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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정보경전] 젤리스톤갤러리 2021년 4월 16일-5월 31일

<회화의 위대함을 무엇보다 몸을 그린다는 점이 아닐까? 모든 회화의 원류는 누드에서 시작한다. 특히 서양화에서는 그렇죠. 뒤샹은 '샘'에서 남성 변기라는 오브제를 통해 여성의 누드를 그렸지만 사람의 몸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드러내는 감정기제가 아닌가 싶다. 베이컨은 결국 몸을 가장 정직하게 그린 화가로 명성 높다. 정보경 작가는 사람을 혹은 사람의 몸을 가장 정직하게 그리려고 꿈꾸는 우리시대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인 화가가 아닌가 싶다>

http://www.jellystone.co.kr

 

Jellystone

젤리스톤 갤러리는 강남구 언주로 학동역 인근에 위치. 2021.04.16부터 2021.05.31까지 정보경 작가의 주변인 전시 진행.

www.jellystone.co.kr

정보경 개인전 젤리스톤갤러리 2021년 4월 16일-5월 31일 06053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133길 20 1층 02 3441 3111
http://www.jellystone.co.kr  www.youtube.com/watch?v=gxceIpS4Kx0

[전시글] 몸으로부터 최태만/미술평론가·몽상가 교차하는 시선

퀭한 눈은 슬픔을 담은 것일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그 눈은 무언가 호소하는 눈빛이거나 모델로서의 지루한 시간에 갇혀, 어쩔 수 없이 생각을 멈춰야 하는, 또는 다른 세계에 대해 상상하는 눈일 수도 있다. 하반신을 벗은 채 두 팔을 무릎에 올려 구부린 상체는 중력을 잃은 듯 화면 위에 부유하고 있다. 흘러내린 물감의 흔적을 제외하면 배경은 거의 텅 비어있다. 그래서일까. 검은 긴 머리에 싸인 얼굴은, 허리를 숙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면 전체로 돌출하며 보는 나의 시선을 끈다. 유달리 큰 눈, 맑은 흰자위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있는 듯하다. 빠르고 활달하기 때문에 거친 붓질은 이 인물을 재현이 아닌 표현의 영역으로, 더 나아가 감각이 살아있는 신체로 만들고 있다. 덜 그린 듯한, 즉 재현과 묘사를 포기한 순간 화면에서 신체는 대상이자 주체로 새로운 시간을 가진다. 그래서 내가 보는 것은 잘 재현된 인물의 외양이 아니라 작가의 감각이 살아 꿈틀거리는 붓질과 색채의 율동이자 활력이다. 그런데 그 눈을 슬픔이나 두려움으로 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는 눈의 타성에 젖은 습관 탓일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보기를 원하기 때문일까. 그것은 그려진 대상을 나의 망막과 시신경으로 보았지만, 나의 마음이 반응한 결과이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추론과 해석은 대상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라기보다 대상을 타자화한 것이므로 나는 그려진 대상을 평형선 위에서 관찰하는 존재가 된다.

관찰자로서 나는 그(그림)를 본다. 그렇다면 그림은, 그려진 대상은 단지 보여지는 존재일까. 나의 시선은 이 인물의 표정과 눈동자로부터 고양이의 눈으로 이동한다. 고양이는 그림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짐짓 의미를 추적하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관찰자의 신체가 고양이의 응시에 의해 전면적으로 노출된 셈이다. 동물의 행동심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지만 들킨 마음을 숨길 수 없다. 그렇다고 화면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또 하나의 관찰자인 고양이의 존재를 무시할 수도 없다. 그림 속 인물의 퀭한 눈을 유심히 바라보다 문득 고양이의 눈에 의해 포획당한 나를 발견하면서 나의 보는 행위는 역전된다. 내가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주체의 비틀거림, 현기증과도 같은 관계의 역전, 나는 보는 존재이자 보여지는 존재가 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사실 본다는 것과 보인다는 것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수하게 많은 철학자들이 다루었기 때문에 새롭지 않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말과 사물』의 제1장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나타나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관계를 해석하는데 할애했다. 사르트르 역시 『존재와 무』에서 보는 주체는 전면적으로 보여지는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열쇠 구멍을 통해 실내를 훔쳐보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흠칫 놀라는 예를 통해 설명하였다. 사르트르의 이원론을 비판한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에 이르게 되면 이 둘의 관계는 세계와 살(flesh)의 문제로 발전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은 시선과 응시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논증하기 위해 홀바인의 <대사들>을 가져왔다. 이 글이 이들의 이론에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그것에 근거하여 정보경의 작품을 해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신체, 봄과 보여짐, 보는 방법에 대해서는 앞의 이론과 함께 들뢰즈(Gilles Deleuze)의 『감각의 논리』를 떠올렸음을 밝혀둔다.

다시 정보경의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어깨에 겉옷만 걸친 채 드러난 신체, 당당하게 벌린 두 다리,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이 모델(일반인)은 작가를 위해 이른 아침에 서울에서 춘천의 작업실까지 기꺼이 택시를 타고 왔다가 한밤중에 다시 택시로 돌아갔다고 한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발가벗도록 만들었을까. 신체는 가려야 한다. 남과 다른 의상으로 가릴 때 나의 존재는 특별한 것이 된다. 의복에 의해 나의 몸은 은폐된다. 옷은 가면처럼 나를 위장하고 나의 살의 감각 또한 세계와의 접촉을 차단당한다. 부끄러움과 함께 예의범절, 교양, 품위, 사회적 위신은 살의 노출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내 몸을 사회적 존재로만 드러내도록 한다. 살은 욕망이 거주하는 공간이라기보다 지방이란 물질과 욕망이 만나는 표면이다. 이 당당하게 벗은 육체에서 나는 성적 욕망이나 유혹이 아니라, 그것이 작가 자신이든 모델이든 작품을 보는 우리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본다. 캔버스에 칠해진 물감은 살을 육화할 수 없다. 내가 보는 것은 그 물감을 바른 붓의 흔적이다. 표면 위에 미끄러지듯 빠르게 지나간 붓의 길은 작가의 호흡이 손을 통해 지나간 자국이며 대상과의 감정이입보다 거리를 두고 대상의 특징을 포획하려는 작가의 눈이 지나간 길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냉정함은 그 어떤 서사의 개입도 저지하는 배경, 비어있는 공간에서 정체를 드러낸다. 고양이처럼 더러 작업실의 식물이나 해골 같은 소품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인물은 사건이 부재한 공간 속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대상에 대한 어떤 추억도 틈입할 수 없는 이 부재의 공간 때문에 주체이자 객체인 몸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감정을 파악하기 어려운 표정과 정지된 행동은 배경과 함께 신체를 객관화한다. 이 드러난 신체를 통해 불현듯 나는 나의 눈임을 확인한다. 눈은 세계로 향해 열린 내 몸이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대상의 눈이 나를 본다. 그것은 교차하는 시선이다.

냉정한 시선

한껏 멋 부린 그는 다소곳하게 의자에 앉아있다. 챙이 넓은 모자와 여러 겹으로 두른 목걸이, 화사한 꽃무늬가 있는 상의를 입은 그가 나(우리)를 본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그는 분명히 인상적인 용모를 지니고 있다. 춘천에서 앤티크 샵을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인 그는 어느 날 (어쩌다) 모델이 되었다. 정보경의 작품에서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는 그는 최초의 자기 모습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고전주의 회화에서 봤던 우아하고 품위 있는 초상화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이미 그는 작업실의 난폭하게 그려진 많은 인물화를 봤을 테니까 꼭 그렇진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림 속의 자기를 부정했던 그가 다시 모델이 되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매혹시킨 것일까. 정보경의 거친 붓질이 지닌 ‘낯선 솔직함’ 때문일까. 녹색 모자와 녹색 상의, 녹색 장화를 신고 녹색 소파에 앉아있는 그도 비슷한 경우이다. 음악 전공자인 그는 마트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면서도 자신에 대해 감출 것이 없는 당당한 사람이다. 정보경은 가까운 친구는 물론 SNS에서 만난 중년 남성, 자신의 조수, 작품사진을 촬영하던 사진작가, 큐레이터, 헤어 디자이너 등을 모델로 섭외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작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기꺼이 모델이 되었다. 이들은 전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작가의 주변인들이다. 물론 작가의 아들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엄마 앞에서 옷을 벗어야 했을 것이다.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이들은 모두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작가는 이들의 삶에 바치는 존경과 예찬으로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최초의 자기 모습을 부정했던 앤티크 샵 대표의 생각이다. 자기가 알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재현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사실 닮음에의 기대는 회화를 유사성의 감옥에 가두는 문제가 있다. 반대로 충실한 재현이 일으킨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일본 근대기에 다카하시 유이치(高橋由一)란 화가가 일본의 고급 게이샤인 오이란(花魁)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을 때 정작 그 주인공은 그 그림을 보고 자기와 닮지 않았다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우키요에의 양식이나 방법으로 그려진 미인도에 익숙한 그에게 사실적인 묘사에 충실한 유화는 분명 낯설었을 것이다. 자신의 외양을 충실하게 재현했지만 유화란 재료로 그린 그 사실적 묘사가 너무도 낯설었기 때문에 모델은 그림 속의 인물이 자신이란 것을 부정했다. 그림 속의 이미지가 실재가 아님에도 우리는 재현이 걸어놓은 최면과도 같은 마술의 덫에 갇혀 그것을 실재라고 믿는다. 그런데 앤티크 샵 대표의 부정은 그를 거듭 작업실로 이끌었다. 이제 그는 마술에서 풀려난 것일까. 아니다. 그는 정보경의 특이한 그림에 다시 한번 사로잡혔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자기 혹은 자기 속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한다. 눈에서 손으로 거침없이 발사되는 작가의 표현방식에는 ‘날 것의 싱싱함’이 있다. 여기에서 작가가 모델을 통해 감정을 표현할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몸이 그린다. 그 즉각성과 직접성은 정보경의 작품이 지닌 매력이자 힘이며 다른 인물화와 구별되는 근거이다. 이 찰나적 포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냉정한 시선이다. 형이상학적 언술이 거주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형상’, 화면 위에서 펄떡이는 붓질과 색채, 군데군데 그대로 노출된 밑그림의 선들, 흘러내린 물감의 흔적은 이 작품이 감각의 결과임을 드러낸다. (아마도) 모델을 했던 그는 자신을 더 그럴듯하게 그려달라는 기대가 아니라 감각이 만들어내는 생경함이 지닌 ‘날 것의 싱싱함’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것이다.

다시 몸으로부터, 나는 나의 몸이다.

정보경은 어떻게 이런 인물화를 그리게 되었을까. 그에 따르면 외할머니의 임종을 겪으며 어린 시절부터 보았던 외가의 그늘진 삶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이 동기는 청년시절의 피카소가 청색시대와 장미시대에 그렸던 숱한 인물들인 거지, 매춘부, 부랑아, 곡예사 같은 사회로부터 뿌리 뽑힌 존재들의 소외에 대한 감상적 시선과도 같은 결과로 발전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청빈을 미덕으로 여기는 박애주의와 눈물 짜는 감상주의에 함몰하지 않았다. 그림 속에 고통, 절망, 환희와 같은 감정의 서사를 표현하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길은 아니었다. 그의 그림에는 6세의 소녀도 모델로 등장하는데 의사인 그의 아버지의 초상도 그렸다. 그런데 작가는 어느 날 ‘문득’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실제로 그의 작업실에서 다른 작품과 다소 결이 다른 인물화를 본 기억이 난다. 가운을 입고 한 손에 해골을 들고 있는 그 인물은 자신의 신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냉담한 듯, 진지한 듯 혹은 모델로서 심리적 부담으로 경직된 듯한 표정은 (뜻밖에도) 구상회화의 어법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 정보경의 인물화에서 특징적인 ‘날 것의 싱싱함’을 결여하고 있었다.

선택과 결정은 단호해야 한다. 묘사를 포기하면서 감정을 대신하여 감각이 전진한다. 내 몸이 타자의 몸을 그린다. 내 몸은 눈이고, 손이며, 신경이다. 눈으로부터 손으로 직진하는 감각은 형상을 묘사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 화면을 생동하게 만든다. 그려진 대상은 재현된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느낀 주체이다. 때로 화면 속에 단독자로 덩그러니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 전사(戰士)처럼 당당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벗은 몸은 옆에 놓인 화분 속의 예리한 잎을 지닌 식물과도 같은 ‘전투적 생명력’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들은 행동이 아니라 눈으로 말한다. 나는 나의 몸이다. 물론 이 문장은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에서 빌려 온 것이지만 정보경의 작품에서 나는 ‘문득’ 주체로서의 몸을 깨닫는다. 몸은 보이는 대상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자 나의 얼굴이고

나를 구성하는 세포이자 살이며, 뉴런이자 자아정체성 그 자체이다. 동시대 미술에서도 포스트 휴먼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만큼 몸이 자아정체성의 표지(標識)라고 말하면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그러나 정보경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나의 몸이다란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