년의 작업에서는 센강변의 강둑, 루브르박물관, 다리와 같은 건축적 요소와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부각되고 사진 프레임 안에 담은 듯한 구도가 나타나 호퍼만의 화풍이 구축되기 시작했음을 느낄 수 있다. 야외 작업에 익숙해진 호퍼는 파리지앵의 일상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생동감 넘치는 파리의 풍경은 그에게 흥미로운 소재였고, 다양한 직업군,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 유행하는 옷을 입은 남녀 등을 33점의 수채화 캐리커처로 기록한다.

이후 파리의 일상에 대한 관찰과 인물 묘사는 〈비스트로 또는 와인 가게〉(1909)와 〈푸른 저녁〉(1914)에서 구체화된다. 뉴욕에서 완성된 두 작업은 실제적인 관찰에 기초한 구성에서 출발하되 기억과 상상력이 더해지며 완성되는 호퍼의 리얼리즘적 특성이 본격화되는 초기 사례로서 중요하다. 그중 〈푸른 저녁〉은 파리의 카페를 배경으로 왼쪽의 노동자, 중앙의 광대와 매춘부 그리고 담배 피우는 예술가, 오른편의 부르주아 남녀 등 다양한 인물 군상을 보여준다. 마지막 파리 방문 이후 4년이 지나 뉴욕에서 그린 이 작업은 인물들의 단절적 관계와 심리적 풍경묘사라는 그의 성숙기 회화의 속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1915년 뉴욕 맥도웰클럽 출품 시 혹평을 받았다. 미국 내에서 독자적인 미술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파리가 아닌 뉴욕의 풍경을 원하는 분위기가 커졌기 때문이다. 세 번의 유럽 방문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뉴욕에 정착한 호퍼는 이를 계기로 미국적 풍경을 담기 위한 시도를 거듭한다

**호퍼의 작품은 사실주의임에도 관객에게 많은 호기심 불러일으키고 수수께끼도 던진다. 그림에 비밀스러운 측면이 많다. 그렇게 해서 그의 작품은 관객을 자신의 작품 들어와 같이 이야기하도록 유도한다. 쌍방소통적 회화라고 할까. 물론 그림에 대한 그 어떤 해답도 없다. 그래서 때로 영원한 미스터리로 끝난다. 프랑스의 인상주의나 독일의 표현주의에서 볼 수 없는 양상이다.

[3] 뉴욕 시기
이 시기에는 그의 주요 무대는 바로 뉴욕의 미술가 뉴욕대학과 같이 붙어 있는 워싱턴 스퀘어다. 백남준의 아파트가 있는 소호 거리에서 아주 가깝다. 70년대 여기가 히피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했다 뉴욕에 가 보신 분들 알겠지만 가장 표현의 자유에서 가장 많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ZONE다 호퍼는 여기에 작업실이 있었다. 호퍼는 영화(연극)에 자주 보는 편이었고 그의 회화를 보면 마치 영화 장면 같은 걸 흔히 볼 수 있는데 그런 영향인 것 같다.

에칭을 시작한 뒤부터 내 그림은 구체화되어 가는 듯했다.”4) 생계를 위해 선택한 삽화가로서의 현실 속에서 예술가의 꿈을 놓지 않았던 호퍼는 선이 강조되는 판화 기법 에칭을 1915년 시도한다. 그는 1916년 에칭프레스를 구입한 뒤로 1928년까지 당대 뉴욕의 면면을 담은 약 70점의 판화를 제작한다. 그의 에칭은 뉴욕의

주택가와 고층 건물, 북적이는 번화가의 풍경을 생생하고 거친 선으로 표현하고, 지하철과 철도 등 교통체계의 발달을 포착하며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도시 개발이 본격화되던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한다. 한편 도시를 밝히는 불빛과 텅 빈 거리, 실내의 인물 역시 에칭의 주된 주제였으며, 이러한 작업은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연구하고 이후 회화 작업과 연결되는 주제 선정, 구도, 표현법의 초석을 마련한다. 실제로 호퍼의 에칭은 화단의 호평을 받으며, 그가 예술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뉴욕은 호퍼가 가장 잘 알고 좋아하는 미국의 도시였다. 호퍼는 1908년부터 1967년까지평생을 뉴욕에 거처했으며, 그에게 뉴욕의 풍경과 뉴요커들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관찰의 대상이자 작업의 소재가 되었다. 뉴욕에 정착하기 전까지 그는 나이액과 뉴욕을 잇는 페리와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한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 온 항해, 기차에 대한 관심은 한적한 교외에서 뉴욕으로 진입하며 변하는 풍경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심화되었고, 이는 〈페리 선착장〉(1904-1906년경)과 〈검은 굴뚝이 있는 예인선〉(1908) 등에서 두드러진다. 마천루 사이로 자리한 공원 역시 그가 즐겨 찾는 소재였다. 호퍼는 1913년 이사한 워싱턴 스퀘어 노스 3번가에서 일평생을 살며 창밖의 워싱턴 스퀘어 파크와 도시의 중심부에 자리한 센트럴 파크에 관심을 가진다. 특히 땅거미가 지는 시간대에 센트럴 파크의 셰익스피어 동상을 중심으로 많은 습작을 남기는데, 조명이 드리워지며 생기는 빛과 그림자, 어둑함이 만들어 내는 미스터리 한 분위기 등 문학적인 영감을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 뉴욕은 오늘날과 같은 ‘메트로폴리스로서의 뉴욕(Greater New York)’으로 변모하던 시기로 마천루가 형성되고, 지하철과 철도에 이어 자동차 보급이 확산되며, 다리와 고속도로가 잇따라 건설되었다.

하지만 호퍼의 관심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 풍경의 스펙터클보다 낡고 사라져 가는 19세기 건축물의 코너나 지붕 등을 포착하는 데 있었다. 더불어 마천루의 수직적 스카이라인 대신 블랙웰섬, 강변에 늘어선 아파트, 옆으로 길게 뻗은 다리의 확장성을 화폭에 담으며 당시 화가들과 차별화되는 감각을 선보인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뉴욕과 뉴잉글랜드를 오가며 시골에 남아있는 다양한 시대 양식의 건축물과 동네를 가로지르는 철도를 목격하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시점은 기차 혹은 ‘엘(El)’이라 불린 고가 전철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기를 즐겼던 호퍼의 시선을 연상케 한다. 호퍼는 사회적, 사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대도시의 풍경과 도시인의 삶을 관찰하여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 밖에서 실내를 들여다보는 관찰자적 시선은 내외부를 연결하는 장치인 ‘창문’ 모티프를 통한 도시인의 일상을 묘사한 데서 드러난다. 조세핀은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위한 습작(1941 또는 1942)에 대해 “유리창 위쪽 끝 경계를 따라 가게 안의 밝은 천장이 어두운 바깥 거리에 대비”5) 된다고 기록했다. 조명이 켜진 실내 공간은 창밖의 어둠과 대비되며 시간이 멈춘 듯한 단절적인 느낌을 준다. 한편 ‘재즈시대’라고 불리는 1920년대 호황기를 시작으로 미국인들은 극장, 레스토랑, 스포츠

등에 열광한다. 호퍼와 그의 부인 조세핀도 연극이라는 공통의 취미를 바탕으로 극장을 자주 찾곤 했다. 그는 무대를 보며 앉아 있는 인물의 뒷모습이나 공연 전후 혹은 막간 사이 인물들을 적막하고 고독한 분위기로 묘사한다. 또한 그는 팰리스(Palace), 셰리던 (Sheridan) 등 여러 극장의 아치와 원형 무대, 오케스트라석과 같은 내부의 건축적 구조물을 즐겨 그렸으며, 50여 점의 스케치를 토대로 각 장소의 구성요소를 기억과 상상에 의해 결합한 그만의 극장으로 새로이 재현한다.

[4] 길 위에서


호퍼의 미국 풍경화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인 풍경이 아닌 작가의 내면에서 새롭게 그려진다. 철길 옆에 우뚝 선 신호탑 뒤로 녹색 언덕과 함께 장관을 이루는 일몰을 묘사한 <철길의 석양>은 기차 창문 너머로 목격한 장면인 것 같지만, 실은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풍경이다. 이 작품을 완성한 1929년, 호퍼 부부는 뉴욕에서부터 찰스턴,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리고 에드워드 호퍼, 〈아파트 건물들, 이스트강〉, 1930년경 매사추세츠주와 메인주까지 함께 여행했다. 6) 여정 중 길 위에서 얻은 인상은 기억에 남아 이후 작가의 작업에 지속적인 영감이 된다

[5] 뉴잉글랜드


호퍼는 미국에서 청교도들의 첫 번째 정착지였던 뉴잉글랜드의 북동부 6개 주 중 하나인 메인주에서 몇 번의 여름을 보낸다. 1912년 호퍼는 뉴잉글랜드의 해안선을 따라 매사추세츠주 글로스터를 여행하고, 야외 작업을 시작한다. 그 후 그는 버몬트와 뉴햄프셔의 산과 농장을 지나 매사추세츠주와 메인주의 다른 해안 지역으로 돌아온다. 1914년과 1915년에 호퍼는 3마일에 이르는 모래 해안으로 둘러싸인 작은 어촌인 메인주의 오건킷7)을, 1916년부터 1919년 사이에는 메인주의 해안선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바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몬헤건섬8)을 4번 방문한다. 몬헤건섬에서 그는 소지가 간편한 작은 크기의 패널을 지니고 암석 해안을 걸어 다니며 스케치를 하거나 밑그림 없이 즉흥적인 작업을 한다.

9)이 시기의 작품은 바다와 대지 간 극명한 색조 대비, 반사된 빛과 그림자의 색채 대조,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법인 임파스토를 통해 강조되는 암석의 덩어리감, 가파른 해안 절벽과 주변의 부서지는 파도에 의해 만들어진 대담한 구성과 같은 역동성과 표현성이 배가되는 특징이 드러난다. 10) 뉴잉글랜드에서의 시간은 호퍼의 개인적인 삶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23년 여름 매사추세츠주 글로스터에서 그는 동문이자 작가인 조세핀 버스틸 니비슨과 교제를 시작했고, 1924년 결혼을 한다. 그는 조세핀의 영향으로 야외 수채화 작업을 시작했고, 곧이어 그녀의 소개로 브루클린 미술관 전시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 작업한 호퍼의 수채화는 화단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판매로까지 이어지며 전업 화가로 진입하는 본격적인 기회가 열린다. 이처럼 뉴잉글랜드 여행은 그에게 도시와 다른 환경을 접하여 영감을 얻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계기가 된다.

[6] 케이프 코드


호퍼 부부는 1925년 기차로 미국을 횡단하고, 1927년 중고 자동차를 구입한 뒤로 미국 서부, 멕시코 등을 평생에 걸쳐 여행한다. 호퍼의 오랜 지인이자 뉴욕 휘트니미술관의 관장이었던 로이드 구드리치는 “여행에 대한 호퍼의 몰두는 꽤 의식적이었다. 호퍼는 운전할 때 그림 주제들이 떠오른다고 말했다”11)고 회상한다. 부부의 여행은 당시 본격화된 자동차의 보급과 도로의 확장으로 인해 용이했고 도시화, 대공황 등 사회경제적 문제로부터의 일시적 일탈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매력에 빠진 호퍼 부부는 1930년 6월 매사추세츠주 케이프코드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트루로에 방문하여, 우체국장이었던 벌리 콥(A.B. Burleigh Cobb)에게 작은 집을 빌려 여름휴가를 보낸다. 길게 펼쳐진 해안선과 고운 모래 둔덕, 낮은 구릉 사이 띄엄띄엄 자리하는 집, 농가의 소박한 헛간, 따스한 햇볕을 즐길 수 있는 넓고 푸른 자연이 펼쳐지는 이 지역은 주민이 500명 남짓한 작은 마을로 번잡한 뉴욕에서 벗어나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해주는 완벽하게 고요한 장소였다. 12) 1934년 트루로에 스튜디오 겸 집을 마련한 뒤, 부부는 매년 여름과 초가을을 케이프코드에서 보내고 뉴욕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한다. 1930년대 말 이후 호퍼는 작업에 기억과 상상력이 결합된 이미지를 불어넣기 시작한다.

시기 작품에는 도시와 시골을 오가는 호퍼의 자전적 경험이 내면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실과 환상, 자연과 인공물의 대비를 통해 나날이 원숙해진다. 트루로 부근의 숲과 집, 해변가의 별장에 대한 호퍼의 인상은 <케이프코드 일몰>(1934),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을 탄생시킨다. 두 작품 모두 여름날 해안의 분위기를 포착하고 있지만, 빛의 극적인 잠재력과 건축과 주변 환경이 교차하는 방식에 집중한다. 조세핀의 기록에 따르면 <오전 7시>(1948)의 배경은 나이액 소재의 주류 밀매 업소다. 금주령이 해지된 지 15년 후인 1948년에 케이프코드의 트루로 스튜디오에서 완성된 작품은 시공간을 오가며 완성되는 작가의 독특한 사실주의적 특징을 보여준다. 시간대를 특정하는 작품의 제목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호퍼가 공간을 비추는 태양의 움직임과 밝기의 변화를 감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려준다

[7] 부인 조세핀


호퍼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는 주로 그의 부인 조세핀이다. /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 역시 화가였다. 1924년 부부가 된 둘은 성격 차로 다툼이 잦았다. 그럼에도 조세핀 니비슨 호퍼(1883-1968)는 1905년 뉴욕예술학교에 등록하여 로버트 헨라이의 수업을 수강하고, 1914년에는 스튜어트 데이비스, 찰스 데무스, 찰스 버치필드 등 미국 모더니스트들과 함께 그룹전을 가질 정도로 촉망받는 예술가였다. 수채화에 두각을 보이던 조세핀의 영향으로 호퍼는 1923년에 매사추세츠주 글로스터에서 함께 야외 작업을 하며 수채화를 시도한다. 그해 가을 그녀의 소개로 브루클린 미술관에 출품된 호퍼의 수채화는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채택되며 미술계의 큰 호응을 얻는다. 1924년 부부가 된 둘은 성격 차로 다툼이 잦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문학, 영화, 연극, 프랑스에 대한 애정 등의 취향을 공유하고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으며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으로 여행을 떠나 함께 야외 작업을 즐겼다. 무엇보다 조세핀은 호퍼의 훌륭한 조력자였다. 과묵한 남편과 달리 활달한 성격으로 예술 딜러, 컬렉터, 큐레이터 및 기자들과 교류하며 작품을 홍보하는 역할을 한 그녀는 호퍼의 오랜 뮤즈이기도 했다. 그녀는 1915년 극단 워싱턴 스퀘어 플레이어스(Washington Square Players)에서 활동한 경력을 살려 다양한 포즈를 남편에게 제안하였으며, 수많은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세핀은 그의 전시 이력, 작품 판매 등 상세한 정보가 적힌 장부 관리를 30년 이상 지속하는 등 매니저의 역할도 수행했으며, 남편의 사망 이후 거의 2,500여 점에 달하는 호퍼의 작품과 자료 일체를 휘트니미술관에 기증한다. 말수가 적은 편이던 호퍼가 언급하지 않았던 작품의 세부 사항들을 조세핀이 세세하게 기록한 덕분에 장부는 그의 작품 생애에 대한 핵심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8] 호퍼의 삶과 작업


뉴욕 휘트니미술관의 소장품과 산본 호퍼 아카이브가 함께 어우러진 <호퍼의 삶과 업>은 크게 여정, 삽화, 호퍼 부부, 작가의 말과 글 그리고 다큐멘터리로 나뉘어 작가의 예술과 삶의 행적을 세세히 전달한다. ‘여정’에서는 평생 유럽, 남미, 미국 전역 등을 꾸준히 여행하며 길 위에서 보낸 호퍼의 삶에 주목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첫 해외 여행지였던 파리에서 남긴 사진과 어머니에게 보낸 서신, 지도 등의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호퍼는 여행을 통해 시선을 환기하고 자연, 도시, 일상의 풍경을 자신만의 관점과 구도로 묘사하면서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간다.

‘삽화’에서는 호퍼가 화가로 본격적인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20여 년간(1906-1925) 제작해 온 각종 광고 삽화, 잡지 표지 디자인, 출판물 삽화를 소개한다. 그의 삽화가로서의 활동은 뉴욕의 도시 풍경과 뉴요커의 일상을 관찰하며 미국의 당대성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퍼 부부’에서는 부부의 사진과 함께 관람 후 모은 극장표, 그리고 4권의 장부를 선보인다. 호퍼는 평소 아이디어 개진과 작품 구상을 위해 수많은 메모와 스케치를 남겼고, 1913년 최초로 작품을 판매하면서부터 관련 정보와 판매 내역, 대여와 전시 이력 등을 아내와 함께 장부에 기록했다. 호퍼가 한 작품을 완성한 후 그는 장부에 그 작품에 대한 작은 스케치를 그려 넣었고, 조세핀은 과묵한 호퍼가 결코 말한 적 없던 작품에 대한 일화와 세부 사항 등을 상상하면서 그 작품에 대한 생생한 설명을 추가했다. 호퍼 부부의 삶과 예술 활동은 부부의 말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미국의 시각예술」(1965)과 「호퍼: 아메리칸 러브스토리」(2022)에서 살펴볼 수 있다.

--> 1, 호퍼는 미국을 안스럽게 봤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미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깊게 서려 있다 미국의 건물 하나, 상가 하나, 다리 하나, 도로 하나, 거리 하나, 물건 하나, 사람 하나, 풍경 하나 자동차 하나 다 작가의 내면 속에 예사롭지 않은 애착을 품고 있다 1882년 생 호퍼는 전혀 19세기 후반기에 태어난 사람 같지 않다. 마네처럼 항상 모던하다.

호퍼와 한 컷 찍다

2, 스산함, 쓸쓸함, 외로움, 고독감이 스민 그림은 묘하다.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대사처럼 마음을 잇는 감정의 촉매로 작동된다. 20세기 초 현대인이 마주한 일상과 정서를 섬세한 관찰과 독자적인 시각으로 화폭에 담아낸 호퍼는 미국의 국민 화가로 추앙 받고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명작은 시공을 초월한다. 21세기에 온 옛 그림이 촌스럽지 않은 이유다. -뉴시스

3, 20년간 뉴욕 휘트니 미술관 관장을 맡아온 애덤 와인버그(Adam Weinberg) [아래 상] 20231031일 계약이 만료되면 사임한다. 와인버그 옆에 킴 코너티 큐레이터, 후임으로 부관장 스콧 로스코프(Scott Rothkopf)

퐁피두 전시

4, <호퍼는 미국을 가장 정직하게 본다 인내심을 가지고 예리하게 관찰한다. 그는 미국인 지구상 가장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도시인의 외로움 그 중에서도 미국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외로움 이토록록 잘 표현하는 화가는 드물다. 그림 그림은 쉼없이 미국 시민들 내면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들이 무의식 속에 담고 있는 감정을 정말 리얼하게 솔직하게 파헤친다. 그럼에도 그런 면에 개의치 않고 삶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나간다 그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놀랍게도 그가 미국을 매우 사랑한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자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호퍼의 시선의 냉정하고 침착하다. 언제나 말이 없지만 많은 것을 그림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미국의 실패와 성공을 중립적으로 이야기 한다. 그의 위대한 점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삭막함과 허무함을 오히려 꾸미지 않고 미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는 아름다움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어두운 사실주의는 고독감을 가중시키고 지독한 권태 속에 지루함이 반복되는 일상을 그리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어떤 기대감을 낳게 한다. 그의 그림 속 주인공은 절대 서로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보는 것인가. 이 세상에 도시인의 외로움을 이토록 잘 표현하는 화가는 드물 것이다 미국은 땅이 넓은 나라라 뉴역 시카고 LA 등을 제외되지만 대부분 혹독한 고독과 고립에서 살아야 하는 나라다. 뭔 물건 하나 사려면 자동차로 몇 시간을 가야 가능한 나라다

5, 호퍼는 빛의 의미와 효과를 예민하게 관찰하고 연구한 화가다. 그의 스케치를 보면 그가 얼마나 빛에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그의 리얼리즘은 특이하다 바로 무의식의 리얼리즘이다. 그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면과 보이는 면을 동시에 표현했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 사이에 놓은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는 미국의 어둠과 밝음을 균형감 있게 그렸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 큰 공감과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미국의 막막함과 허전함 절절하게 느끼게 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의 그림을 구원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비극성과 폭력성에 그 속에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초현실주의적 요소와 로스코에서 보는 어둔 분위기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숭고미마저 느껴진다

6, <호퍼는 어디에 가나 예리한 시선을 갖춘 관찰자였다. 그만의 독보적 시각적 화법과 내면의 인상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아냈다> - 휘트니미술관 아담 와인버그 앨리스 프랫 브라운 관장(아래사진 오른쪽)

19일 호퍼전 기자간담회에서 뉴욕 휘트니 미술관이 보유한 에드워드 호퍼의 가장 중요한 회화, 유화, 판화, 드로잉 등 컬렉션 일부를 산본 호퍼 아카이브의 자료와 함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해외소장품 걸작전의 일환으로 소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면서 휘트니 미술관은 세계 최대의 에드워드 호퍼 작품과 아카이브를 소장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매체를 합쳐 3100여 점을 보유하고 있고 또 휘트니가 소장하고 있는 한 작가의 작품으로 봐도 호퍼의 작품이 가장 많다고 말했다.

금번 전시는 호퍼가 뉴욕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부터 확장을 해서 그가 방문했던 장소들 중 그의 작품에 대한 접근 방식에 영감을 주었던 의미 있고 중요한 장소들을 따라가게 된다. 그중에는 파리, 뉴잉글랜드, 케이프코드 등이 있다라면서 호퍼는 어디에서나 관찰자의 역할을 했다. 뉴욕의 고가 전차를 타거나 어두운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파리의 센 강변을 산책하거나 메인주 오건킷의 바람 부는 해안을 거닐거나 조세핀 호퍼가 케이프코드에서 스케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호퍼는 그만의 독보적인 시각적 화법과 내면의 인상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출처 www.ikoreanspirit.com * 간담회 늦게 도착 이 부분 듣지 못하다

호퍼는 어디에서나 관찰자의 역할을 했다. 뉴욕의 고가 전차를 타거나 어두운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파리의 샌 강변을 산책하거나 메인주 오건킷의 바람 부는 해안을 거닐거나 조세핀 호퍼가 케이프코드에서 스케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호퍼는 그만의 독보적인 시각적 화법과 내면의 인상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7, 호퍼 사후 모든 작품 휘트니 미술관에 기증(장부에 정리한 2,500여점) 현재 이 미술관에 호퍼 작품 아카이브 포함해서 31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자료> 휘트니미술관은 1968년에 조세핀 니비슨 호퍼(1883~1968)에게 작고한 남편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2,500여 점과 작품 관련된 정보를 꼼꼼히 기록한 장부를 기증받았다. 또한 휘트니미술관은 2017년에 아서 R. 산본 호퍼 컬렉션 트러스트가 보유한 4,000여 점의 아카이브를 이어받아, 에드워드 호퍼와 관련된 독보적인 연구 자산을 확보하고 있다.

[추신]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이면서 최고의 걸작이다. 이번에 서울에 오지는 않았다. '미국의 빛과 그림자[마국의 영예와 비참 미국의 물질적 풍성함과 정신적 공허함]'(일종의 명암법 효과를 준다)를 극명하게 매우 사실적으로(Social Realism) 그리다. 게다가 그림의 내용이 미스테리하기에 관객이 작품에 참여할 여지를 최대한 보장한다. 현대미술의 특징인 interactive 요소를 살렸다

8, 위대한 예술이란 예술가의 내면의 삶을 밖으로 표현한 것으로 내면의 삶에 대한 예술가의 개인적 심상은 빚어낸다. 회화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려내는 장르다. - 에드워드 호퍼. 아래 아카이브 전시

호퍼는 매우 실존적인 물음을 던지는 화가다. 고독, 우울, 허무, 고통, 좌절, 절망, 소외, 현존 이런 단어를 떠오르게 하는 화가다 사람을 그릴 때 영국 화가 호크니 처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