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박물관] 특별전,<광복80-합合> 3부작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2025 경기도박물관 특별전, <광복80-합合> 3부작-Ⅰ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작성중>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관장 이동국)은 독립완성과 통일성취를 위한 〈광복80–합合〉 특별전 3부작을 연중 개최한다.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04.11~06.29), 《여운형 : 남북통일의 길》 (07.17~10.26), 《오세창 : 문화보국》 (11.27~'26.03.08)이 그것이다.
오는 4월 11일에 시작하는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는 그 첫 번째 시리즈로 김가진의 시문(詩文)과 글씨, 사진, 그림을 중심으로 충절가문, 독립전쟁에 투신한 동시대와 후대 인물들의 작품 120여 점이 종횡, 대각으로 그물망처럼 엮었다. 종축으로 김상용 등 충절혈맥을 필두로 횡축으로 동시대 인물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과 같은 개화파들, 흥선대원군, 고종, 명성황후, 의친왕 이강과 같은 황실 인사, 조병세, 민영환, 이준, 이상설, 최익현, 이만도, 황현 등의 절의파가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로(國老)로서 김가진은 김의한, 정정화, 김자동이 대를 이어 신규식, 이동령, 여운형, 조성환, 이승만, 이시영, 조소앙, 김좌진 등과 독립을 화두로 정신과 피를 통하고 있었다. 예술에 있어서도 김가진은 서화협회 고문으로서 오세창, 안중식, 정학교 등과 불가분의 관계다. 그야말로 정치와 예술의 모든 길이 김가진으로 사통팔달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엮는 정신 줄은 다름 아닌 마음 그림, 즉 심화(心畫)로서 '서(書)'라고 하는 언어다.
이런 맥락에서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 충절혈맥忠節血脈, 개화선각開化先覺으로 △ 대한제국대신大韓帝國大臣 △ 예술과 정치의 일치政藝一致 △ 임정국로臨政國老 등 4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주요작품은 △ 겸재 정선이 그린 〈백운동도白雲洞圖〉 △ 김윤식, 김옥균, 김가진, 서재필 등 개화파들의 합작 〈시축詩軸〉 △ 김가진이 만든 〈주일공사관 외교서신 암호규칙 초고와 완성본〉, 그리고 〈암호 편지〉 △ 명성왕후가 영의정 심순택에게 휘호한 〈옥골빙심玉骨氷心〉과 김가진이 쓴 〈이병직 묘표〉 △ 김가진이 휘호한 〈독립문〉 〈獨立門〉 현판 △ 일본 화가 덴카이(田慶)가 유화(油畫)로 그린 〈김가진 초상〉 △ 을사늑약 때 자결한 민영환을 추모하는 〈김가진의 만장輓章〉 △ '수죽향(水竹鄕)' 건설을 노래한 자작 행서 〈칠언시(七言詩) △ 김가진이 직접 짓고 쓴 〈대동단大同團 선언서〉 △ 김구가 김의한에게 써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시〉 등이다.
이번 전시는 김가진과 후손들의 다양한 관계 인물망을 통해 개인 → 가족 → 대한민국의 역사가 독립과 통일로 하나 됨을 실증하고 있다.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 →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개화선각자와 혁신관료로 일이관지(一以貫之) 해낸 김가진이 청(淸)과 일(日)로부터 독립(獨立)이라는 2가지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갔는지를 보면 광복80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도 자각한다. 특히 복벽주의가 아니라 민주공화주의자로 일생의 마지막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백의종군하여 독립전쟁 현장에 투신하는 김가진의 정예일치의 철학과 실천은 광복 80년 우리 앞에 놓여 진 남북통일 과제 해결의 등불이 된다.
본 전시는 경기도박물관과 동농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하고 광복회 후원으로 진행된다. 전시관련 부대행사로는 오는 4월 25일에 前문화재청장 유홍준의 석학특강이, 5월에는 경기도박물관과 아트인컬쳐가 함께하는 경기도박물관대학이 '광복80, 한국미술80'을 주제로 개최될 예정이다. 더불어 '대동단과 김가진의 정예일치의 삶'과 '신흥문관학교 뿌리와 대종교'를 주제로 두 차례의 학술포럼과 '대한제국과 세계열강'을 주제로 한 영화 상영도 함께한다. / 본 특별전은 유료(4,000원, 경기도민은 50%)로 운영되며 자세한 사항은 경기도박물관 누리집(musenet.ggcf.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광복80-합合〉특별전 3부작 - 김가진, 여운형, 오세창
○ 전시 목적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관장 이동국)은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합合”을 모토로 독립(獨立)완성과 통일(統一)성취의 미래를 역사에서 찾는 3부작 특별전을 연중 개최한다. 대한민국은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출범, 1910년 한일강제병합, 1919년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945년 광복과 1950년 6.25전쟁, 그리고 남북분단으로 2025년 오늘날까지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때 ‘광복80-합合’특별전 3부작은 역사 변곡점의 중심인물인 김가진, 여운형, 오세창의 정예일치의 삶을 거시적(巨視的)인 역사 맥락에서 되새김질하여 남북통일의 미래를 설계해 내는 데 목적이 있다.
- 제1부 《김가진,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4.11~6.29)
제1부 《김가진,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4.11~6.29)은 대한제국의 대신(大臣)이자 한일강제병합 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임정’이라 함)에 망명하여 독립전쟁에 투신한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의 정치와 예술의 일체된 삶을 종횡하며 입체적으로 조명하였다.
- 제2부 《여운형, 남북통일의 길》(7.17~10.26)
계몽운동가, 임정(臨政)외무차장과 중국국민당에서 반제국주의 운동, 광복이후 좌우합작을 통한 남북통일을 주도하다 암살된 혁명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선지적인 융화주의(融和主義) 정치철학과 행동을 정치 언론 체육 문화를 키워드로 조명한다.
- 제3부 《오세창, 문화보국》(11.27 ~ 2026. 3.8)
3.1혁명의 민족대표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문화독립운동을 서화사연구, 서화감식비평과 콜렉션, 서예전각으로 조명한다. 여기에는 〈근묵(槿墨)〉 〈근역인수(槿域印藪)〉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畵彙)〉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등 위창편집 유물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이와 함께 오세창과 동시대 활동한 서화미술 작가의 작품으로 동서(東西)를 넘어선 한국현대미술의 내일까지 살펴본다.
○ 전시 의의
홍익인간 되새김질로/ 통일과제, 기후변화, AI시대 위기 해결하자
이번 ‘광복80-합(合)’ 3부작 전시는 분열된 우리 시대와 사회를 ‘합(合)’해 내는 데 방점을 찍고, 김가진, 여운형, 오세창의 정예일치의 철학과 실천을 통해 2025년 오늘 우리의 갈 길을 남북통일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암흑천지 망국시대 대한독립의 북극성이자 등불인 ‘홍익인간(弘益人間 humanitarianism)’을 되새김질하여 남북분단 문제는 물론 기후변화와 AI시대 자연파괴와 인간의 기계화 문제를 푸는 등불로 다시 켜 ‘홍익자연(弘益自然)’과 ‘홍익우주(弘益宇宙)’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전시개요
19세기 말 20세기 초,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혼란이 거듭되었던 시대에 개화선각자이자 혁신관료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로(國老:큰 어른)로 독립전쟁에 투신한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의 정치와 예술 일체의 세계를 동시대 인물들과 함께 조명하였다.
김가진이 남긴 수많은 글과 글씨에는 척사(斥邪)와 개화(開化), 제국(帝國)과 민국(民國), 망국(亡國)과 건국(建國), 중국으로부터의 독립(獨立)과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이중 과제가 교차하는 시대 사회의 문제를 풀기 위한 고뇌와 실천이 녹아있다.
이러한 김가진의 유물과 정신은 충절혈맥과 동시대 인물들과의 대화는 물론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 그리고 지금 살아있는 후손들에게 전해져 우리 모두의 과제인 남북통일 내일을 제시해 주고 있다. 요컨대 ’한 인물의 역사’가 ‘한 가족의 역사’로, 더 나아가 ‘한 시대의 역사와 정신’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 종횡의 인물로 엮은 그물망 전시구조
이런 맥락에서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는 김가진의 시문(詩文)과 글씨, 사진, 그림을 중심으로 충절가문, 독립전쟁에 투신한 동시대와 후대 인물들의 작품 120여 점을 종횡, 대각으로 그물망처럼 엮었다. 그 이유는 김가진의 전체상을 보는데 있다. 그것도 붓글씨, 즉 서(書)언어로 관통하고 있다. 2025년 오늘날 기계시대는 서맹(書盲)으로 직통하지만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언어중의 언어다. 내용과 조형의 일체로 시세물정의 변화는 물론 필자(筆者)/서자(書者)의 각각의 성정기질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담아낼 수 없다.
종축으로는 김상용, 김상헌, 김광욱 등 충절혈맥을 필두로 하여 횡축의 동시대 인물로는 오경석, 김석준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과 같은 개화파들, 흥선대원군, 고종, 명성황후, 의친왕 이강과 같은 황실 인사, 조병세, 민영환, 이준, 이상설, 최익현, 이만도, 황현 등의 절의파(節義派)까지 망라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로(國老) 김가진은 김의한, 정정화, 김자동이 대를 이어 신규식, 박은식, 이동령, 여운형, 조성환, 이승만, 이시영, 조소앙, 김좌진, 김원봉, 지청천 등과 독립릏 화두로 정신과 피를 통하고 있다. 예술에 있어서도 김가진은 서화협회 고문으로서 장승업, 오세창, 안중식, 정학교 등과 불가분의 관계다.
그야말로, 모든 길이 김가진으로 통하며 사통팔달(四通八達)한다. 그리고 이 모두를 엮는 정신 줄은 다름 아닌 필획(筆劃)이 생명인 ’서(書)‘라고 하는 언어다. 마음 그림, 즉 심화(心畫)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가 이전에 위대한 서예가였다. 조선의 학예(學藝)가 가학(家學)임이 여기서 증명된다.
○ 주요 전시작품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전시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김상용이 쓴 〈동지사冬至使 이상길의 전별하며〉(1617)▲ 겸재 정선이 그린 〈백운동도白雲洞圖〉(1730)▲ 김윤식, 김옥균, 김가진, 서재필 등 개화파들의 합작 〈시축詩軸〉(19세기 후반)▲ 김가진이 만든 〈주일공사관 외교서신 암호규칙 초고와 완성본〉, 그리고 〈암호 편지〉 (1890년경)▲ 청일전쟁의 일본군 승리를 그린 〈아산성환 아육군 대승리 개선지도(牙山成歡 我陸軍 大勝利 凱旋之圖)〉(19세기 말)▲ 명성왕후가 영의정 심순택에게 휘호한 〈옥골빙심玉骨氷心〉(19세기 말)▲ 김가진이 휘호한 〈독립문〉 〈獨立門〉 현판(1897)▲ 일본 화가 덴카이(田慶)가 유화(油畫)로 그린 〈김가진 초상〉(1905)▲ 을사늑약 때 자결한 민영환을 추모하는 〈김가진의 만장輓章〉(1905)▲ 김가진이 휘호한 평양의 신식군대 현판 〈진위제사연이대대鎭衛第四聯二大隊〉(1900년경),▲ ‘수죽향(水竹鄕)’ 건설을 노래한 자작 행서 〈칠언시(七言詩)〉(1917)▲ 1919년 2월, 중국 지린성 대한독립의군부의 조소앙(趙素昻)이 기초하여 애국지사 39명이 대한독립을 선포한 〈대한독립선언서〉(1919)▲ 김가진이 직접 짓고 쓴 〈대동단大同團 선언서〉(1919)▲ 김구가 김의한에게 써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시〉(1936)
이 중에서도 이번의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전시에서 특히 문제 삼고 있는 작품은 〈김가진초상화〉와 김가진이 쓴 〈독립문〉 〈獨立門〉 현판, 그리고 제2 독립선언서인 〈조선민족대동단선언〉이다.
⓵ 〈김가진 초상화〉, 대한제국의 당당함 속에 깊게 드리운 망국(亡國) 근심
특히 일본화가 덴카이(田慶)가 유화(油畫)로 그린 〈김가진 초상화〉(1905년, 동농문화재단 소장)은 조선왕조에서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수립을 꽃과 색, 훈장으로 주체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대한제국 칙임관 2등 대례복을 입고 있는 김가진의 초상화에는 금사(金絲)로 수놓은 활짝 핀 무궁화가 4개, 흰색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손과 흰색 장식털을 두른 대례모, 그리고 오른쪽 가슴에는 훈2등 팔괘장, 목 아래에는 훈3등 팔괘장을 패용했고, 왼쪽 가슴에는 황제망육순등극10주년기념장을 비롯해 3개의 기념장을 패용하고 있다. 실제 『고종실록』에도 김가진을 1901년 훈3등, 1905년에 훈2등에 서훈해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김가진이 초상화에 스스로 지은 시〉는 을사늑약 이후 망국(亡國)의 쓰나미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에 대한 깊은 근심이 드러나 있다.
爾身挺立, 若無所求. 爾容太瘦 若有所憂.滔天洪水, 疇與同舟. 江湖廊廟, 白髮滿頭.光武 九年 南至日 六十叟 東農 題
우뚝 선 너의 몸, 바라는 게 없는 듯하나,바짝 마른 너의 몸, 걱정 담긴 듯하구나.하늘에 닿는 홍수의 소용돌이에서, 누구와 배를 함께 탈까.재야와 정부에서 백발만 머리에 가득하구나.- 광무 9년(1905) 동지에 육십 늙은이 동농
⓶ 김가진이 박달나무 방망이 같은 필획으로 쓴 〈독립문〉, 〈獨立門〉,
〈독립문〉, 〈獨立門〉은 청(淸)으로부터 조선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표방한 상징으로
김가진이 한글 한자로 직접 쓴 것이다. 그 근거는 서체와 서풍의 일치, 소장내력, 그리고 독립문 완공 후 김가진이 ‘제국독립문帝國獨立門’이 새겨진 먹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였다는 사실, 한글에 대한 선각자적인 인식과 실천에서 종합적으로 확인된다.
먼저 〈독립문〉, 〈獨立門〉의 서체와 구조미학에서 김가진만의 박달나무 방망이같이 단단한 원필圓筆, 즉 둥글둥글한 필획(筆劃)과 전형적인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기필起筆(글씨 시작)과 종필終筆(글씨 마침)에서 현판의 일반적인 특징인 마제馬蹄(말발굽)와 잠두蠶頭(누에머리)의 강조 없이 바로 단도직입(單刀直入的)의 행필行筆로 휘호되고 있다. 이완용의 마제 잠두가 분명한 〈저존재著存齋〉(국민대박물관소장)의 가로획과는 정반대의 획질劃質이다.
두 번째, 독립신문 1898년 1월 25일자 기사다. “황해도관찰사 김가진씨가 해주 먹판을 금범에 새로 만들어 먹에 박아서 전국에 반포하였는데, 그 먹 전면에는 ‘제국독립문帝國獨立門’이라 박아 도금하였고, 후면에는 독립문을 온통 모본하여 박고, 국기와 독립문에는 또한 도금을 하였더라. 물건에까지 이렇게 판각하였으니 김씨의 마음에 독립 두 글자를 사랑하는 것을 깊이 치사하노라. 전국 인민이 일심으로 애국하여 독립 두 글자를 생각하기를 이 먹에 다 각한 것과 같이 함을 우리는 바라노라.”
세 번째, 김가진의 후손들도 〈독립문〉, 〈獨立門〉 휘호당시의 탁본작품을 집에서 대대로 소장해오고 있었다는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 증손녀 김선현의 일관된 증언이다.
네 번째, 한글 〈독립문〉을 한자 〈獨立門〉과 대등하게 세운 철학자체와 실천에서 한글에 대한 김가진의 선각자적인 각성이 지목될 수밖에 없다. 김가진은 이미 1887년 즈음부터 주일공사관 외교서신 암호규칙과 암호편지를 한글의 자모를 응용하여 사용하였고, 그 초안까지 직접 써서 남겨놓았다. 물론 부인과 아들에게 한글편지를 일상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특히 농상공부대신, 법부대신 및 비원장을 겸할 58세 때인 190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언문학교를 설립하여 한글교육에 앞장섰다. 황성신문 1902년 1월 29일에 의거하면 동농 김가진이 학부 인가를 받아내고, 자신이 교장에, 부교장에는 황족인 의양군 이재각, 교감에는 지석영을 내정했다.
⓷ 단군(檀君)자손으로 ‘제2독립운동’의 혈전(血戰)을 천명한 〈대동단선언大同團宣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 1919년 11월에 발표한 독립선언서로 〈대동단결선언〉(1917.7),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1919.2), 〈3.1독립선언서〉(1919.3.1.), 〈국민의회선언〉(1919.3.17.)에 이어진다. 대동단은 3·1운동 직후에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로 김가진이 총재를 맡았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항일 무장조직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고, 대동신보大同新報 등의 선전물을 비밀리에 제작·배포하여 민중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본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총재인 김가진은 1919년 10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이 선언서는 김가진이 기초한 것으로, 그가 망명한 뒤 11월 28일에 일어난 이른바 ‘제2차 독립 만세 운동’ 때 배포되었다. 단군과 고구려의 자손인 우리 민족의 자주(自主)를 선포하고, 일본의 폭압을 규탄하며 혈전(血戰)을 불사하겠다는 내용이 의친왕 이강, 김가진, 전협, 백초월(白初月), 나창헌, 이신애, 염광록(廉光祿) 등 33인의 조선 민족 대표 이름으로 적혀 있다.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2천만 민중의 성충(誠衷)을 의지[仗]하여 국가의 독립됨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 됨을 천하만국에 선언하며 또한 증언하노라. 근역 청구(槿域靑丘)는 남의 식민지가 아니며[非人之植民地] 단군과 고구려의 자손[檀孫麗族]은 남의 노예의 종자가 아니다[非人之奴隸種] . . . . . 원한과 고통을 삼키고 마시며[飮恨茹痛]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십 개 성상(星霜)을 지난지라. . . . . . 세계 개조의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이론은 천하에 드높고, 우리나라의 독립국과 우리나라의 자유의 소리는 나라 안에 울려 펴졌도다[漲於宇內] . . . . .이제(於是乎) 3월 1일에 선언 독립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건설했으나 . . . .만일 일본이 끝내 뉘우침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 1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혈전(血戰)을 불사(不辭)코자 이에 선언하노라.” - 대한민국 원년 11월