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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백해영갤러리] 2인전 '김강용&권오봉' 1월 27일

 백해영갤러리(용산구 이태원로 27길 77) 이인전 김강용 권오봉 <선과 면의 우연한 만남> 2021년 1월 13일부터 1월 27일 월요일-금요일 9AM–6PM (사전 예약으로 진행) 백해영갤러리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27길 77(이태원동) 02-796-9347 * 전시문의 02-796-9347, 010-9283-4646 paikhy@paikhygallery.com www.paikhaeyounggallery.com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위치한 백해영갤러리에서 2021년 1월 13일부터 1월 27일까지 김강용 권오봉의 전시 <선과 면의 우연한 만남>이 열린다. 김강용 작가는 70년대부터 모래를 회화의 재료로 사용하여 벽돌을 극사실주의적 기법으로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벽돌의 그림자를 그려왔는데 이러한 작업은 무한 반복과 단순함 속에서 수행과도 같은 성실함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백해영갤러리

한국의 하이퍼리얼리즘의 중심에 있던 작가는 2000년대 이후 벽돌의 재현이 극사실을 넘어서 추상적인 형상으로 탈바꿈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벽돌을 넘어서 무한한 변형과 본질적 잠재성을 표현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결국 그에겐 벽돌은 단순한 사물이 아닌 그림이란 뭔지, 화가는 무엇을 왜 그려야하는지 그러한 질문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권오봉] <내면의 격정이 담긴 파동의 회화>

“그의 미술은 급소를 정확히 찌를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누구나의 머릿속에 있지만, 아무도 감히 보려 하지 않는 그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 미술이다.” 기억일 수도 몽상일 수도 있는 장면을 거침없이 그려내는 권오봉은 미술 특유의 힘을 믿고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는 작가다. 대구 출신의 작가는 변두리에 터를 마련한 후, 몇십 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자기 내면의 모서리와 유머 그리고 승화된 욕망에 대한 가시 돋친 여행을 선보인다. 시골의 쉬이지는 태양, 지극히 현실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작가는 오로지 그리는 것에 집중하며 보는 이의 심장에 린치를 가한다. -퍼블릭 아트 정일주 편집장

작가 권오봉은 1954년 대구 출생으로 17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미술의 무한한 가능성과 그 심연의 깊이를 탐구한다.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 음악이다. 20세기 현대 미술은 무엇보다 음악이어야 한다. 음악으로 그리는 미술이다. 추상화는 더욱 그렇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다 보면 추상이 될 수밖에 없다. 서양화가 중 칸딘스키의 발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양의 오래전부터 추상적 요소가 많다. 생략의 기법도 즐겨 사용한다. 산수화에 사람은 보이지 않게 그렸다. 그만큼 그림을 보는 이에게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의 회화의 추상적 요소가 강한 것은 그의 그림을 악보와 같다. 그 속에 신비한 기호가 숨겨져 있고 말할 수 없는 격정이 담긴 파동과 시공간을 초월하는 리듬감이 그득하다. 거기에 숨소리의 들려오고 그것이 우주순환의 원리를 닮았다 천지인의 소통을 촉진한다.

지나온 삶의 흔적을 남기려 하는 것인가 뭔가 작가의 숨겨진 심경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손으로 잡을 수는 없다. 그것이 매우 비밀스럽고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가의 붓질은 자유분방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감정의 기억을 오래 두고 그릴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회화의 기법에서 막힘이 없다. 마치 무희가 제 마음껏 현대댄스를 추는 것 같다.

반면 그는 역시 동아시아 미술의 근간이 되는 서예라는 전통예술의 요소가 놓칠 수 없다. 한 획에 담긴 먹의 농담 효과는 매우 효과적으로 살린다. 한 번의 붓질로 사물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이런 서예 정신을 현대회화로 다시 풀어낸다. 전통과 현대가 신묘하게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청자에 비유하면 활력이 넘치는 분청사기(粉靑沙器) 같다. 흑회색 은은함 멋이 살아 있다. 작가는 체질적으로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선호하는 것인가. 틀에 얽매이지 않는 무늬처럼 오 작가의 회화도 그렇다. 그것이 그를 더 자유롭게 하는 모양이다. 그림에 고양된 정신세계를 불어넣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문명에서 벗어난 원시적인 몸이 들어간다. 여기서 몸은 마음이기도 하다. 정신세계와 마음세계는 좀 다르다. 정신이 관념으로 빠지기 쉽다면 마음은 몸이 될 수 있기에 더욱 빛난다.

그의 회화는 프랑스의 설치작가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와 하얀 캔버스 위에 드라마틱한 순간을 전하는 독특한 회화 언어를 구사한 미국의 낙서화가 '사이 톰블리'를 연상시킨다. 나는 그의 회화는 <무미술>이라고 부른다. 작위성이 배제된 무위미술이다. 마이너스가 플러스가 되는 미술이다.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추상이든 구상이든 그림이 되는 것이다. 40년간 그의 작업을 그림이 되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이다. 그림은 그 누구도 규정할 수 없다. 스스로 만들어간다. 피카소 풍이 있고, 잭슨 폴록 풍이 있고, 라우센버그 풍이 있듯이 작가의 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무상의 노력으로 40년간 진행 중이다.

그의 작품은 생성 중이다. 완성된 것은 없다. 그의 원초적 몸짓으로 선사시대의 그림의 원형을 찾아가려 한다. 무심한 낙서 같은 그의 붓질은 자신을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이다. 삶이라는 하나의 여행이다. 그는 그림을 통해서 전 세계를 여행한다. 작가는 현대 미술가답게 작가의 심정을 개입시키는 것을 절제한다. 지성을 담으려고 한다. 거침없이 뻗어가는 선의 에너지는 동양회화의 정신인 기운생동으로 치닫는다. 그는 때로 오브제와 설치를 혼합한 형석의 모던한 미술에도 도전한다.

그의 미술은 무엇보다 음악이지만 부수적으로 몸이 따라오고 다시 말해 퍼포먼스가 녹아 들어가 있다. 그렇지만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회화의 정신 즉 새 생명의 잉태한다. 아무도 그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우주 만물 속에 숨겨진 비밀코드를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캔버스라는 소우주 속에 담는 것이다. 80년대 말부터 그의 회화는 더욱더 자유롭고 거침이 없는 심경을 드러낸다. 사이 톰블리의 극점을 보인다. 매우 매혹적인 회화.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 회귀하는 면모를 보인다. 어떤 선순환의 카테고리로 돌아온 것이다. 일종의 귀향이다. 그러나 업그레이드된 귀향이다. 이 시기에는 더욱 광풍이 분다. 거친 폭포도 보인다. 뭔가 쏟아지는 그림이다. 그의 회화의 매력은 무한한 가능성의 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2021.01.8

권오봉 작가는 낙서 회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선은 무의식에서 표출된 자유로운 선의 표현으로 유희에 가깝다. 어린아이의 낙서와 같기도하고 춤추듯 리드미컬한 에너지가 표현된 작품은 보는 사람 따라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의 작업은 한국 도자의 분청 기법이 떠오르기도하는데 선을 긋고 다시 지우고 긁어내는 방식을 통하여 완성이 된다. 수십년동안 선과 면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두 작가의 작품을 통하여 회화의 범주안에서 다양성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김강용] <극사실회화가 첨단현대추상 되다>

작가 김강용은 1950년 정읍 출신으로 반세기 극사실회화에 깊이 빠져 작업해왔다. 초기 잠시 구상을 하고 50년간 극사실주의 그림을 했는데 결국은 구상화가 아니라 포스트모던하고 미니멀한 추상화가 되다. 참 묘한 역설이다. 그의 작품 경향은 광역의 단색화에 속한다. 나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요약해 본다. 그의 회화 세계가 구상이냐 추상이냐? 라기보다는 그의 회화가 그림이 되어야 하는데 마침내 그런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그의 회화는 추상과 구상을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림에서 경계가 없어졌고 그야말로 그림이 되고 현대 미술이 되었다. 물론 페인팅으로 말이다.

김 화백은 1970년대 중반에 모래 회화를 도전하다. 재료의 차별성으로 회화의 무궁한 가능성을 열었다. 그의 그림은 건축을 닮았다. 그의 모든 그림은 모래로 그리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연이 만든 특히 바다의 파도가 만든 점 즉 모래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 강릉에서 모래를 가져다가 모래로 그리는 벽돌 회화로 만든다. 손으로 하는 그의 작업은 하나의 퍼포먼스다. 마치 미친 광화사처럼 작업하는 면모를 보인다.

미술의 정신은 변형(TRANSFORMATION)에 있다. 그의 모래가 갑자기 꽃으로 보인다.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는 보이지 않는 음악을 미술로 그리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점선면 기호가 들어가고 결국에는 음악의 미술인 추상화를 발명한다. 물론 거기에 괴테의 색채론을 응용한 색채를 추가시켰다. 김 화백은 그런 보이지 않은 인간의 정신을 자연의 육체인 점 다시 말해 모래로 그려낸다. 결국,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 그렸다기보다는 아상블라주에 가깝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적으로 극사실 구상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추상화가 되었다.

김 화백은 자신을 벽돌을 그린 것이 아니고 벽돌의 그림자 즉 실루엣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림의 본질에 추구한 셈이다. 눈속임(trompe-l'oeil)이라고 결국은 착란의 미학이다. 이수균 평론가는 그는 벽돌을 그림으로써 김강용의 벽돌은 실재 벽돌의 ‘리얼리티’를 품고 있지만, 벽돌의 재현이나 그림자로서의 이미지가 아닌 추상적 존재로 탈바꿈시켰다고 평했다.

그는 물방울로 바위를 뚫듯 그런 창작 태도로 작업을 한다. 그의 단순한 패턴 속에는 지루하고 단순하게 보일 정도로 유사한 벽돌의 형상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속에 무한한 변주가 일어난다. 많은 변화를 내포한다. 그 속에 창조적 파격을 숨겨져 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사물이 주는 환상적 황홀 세계에 도취하게 만든다. 그것은 결국 화담 서경덕이 말하는 '격물치지'의 세계의 현대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의 벽돌은 이수균 평론가의 말대로 진실과 허구의 구별이 모호한 시대에 그의 회화 한편에는 왠지 슬퍼 보이는 것과 함께, 따사로운 인간의 정이 부드럽게 연민의 미소가 띠고 있다. 무미건조해 보이는 모래 차갑고 딱딱한 물질이 하나의 그리움 같은 진짜 그림이 되는 것은 50년간 작가의 각고의 수행과 구도의 결과물로 보인다. 2021.01.10

백해영 갤리러 2층 레지던스와 작가의 방 휴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