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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허진(許塡)'전] '광화문아트포럼 2020올해작가상'

[허진] 동덕아트갤러리(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68 동덕빌딩 B1) Tel. 02).732.6458 인간과 자연의 화해
+허진(HURJIN) painting 2020_1223 2020_1228 <작성중> www.gallerydongduk.com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2020-1, 162×130㎝(each), 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 2020

포스트휴먼 시대에 콘텐츠는 어디에 있는가

[1] 포스트 휴먼의 시대에 회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허진의 모색은 회고적으로 보인다. 회화의 기원부터 동시대적 삶까지 두루 살피려는 자세는 아주 성실하다. 그 배경에는 전통적인 관계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이상에 대한 욕망이 그것이다. 동아시아 전통회화미학이 견지해온 태도를 그는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들이닥친 디지털 문명에 대한 고려는 전통회화가 아직 들어서지 못했다. 그 어중간한 사이 어딘가에서 그는 회화미학을 고민한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혹은 그것은 어떻게 그리고 왜 시작되었는가? 이러한 물음이 의문으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미술의 역사와 윤리에 대한 회의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이미 유효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전통적인 회화미학을 통하여 삶에 대한 감각적 호소를 촉발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과연 어느 정도 성공적일까? 여기서 한 명의 예술가는 단순히 제작자 혹은 생산자일 뿐만 아니라 개인으로 남으려고 노력한다. 오, 불완전한 모나드!

유목동물+인간-문명 2020-10, 130.5×97㎝, 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 2020

[2] 그런데 허진은 '익명'을 그렸다. 인간이 익명이라는 것이다. 대지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사물들은 서로 뒤엉켜 있다. 수묵과 채색이 한 화면에 어우러져 조형성을 획득한다. 자연은 존재이면서 미학적으로는 산수이고 윤리적으로는 이상이다. 여기에서 어긋나는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사물들에 의한 은유는 아주 사소해 보인다. 그 사물을 선택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대부분의 미술작품들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식이 필수적이다. 작가의 텍스트가 항상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그것은 언제든지 개폐가 가능하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성립시키는 사적 소유에 반대하는 듯이 보이는 텍스트의 제스처조차 빨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조형적으로 수묵과 채색이 조화된 세계는 현실적 삶의 부조화를 극복하고 이상적인 상태를 갈망한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여기서 파악된 현실의 갈등 요소들이 여전히 유효한가, 혹은 클리셰는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2018-2, 162×130㎝(each), 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 2018

[3]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적이다. 개념은 본질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감성의 윤리에로 이행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개념은 현상에서 얼어붙거나 허물어져 내리기도 한다. 물론 오해와 오류가 모두 무용한 것은 아니다. 스며들거나 녹지 못한, 망각될 수 없는 것들이 '그저 그런' 흔적으로 남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익명의 상태를 인간의 조건으로 바라보면서도 조화를 모색하는 것이 허진의 회화세계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이 '유목'이었다. 한때 철학적 개념으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이제는 거의 철지난 용어가 여전히 삶의 태도이자 미학적 명제로 그에게 작동한다.

[4] 야생적 삶에 대한 동경과 조형적 안정성은 작가의 모순적 펀더멘틀이다. 그의 사회적 산물로서 미술작품은 다시 삶과 사회에 대한 처세의 텍스트로 작동한다. 텍스트는 원래 직물을 뜻하다가 한 필의 천이 씨실과 날실의 교착으로 짜인다는 의미에서 다양한 요소가 착종된 것을 함의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은 선행 텍스트와 동시대의 텍스트를 인용한 직물이고 여러 계열과 통합이 가로지르는 교착이다. 또 생산자와 소비자의 텍스트를 통한 상호작용은 그 자신이 이미 여러 텍스트가 뒤섞인 존재인 소비자가 참여함으로써 의미들이 지속적으로 밀려나며 창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 회화가 한 시대를 이해하는 창문 혹은 거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감동을(그리고 동시에 아련한 연민도) 준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허진의 회화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